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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종교개혁 기념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 속에 개혁과 혁명의 불길을 꺼지지 않았다.

이 불길은 매해 10월 다시 불붙는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또다시 타오르기 때문이다.

페널티 킥 앞에 서있는 골키퍼처럼 다른 생각은 다 잔디밑에 묻어두고 저 둥근 공에만 집중한다. 공이 어디로 튈지 아무도 모른다.

골키퍼는 몰입한다. 그럴수록 심장의 박동소리는 더욱 커진다. 혁명이 다가오는 소리처럼 내면에서 울려퍼진다.


그런데 조용하다.

루터 (Luther) 선생이 종교개혁을 일으키게된 비텐베르크(Wittenberg) 시도 조용하다.

거리가 멀어가지 못하고 인터넷으로 방문해보니 종교개혁을 기념하여 몇 가지 세미나가 열린단다. 기념일 당일 예배가 예정되어있다.

베를린 다녀오는데 비텐베르크 궁정교회와 시내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루터는 궁정교회 문에 95개 조항을 내걸었고, 시 교회에서 설교하였었다.

492주년이니 기억 속에서 잊혀질만도 하다.


500년 가까운 역사적 축제의 현장을.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그렇게 오래된 사건이니 현대인들의 뇌리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것도 자연스런 일인 것같다. 종교개혁의 후손들이 사회 제도와 체제로 종교개혁의 의도를 어느 정도 반영해 놓아 안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세속화 끝에 와있는 현상일까.


이렇게 조용하게 종교개혁기념일을 맞는 모습은. 또는 가톨릭이 강세인 바이에른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은 어떻게 종교개혁 기념일을 보내고 있을까.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뮌헨 시내 동서남북에 소재한 여러 교회에서 10월 31일 저녁에 기념예배가 거행된다.

어떤 교회는 성만찬 예식을, 어떤 교회는 관현악기 합주로 음악예배를, 어떤 교회는 성가대로 찬양예배를 준비하고 있다. 교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예배를 선택해 예배를 드릴 것이다. 루터교단이 아닌 다른 교단은 따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루터의 유산이 강한 독일에서는 아무래도 루터교단이 종교개혁을 기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츠빙글리(Zwingli)의 취리히는 어떠한가, 칼빈(Calvin)의 제네바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취리히도 제네바도 조용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거기도 시간이 흘러가기는 마찬가지고, 독일이나 스위스나 똑같이 세속화의 길을 걸어왔으니 취리히 호수나 제네바 호수의 잔잔한 물결처럼 고즈녁하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서구의 황혼이 도래한 것이다.

그 황혼은 생각보다 넓고 깊어 보인다. 니체(Nietzsche)는 이미 1860년대부터 목소리를 높였었다. 유럽에 드리운 황혼을 걱정하라고. 하지만 누구도 그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고독한 철학자는 광야의 늑대처럼 저홀로 부르짖다 정신병으로 죽어갔다.


종교개혁의 본고장 유럽은 현재 그런 모습이다. 변명하자면 490년 이상 지났으니 이제 권태에 빠질 수 있다. 지극히 인간적이지 않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도 광야에서 바로 그 기적들을 잊었는데. 속담에도 ‘죽은 조상님 제삿날 돌아온 듯 한다

종교개혁은 기독교를 세운 머릿돌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루터(M.Luther) 선생 혼자 일으킨게 아니었다. “에라스무스가 달걀을 놓았고, 루터는 그것을 깨기만 했다”고 가톨릭 사람들은 빈정거렸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에라스무스가 길을 열어놓았기에 루터의 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역할로 말하자면 에라스무스는 장작을 패어 불쏘시개를 만들었고, 루터는 불을 붙였다. 하지만 횃불을 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였기에 역사는 루터에게 종교개혁가라는 영예를 선사했다. 종교개혁의 분위기는 당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중세 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몇 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다. 역사적 사건은 복합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단선적이고 편협한 시각이 언제나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종교개혁의 제 1원인을 하나님의 섭리에서 찾아야한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여타 시대적 조건들이 성숙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 역사적 사건으로 이끄신 이는 주님이시다. 하나님 말씀이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성령께서 신앙적 자의식에 눈을 뜨게했던 것이다.


