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leadership Academy'17 인사말

인 사 말

무엇이든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랄까 아니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셀폰이 새로운 모델이 나올 때면 인터넷 마켁을 통해서 수백만의 사람들과 오프라인 선상의 매장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하룻밤을 보내며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 새로운 것을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단편적으로 알 수 있는 그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만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뉴에이지 사상을 갖은 사람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래서 어떤 전자제품을 사더라도 새로 나온 최신판, 신제품을 구입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만화나 영화를 보더라도 새로 나온 신작을 보기를 원합니다. 누군가 나에게 신발을 선물로 준다면, 자기가 신던 헌 신발을 주는 것보다, 새로 나온 최신 디자인의 신발, 새 것을 사주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새로운 물건들만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새롭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새롭게 살 수만 있다면, 그렇게 살지 않을 텐데.”합니다.

시편 51편을 보면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이 말씀은 바로 다윗이 간음과 살인이라는 무서운 범죄 후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내용이었습니다. 다윗은 그의 삶이 새롭게 되기를 원했고, 그의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는 온 이스라엘이 두려워 벌벌 떨던 거인 골리앗 앞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섰던 주님의 용사였습니다. 그는 사울 왕이 부당하게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수많은 생명의 위험과 고난 가운데서도, 사울 왕을 대적하여 싸우지 않고, 여전히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으로 인정하고 존경하였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어느덧 왕이 되었고, 모두가 치열한 전쟁에 나갔던 때에, 한가하게 왕궁을 거닐다가, 간음을 하게 되고 살인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인생은 완전히 망쳐진 것 같았습니다. 그의 명성과 그의 인기와 그의 평판은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다른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마음이 새롭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정말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솔로몬을 다음 왕으로 세우기까지 다시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길을 걸었습니다.

여러분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전혀 범죄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뒤에, 실패한 뒤에, 그 뒤에 다시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이야기들 속에서, 그리고 역사 가운데서 실패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하고 넘어지고 범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실패하고 넘어진 뒤에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새롭게 된다는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Reform”(개혁)된다고 할까요 이미 새롭게 되었지만 더 새롭게 거듭난다고 할까요 날마다 본질을 찾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은 “An approach to essentials”(본질로의 접근) 혹은 “Transformation”(변화) 또 한 이것을 “Restoration or Again ”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는 “New”(새롭다) “전혀 다른 것 혹은 같은 것이나 새 것”이라는 뜻으로 “약속한 것을 무시하고 늘 ”Change“ (바꾸어진 새 것)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유행가라는 것은 그 시대 그 환경에 맞는 노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 그 시간은 지나가게 되어있듯이 그 때 그 시절 불렀던 노래도 지나가고 새롭게 바뀐 그 시대 그 상황에 맞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러지듯이 언제나 새 것 “NEW”을 찾는 세대를 “NewAge Generation”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We are Christians. & Nyskcian”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Nyskc Leadership Academy에 참여한 Nyskcian들이자 MS, MS2, MAS들은 첫 번째의 사상을 갖을 것을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들은 개혁주의적 신앙 곧 개신교인들이며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로서 그 의미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에 기수라고 할 수 있는 루터나 칼빈 그리고 쯔빙글리에 의해 지금의 신앙과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게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중세교회의 잘못을 고쳐서 신약교회의 원형으로 개혁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16세기의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영국의 존 위클리프나 보헤미아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성경의 절대 권위와 무오류설, 이신득의의 교리,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로마 가톨릭의 변화를 추구하였으며. 루터나 칼빈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있고 광범하게 전개하였습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에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곧 중세시대에 하나님 말씀의 왜곡으로 인하여 영적인 타락에 의해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의 부패(교직매매, 음행)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세속화(권위상실, 홍의주교의 부도덕생활)이었으며 우상화가 되었습니다 또한 레오 10세가 죄를 사하는 면죄부 판매하게 되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받고 파는 장사를 하였고 성직매매가 성행 했으며 성직자의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으니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교회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또한 지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감주의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으며. 북유럽에서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습니다. 르네상스에 뒤따른 새로운 학문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를 불지르고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습니다. 중세의 긴 지적인 통제는 결국 개혁이라는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또한 십자군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습니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에스파냐와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로 인한 교황권 위신의 실추와 세금의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했습니다 동방의 사치품이 수입되고 서방 사회는 사치 풍조에 휩쓸리게 되었고 사제주의의 횡포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제가 단절된 무리들은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기 위하여 현실 도피에 신비주의에 휩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개혁의 욕구는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끌었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하며,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하는데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입니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합니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성경 외에도 외경과 위경도 가르치며 과거로부터 내려온 전례나 전설 또 전통을 성경과 동일한 권위로, 때로는 이것을 통해 성경을 해석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성경 보다 우월한 권위로 받아드렸으나 개혁주의는 이와 같은 전설이나 전통보다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 무엇이라 하였는가에 더 관심을 갖었습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습니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인 개신교인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하나님의 교회건설이었습니다. 이것이 교회중심(Church-centered) 사상입니다. 신학는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합니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하면서도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입니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적 종교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교권주의에서 개혁신앙 주의로 발전시키며 의식적인 신앙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체험적 신앙 곧 지정의 신앙으로 옳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입니다

