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사 말
지난 2011년 Nyskc Movement는 처음으로 한국 서울에서 컨퍼런스를 열었습니다 그 이 후 2015년 대전에서 두 번째 열었고 그리고 세 번째 광주에서 컨퍼런스 열도록 허락하여 주신 성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1993년 7월에 설립된 NWM(Nyskc World Mission) 1996년 처음으로 Suffering, NY의 Holiday Hotel Conference Hall에서 갖게 된 뒤 현재까지 21년 동안 꾸준히 예배회복을 위한 운동을 펄쳐오고 있습니다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은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Theme의 방향을 세우고 본질로 접근하자는 개혁주의 신학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예배함을 연구하고 신앙의 본질과 회복의 신학을 연구한 것을 실천적 입장에서 Conference & Forum, Symposium을 통해서 적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매년 National Family Conference, Family Mission Conference, Leadership Academy, Teachers Colloquium 등을 열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중심, 예배중심 교회 중심적 신앙을 갖도록 훈련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동안에 우리들이 경험하고 체험하며 쌓아온 것들은 다 지나간 것들이요 “보라 새것이 되었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신앙의 보루인 한국광주에서 제 2의 부흥을 이루어 예배 회복이 전 세계로 번져 나가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 그렇듯이 주께서 하시는 일은 성령께서 수면에 운행하셔야만 되는 것처럼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성령께서 운행하셔야 한다는 것은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한다 하여도 성령께서 함께 하여야 하고 말씀을 애독한다고 할지라고 마찬가지며 전도를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자리에까지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모임 사람들의 생각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조차도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가인처럼 나의 노력과 애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행하는 것이 될 때” 비로소 온전한 헌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한 일이나 주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찬양하고 영광과 존귀를 올려드리는 모든 일들 조차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람의 방법과 뜻으로 할 뿐이요 형식적인 신앙으로 변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기본적이며 본질적인 요소의 회복과 그에 따른 세 가지의 행동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 첫째는 기도이며 두 번째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는 신앙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고 다른 하나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을 살리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 두 가지가 무너졌거나 버렸거나 했다면 그것은 이미 그의 영혼은 죽었으며 사망에 이른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받을 실만한 예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셩경은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라는 로마서 12장의 말씀이나 레위기 말씀에서 “흠 없는 생축” 이 아니므로 말라기 말씀처럼 “병든 것 저는 것 흠이 있는 것을 드리는 예배자”가 된 것이므로 하나님은 기쁘시게 받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들이 전통주의나 형식주의를 같이 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해하는 것 같지만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것이나 병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형식이라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형식주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는 생명력이 없으나 그 형식만 남아 행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전통주의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조상을 두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삭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고 야곱의 늘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예배하였던 그 생명 곧 신령과 진리의 예배는 버린채로 오직 그들이 행히였던 형식만 따라 의식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흠향하는 예배가 아니요 기뻐하시며 찾으시는 예배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보다는 그 예배를 통해서 “잘사는 가정 행복한 삶”으로 국한시키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신앙을 사회학적으러나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며 말씀을 문학으로 이해하고 원리를 찾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한 종교적인 자세가 늘 그렇듯이 앞장서서 헌신하려고 하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늘 조용하게 그리고 뒷자리에서 지켜보다 순리에 따라 행하는 것이며 나의 중심에서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별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삶에 간섭을 원하지 아니하며 내가 원하면 하는 것이고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원하지 아니하면 버려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나에게 강요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종교화되고 형식주의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사야 30장 10절의 말씀처럼 “ Which say to the seers, See not; and to the prophets, Prophesy not unto us right things, speak unto us smooth things, prophesy deceits:(그들이 선견자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정직한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레미야 6:14말씀처럼 “They have healed also the hurt of the daughter of my people slightly, saying, Peace, peace; when there is no peace”(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고 위로하고 그들로 하여금 마음에 거룩한 부담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소개하며 전도할 때 나누는 전도지에“우리교회는 여러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라고 기록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Caring목회를 추구하고 있어 위로와 사랑 그리고 죄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로서 말씀가운데 심판이나 책망 그리고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저들에게는 결코 해당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에 부담을 갖지않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6:12-13 “And their houses shall be turned unto others, with their fields and wives together: for I will stretch out my hand upon the inhabitants of the land, saith the LORD. For from the least of them even unto the greatest of them every one is given to covetousness; and from the prophet even unto the priest every one dealeth falsely.(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하셨습니다
