인사말
시간과 변화라는 주제로 2011년 Nyskc Symposium을 개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힘써 알아 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인도해 주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는 뜻인 줄을 믿습니다
1993년 Nyskc Movement가 시작된 이래 18년째를 맞이하는 2011년은 지나 2월에 유럽영국에서 Nyskc Family Conference EU.를 갖었고 이제 한국에서 8월8일부터 12일까지 오산리에서 갖기로 하여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Nyskc World Mission의 사역은 예배회복이며 회복이라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하여 네 개의 축을 세워 달려왔습니다
그 하나가 “예배 훈련으로 Conference을 매년 나라별로 진행되고 있으며”“목회자를 중심으로 하는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통하여 회복의 신학과 관련된 학문을 연구하며 목회에 적용하고“”Goshen Theological Seminary를 세워 회복의 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목회할 수 있는 도울 뿐 아니라 평신도 헌신자 양성인 MS. MS-2 MAS와 더불어 제직들의 신앙회복을 돕고“”Meclot Culture를 세워 문화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지난 2006년 Atlanta, Georgia State 아트란타제일장로교회(서삼정목사님)에서 시작하여 2007년 Colorado State에서 갖었으며 2008년 2009년 그리고 2010년에는 Princeton Seminary 이 자리에서 그리고 올해 2번째로 이곳에서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미숙하지만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열심을 품고 Nyskc Symposium을 준비하며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학회의 연구 활동 방법으로는 Symposium, Forum 그리고 Seminar & Colloquium 형식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초대학회장으로는 장상선목사님이셨지만 2008년 소천하셨고 이후 부학회장 윤사무엘목사님 중심으로 회복의 신학적 방향에서 연구와 발표를 통하여 수많은 목회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유일무일(有一無一)한 학회로 세워진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회복의 신학을 (Restoration of Theology) 연구함에 있어서 회복자로 오신 예수님을 더욱 알기를 힘쓰며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는 지상명령을 받은 학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분명 점점 확산되어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미 복음을 들어갔던 나라들에서 신앙의 무너짐의 현상은 유럽을 비롯하여 미주대륙 그리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복음의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에 이르기 까지 교회의 무너짐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 선교를 담당하고 있는 미국이나 한국 그리고 유럽의 나라들에게서 이러한 현상들은 구령사업에 앞날을 아주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인들은 현상적으로 볼 때 많은 것들처럼 보이지마는 단순하게 말하면 결국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들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함으로서 신앙의 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말로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편지로서 삶을 살고 있지 못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어제 오늘에 일은 아닌듯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백성들을 보면 늘 그렇게 해 왔고 심지어 사사기를 보면 한 세대가 다 지나지 못하고 타락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입고 다시 회복되는 반복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소선지자 서를 보면 나라가 패망하였고 암흑에 시대로 접어들 때 그들은 분명 하나님의 택한 선민이었으나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모습은 형식적인 신앙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곧 메시야가 오셨음에도 그들은 율법 곧 형식적인 패턴에 매달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눈은 육신의 눈으로서 동물이나 사람이나 전혀 차이가 없는 것같은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시각으로 보고 판단하고 확인되면 믿고 보지 못하고 듣는 것으로는 전혀 믿을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그들이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렸던 재앙과 같은 기적을 시시때때 많은 병든 자나 혹은 슬픈 자 죽은 자 눈먼 자나 마귀 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면서 이적과 표적을 보여 주셨을 때만이 저들은 잠시 보였던 것을 인하여 믿었지만 이내 다시 그들은 본래의 불신앙으로 돌아가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자연계시의 풍랑도 꾸짖어 잠잠케 하셨으며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를 들으시고 하늘을 향하여 축사하시며 나누어주라 하였을 때 무려 장정이 오천 명이 먹고 남음이 열두 광주리에 거두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와같은 기적을 체험한 저들이라면 이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시강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강도를 풀어주라고 당시에 세상의 최고 권력자 빌라도에게 간정하며 아우성을 치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부활하여 자기 앞에 서셨을 때 나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는 하니 예수님이 그에게 “보고 믿어라”하시며 그의 손을 잡아 못박혔던 손을 만지고 보게 하셨습니다 한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위하여 죽기를 각오했던 저들 역시도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되었습니다
시각이라는 말은 한자로 쓸 때 두 가지로 표현합니다
視覺을 통해 인지하는 감각들을 일컫을 때 쓰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눈을 통해 사물의 크기와 모양, 빛깔, 멀고 가까운 정도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인체 생리학에서는 눈의 구조와 시각정보의 전달과정을 시각이라고 말합니다 즉 눈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망막과 연결된 시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을 말하며 뇌에는 눈에서 전달된 정보를 처리하게 됩니다
또한 심리학적으로는 인간이 눈이 사물을 인지하는 기본적인 기준으로 색체 지각과 깊이 및 거리의 지각을 제시하며 색체지각을 통해 색상을 구분하며 상대적 기준에 의해 판단되는 깊이 및 거리 지각으로 사물의 모양, 크기, 멀고 가까움을 구분할 때 시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각을 인체의 눈으로 판단하는 지각이라고 말할 때 몇가지 시각의 역할이 있습니다 동일한 모양의 사물들이 있다면 작은 것이 멀리 있다고 판단하는 시각입니다 또한 상대적 동일한 모양의 사물들이 있다면 시야에 들어오는 각도가 큰 것이 높다고 판단합니다
또한 겉을 이루는 무늬가 촘촘할수록 멀다고 판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크기에 대한 친숙성 내지는 직선조망 혹은 대기 조망 그리고 차를 타고 가며 보이는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수가 천천히 지나가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는 지각들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눈으로 본 것은 자신이 종합적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시각(視覺)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뜻을 가진 시각을 봅니다
視角(viewpoint)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관점(觀點)(point of view)이라는 단어와 같이 쓰는 단어라고 할 수 있는데 사물이나 사람을 보는 방법이나 보는 기준을 말합니다.