개혁의 형태로는 독일을 중심으로 루터파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하는 칼빈 개혁주의 쥬리히를 중심으로 쯔빙글리 서구라파를 중심으로 하는 제세례파 그리고 영국개혁파 등등 개혁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도 1517년 10월 31일 윗텐벌 교회 정문에 95개조항의 개혁의 내용을 발표함으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은 “1-7조 성경적으로 본 회개의 의미, 면죄부를 판단할 일반적인 원칙을 서론적으로 말하고 8-29조 연옥에 가 있는 영혼을 위한 면죄부에 대하여 이 논제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적이며 영적인 면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30-80조는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면죄부에 대하여, 81-95조는 결론적으로 면죄부 판매에 대한 평신도로서의 반대와 면죄부 판매의 옳지 못한 동기를 적시하였습니다.

그 중에 핵심은 36조로서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면죄부가 없어도 죄와 형벌에서 사함받을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는 것과. 37조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산 자나 죽은 자나 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축복에 참여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면죄부 없어도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가운데 정치를 보면 중세 독일의 무 국가 상태, 유명무실한 황제권이었습니다 또한 경제적 배경을 보면 장원 경제 몰락, 신흥 상업 자본주의, 농노에서 약간의 자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고 르네상스 휴머니즘으로 사람들은 사치과 향락에 빠져있었습니다.

따라서 교회내의 부패, 교회의 교리적 탈선, 사회적 계급과 빈부격차, 교회의 재정압박, 교직자들의 수준 생활의 저하는 물론 성직자 부재, 또한 성직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대중의 종교적 열정으로 인한 원인들을 들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무력한 황제와 무 국가 상태, 봉건 영주의 세력 강화, 제국도시의 번영과 의식 발달, 기사계급의 몰락과 반항, 농민들의 불만, 로마의 착취 대상, 종교적 순수성과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고 있던 로마 카토릭 교회 전통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대회가 정경을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권위가 성경권위보다 우선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해석권 내지는 성경를 읽는 것까지도 평신도들에게는 제한이 되어 있었으며 이같은 결과로 교회의 경직화 내지는 성직자 주도적인 교회로 타락하게 하였습니다

교회가 결정하였기 때문에 성경이 된 것이 아니라 성경 자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교회가 정경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며 오직 성경위에 신앙의 표준의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성경을 교인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도록 개방시킨 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의도요 내용입니다 .

