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it Nyskc: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본문: 창세기 22장 12-19절
서론:
첫 사람 아담이 잃은 세 가지 기업의 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토지기업, 교제 기업, 생명 기업입니다. 그들은 사단의 생각과 사상에 빠져서 미혹 당함으로 경건을 잃어 버렸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그는 땅의 복을 잃었고, 주님과의 진리 안에서 순종을 통한 깊은 교제를 잃었으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기업을 완전히 잃어버린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낙원을 잃은 실낙원의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결국, 길과 진리와 생명을 잃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회복을 위해서 예배라고 하는 길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라고 하는 그 길로만 들어가야, 그 다음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잃었던 교제가 회복되어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서 주님과 성령 안에서 교통 되어질 때, 그 다음에 주어지는 것은 생명을 담은 예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그 생명의 그림자요, 모형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신약에서는 짐승의 피가 아닌,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생명의 속전을 다 드리셨습니다. 그리하심으로 우리가 그분을 믿을 때 온전한 예배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온전한 예배 자가 되었다는 증거는 단순한 믿음과 자기 확신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으로 가서 정해주신 생명이 있는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 생명 안에 담겨진 길이요, 진리까지의 온전한 회복을 위해서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회복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회복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배 자를 찾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 자를 찾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 거룩한 믿음의 인격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오해하지 않고 그대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 예배가 회복되어진 믿음의 사람은 생각에 오해가 없어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절대적인 온유가 그 속에 있고 그 생각과 사상이 분명한 사람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하나님이 인정하셨던 그 삶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여정을 걷도록 모형을 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섬세하시고 감사한 분입니다. 이미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게 너무도 선명한 모형들과 모델들을 제시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 곧 믿음의 사람들은 그 생각 속에 분명하게 그 누구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상이 명확해요. 사상이 명확해서 그 사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상을 위해서 죽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말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예배 하는 Nyskcian 나이스키안들입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예배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고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어렵지 않고 힘든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온전하게 회복되어졌고(Already),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Not Yet) 상태에 있는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천국을 향하여 지금도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정을 걸어가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한 자기 확신 때문에도 목숨을 걸어요. 바른 길도 아니요, 진리도 아니요, 생명이 아닌 것에도 목숨을 걸지 않아요? 생명이 아닌 우상 앞에 절을 하고 우상을 섬기지 않던가요? 그런데 우리는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생명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찬양하고 예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정한 믿음과 사상이라는 것은 내 생각과 내 확신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내 생각보다 더 중요합니다. 내가 잘못 믿어서 천국이 내게 없는데, 천국이 있는 것처럼 산다면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 상관없는 확신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의 결과가 어떻겠습니까? 그렇기에 내가 어떻게 생각 하느냐보다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내 감정과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더 중요한 것을 믿는 사람들이 나이스키안들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언제나 실패였습니다. 자기 생각의 결과는 하나님의 음성과 반대가 되었고, 결과는 실패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의 생애는 마침내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확신하셨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말을 바꾸어서 말한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과 사상에 있어서 절대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과연,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확신을 얻었어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입은 결과가 뭐에요? 예배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배의 마지막 단계, 마지막 극치 점이 뭐에요? 다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다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위해서 다 드리고 다 버렸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일생동안 준비해 왔던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께 다 드렸습니다. 이 모습이 결과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분의 확신을 얻은 사람들에게 일어난 삶의 고백적인 사건들입니다. 너무도 구약과 신약이 똑같아요.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오히려, 신약에 와서는 더 강한 것처럼 보입니다. 아들뿐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다 드려요. 시간? 물질? 몸?
로마서 1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예배 자가 되려면, 우리가 성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우리가 예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이교도들의 어떤 행습과 같은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비의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지, 무섭고 율법을 강요하거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예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결과를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반응하며 나아가는 것,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가는 것이 예배로 표현되고 고백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이 신본주의요, 하나님 중심의 사상을 가진 예배가 회복되어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 있고,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을 단순히 내 확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를 통하여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착각일 뿐이지 믿음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가짜입니다. 가짜. 아직은 가짜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경험하고 제대로 되어지면 다 드리겠지만............그 믿음이라고 것은 내 교양과 내 생각과 상식 밖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건입니다. 상식과 교양, 내 이해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초월한 것이 믿음입니다. 철학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형이하학적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는 수준입니다. 그것은 이 땅의 일이기 때문에 의심할 것도 없는 수준의 것들입니다. 이 땅의 일은 고민하고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것, 땅의 생각이 아니라 위의 것, 하늘의 것,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우리들의 거듭나지도 않은 이성으로 그 세계를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어떻게 내 생각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인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은 이 세계를 믿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론: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십시오.