예레미야 당시는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바로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경고했음에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에 이방나라를 들어 저들을 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임재는 걷혔고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계십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함에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죄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사탄의 억압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끊기지 않습니다. 세상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황인대도 불구하고 당시의 메시지는 “괜찮다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질 것이다, 위로하고 위로하며 평화라” 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택한 백성을 만세전에 축복하셨기에 축복도 좋고 사랑도 좋고 위로도 좋지만 그것이 다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은 형식적으로 흘렀고 섬삼위 하나님의 역사가 겉히고 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 느끼고 있습니다 그 단적인 예로 예배를 통해서 찾아주신 주님을 만나고 은혜가 풍성해 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줄어간다는 것이 형식적인 예배자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이 이러한 한가지의 예만 이겠습니까 더 놀라운 사실은 예배가 회복되지 못함이 죄 때문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반말하고 대적하는 것을 보아도 예배가 무너져 있는 상태라는 것을 쉽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엄청난 사탄의 궤계와 다툼과 후욕과 시기, 질투, 미움이 성도들 삶 속에 가득합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죄를 이길만한 힘을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에배를 드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사도행전 2:42-47 말씀에는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승천하시는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And they continued stedfastly in the apostles' doctrine and fellowship, and in breaking of bread, and in prayers. And fear came upon every soul: and many wonders and signs were done by the apostles.And all that believed were together, and had all things common; And sold their possessions and goods, and parted them to all men, as every man had need.”(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회복된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교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말입니다. 또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주님과 승리와 생명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회들이 이렇게 흘러간다면 얼마나 비극이겠으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속상해 하실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노아의 시대처럼 죄가 만연되어 죄가 죄가 아닌 것이 되어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잃지 않고 싶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아주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썩어 가는데 약간에 피부약을 발라주는 격이라고 할까요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억압과 죄의 억압이 큰 반면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처럼 느껴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보다는 세상을 예배하는 예배의 대상을 바꾸었기 때문이겠지요
사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던 유다 왕 요시아 그리고 시드기야 왕까지 활동했던 에레미야 선지자는 저들의 죄를 지적하여 외쳐되었지만 그들은 예배의 대상을 바꾼체 자기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반론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레미야를 통해서 “너희들은 자고새처럼 살고 있다” 지적합니다 “ As the partridge sitteth on eggs, and hatcheth them not; so he that getteth riches, and not by right, shall leave them in the midst of his days, and at his end shall be a fool”(렘17;11) 자고새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 속임과 도적질의 상징이기도 하고, 또한 교회와 진리의 상징입니다 ”불의로 재산을 모은 사람은 자기가 낳지 않은 알을 품는 자고새와 같아서, 인생의 한창때에 그 재산을 잃을 것이며, 말년에는 어리석은 사람의 신세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므로 신앙 생활은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가면 형식적인 신앙이요 종교적인 삶이 되어 하나님을 속이며 위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며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하면 타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하면 예배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으로 나갈 때만이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자 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수단이 되니까 축복을 들으려고 하니 신앙이 회복더;f tn 없고 교회가 회복될 수 없고 하나님의 통치를 원하는 자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Nyskc Conference에 참여하였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함께 하시는 역사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도 있을 수 없으며 죄를 이기는 승리도 없을 것이며 영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이 없을 것이며 성령께서 인도하시며 역사에 동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이 중심 되는 신앙생활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들을 기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들을 보면 따라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행하신 것들은 우리가 닮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님의 기도의 모습은 우리고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보여준 것이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애독하며 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6:13-18 입니다. “When Jesus came into the coasts of Caesarea Philippi, he asked his disciples, saying, Whom do men say that I the Son of man am?
And they said, Some say that thou art John the Baptist: some, Elias; and others, remias, or one of the prophets.
He saith unto them, But whom say ye that I am? And Simon Peter answered and said, Thou art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And Jesus answered and said unto him, Blessed art thou, Simon Barjona: for flesh and blood hath not revealed it unto thee, but my Father which is in heaven.