존 칼빈은 "성경을 떠나서 신앙을 논하는 자들은 광난 증환자(정신병자)"라고 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신칭의 사상입니다. 성경에 밝혀진 복음의 내용을 수납하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구원)함을 얻는다고 밝힌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불화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복음의 본질이 성경의 기본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장은 성경에 근거를 둔 구원관이며 동싱에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노력 즉 공적 사상을 배재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혁주의는 새로운 것(개혁)라는 것을 새로운 것(창조)이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미 있는 것에 발견하지 못한 것 즉 본질을 찾는 것을 새로운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넣으주심으로 생령이 되었다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사람이기는 하나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 뜻을 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새 삶을 산다는 것에 의미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찾아주실 때를 새롭게 변화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이라는 것도 내가 자력으로 무엇을 믿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며 잃었던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다시 회복된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믿음의 삶을 언제 시작했습니까 그는 75세 때에 주님의 부르심을 처음 받았지만, 자기 마음대로 이스마엘을 낳으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다시 100세에 이삭을 낳으면서 믿음의 길을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새롭게 된 믿음의 여정은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때까지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100세에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의로 여기게 되었다는 말씀처럼 된 것입니다

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모세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이집트의 왕자 신분으로 자라났습니다. 그가 40세가 되었을 때,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패하였고, 이집트 사람을 살인하였다는 누명을 입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그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80세 때 새롭게 시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양의 털을 깎고, 양의 젖을 짜던 그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의 인생은 40세 때에 망했다가, 80세 때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열성이 있었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베드로는 정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하고 따르던 제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더라도, 자기는 죽을지언정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베드로가 결국에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안다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9-62절 “한 시간쯤 시간이 지나서 또 다른 사람이 자신 있게 단언하여 이르되, 이자는 갈릴리 사람이므로 진실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매 베드로가 이르되, 사람아,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가 아직 말할 때에 즉시 수탉이 울더라. 주께서 돌이키사 베드로를 바라보시니 베드로가 그분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하신 주의 말씀을 기억하고 밖에 나가 몹시 슬프게 우니라.”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재판을 받으시던 대제사장의 관저 안에 뒤를 돌아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눈빛은 그가 다시 새롭게 회복하기를 원하시는 긍휼의 눈빛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따라 감옥에도 가고, 죽을 각오도 되어있다고 큰 소리를 쳤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과 함께 왕국의 왕좌에 앉을 것이고, 큰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제 모든 것이 망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기는 정말 반역자 중의 반역자요, 배신자 중의 배신자라고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새롭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완전히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도행전에 와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목숨을 위협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지 말라고 위협할 때에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2장 25절“바나바와 사울은 자기들의 사역을 마치고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바나바와 사울, 그리고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 이렇게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울은 바로 사도 바울을 말합니다. 그리고 마가 요한은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바나바와 바울은 선교팀을 구성해서 사역을 진행하였는데, 바로 마가 요한이 합류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5절“살라미에 이르러 유대인들의 회당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한 요한을 자기들을 섬기는 자로 두었더라.”

이 말씀을 보게 되면, 마가 요한이 바로 바나바와 바울을 섬기는 자로 선교팀에 합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섬겼다는 것은 바로 선교사역의 보조자로서, 참여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3:13절“이제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바보에서 배 타고 떠나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렀을 때에 요한은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하였습니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밤빌리아의 버가라는 장소에 이르렀을 때에, 마가 요한이 그들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선교팀에서 무단이탈한 것입니다.

또 사도행전 15: 36-41절“ 며칠 뒤에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르되, 우리가 전에 주의 말씀을 선포한 모든 도시로 다시 가서 우리 형제들을 방문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하는지 알아보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는 이름의 요한을 데리고 가고자 결심하였으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자기들과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니라. 그들 사이에 다툼이 격렬하여 그들이 서로 갈라져 떠나니 이처럼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키프러스로 가고,형제들이 바울을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매 그는 실라를 택한 뒤에 떠나서, 시리아와 길리기아를 지나가며 교회들을 굳건하게 하니라.