루터는 회심 이후 “어떻게 하면 불의한 죄인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가(칭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영적 깨달음을 얻는다.

성령의 조명이 강하게 그의 마음에 비친 것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때까지의 교회는 교회의 전통, 사제의 권위가 마치 성경보다 우선하는 것처럼 가르쳤다.


또한 미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들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로 표현되기에 거부되어야했고, 미사에 들어온 각종 미신적 요소는 신앙으로 이끌기 보다 신앙을 미혹하는 도구가 되었다. 구원의 능력은 그런 외형적인 사물에 달린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능한 것이었다.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이 열리게 되었다.

구속함을 입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을 향한 자유였지 제도와 예식에 제한받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깨달음이었다.


종교개혁은 먼저 교회내적 개혁 운동이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가톨릭 교회가 부패한 것이 원인이었다.

교황의 역사를 보면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연루되어있었다. 사제들은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제도에도 불구하고 사생아들을 낳게 하였으며, 사제직을 사고 파는 행위도 자행되고 있었다. 일부 사제들은 탈선하고 윤리적으로 바르지 못했다. 마녀 사냥이라는 폭력 행사는 사제들의 욕망과 결부된 면이 많았다. 게다가 교회는 백성들의 삶에 무관심했다.

백성들은 헌금 외에도 정기적으로 세금을 바쳐야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 교회가 지정하는 건축이나 전쟁에 동원되어야 했다.


나중에 페스트가 창궐하고 흉년이 계속되자 농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교회와 사제가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안지 못한 데에 있었다. (이런 사건은 후에 다시 반복되었다.

예를 들면 1789년 프랑스 혁명때 시민들은 가톨릭 교회와 사제들을 박해하였고, 1917년 러시아 혁명 때도 시민들이 역시 러시아 정교회와 사제들을 처단했다.

왜 그랬을까.

종교가 백성들과 호흡을 맞추지 않았기에 백성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종교개혁이 몸소 보여준 개혁을 계속 했더라도 그런 참극이 일어났을까 묻고 싶다.)


특히 루터를 격분하게 했던 것은 면죄부 판매였다. 루터에 앞서 이미 에라스무스가 이 불법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 각지에서 면죄부를 팔아 성 베드로 성당 건축기금에 충당하려했다. 각지로 면죄부 설교자들이 파송되었다. 테젤이 그중 하나였다. 루터는 논쟁을 통해 면죄부 교리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가톨릭 교회는 당시 지배세력인 정치 권력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다. 칼 5세의 제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력 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경제력을 구비한 신흥 귀족들이 출현해가고 있었고, 몰락한 기사 계층이 거기로 모여들었다. 창과 칼로 무장한 기사들은 신무기에 밀려 힘을 쓰지 못했다. 이들은 신흥 귀족들 문하에 들어가 일자리를 찾아야하거나 독립해야하는 운명이었다.


신흥 귀족이 종교개혁에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은 확실하다. 그들은 중앙 권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귀족들도 구교로부터 행동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고 있었다. 루터를 지원한 작센공 프리드리히는 루터를 박해자들로부터 보호하고, 생활을 책임져 주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신약 성경을 번역할 수 있었다. 부처를 헤센 지방으로 부른 이도 헤센 필립공이었고, 나중에 영국으로 가게된 것도 역시 개혁을 추구하는 귀족들이 요청해서 가능했다.