And I say also unto thee, That thou art Peter, and up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il against it.“(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선 이 말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였던 시점은 예수님의 공생애중 마지막 6개월 남짓 남았던 시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6개월은 제자들과 보내는 시간이 주로 많았습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바로 그 때입니다. 여행 중에 예수님은 사람들의 자기를 향한 이야기를 무르셨고 제자들이 대답을 하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무르신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16절에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아버지시라”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약 3년 정도 같이 주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같이 다니되 24시간 주님과 같이 살았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5병2어 기적 때에는 기적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5병2어의 기적에 동참했을 때 베드로는 밤에 할 얘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잠도 안자고 말입니다.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믿게 되었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보았고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씩 주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감격했으며 그 수많은 기적들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 나라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리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보지 못한 채 정치적인 메시야로만 생각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다시말하면 이들 모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설교를 들었으며 기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에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관원들이 주님을 귀신들렸다고 욕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여기는 관원들에게 이르기를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예수를 보는 것과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 안에서 살아계신 메시야인 하나님의 아들을 본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이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보게된 고백입니다. 진정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입니다. 이게 반석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단순히 이론적인 예수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게하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그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전 3:10-11을 보면 “According to the grace of God which is given unto me, as a wise masterbuilder, I have laid the foundation, and another buildeth thereon. But let every man take heed how he buildeth thereupon.(For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is laid, which is Jesus Christ.”(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여기서 “터”는 교회의 터를 말하며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의 말씀은 고전1:17-18“For Christ sent me not to baptize, but to preach the gospel: not with wisdom of words, lest the cross of Christ should be made of none effect. For the preaching of the cross is to them that perish foolishness; but unto us which are saved it is the power of God.”(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반석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4“For after that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by wisdom knew not God, it pleased God by the foolishness of preaching to save them that believe.For the Jews require a sign, and the Greeks seek after wisdom: But we preach Christ crucified, unto the Jews a stumblingblock, and unto the Greeks foolishness; But unto them which are called, both Jews and Greeks, Christ the power of God, and the wisdom of God”(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셨습니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지식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0입니다.”But of him are ye in Christ Jesus, who of God is made unto us wisdom, and righteousness, and sanctification, and redemption:”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구속함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 절입니다.“And I, brethren, when I came to you, came not with excellency of speech or of wisdom, declaring unto you the testimony of God. For I determined not to know any thing among you, save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And I was with you in weakness, and in fear, and in much trembling. And my speech and my preaching was not with enticing words of man's wisdom, but in demonstration of the Spirit and of power: That your faith should not stand in the wisdom of men, but in the power of God.“(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죽으셨던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오직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알기로만 작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을 알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할 때도 오직 예수님만을 전한다고 결단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발견하면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 말씀입니다.“For other foundation can no man lay than that is laid, which is Jesus Christ.”(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For I am jealous over you with godly jealousy: for I have espoused you to one husband, that I may present you as a chaste virgin to Christ.“(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듣고 예수를 만나면 모든 것으로 그 분께 고백하게 되어있고, 모든 것으로 사랑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은혜와 승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다” 고 고백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육체를 신뢰함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1-4, 7-9 입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하셨습니다