이제 바나바와 바울이 다시 선교여행을 시작하려고 하였습니다.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다시 데려가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 번 선교여행에서 무단이탈을 한 자를 다시 선교팀에 합류시키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일에 대한 다툼이 얼마나 결렬하였든지,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팀 자체가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고, 바울은 실라라는 새로운 형제를 택하여,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6절“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이 떠날 때가, 즉 자신의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디모데후서 말씀은 사도 바울의 유언장과도 같은 마지막 말씀인 것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4:11절“오직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라. 그가 사역을 위해 내게 유익하니라.”우리는 바울의 유언장과도 같은 마지막 편지에서 마가를 필요로 하는 내용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마가는 바울이 보기에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의 마지막 날들에 마가는 필요한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 같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어도 이방인 나라에서 관직을 얻고 충성을 하면서 그 날 그 때를 기다린 신앙의 사람이 아닙니까

느헤미야는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증축합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할 찬양대와 레위 사람들, 제사장들을 세우며, 문지기를 세우는 일을 합니다. 예배를 회복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문 앞 광장에 온 백성들이 에스라를 통해 커다란 부흥을 체험합니다. 그뿐이 아니라 큰 은혜를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의 축제인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런 일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언약에 맺겠다고 맹세를 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살기를 자원하는 자들이 생기며, 성벽봉헌식을 시행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전에 없는 영적인 부흥과 도덕적 회복, 정치적 안정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모든 일들은 12년 간 느헤미야를 통해 이루어진 일입니다. 이런 대역사를 마친 느헤미야에게 바사의 왕 아닥사스다가 불러서 바사로 돌아갔었고, 그곳에서 아닥사스다 왕의 신하로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예루살렘에서 심상치 않는 소문들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이 예배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더럽혔던 세속적인 가치관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으로 헌신했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헌신을 게을리 합니다. 가정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1:6)

그가 예루살렘에서 12년 동안 있으면서 회복하였던 모든 것이 1년 만에 다 무너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헤미야가 없는 동안 예루살렘은 새로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벽재건이후 평화로운 삶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했습니다. 특히 오늘 13장은 느헤미야의 마지막장이며, 결론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서 결론은 백성들의 정신을 바로 세우는 사건으로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변질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부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정신, 영성입니다. 행여 우리들 가운데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참 뜨겁게 신앙생활 했지만 지금 차가운 가슴을 안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불덩이 기도꾼으로 살아갔는데 이제는 숯덩이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토록 순결했던 믿음이 지금은 때가 묻고 가증스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계신 분 계시지 않습니까

성전 벽돌을 쌓아가던 그 아름다운 손이 지금은 그 성전을 무너뜨리는 자리에 앉아있는 분 계시지 않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려는 분 아니계시냔 말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새로워지지 않으면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신령한 은혜를 누리며 날마다 새롭게 경험하지 아니하면 신앙은 의식만 남게 됩니다. 감사와 찬송은 사라지고 불평과 원망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던 가슴에 어느덧 자신의 영광과 자아의식이 들어 앉게 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신앙과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성전 안에서 가증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그 방은 원래 소제물과 유향과 그릇과 또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십일조로 주는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또 제사장들에게 주는 거제물을 두는 곳이라”

성전 중심에 백성들이 가져온 십일조와 성문들을 보관하는 거룩한 한 장소를 깨끗하게 청소하여 새롭게 하였더니 거기에 ‘도비야’가 사택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도비야가 누구입니까 느헤미야서 1장부터 예루살렘 성벽수축을 끈질기게 방해했던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인물 아닙니까 백성들을 조롱하였고, 비난했으며 백성들에게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 한다고 거짓말을 지어내 곤경에 빠뜨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비야와 제사장 엘리야십이 내통을 합니다. 자녀들끼리 정략결혼을 시키고 도비야를 성전 중심자리에 앉혀 놓은 겁니다. 그러니 십일조 곡간이 텅텅 비며, 예배가 무너지고, 백성들의 영성이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때 느헤미야는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 던지고,명령하여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전의 그릇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놓았느니라”(1:8-9)

분노한 느헤미야! 그 방에 있던 세간들을 창밖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그리고 방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소재했습니다. 그리고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곳으로 들여 놓습니다. 또한 그곳을 십일조를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고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집이라 호통을 치시고 돈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울부짖던 소떼와 양떼를 내어 좇으시던 장면을 기억나게 합니다.