1절을 보면 '그 일 후에'라고 시작합니다.
'그 일 후에'. 이 말씀을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창세기 12장부터 21장 전체까지에 기록되어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아야 합니다. 이 일 이전에 이미 아브라함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면 그가 하나님께 받은 복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미 그는 하나님을 만남으로 그의 인생의 궁극적인 기업이 완전히 회복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약속이라는 것은 현재에 주어졌지만, 미래적인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약속은 창세기 12장 2절에서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약속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현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길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길로 들어섰을 때, 그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토지 기업을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 토지 기업을 회복받기 위해서는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약속이지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약속을 하실 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너에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순간에 그것은 실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 미래에 주어질 실체를 보면서 오늘 그렇게 된 것처럼 행동하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경험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처럼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얻었습니다. 또한 그에게는 훈련된 사람들 318명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미래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기다리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는 이스마엘 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14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지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의 몸에는 아이를 잉태할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이 상실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백세였습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불완전 했으나 하나님은 결국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 가고 계셨습니다. 마침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주셨어요.
백세에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백세에 얻은 그 아들이 얼마나 귀한 아들입니까? 그 생명을 얻은 이후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너무도 깊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아들을 볼 때마다 그의 마음을 빼앗겨 버릴 정도입니다. 그는 이미 토지 기업, 교제 기업, 생명 기업을 모두 하나님께 받은 사람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현재 가장 귀한 보물이 뭐에요? 약속의 아들, 이삭입니다. 우리가 생각해보면, 우리도 믿음으로 이삭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이미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잃었던 기업들이 회복되어진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과 그 사랑까지 다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 얻은 우리들이 무엇을 얻지 못했겠습니까? 얻지 못한 것이 없어요. 그것을 다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가 부자인데, 거지꼴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생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백세에 얻고 그 아이가 자랐을 어느 때에 하나님은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 일 후에'
이제, 창세기 22장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도 커 보이는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생명인 아들, 죽은 자와 방불케 되었던 사라의 몸에서 태어난 그 아들(히브리서 11:12), 아브라함이 백세가 되어서 받은 그 아들을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십니다. 그것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서 순종하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면 죽는 자리까지도 따르겠다는 결단을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요,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예배 속에 담겨진 의미 입니다. 다 드리는 것이 예배의 극치입니다.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고전 10:13).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은 그가 그 시험을 치룰 수 있는, 이미 준비되어진 존재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시험을 잘 치룰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시험 치를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겠어요? 그것이 믿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네 생명, 네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제물로 드리라.'하셨습니다. 그것도 그 자리가 아니라, 집에서 떨어진 곳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그곳은 모리아 산, 삼일 길이 떨어져 있는 그곳으로 가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이삭을 데리고..........' 참으로 치루기 힘든 시험이 틀림없습니다.
모리아 산은 무엇을 의미하겠어요? 지금으로 생각해 보면,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교회에 와서 뭐하라고요? 하나님이 주셨던 생명을 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라 하셨습니다. 생명이 있는 예배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언제나 희생 제물이 있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생명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께 내 몸을 거룩하게 구별해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그 안에는 예배자의 인격이 담겨 있어요. 완전이라고 하는 의미가 예배 안에 있습니다. 예배에는 생명이 함께 담겨져 있습니다. 예배 안에 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물은 언제나 죽은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 그것을 드린 후에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생명이 회복 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온전하 드림, 온전한 예배 속에는 생명이 담겨져 있어요. 생명. 예배에 성공할 때, 생명 기업을 회복 받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을 확인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예배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이스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듣고 성경 전체의 요약을 해 주시면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7절,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숨은 곧 생명입니다. 생명을 다하기 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 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영생이 있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생명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영생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어떤 제물을 요구하고, 단순히 아브라함을 테스트 해 보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진정한 예배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의 결과를 그에게 분명히 보여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삼일 길이 떨어진 곳까지 시간과 몸과 제물인 생명을 가지고 자기 뜻을 복종 시켜서 거기까지 가게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온전한 사랑과 생명이 담긴 헌신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그에게 그것을 요구하신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회복과 사랑을 받은 존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아무런 관계도 되어 있지도 않았을 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내게 달라.' 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회복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 하나라도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생명인 아들을 드릴 수 있겠어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