종교개혁의 단초를 인문주의가 제공했다면, 인문주의는 또 어디서 그 동력을 얻었을까. 우리는 어렵지 않게 르네상스를 생각할 수 있다. 르네상스는 지중해와 아랍 세계가 연결되어 새로운 항로가 개척되고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가운데 경제, 학문 등의 왕래 속에 생겨난 고전 회귀 운동이었다.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가운데 지식인들은 고전(古典)에 대한 관심, 진지한 연구 자세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에라스무스(Erasmus)는 신부가 되기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의 냉철한 지성은 당시 교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의 『우신예찬』은 지배세력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교회의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그리스 원전에서 학문과 지혜의 샘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렇게 외친다. “근원으로 돌아가라!”(ad fontes). 이 열정은 원전의 정확한 해석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게 되었고 결국 성경을 해석하는 자세도 바꾸게 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영적 해석, 알레고리적 해석, 비유적 해석 등에서 원문 연구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멜랑흐 톤(Melanchton)은 루터의 동료로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작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고대 그리스어를 가르치는 교수로 비텐베르크에 오게되어 루터와 합세하였다. 그 역시 인문주의 학문 연구를 기초로 역사적 원전을 해석하여 중세교회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밝혀내었다.


종교개혁가 본인들도 인문주의의 길을 가려고 했었던 경력이 있다. 루터나 칼빈의 경우가 그렇다. 두 분 선생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신학자가 되고 목회자가 되었다. 두 분 모두에게 회심의 계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이는 교회를 개혁하시려는 하나님의 예비하심이 아니었을까.


과학과 문화의 발달도 종교개혁에 기여한 바가 대단하다.

16세기 궁정(宮庭)문화는 새로운 지식에 굶주려 있었다. 새로운 귀족과 지식 계층이 형성되어 지식에 대한 강한 열기가 끓어올랐다. 신지식은 당시 호사가들이 귀족과 궁정에 실어나르는 상품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독일의 한 지방에서 날아든 “95개 조항” 뉴스는 여러 면에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페스트도 잠잠해지고 별반 큰 사건들이 없어 하품과 권태를 느끼며 살아가던 자들에게 루터의 주장은 대형 사건이요 스캔들임에 분명했다.


그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누구보다 먼저 접한다는 자부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발동했다. 때마침 구텐베르크 인쇄술이 발달하여 하루에 무수한 책자를 찍어낼 수 있었다.

신지식 계층의 독서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므로 인쇄는 쉴 사이 없이 돌아갔다. 95개 조항 뿐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수많은 글, 그림, 우화, 삽화, 전단지 등이 배포되었다.

루터는 가톨릭 사제를 여우와 당나귀 등으로 그리고, 사제들 쪽에서 루터는 사탄이나 지옥의 마귀로 그려졌다.


양쪽의 변호, 공격이 난무하는 가운데 신앙과 관계없는 호사가들의 흥미도 점점 도를 더했다.

지금까지 터부시되었던 종교계에 대한 비판과 비난, 욕설, 저주 등이 문학적 수사학을 타고 백성들의 입가에도 오르내렸다.

시대는 중세 때 잠자고 있던 아이러니, 패러디, 위트, 알레고리 등의 새로운 언어를 깨웠고 이런 단어들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동안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맛보게 하였던 것이다.


역사는 인간없이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를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항상 잘하나 잘못하나 인간이 등장한다.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지만 역사에는 사람이 함께간다. 그래서 자연의 변화를 역사라고 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에서 사람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종교개혁가로 알려진 세 분 선생님이 떠오른다.

루터, 츠빙글리, 칼빈.


먼저 루터 선생이다. 그가 남긴 초상화는 얼굴이 비교적 두툼하다.

비텐베르크 궁정교회 밑 음식점에서 ‘루터’라는 이름의 맥주를 팔고 있었다.

루터는 세 명 가운데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회심 사건은 그러나 많이 과장되었다. 어느 설교 시간에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그가 친구하고 말을 타고 가는데 번개가 쳐서 까맣게 타죽었습니다.

루터는 이 때 하나님께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루터의 일화에 번개의 등장은 맞다. 그 때 두려움과 회개, 회심의 과정이 일어난 것은 맞다. 그러나 바로 옆의 친구가 있었다는 것, 바로 그 친구가 번개에 맞아 까맣게 타죽었다는 것은 과장이 아니라 극적인 것을 일구어내려는 어느 모사꾼의 거짓말임이 증명되었다. (앞으로 예화를 과장하고 왜곡하여 회중을 기만하는 일은 없어져야겠다).


