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Family Conference KJJ'17 환영사

환 영 사

할렐루야! 먼저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드립니다. 지난 6월26일부터 29일까지 2017년 미국 플로리다 Lakeland에서 열린 Nyskc Family Conference를 은혜 중에 마치고 2011년 서울과 2015년 대전, 2016년 광주에 이어 이번 2017년 전주에서 나이스크 패밀리 컨퍼런스가 열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이번 컨퍼런스가 열리기까지 애써주신 NWM(Nyskc World Mission)전주본부 임원목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본부장 박재신 목사님을 비롯하여 부본부장 임기수 목사님과 그 외 임원목사님들이 다 함께 기도와 시간과 물질을 지원하여 주셨기에 이처럼 오늘 컨퍼런스가 열릴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더불어 NWM 광주본부장 윤구현 목사님과 임원목사님들, 대전본부장 류제이 목사님과 임원목사님들도 함께 협력해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참석해 주신 전주교협회장 목사님을 비롯하여 임원목사님들과 전북도지사님, 전주시장님, 전주지역 국회의원 여러분들께도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2017년 주제처럼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갈2:20) 가야 될 구원받은 백성들이 모여 하나님이 기뻐하며 찾으시는 예배자, 곧 신령과 진정,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세우기 위한 예배 회복의 훈련인 Nyskc Conference를 21세기 신앙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이곳 전주에서 열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습니다.

성경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3-14)고 하셨습니다.

“좁은 문”과 “협착한 길”이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지나야 하며 협착한 길을 택하여 걸어야 함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신앙생활은 “쉬운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여도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천국에는 적은 수의 성도들만이 들어간다는 충격적이고도 심각한 말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전 세계에는 약 18억의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는 1천만 교인들이 있다고 하니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그중 일부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간의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면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경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는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께 교회에 다니며 함께 믿음생활을 하지만 모두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하시며 그만큼 구원받는 이들이 수적으로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원전에 “zoe”로 우리말 성경에서 “영생”, “구원”으로도 번역됩니다. 평생 교회생활을 하며 성도들과 교제하고 함께 예배드리며 섬기다가 적은 수에 들지 못한다면 그처럼 딱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에 등록된 교인이면 모두 구원을 받는다는 안일한 생각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6:31절의 말씀처럼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또 빌립보서 2:12절의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신 것을 보면 구원은 아주 어렵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6장 30절과 31절에는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고 계시므로 아주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구원을 아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곁에는 두 명의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르지 않았느냐 하며 나도 죽을 때쯤 예수님을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쉽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상황에서 과연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믿음이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변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만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은 스스로를 자멸로 그리고 불법과 불순종으로 점철시킬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의 의미는 단순히 우리의 입술의 신앙고백만을 가지고 구원을 얻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의 이면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대의 목숨을 바꾸기까지 그를 인정할 수 있는가” 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되 그의 하신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의사가 있는가?"라는 강렬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옥에 투옥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옥중에서 바울이 하나님을 찬미하니 홀연히 큰 지진이 나고 옥 터가 움직이며 옥문이 다 열리게 되었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 옥문을 지키던 간수는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죄수의 도망은 곧 간수의 사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행12:19,27)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결하려던 그 간수는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간수에게 사도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선포하였던 것인데, 과연 이 말씀의 의미가 그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만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의미일까 우리는 심사숙고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간수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겠다는 그의 믿음은 단순히 믿는다고 동의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 “목숨의 위태할지라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시인하겠다”는 강렬한 신앙 고백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목숨을 내어주고 혹은 목숨과 바꾸어서라도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네 목숨을 주고 바꾸어서라도 주 예수를 시인할 마음이 있는가, 만일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주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한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인정하고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누군가를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믿고 따르겠다는 의미를 내포한 채 믿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따라서 순종할 때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31-32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라고 하면서 먼저 믿음에 대한 선포를 하고 이어서 주의 말씀을 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영적 작용이 발동하기에 앞서 그 믿음의 대상이 되는 분의 말씀이 반드시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 물어오던 간수에게 사도 바울이 전했던 “주의 말씀”은 그 간수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고 따라야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서도 사도행전 16장과 똑같은 상황이 있음을 우리는 성경 연구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주어진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간수에게 영생의 조건으로 제시하려고 했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놀랍게도 사도행전에서 간수와 바울 사이에 오고간 “구원과 영생”에 대한 대화는 마태복음 19장에서 율법사와 예수님 사이에 오고간 대화의 텍스트와 동일한 구조로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텍스트의 병합 연구를 통해 주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영생에 대해 질문해 온 사람에게 대답하신 주님의 말씀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세주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의 조건으로 내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계명과 그에 대한 굴복이었습니다.