그러나 가능하게 된 이유는 이미 아브라함은 바른 길에 들어서 있었고, 아브라함이 중간에 실수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깊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 교제가 회복되어져 있었습니다. 그 교제가 회복되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마지막 생명 까지도 하나님은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능히 하나님께 내어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예배요, 진정한 회복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회복의 결과는 예배요, 예배의 결과는 회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한 예배를 요구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생명을 얻은 자가 '내가 피곤해서 기도할 수 없다. 내가 거기까지 갈 수 없습니다. 내 아들입니다. 나는 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피곤해서 할 수 없습니다. 이 돈은 내 것입니다.'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내 생명을 구원해 주신 그 생명의 은인을 위해서 무엇을 못할까요? 다 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께서 요구하시는데요? 그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예배의 극치 점에서 이런 생명을 드렸을 때,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최상의 복된 것으로 되돌려 주시는 것을 미리 보셔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 인생의 위기 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맛 본 사람은 절대로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 아들과 가족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기도했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시면 부끄럽지 않게 살겠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하고 약속하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막상 다 되니까, 옛날 그 생각으로 되돌아가 버리고 말아요.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사람들은 처음에 하나님이 주셨던 그 마음을 잡아 놓지 못합니다. 잡아 놓지 못하고 담아 놓지 못하는 그릇입니다. 그럴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믿음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있어요? 그것을 주님이 주시지 않았으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생명을 받은 후에, 내가 생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돌려 드리겠다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믿음입니까? '나는 죽었다가 살았다.'는 믿음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넘어질 수 없어요. 어짜피 내 것 아니지 않아요? 잠시 연장 시켜 준 것 뿐이지, 내 것 아니지 않아요? 자식도 그래요. 잠시 내게 맡겨 주셔서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할 뿐입니다. 그것 내 것 아닙니다. 그분 것입니다. 물질도 그래요. 그런데 아직도 십일조 가지고 시험 들어요? 예수님을 분명히 믿는다고 하고,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서 아직도 십일조에서 걸려 넘어지고 있다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해 주신 그분께서 드려보라고 하는 그것조차 못하고 시험에 빠질 정도면 안되지요.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신 분들은 십일조 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당신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었다고 하면 그것은 결단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일조 드리는 것, 헌신하라는 것, 순종하라는 것으로 시험 들지 마십시오. 새벽 기도하는 것, 주일 성수, 개인적으로 복음의 열매를 드러내는 것이 왜 시험거리가 됩니까? 그럴 수가 없어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건이 분명하다면 그 다음은 정도의 차이가 있고, 과정의 문제이지 결단코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더 못드리고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 할 뿐이지요. 아브라함은 그 은혜가 너무 귀하고 귀해서 아들을 드립니다. 이것은 최상의 예배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많은 교회 안에 모여 있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최상의 예배를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그 산인 교회, 그 정상까지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정조차도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목마름조차도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모리아 산, 그 교회 주변에서 맴맴 돌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꼴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 않아요? 생각으로는 다 알아요.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의 문제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살아 있는 씨앗은 그 속에 생명이 있어서 계속 자라게 되지 않을까요?
3절을 보십시오.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데리고 떠난 모리아까지의 거리는 삼일 길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집이 아니라, 삼일 길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그것을 자기 생각, 자기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온전히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러한 시험을 하시겠어요? 아브라함이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믿어준다는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오해하지 않을 만큼, 절대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믿어 줄만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호와의 산에서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불완전해 보이지만,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믿어주실 만큼 그의 믿음과 그에 따른 순종이 준비되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시험을 감당할만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만 있으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믿어 주실 정도의 큰 시험이 와도 감당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나이스키안(Nyskcian)들은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특징은, 예배에 목숨 건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림으로 표현되고 고백되어집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는 성령으로 거듭나서 말씀이 내 삶의 현장 속에서 몸과 생각을 복종한 상태에서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상태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져서 순종되어지는 상태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배를 위해서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힘으로 그들은 사람들을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이스크의 다섯 가지 예배자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N: New Life / 새벽에 기도로 시작하라.