여기 도비야는 세속적인 가치관을 말합니다. 교회 안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의 능력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세속적 가치관들이 판을 치고 있다면 그것이 도비야입니다. 교회가 교회되고, 교회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부흥되고자하는 몸부림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도비야입니다. 지도자 느헤미야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세력, 백성들 교인들의 열심과 충성에 걸림돌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도비야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말도 되지 않는 일들이 자주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도비야는 성벽수축을 한사코 방해하던 자입니다. 지도자 느헤미야를 끈질기게 괴롭히던 자입니다. 백성들을 낙망시키던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계셔야하는 성전 중심에 예배와 찬양과 기도가 넘쳐야 될 성전 안에 악한 마귀가 아예 살림을 차리고 앉아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꿈틀거려야 될 내 가슴속에 기도가 넘쳐야 될 내 입술 속에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 되어져야 될 내 영혼 속에 세상에 썩을 가치관들이 내 영혼을 갉아먹는 악한마귀가 주리를 틀고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날마다 거룩해 지지 않으면 우리들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속에 날마다 거룩하지 못한 것은 꺼집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썩어져가던 자리에서 벗어나 새로워질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무너져가던 백성들의 신앙과 정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습니까

아주 구체적으로 지금 접근해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개혁은 가장 근본적인 것, 가장 작은 가장 기초적인 것부터 회복되어질 때에 나라가 교회가 새로워질 수 있다고 느헤미야는 믿었던 것이지요. 성을 수축하고 마냥 기뻐했던 그 영광스러운 그 감사의 순간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울며 하나님 앞에 서약하고 맹세했던 그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0장으로 돌아가 보면 성을 수축하고 커다란 은혜를 체험한 다음 느헤미야는 백성의 대표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제사장 23명, 레위지파사람 17명, 12지파의 대표되는 백성의 대표자가 44명, 총 84명 의회에서 하나님 앞에 언약대로 살겠다고 맹세하고 일일이 도장을 찍고 서약했습니다. 그들은 세 가지 서약을 하였습니다.

첫째, 이방결혼을 하지 않으므로 가정을 거룩하게 지켜나가겠습니다.

둘째, 안식일을 철저히 지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하나님 뜻대로 쓰겠습니다. 우리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고백하고 살겠습니다.

셋째, 십일조를 잘 드림으로 구별된 물질 관리를 하겠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잠깐 바사왕의 부름을 받고 가 있는 동안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켜 아예 모국어를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함부로 범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습니다. 너도나도 범하고 사니 당연한 듯이 생각한 모양입니다. 십일조를 저마다 도적질하여 십일조 곡간이 텅텅 비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성전의 레위지파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농사지으러 시골로 다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끗이 파괴하고서도 저들은 한결같이 생각하기를 ‘적어도 우리는 성전을 수축한 사람들이야.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한 백성들이 아닌가라는 것에 안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새롭게 될 수 없음을 알았던 느헤미야는 이 세 가지 맹세를 하나씩 회복시켜 나갑니다. 회복의 순서는 맹세 했던 순서와는 반대로 해 나갑니다.

거룩한 물질 관리를 새롭게 합니다.

“이에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백성들은 세금을 정당하게 내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드릴 십일조와 헌물을 힘껏 드려서 선교사역과 부흥운동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향 땅으로 도망가 농사짓고 있던 레위지파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무너진 제사를 회복시킵니다.

반면 느헤미야는 십일조하지 않아 이처럼 영적인 피폐함을 가져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되게 나무랍니다. 그리고 빈 십일조 곡간을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시간관리를 새롭게 합니다(주일거룩).