당시 절박했던 간수에게 구원의 조건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목숨까지 내놓겠다는 강한 신념과 결의, 또한 세상과 죄를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겠다는 강한 의지의 굴복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안일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나는 기도할 때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수님 이름을 부르니 구원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 그 이름의 뜻도 모르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또 구원의 참된 뜻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주여, 주여 하며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많이 불러도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구원자이십니다. 그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갈 때 성전 문 앞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하고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서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이름의 능력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치료하며, 죄를 사하며, 죽은 자를 살립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이름을 외치며 나아가야 합니다. 또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며 그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동의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이시요, 구원자시요, 나의 능력이시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주인이시요, 나의 왕이십니다. 그를 마음 가운데 영접하고 모시고 의지하고 사는 삶이 동반되어야 참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의 상처와 육신의 병을 치유 받고, 사탄의 발을 묶고 물리치며, 새 힘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내가 스스로 인정하는 믿음이 아닌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내 신념이 아닌 성령께서 주신 믿음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마태복음 22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좁은 문”이란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지만 좁은 문은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란 뜻입니다. 이는 마치 상급 학교를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할 입시의 문과 같습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거쳐야 할 문입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학교의 입시관문은 통과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또 다른 한 예로 승리의 월계관을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운동선수들의 훈련의 문과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문은 넓고 많은 사람이 들어가는 문이 아닙니다. 구원(생명)이라는 최대의, 최고의 영원한 축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통과하기 어려운 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믿음의 문은 좁은 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볼 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것은 아주 좁은 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온전한 회개라는 좁은 문을 지나야 합니다.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으로 죄를 자복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죄 사함을 받는 기쁨을 누리는 참된 회개는 결코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입장에서 자기의 이성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세상의 유혹과 죄 등과 싸워 이겨야 할 굳건한 믿음의 문은 좁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유혹을 이겨야만 합니다. 죄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좁은 문은 꼭 통과해야 할 문입니다. 다른 문을 통과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이 좁은 문을 지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하셨습니다. 오직 영생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과해 들어가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밖에 없는 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좁은 문은 약속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인내하며 약속의 문을 지날 때 약속의 응답을 받습니다.

생명, 구원의 약속입니다. 약속의 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약속은 없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택하지 않고, 원하지 않고, 피하는 문일지라도 이 문이 구원의 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분들이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소수의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협착한 길”입니다.

“협착(狹窄)하다”는 “thlibo”으로 “괴롭히다”, “깨뜨리다”, “좌절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할 때 성도들이 받는 고난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했습니다. 예컨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에 육체에 채운다는 뜻으로 사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는 말씀도 찾는 사람이 적은 협착한 길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뒷받침하는 구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협착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협착한 길을 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야합니다. 이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친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길이 협착한 길입니다. 나의 자존심이나 권세, 권리, 명예, 내가 지닌 재주와 능력, 나의 가진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일은 나를 부인하는 협착한 길, 괴로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이 주를 향한 사랑의 길이요, 생명의 길입니다. 나를 부인하는 일은 내가 죽는 일입니다. 예배의 자리는 내가 죽어 제물로 드려지는 자리입니다. “내가 죽었습니다. 나를 받아 주소서” 하는 자리입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부활은 없습니다.

또한 날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는 삶이 곧 협착한 길입니다. 진정으로 예배가 회복된 분들이 가는 길이 좁은 길,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내 힘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어려운 일이나 괴로운 일이 있어도 품고 사랑하며 끊임없이 기도하며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사랑하여 주님께로 인도하며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이 길이 협착한 길이요 생명길입니다.

우리의 kronos의 때를 지나면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kairos의 때가 옵니다.

혹시 우리 중에 남들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나쁜 습관, 죄 된 습성 때문에 괴로워하며 고침받기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협착한 생명 길로 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시편 1편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의 유혹과 죄악에 물들지 않고 의롭게 살고자 힘쓰는 삶이 협착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복된 길입니다.

또한 내 방식을 포기하는 삶이 협착한 길을 걷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되 말씀을 따라 믿지 않고 자기 식대로 믿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의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이삭을 드리는 믿음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도 자기 방식대로 속이는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삶을 배웠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에서 나를 완전히 내려놓음으로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왕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후, 40년간 미디안 광야에서 그동안 배운 것을 모두 버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40년간은 여호와의 선지자가 되는 법을 배웠습니다. 모세는 120년 동안 자기 방식을 버리는 것을 배우며, 하나님의 방법으로 사는 것을 배웠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운 것입니다.

나의 방법과 나의 방식을 포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길은 협착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화려한 큰 문으로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는 멸망의 문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길, 편하고 쉬운 길로 가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도 있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대가 이끄는 대로 세속적으로 살기 보다는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로 살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좁은 문입니다.

성수주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우며,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애독하며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되어가는 것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말씀을 전하며 삶 자체가 증인이 되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좁은 문입니까. 하지만 이와 같은 삶은 예배가 회복된 사람만이 지키고 섬기며 나아갈 수 있는 좁은 문입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Nyskc Theme처럼 우리 Nyskcian들은 우리들의 교회와 나라와 가정들을 회복시키는 회복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좁은 문, 협착한 길을 가는 것처럼 예배 중심의 삶, 교회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모인 것은 사람의 지혜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에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임을 믿습니다. 4일간 하나님께서 성삼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함에 부족함이 없는 인생으로 우리 모두를 변화시켜주실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훈련에 참여하신 Nyskcian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