창세기 22장 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듣고, 그 다음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모든 것을 준비해서 예배의 장소로 떠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즉시로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요.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이미 전 날 밤에 모든 것을 계획하고, 아침에 일찍 떠나기로 결단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 되고 아침이 되는 그 시간 동안에 모든 것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마찬 가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예배의 장소로 떠나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여기에서 우리는 새벽 기도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하나님께 하루의 삶을 드리기 위한 첫 번째 드림이요, 결단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이 새로운 삶(New Life)를 위한 드림의 시간입니다.
2.Y: Yielding for Manna/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
22장 1절을 보십시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귀가 열려있지 못하면 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들려진 귀, 듣고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아브라함, 노아, 므드셀라, 에녹...........아벨에 이르기 까지 신앙이 전수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그는 아벨 때부터 전수되어져 온 신앙의 유산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귀, 하나님의 음성만 들을 수 있는 귀로 길들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쉽게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으로 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2장에서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그 방향으로 가는 도중에 아브라함이 한 것은 오직 예배 밖에 없어요. 얼마나 재미없어 보입니까? 그러다가 도착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그의 믿음을 사모하면, 내가 복을 받고, 아브라함의 믿음을 저주하면 내가 복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깨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깨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귀가 있다는 것은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S: Salvation for one by one/ 성도의 열매를 드리라.
아브라함은 그의 집안에 318명의 가신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철저하게 삶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되어진 준비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집안도 보호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을 돕고 구원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318명이 언급된 구절이 한 곳에 나옵니다. 언제입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에 살다가 그 도시가 5개의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의해서 초토화되어졌을 때, 그의 조카 롯뿐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백성들과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그 소식을 듣고 318명의 집에서 훈련시킨 그들과 함께 밤중에 그들을 공격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한 그 전쟁에서 아브라함이 완전히 승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과 롯과 그의 소유까지도 모두 되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가 한 일은 하나님께 십의 일조를 구별해서 드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예배가 회복되어진 사람들, 하나님이 마침내 복을 주시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성도의 열매는 언제나 사람을 살리는 일, 생명을 살리는 일, 그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들을 다 통과해 온 아브라함의 모습이 오늘, 모리아 산을 향하여 더욱더 깊이 나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진 사람에게 있어서 진정한 이웃 사랑이 뭐겠어요? 진정한 이웃을 향한 사랑이 성도의 열매가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것이 뭐에요?
진정한 구제(Ministration)가 뭐에요?
밥 한끼 사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복음과 함께 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선은 언제나 생명의 말씀,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둘 중에 하나만 주어야 할 수 밖에 없다면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복음이 없는 사람들은 빵을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줄 수 없을 때 어떻게 합니까? 빵만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회복된 우리들은 그들에게 영생을 얻게 해 줄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 예배의 사람들, 모든 회복되어진 우리들은 언제든지 무엇이든지 다 줄 수 있는 존재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복음을 주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육신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영원한 생명을 살려 주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웃을 단순히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예배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 아들이 참된 제물이요, 예배 자가 되게 했어요.
4.K: Keeping for Lord's day/ 성령의 교통이 있는 예배를 드리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이른 새벽에 일어나서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예배를 위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삼일을 걸어갔습니다. 먼 여행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정해 주신 곳을 향하여 갔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이 삼일 길이었습니다. 삼일 길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그것도 아들이 제물이 되어야 함을 알고 길을 떠난 그 삼일 길이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도 어려운 길이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를 향한 그 여행을 아브라함은 결단코 지루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신 죽음의 길도 삼일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예수님은 몸은 힘들었으나 그 힘든 몸을 의지하고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부활의 그날을 바라보면서 소망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그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에게는 죽음의 얼굴, 괴로움의 얼굴이 아닌, 소망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19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그 시간 동안 하나님이 그에게 예배하라고 하셨던 그 마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원하시고 말씀하신 아들,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예배가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예배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억지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분명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정해주신 그 날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북 이스라엘 왕국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처럼 자기 멋대로 장소와 시간을 바꾸고 날짜를 바꾸어서 하나님께 거짓 예배를 드렸던 그 사람의 최후를 알고 있습니다.(왕상 12:25-33) 우리는 믿음이 없고, 자기 의에 빠져서 하나님께 생명을 드리지 않았던 가인의 실패한 제사를 알고 있습니다(창 4장).
우리가 가져야 할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예배를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거짓이 없이 드려지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 성령의 감동이 있고 교통이 있는 상태에서 드려지는 감격의 예배를 드리겠다는 소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 날이 주님의 날입니다.