“손할례당”이란 “할례를 받아야 참다운 성도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르켜 “개”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그러면서 참다운 성도의 특징은 세 가지는 성령으로 봉사함 즉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는 교회나 가정 사역이나 내적 치유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가 된 토대위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유일한 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그 분만을 알기를 구했으며 그 예수님만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교회는 그래서 예수님 중심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듯 복음이 빠지면 예배의 회복은 없습니다. 아무리 기법을 동원해서 그럴듯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예배의 회복은 없습니다. 복음이 빠지면 모든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외에는 어떠한 터도 없고, 예수 외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이 외의 것은 아무리 성경에서 인용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도, 또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도울지라도, 사람들이 듣기 좋을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만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집니다. 가정사역도 이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고, 내적치유도 이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예배를 역사적인 입장에서 살펴볼 때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일수록 형식적이 될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아니하며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의 충만함이 없어집니다 다시말하면 성령의 감화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됩니다 침체에 빠진 교회의 특징은 예배가 형식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배가 침체기에 빠지면 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반면에 예배가 회복되면 부흥이 일어나고 회개가 나타나며 찬양이 많아집니다 예컨대 성도들을 위해 노래하면 성령이 소명됨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우리들이 찬양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노래를 부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반복적으로 옳은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께 예배함이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못한체 그대로 행할 뿐입니다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 같은 자만에 빠집니다. 이게 형식화된 예배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이렇습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이 함게 하심을 깨닫지도 못하고 발견할 수도 없는 어두움에 있는 것입니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예배에 오고 늘 빠지지 않고 늦지 않게 예배드리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배함을 참 좋은 습관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아 예배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 중에 하나입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이는 예배다운 예배의 모습으로 드려진다고 해도 그것은 형식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의 예배를 바꾸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부흥이 올 때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형식적인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바른 예배가 되려면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로 바뀌어야 합니다. 호세아 6:6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For I desired mercy, and not sacrifice; and the knowledge of God more than burnt offerings)라고 하시며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예배에 왜 드립니까 우리를 찾아주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좇아다니던 백성들 모두가 다 “할렐루야” 외쳤지만, 다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사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들에게 치유나 기적이나 감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만나고 교제하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주님이 찾아주시고 우리들이 그분을 만나는 과정이 예배입니다 그 분을 만나 경배하고, 그분의 행하심을 감사하고, 찬사하기 위해서 오는 게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게 예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찬양과 경배입니다.
예배가 형식적일수록 신앙은 타락될 수밖에 없고 타락된 신앙일수록 예배는 형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회복에는 신령과 진리의 예배가 중요하며 이것 외에는 없다고 보는 것이 요한복음4:23-24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의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더다도 그렇고 교회사를 보더라도 그 역사가 말해줍니다 사람들의 원하는 것은 예배가 아니라 종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는 것은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그 수면에 운행하시게 됩니다
교회들이 예산도 있고 프로그램도 있어 빠르게 돌아갑니다 하지만 모인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체 친목하는 모임으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굴복하고 세상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의 믿음을 강조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자신을 땅에 부딪치지 아니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자만과 교만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배가 회복되면 우리는 담대함을 갖게 됩니다 즉 카리스마가 있게 됩니다 또한 예배 가운데는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시며 성령께서 운행하시는 예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 모이게 된 교회에서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4:26에서 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일컫습니다.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합니다.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셨습니다. 찬송시도 있고, 설교가 있고, 예언이 있고, 방언도 있고, 방언 통역함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하셨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통치하시며,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성령이 인도하신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진리대로 인도하시되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신 사데교회는 이와같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어 있다” 실제로 생명이 없는 교회가 사데교회였습니다 형식인 아름다운 틀이지만 그러나 형식주의에 빠지게 되면 타락된 것이며 주님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라고 말해야 합니다 흔히“다람쥐 챗바퀴돌 듯 신앙생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의 강이 흘러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수가 말라버렸습니다 예배 가운데 감동과 감격이 없어진지 너무나 오래되었고 이제는 기대하지도 않는 상태가 가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물론 ‘늦은 비가 있고 이른 비도 있어 어떤 것으로든 속단하기에는 이른 줄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일뿐 속단한 것은 아닙니다
23/21년동안 예배회복운동(Nyskc Movement)에 한길을 걸어왔습니다 이 길은 년수를 따지기에는 너무나 짧은 연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수천 년동안 예배회복을 위해 애쓰던 선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 곧 믿음을 인정받았던 사람들은 모두가 예배에 승리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체 살았던 사람들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21년차가 되었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작게 시작된 이 불꽃이 온 산야를 다 태울 수 있는 예배 회복의 역사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분명 이번 광주컨퍼런스에 오신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보내신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작은 이유를 한 가지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예배회복을 원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로 삼으셔서 전 세계 모든 열방에 “예수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곳이라면 예배회복을 외쳐 되는 나팔수가 되라는 명령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아주 짧은 3박 4일간의 일정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가지고 예배회복을 외치며 가르치고 찬양하고자 하오니 참여한 모든 Nyskcian들이여 예배를 회복합시다 할렐루야!
July 25 2016
최고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