루터는 성경을 연구하다 말씀에 화살이 꽂혔다. 성령께서 그의 눈을 여시자 말씀이 심장으로 파고든 것이다. 수십 년 고민이 한 성구에서 해결된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이었다. 연구실에서 책을 파고 강의하던 꽁생원 루터는 그 때 혁명가로 부름을 받았다. 루터가 절대적 권위를 자랑하는 가톨릭에 대항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95개 조항을 기록하여 세상에 공포하였다.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가톨릭 교계는 발칵 뒤집혔다. 가톨릭 세력에 은근히 반감을 드러내고 있던 신흥 귀족들도 발칵 뒤집히기는 마찬가지였다.


1521년 루터는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회의에 불려갔다. 그 자리에는 황제와 가톨릭 추기경, 주교단, 수많은 귀족들, 즉 실세들이 모여있었다. 루터는 혼자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번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이렇게 외쳤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는 달리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누구는 루터가 비겁하게 성주가 마련한 성에 숨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루터는 성경을 번역하였다. 백성들이 자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사랑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이 모습을 두고 비겁한 루터라고 하기에 너무 가혹하다. 하나님은 루터가 성경을 번역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이다.


루터 다음에 등장하는 이는 스위스의 츠빙글리 선생이다. 루터의 명성에 가려 별로 이름이드러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일등 뒤에 가려진 이등이라고나 할까. 그는 취리히에서 교회가 정한 금식일에 빵을 먹게 했다.

자신은 당일엔 먹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이 금식 규정에 대해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였다. 가톨릭 교회가 제정한 절기가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지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츠빙글 리가 추진하던 개혁의 모토는 신명기 4장 2절이었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중세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와 신앙 외에 불필요한 것을 너무 많이 가미시켰던 것이다.


취리히 호수가에 그가 설교하던 교회가 서있다. 거기엔 유대인 출신 화가 샤갈이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가 햇빛을 받으며 은은히 이야기를 전한다. 성경 이야기를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화풍으로 아로새겨 넣어 찾는 이들에게 마음의 여행을 떠나게 하고 있다. 츠빙글리는 비텐베르크에서 전해지는 개혁 방법을 자신의 고향에서 실현하려고 전력을 다했다. 그는 열정 때문에 강한 인상을 풍긴다.


성찬에 대한 이해는 루터보다 과격하고 진보적이었다. 종교개혁에서 성례와 성만찬은 중요한 논제거리였다. 수도사였던 루터는 성만찬을 가톨릭적 기반을 갖고 이해했다. 떡과 포도주가 곧 실재하시는 주님의 몸과 피라고 믿었다. 츠빙글리는 반박했다.

주님의 몸은 실재적으로 천국에 존재하고, 지상에 있는 떡과 포도주에는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이해했다. 성경에 “기념하라”(눅 22:19, 고전 11:24-25) 하셨으니 기념에 의미가 더 배여있다고 주장했다.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는 교회 안에서 음악까지도 배제하였다. 그는 전사처럼 개혁을 지휘해 나갔다. 그는 개혁을 위해 전투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1531년의 일이었다.


종교개혁의 세 번째 이름은 단연 칼빈 선생에게 맞춰진다.

그의 외모는 초상화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그의 모습은 특이해 보인다. 턱은 뾰족하고 얼굴이 야위어있다. 눈은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날카로워 보인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부인이 세상을 떠난 뒤 그린 그림이 되어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칼빈도 루터처럼 처음부터 종교개혁가가 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순전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였다. 개혁의 물결이 파리로 밀려들 때 그곳에서 칼빈은 파리 대학에 취임하는 친구의 연설문을 써주었다. 종교개혁의 사상이 물씬 풍기는 내용이 발단이 되어 그는 파리에서 피신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로 가려했다. 그곳에 종교의 박해를 피해 온 프랑스와 영국 피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신앙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 있는 프랑스 신앙인들을 돌보고자 했었다. 망명의 길을 가다 제네바에 잠시 여장을 풀게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 시가 신앙적 열정을 불태우고 자신의 뼈를 묻게될 개혁의 현장이 될지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그때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간했었고 그의 명성은 프랑스 지역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1536년 여름 제네바에 머무르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제네바의 신앙적 지도자이며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름이 파렐(Farel)이라고 했다. 그는 제네바 개혁을 칼빈에게 제안했다. 칼빈은 자신이 목적지가 따로 있다고 대꾸하며 거부했다.