그 날은 첫 번째 열매를 거두는 초실절이요, 그 초실절에 첫 열매가 되어주신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이요, 그 날 성령님이 강림하셨습니다. 그렇기에 그 주님의 날은 성령의 교통이 있는 날이 되도록 최선의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5.C: Complete Offering / 축복의 도리인 헌물을 드리라.
그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가운데는 반드시 준비되어진 제물, 곧 헌물이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제사에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하고, 신약의 예배에서는 반드시 정성된 헌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제사이든, 예배이든지, 여기에는 거룩하게 구별되어진 장소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아무런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아브라함은 듣고 결단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헌신의 시작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곧 교회로 삼일 길을 걸어가는 헌신을 드렸습니다. 세 번째로, 아브라함은 제물인 아들, 이삭을 데리고 그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제물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모두, 성령의 교통하심과 말씀이 육신이 되어져서 온전하게 순종되어진 산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되어 질 때 그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살아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모리아 산이 어디겠어요?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면 예배의 장소가 어디이겠어요?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한 산 거기서(22:2)' 거기가 모리아 산입니다.
그것을 보면, 예배는 내가 정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해주시고 지시하신 곳에서 드리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삼일 떨어졌다는 것은 뭐에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삼일 길이 떨어진 곳, 모리아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생각과 마음의 자세가 조금도 흔들리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물건을 사 놓고도 마음이 바뀝니다. 후회를 합니다. 집을 사고도, 차를 사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아요? 어떤 사람은 사랑해서 결혼을 해 놓고도 신혼 여행을 가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이혼을 해 버리고 말아요. 그런데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데리고 가는 여정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도 흔들림이 없었어요. 믿음이 뭐에요?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한결같은 것으로 진정한 믿음은 나타나게 됩니다. 어디로 그렇게 나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곳, 교회로 나아가야 합니다. 가는 도중에 유혹을 받아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곳으로 치우치지 말고 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이 드리라고 한 제물이란다.' 그러자 아들, 이삭은 아무런 반항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묶어서 드디어 제단에 올려 놓았습니다. 아들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그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물입니다. 구약에서는 제물이요, 신약에서는 예물, 헌금으로 표현됩니다. 그것이 온전한 드림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간 제물은 하나님이 직접 요구하셨던 가장 소중하고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제물이 되어줄 것을 요구했을 때, 이삭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제물로 내어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도 대단하지만, 살아 있는 제물의 모습이 너무도 완벽합니다. 완벽한 순종의 제물이 되기로 그는 이미 작정되어져 있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아브라함은 그 아들,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마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면 드리기 위해서 준비해 놓은 사람 같아요. 하나님이 이삭에게 직접 말씀하시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삭은 아버지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은 완전히 순종의 제물로 드려져야 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아들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기 위해서 준비하는 아버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과연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을 만큼 신뢰할 수 있고, 믿을 수 있는 아버지를 가지고 있는 이삭과 같은 존재는 너무도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하나님은 절대로 부정한 짐승이나, 병든 짐승은 제물로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흠이 없는 온전한 짐승을 받으시는 것처럼, 온전한 제물로 준비되어져 있던 이삭을 요구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형을 통하여 우리는 신약에서 당신의 온전하신 몸을 제물로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온전하고 완벽한 제사요, 신령과 진정의 예배, 즉 말씀이신 예수님 당신이 육신이 되어서 성령의 능력으로 드려진 순종의 제사를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예배의 원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한 예배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의 온전한 제사, 온전한 예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는 온전한 드림이요, 그것은 온전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신 하나님의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위에서 언급했던, 아브라함의 삶에서 나타난 다섯 가지의 열매는 예배가 회복되어진 신령과 진정의 예배 자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열매들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러한 삶의 훈련과 드림과 고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이스크 삶의 결과로 주어지는 축복이 무엇입니까?
이러한 다섯 가지, 나이스크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때,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시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를 위하여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고백하게 됩니다.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 대신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미래의 복, 창세기 12장에서 이미 그를 부르셨을 때 주셨던 그 약속을 완전히 인정해 주시고 다시 확인 시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른 새벽에 작정한 대로 기도하고, 삼일 길을 떠나서 예배의 산으로 올라가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아들, 이삭 대신에 받으실 수양을 그 산위에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한 어린양을 이미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의 섬세하심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드리러 그 곳으로 올라올 것을 믿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어린 양을 나무 가지 사이에 그 뿔이 걸려서 머물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더욱더 깊이 알게 됩니다. '아, 하나님은 이미 나를 믿으시고 당신이 받으실 제물까지 준비해 놓으셨구나!' 그리고 그 땅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이레의 뜻이 뭐에요?