그리고 무너진 이스라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하여 느헤미야는 안식일 신앙을 회복시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 백성들의 시간을 하나님께 집중시키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안식일 전 예루살렘 성문이 어두워갈 때에 내가 성문을 닫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열지 말라 하고 나를 따르는 종자 몇을 성문마다 세워 안식일에는 아무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느헤미야는 안식을 지키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약을 사는 우리들에게 율법적으로 지키라는 말은 아닙니다. 주일 신앙은 예배 신앙의 회복입니다. 주님 전에 찾아 올 때마다 은혜 받는 성도들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 잃어버리고 나면 껍데기만 남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주께 힘을 얻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돈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으로부터 힘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새 힘을 얻습니다.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 힘, 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 불의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고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이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갑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 그 힘을 얻는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주일은 말씀을 통하여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을 얻는 시간입니다. 천 가지 만 가지 문제를 가지고 나왔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저건 내 말씀이야 그것 부둥켜 잡고 악을 물리치며 승리할 수 있는 힘, 그 힘을 얻는 자리가 이 자리입니다.

주일은 찬양과 예배를 통하여 내 인생의 가치와 행복을 얻는 날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세상에서 천 날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가 좋고 악인의 집에서 평안이 사는 것보다 하나님 집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일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이름 그대로 주님의 날, 주님의 사역을 열심히 감당하는 날입니다.

가정을 거룩함으로 새롭게 합니다. 온전한 십일조와 거룩한 주일 이것이 가장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본이 무너질 때 나라가 무너지고 가장 기초적인 신앙생활이 무너질 때에 백성들의 영성이 무너진 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지요. 기본을 세울 때 나라가 제대로 되고 민족이 제대로 되고 교회가 제대로 된다고 지금 느헤미야는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회복한 느헤미야 이번엔 가정을 회복시킵니다. 가정을 거룩하게 지키겠다고 서약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정을 더럽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가정의 신앙을 파괴하는 자들, 이방여인과 교제하는 자들, 어미가 이방여인이라 제나라 말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본문 25절 말씀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책망하고 저주하며 그들 중 몇 사람을 때리고 그들의 머리털을 뽑고 이르되 너희는 너희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아들들이나 너희를 위하여 그들의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라 하고”

지금 느헤미야는 대단히 단호하면서도 과격하게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그만큼 중요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만큼 가정의 문제가 심각했다는 얘기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들이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자녀들을 잘못 결혼시키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결혼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두 남녀의 육체적인 결합이 아닙니다. 정신과 정신의 만남입니다. 신앙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바른 가치관과 가치관의 조화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사용하는 도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일하는 방법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건강해야 나라가 건강하고 여러분이 똑바로 서 있어야 나라가 똑바로 서 있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정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축복을 먹고 자란 자녀들을 하나님은 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먹고 자란 여러분의 자녀들이 이 땅의 제2의 느헤미야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는 또 다른 공동체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일으켜 세워 하나님은 이 민족을 세워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이 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구름 떼처럼 쏟아져 나오기를 하나님은 기대하고 계십니다. 이 교회와 가정, 사람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명체는 썩든지 새로워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있는 것은 돌멩이입니다. 광물입니다. 생명체는 부패하든지 새로워지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당신의 신앙이 살아있다면 날로 새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새로워지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이미 당신의 정신, 영혼은 부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에서 무너진 정신들을 일으켜 세울 지도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새시대 한국교회는 제2의 느헤미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 들이 건강하게 세워지고 쓰임받기를 원하고 계십니다.ㅊ

Nyskcian들이여, 오늘 당장은 우리의 모습이 누군가가 보기에 자격이 없고, 마땅치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보기에도 한심하고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있는 능력으로 Leader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서 생각해 보았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이 MS, MS2, MAS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100세 새롭게 하신 하나님, 모세를 80세에 새롭게 부르신 하나님, 다윗을 무서운 죄에서부터 새롭게 회복시키신 하나님, 배신자 베드로를 다시 주님을 위한 충성된 일꾼으로 세우신 하나님, 그리고 마가 요한을 회복시키셔서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마음과 생각도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내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속에 올바른 영을 새롭게 하소서.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