파렐이 또다시 찾아왔다. 그는 칼빈에게 하나님의 소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주가 내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이 칼빈의 마음에 꽂힌 것이다.

일종의 거룩한 저주였다고나 할까.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도 사용하여 섭리가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인데 파렐의 저주를 하나님은 그렇게 사용하셨던 것같다.


제네바 대학교 언덕 아래에 종교개혁 기념비가 있다. 대리석 기념벽으로 수십 미터에 이르는데 여기에 네 명의 개혁가가 새겨져 있다. 순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칼빈, 파렐, 녹스, 베자가 그들이다. 칼빈이 중앙에 위치해 있는 것은 확실하다.

베자는 칼빈의 제자로서 개혁을 계승하여 일했고, 칼빈 전기를 쓴 충직한 후배였다. 녹스는 제네바에서 영국 난민들을 섬기며 칼빈의 정신을 배웠다. 그는 나중에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영국 개혁주의 교회를 일으킨 지도자가 되었다.


칼빈의 개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제네바 시는 정치, 종교, 윤리 면에서 질서가 사라지고 혼란스러웠다. 수많은 정치, 종교 난민들이 자유로운 도시 제네바로 모여들어 토착 시민과 그들 사이에 갈등도 심했다.

또 당파가 난립하여 개혁은 그들의 이익 때문에 제동이 걸렸다. 개혁의 동지들 가운데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는 교회의 질서, 예배 순서, 신앙인의 생활, 권징 등을 다시 회복하려했다.


칼 빈이 설교한 제네바 시내 성 베드로 교회에 그가 앉았던 의자도 있고, 강단도 있다. 교회 첨탑에 올라가면 제네바 시내는 물론이고 제네바 호수가 바라다 보이고, 그 뒤로 알프스의 위용이 펼쳐진다.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이 거기서 그리 멀지 않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7:00).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칼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교회 밖 세상은 욕망과 정욕에 눈이 어두워 있는데, 교회 안에서도 개혁을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모두가 눈 앞의 이익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칼빈은 그의 개혁을 반대하는 정치인들, 가톨릭 교인들과 전쟁하듯 토론을 벌였다. 그는 정의의 이름으로 바르지 못한 교리를 전하는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하거나 엄하게 다스렸다.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세르베투스(Servetus)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의사이며 신학적 글을 발표한 세르베투스는 칼빈과 논쟁하려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글을 쓰고 떠들고 다녔다.


칼빈은 그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몇 차례 경고를 이단자에게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르베투스는 제네바에 몰래 숨어들어왔다.

칼빈은 거룩한 도시로 변해가는 제네바를 미혹하려는 그를 그냥 놔둘 수 없었다. 세르베투스는 체포되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칼빈이 형집행을 만류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칼빈의 이 사건을 들어 잔인한 독재자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칼빈 자신도 그의 사형에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혁명가에게는 때로 결단의 시간이 그리 많이 주어지지 않는다.


개혁의 최전선에서 동정과 연민은 때로 사치하게 보일 때도 있다.

정의는 지키기 위해 있는 것이지 폐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을 했다. 거룩한 독재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합성어처럼 보인다.