관점이 올바르면 모든 사건이나 사물에 대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될 뿐 아니라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또 다른 관점의 차이는 사람들을 대립시키고 분열시키기 때문에 사회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복음서가 네 권인데 마태복음에서 나타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고 마가복음이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다르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처럼 시각과 관점은 우리의 기치관 신앙관 세계관의 뿌리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학파가 다르고 주장이 다른 것은 바로 시각의 문제요 관점에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대한 것을 곡해 한다거나 혹은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다른다는 것은 당연히 경계하여야 하겠지만 사복음서처럼 혹은 우리의 기존 교단과 교파에서 다루고 있는 신학을 부인하는 것은 관점에 차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성령을 보는 관점에도 연역적 방법이 있고 귀납적방법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틀렸다 맞았다 하기 보다는 성경을 철학적 논리 관점를 통해서 보려고 하는 학문적 체계이므로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은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회복자 되시는 예수님을 조망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많은 것들은 회복을 위한 Tool이 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회복자이시며 인류를 구원하고 회복시키기 위하여 성육신 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회복을 위하여 주신 것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곧 “예배”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신앙의 본질이면서 동시에 신앙의 종합예술과 같은 전체를 아울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는 기도와 말씀 그리고 열매와 성령의 교통과 헌신 같은 것들이 다 들어 있어 이것을 하나님 앞에 찬양하며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는 곧 예수님”이라는 등식으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예배라는 단어가 예수님이라는 단어와 같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의미를 볼 때 같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배는 회복의 도구로 주신 하나님의 뜻이며 그 근거로는 가죽 옷의 사건이나 아벨의 제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같은 모형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 삶을 사는 것은 당연히 회복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성령의 보혜사를 우리들에게 보내주시고 충만케 하신 것 역시 육신의 시각에서 영의 시각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하며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여 우리를 하늘 백성으로 변화하게 하려는 주님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 짧은 기간 동안에 무엇을 다 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십포지움에서 다루는 “시각과 변화”라는 대 주제 속에서 절기를 통한 회복의 사상을 연구하고 또한 말씀을 통해서 회복의 신학에 더욱 가깝게 접근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우리들이 이처럼 모여 하나님을 배우기를 힘쓰는 것은 호세아 시대와 마찬가지로 예배가 무너지고 따라서 교회가 무너졌으며 나라와 가정이 무너지는 현실에서 목회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여호와를 힘써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6:4)
주님의 은혜는 새벽같이 일정하다고 하시며 비와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여 회복을 이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모인 것은 여호와를 힘써 알기 위함입니다
호세아서를 보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영원히 기념되어야 할 '미스바'와 '길갈'과 '벧엘'은 돌이키지 못할 죄악의 산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켜야 할 의무를 가진 백성으로서 형제들의 아내를 겁탈하고도 모자라 남색의 무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죄하여야 한다는 미명아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어나갈 베냐민 지파를 멸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더이상 그들은 나아갈 곳이 없을 정도록 더러워졌고 병들어갔습니다.그러나 더 큰 문제는 자기들의 더러움과 병을 알고도 그것을 자기 스스로 해결해 보려는 데 있습니다.
호세아는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너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지 못하리라"(호5:13) 책망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구원자요 회복자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야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선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왕과 방백들이 있었으며 제사장들도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병과 상처를 오히려 애굽이나 앗수르에 가서 고치려 하였습니다.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것입니까
전지전능하시며 인애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두고 저들은 이방을 통하여 회복하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인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일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는 빛이시고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르심에 나아가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우리를 대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그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하였습니다. 여호와란 택한 백성들에게 주신 '구속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란 오직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만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이름인 것입니다.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낫게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라"하였습니다.
Nyskc Symposium‘11에 참여하신 것은 여호와를 힘써 배우며 알아가기 위하여 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신학 연구학회를 통해서 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구활동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사님들께서나 Nyskc World Mission을 섬기고 있는 저나 우리 모두는 다시 오실 예수님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중대한 사명을 받은 종이라고 생각합니다
단 한 영혼이라고 더 구원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는 구령사업에 누구보다도 힘써야 할 본분을 가졌다고 봅니다
예배와 교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기 보다는 인간이 타락한 이후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많은 선지자와 제사장 그리고 왕들을 세우셨고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죄를 사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까지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무너졌다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고 목회를 하기 보다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주님의 종들은 당연히 회복의 운동을 펄치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믿습니다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령으로 우리 모두가 충만하여 강의 시간시간 마다 마음을 다하는 목사님들이 되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특별히 강의를 맡으신 총재 피종진목사님을 비롯하여 부학회장 윤사무엘목사님,학회실장 장진광목사님 그리고 GTS, GRI 목사님들 김시천목사님의 강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Princeton Seminary Dennis T. Olson 구약학 교수의 강의도 감사하며 이일을 이루기까지 항상 애쓰시는 기획실장 박재준목사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Nyskc Learned Society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세계 석학들의 연구 학회로 발전과 성장를 거듭할 것이며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회복을 이루는 그날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인사드립니다.
May 9 2011
대표회장 최고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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