'이레'라는 말은 '무엇이 되어 간다. 만들어져 간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이레'라는 것은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모두가 이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생기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게을러 질 수가 없습니다. 이 믿음이 생기면, 그 어느 것도 핑계할 수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이 오고 바람이 불어도 기쁨으로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 날부터 내 자신을 준비해 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백했습니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이 믿음은 단순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저 어떤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다 준비해 놓으셨어. 걱정하지 말아요. 내 자식의 앞길도 다 준비해 놓으셨어.' 수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말입니다. 여호와이레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한 결과, 예배의 극치를 통과한 예배에 성공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깊은 믿음의 언어요, 고백입니다.
나이스크의 삶을 온전히 실행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결과가 여호와이레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자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준비되어진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인식한 결과의 믿음이 여호와이레의 믿음입니다. 여호와이레의 믿음을 소유하게 되어지면 그 날을 준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이레의 신앙이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의 신앙은 반납하는 신앙입니다. 주신 그분께 다시 돌려 드리는 신앙입니다. 무엇을 돌려 드린 결과입니까? 생명을 주신 그분께 자기 아들의 생명을 돌려 드린 결과가 '여호와이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신 그 생명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주시는 복이 여호와 이레의 축복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리를 풍성하게 채우셔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확증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는 그 날을 준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께 다 드리고 싶어서 준비하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내 속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이대로 있고 싶은 게으른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깨달아 지게 됩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오늘, 내일을 준비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이스크의 다섯 가지 순종해야 할 강령들은 곧, 예배 회복을 위한 경건의 도구들입니다. 또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회복되어진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이 나이스크의 다섯 가지, 즉 새벽기도의 삶, 성경 애독, 개인 전도, 주일 성수, 일조 전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어 질 때,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여러분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예배에 목숨 건 인생인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회복의 세 가지 기업이 있습니다.
1.토지 기업의 회복
그는 이미 자기가 길을 만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길을 내어 주셔야 함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위한 길을 만들고 그 길로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창 12장). 그것은 토지 기업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2.교제 기업의 회복
또한 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경험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기업이 회복되어진 사람입니다.
3.생명 기업의 회복
아브라함은 생명이 없는 몸에서 생명의 아들을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생명 기업이 회복되었습니다.
결론:
나이스크 운동은 본질 회복 운동이요,
무던 것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한 인생을 위한 회복의 도구는 예배(NYSKC) 밖에 없습니다. 회복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뿐입니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시대에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노아의 방주 밖에 없었습니다(창세기 6장).
*부지중에 오살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곳은 오직 도피성 밖에 없었습니다(여호수아 20장).
*수가성 여인과 죄인들, 병든 자들이 회복될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은 교회의 주인이시오, 교회를 세우시며 교회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죄악 된 인생들이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남겨 놓으신 빈 무덤인 교회밖에 없습니다.
회복의 도구도 회복의 결과도 교회요, 성도요, 신부인 교회가 일으켜야 할 이 시대의 마지막 운동은
NYSKC MOVEMENT입니다.
나이스크는 회복을 위한 도구요, 회복의 결과물입니다.
나이스크는 눈에 보이는 현상이지만(새벽기도, 성경애독, 개인전도, 주일성수, 일조전납), 그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본질인 회복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주님 오심을 대망 하고 기대하고 기다리는 교회(성도)가 거룩함으로 그분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도구가 나이스크요, 그 날에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Nyskcian 나이스크안들은 회복의 신학, 전가의 신학, 그리고 기다림의 신학을 가지고 무장되어져야 합니다.
Do it Nyskc!
NYSKC
New Life /새벽기도 / 영혼의 호흡
Spiritual Respiration (Mark 1:35)
Yielding for Manna /성경애독 / 영혼의 양식
Spiritual Nutrition (Isaiah 34:16)
Salvation for one by one /개인전도 / 성도의 열매
Fruit of the Blessed (Acts 4:12)
Keeping for Lord's day /주일 성수 / 성령이 교통
Communication of the Holy Spirit ( Ex 20:8)
Complete Offering / 일조전납/ 축복의 도리
Duty of the Blessed (Malachi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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