개혁자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경우 바로 그 경계에 서 있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를 인정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1538년 4월 칼빈은 타협없는 개혁을 수행하다 반대에 부딪쳐 슈트라스부르크로 몸을 피하였다. 그곳은 자신이 본래 가고자했던 도시였다. 그는 여기서 부처(M.Bucer)를 만난다. 부처는 온건한 지도자였다. 그는 루터와 츠빙글리 두 선생이 성찬식 문제로 격렬한 토론을 벌일 때 중재하려고 무척 애를 썼었다.


예배, 찬양, 교육, 학교 문제 등에 관해 고민하던 칼빈에게 부처가 실행한 방법은 그대로 모델이 되었다.

부처의 찬양 이론에 영향을 받아 칼빈은 제네바 찬송을 만들고, 부처의 학교 교육에 감명 받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하였다. 또한 하나님은 개혁에 지친 칼빈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곳에서 참한 과부댁인 이델렛드 부레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게다가 제네바 시가 그에게 다시 구원을 요청해온 것이다. 1541년 칼빈은 다시 제네바로 귀환하였다.


부처에 관해 잠시 발자취를 더듬어가본다.

개혁가로서의 부처의 명성은 북부 독일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헤센 성주의 초청을 받아 그곳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영국으로까지 부름을 받았다.

영국은 당시 헨리 8세의 악정으로 인해 종교, 정치적으로 시끄러웠다. 헨리 8세는 애인을 정부인으로 맞기 위해 가톨릭의 규정을 어기고, 급기야 영국 국교를 만들어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수장이 되었다.


헨리 8세는 결혼을 자그마치 6번이나 치루면서 수많은 충신을 죽이고 결국 자신도 광기에 사로잡혀 죽음을 맞이했다.

헨리 8세의 딸 중에서 매리(Mary)가 왕위에 오르자 국교였던 가톨릭으로 회귀하였다. 그러면서 잔혹한 폭정을 시작하였다. 개혁가 부처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지만 메리 여왕은 무덤을 파헤치게 하고 그의 시신을 화형에 처하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메리는 실각된 뒤 사형당하였다.


부처는 죽은 다음에야 그런 비극을 만났지만, 생전에 개혁으로 인해 죽임당한 지도자도 여럿 있었다.

츠빙글리는 대적들과 전투하다 목숨을 바쳤고, ㅎㅜㅂ마이어(B.Hubmaier)라는 지도자는 사형을 당했다. 그는 중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다 체포당하여 끝내 화형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의 자녀들도 모두 죽임을 당하고, 부인은 도나우 강에 빠뜨려져 익사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역사적 거사로만 우리에게 남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는 개혁 도중에 만나는 고난, 배고픔, 폭력, 가정 해체, 죽음 등 말할 수 없는 시련이 포함되어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골 1:24)이라고 말할 것이 이런 것이며, 또한 선교 여정 중에 만난 위험이 바로 이런 유의 것이리라(고후 11:26).

하나님은 성도의 죽는 것을 귀중히 보시는도다(시 116:15) 하셨는데 선하시고 의로우신 주께서 어떤 귀한 상급을 준비하셨는지 궁금해진다.


칼빈은 다시 제네바 개혁을 실행해 나갔다. 그 사이 기독교강요가 수정되어 나오고 수많은 설교, 성경 주석, 강연집이 쏟아져나왔다. 그는 목회자요 정치인으로 제네바 성시화(聖市化)를 이끌고 나갔다. 칼빈은 잘 웃지 않았다.

잘 웃을 수 없었다. 그는 개혁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감정보다 이성에 몸을 맡겼다. 칼빈은 본래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법학도 출신이라는 것도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그에게서 웃음을 뺏아간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의 곁에서 개혁의 후원자가 되어주던 아내가 하늘나라로 먼저 간 것이다. 칼빈은 아내의 사랑과 헌신에서 큰 힘을 얻었었는데 이제 절망에 떨어질 지경이었다.


여기서 루이스(C.S.Lewis)가 떠오른다. 판타지 장르가 한창 유행할 때 톨키엔의 『반지의 제왕』 곁에서 『나니아 연대기』 작가로 소개된 바 있는 그였다. 루이스는 20세기의 기독교변증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소설, 동화, 시, 문학비평, 신앙변증서 등 다양한 글쓰기를 통해 허무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신앙을 전해주려고 애썼다.


그는 50세까지 독신으로 살다가 미국에서 건너온 열렬팬인 조이 그래셤과 결혼하였다. 결혼은 그런데 불과 채 5년도 가지 못했다. 아내가 골수암에 걸린 것이다.

루이스는 온힘을 다해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데려가셨다. 루이스는 동료들로부터 신앙을 버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나님은 내 생애 마지막에 천사를 보내주시고, 어찌하여 그 행복을 시기라도 하시듯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는가.’


루이스는 이 때 “하나님은 잔인한 해부학자 같다”고 썼다. 좋은 의사일수록 환자의 아픔과 상관없이 빨리 환부를 도려내듯 하나님도 그렇게 일하신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하나님 곁에 있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으니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남편을 위로했다. 루이스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이렇게 깨달았다.

‘내가 아파한 것은 먼저 간 아내가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내가 없이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는 자기애(自己愛)적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 아내는 내 곁에서보다 하나님 곁에서 더 행복할 것이다.’ 루이스는 이후 아픔을 서서히 이겨냈다.


칼빈은 어떠했을까. 『기독교강요』라는 기독교사에 길이 남는 대작을 저술한 학자, 목사, 정치지도자, 개혁가 칼빈은 어떻게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는가.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고백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묵묵히 개혁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1564년 5월 숨질 때까지 제네바를 거룩한 도시로 만드는데 온 힘을 다했다.


종교개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고여있는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듯이 정체되면 부패하게 된다.

“구르는 돌에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모두 개혁에 비유하면 그 어떤 깨달음을 건져올릴 수 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변화이다. 변화, 변혁, 개혁, 변모, 혁신 등의 개념들 속에 들어있는 공통분모, 그 지속적인 움직임 속에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가는 다리이다.

교회는 종점이 아니다. 교

회는 과정이다.

지상의 교회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수정과 보완을 반복해 나아가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종교개혁은 바로 그런 살아있는 운동이다.

“개혁된 교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야 한다.”

변화의 힘은 그렇다면 무엇인가. 종교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여기에 있었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세상은 종교개혁을 기억하지 않는다.

세상에게 그런 기대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몫이다. 종교개혁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기억하고 그 뜻대로 개혁에 참여하라고 부르신다.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다. 복음은 계속해서 행진하고 있다. 복음의 행진이 나라들을 깨우며 개혁을 일으키고 있다.


복음의 행진이 우리나라를 깨운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섭리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복음이 행진했다. 독일, 스위스, 프랑스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의 물결이 영국으로, 네덜란드로, 미국으로, 그리고 우리나라로 전진해왔다. 이 어찌 역사의 단순한 과정으로만 생각할 것인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이루신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것은 세상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온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고 그 분께 영광돌리도록 부르신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로(solus Christus),

오직 은혜로(sola gratia).


루터가 즐겨부르던 찬송이 마음에 울려온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종교개혁가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부른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따라 가라고 하신다. 고난도 넘고, 환란도 넘고, 장애도 넘고, 시대의 미혹도 넘고넘어 하나님의 대사(大事)를 이루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칼빈이 애송하던 성구가 귓가에 들여온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는다. 말씀에 사로잡혀 담대히 나섰던 믿음의 선조들을 상상해본다. 우리의 심장에 혁명의 열기가 불타오름을 느낀다. 이것은 피를 부르는 혁명이 아니다. 창과 칼로 대적을 무찌르는 그런 힘의 혁명이 아니다.


죄 인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개혁이다

그것은 사랑의 회복이며 십자가의 회복이다.

이 회복은 가난하고 목마른 회복이며 애통과 온유의 회복이다.

이 회복은 긍휼과 청결한 마음의 회복이며 화평의 회복이다.

이 회복은 천국의 회복이며 하나님의 혁명이다.


아, 성령이시여 오셔서, 이 거룩한 개혁의 불길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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