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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주의 보스

표현주의의 선구자 보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르네상스의 주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친와 동갑이거나 두 살 연하이다.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레오나르도는 르네상스 중심지인 이탈리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반면 보스는 르네상스의 영향이 직접 미치지 못한 변방 종교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전혀 다른 환경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화가로 활약했다.

따라서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이질적인 미학이 나타난 것은 당연하다.


인문학이 발달하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지만 중세적인 성격이 여전히 농후했던 네덜란드의 환경에서 태어난 보스에게는 자연히 그런 영향 하에서 작품을 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같은 시기의 이탈리아 예술가들과 그의 작품을 비교해볼 때 보스의 작품은 미래지향적이기보다는 과거지향적인 색채가 현저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보스는 중세에 속한 화가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근대와 중세 사이에서 활약한 그의 작품에는 중세적인 요소가 다분하지만 자유분방한 창의력으로 근대를 예고하는 개성적인 표현 또한 현저하다.


중세적인 요소는 당시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어두운 면을 반영할 때 나타났으며 개성적인 표현은 비판적이고 심리적이며 창작의 요소를 정밀사실주의 양식으로 한껏 드러난 데서 나타났다.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이유는 회화에서는 전례가 없던 개인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표현주의 양식을 선보였으며 풍경을 단지 배경으로 사용하지 않고 풍경 자체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각시켜 풍경화의 장르가 가능함을 시위했기 때문이다.


풍경화의 장르가 가능함을 시위한 화가로 레오나르도를 함께 꼽을 수 있지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표현주의 양식에서는 보스가 두드러진다.

표현주의가 시와 문학에서는 이미 나타났지만 회화에서는 보스가 처음 시도한 것이 특기할 만하다.



보스가 타계하고 그의 작품이 4백여 년 동안 플랑드르와 에스파냐 회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지만 19세기 미술사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인간의 잠재의식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고부터 보스의 독특한 상상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보스가 남겨놓은 기록이 없는 데다 작품에 제작연대를 기록하지 않았으므로 학자들마다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언제 제작했는지에 대한 추정이 다르다.


작품을 심리적인 측면에서 프로이트의 말로 잠재의식의 표출로 보더라도 그의 잠재의식은 그가 생존했던 당시의 네덜란드 고유 문화와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의 작품을 해석할 수 없다.


잠재의식은 은유적 상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보통이므로 상징으로 사용된 각 요소에 대한 타당한 설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모티프와 관련된 문화적, 종교적, 회화적 선례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더라도 그의 환영 혹은 악몽의 세계와도 같은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며 이를 놓고 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한다.

그의 작품은 워낙 독특하고 기괴해서 미술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자와 심리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문학자, 인류학자, 역사학자, 심지어 소설가들까지도 그의 작품을 연구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일부 학자들은 심리적 분석을 통해 그의 작품을 잠재의식의 분출로 보고 때 이른 15세기의 초현실주의라고 말하고 있으며,

혹자는 연금술, 점성술, 마술과 같은 중세의 비의적 행위들을 반영한 것으로 보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충분하지 않아 설득력이 부족하다.



좀더 설득력을 갖춘 논문으로 빌헬름 프랭거가 보스의 작품을 중세에 존재했던 이단 종교와의 관련성을 지적한 것이 있다.

프랭거는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의 일원이었다고 주장하는 바 13세기에 출현한 이래 수백 년 동안 유럽에 성행한 이 이교 단체에 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지만 종교의식으로 성적 난교를 도입해 타락 이전의 아담과도 같은 상태로 회귀하기를 원했던 점은 특기할 만하다.

사람들은 형제회 멤버들을 “아담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프랭거는 보스가 <지상 쾌락의 동산>을 자신이 살던 도시 스헤르토겐보스의 자유정신형제회를 위해 그렸다면서 중앙 패널의 에로틱한 장면은 성적 타락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이 종파가 추구한 종교적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보스의 그 밖의 작품들도 형제회의 신념과 관련지었다.



프랭거의 분석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은 1920년대의 시대적 불안, 그리고 희망과 관련이 있다.

보스의 작품이 워낙 기이하고 선정적이며 난해하기 때문에 개방적인 성에 대한 표현으로 볼 경우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점근은 현대인들이 성적 자유를 심리적, 사회적 억압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치료의 방법으로 성의 자유를 주장한 노먼 브라운은 저서 <사랑의 육체>(1966)에서 <지상 쾌락의 동산>을 자신의 논증의 예로 꼽았다.

그러나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 회원이었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프랭거의 주장은 신빙성을 결여한다.



16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에 조예가 깊은 월터 깁슨은 저서 <히에로니무스 보스>(1973)에서 보스가 자유정신형제회 멤버가 아니라 성모마리아형제회의 멤버였다면서 이 단체는 자유정신형제회와는 달리 성모 마리아에게 헌신하는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길드로서 정통 교단이라고 주장했다.


깁슨은 보스가 성모 마리아 형제회로부터 주문받은 작품을 몇 점 제작한 적이 있으며 교회의 고위성직자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음을 지적하여 <지상 쾌락의 동산>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의뢰받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작품은 스페인의 필리프 2세의 소장품이 되었으며 그는 이 작품 외에도 보스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했다.


필리프 2세는 매우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였다. 당시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었고 이단 문제는 매우 심각했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그 진위가 가려지던 때였다.

보스의 작품이 이교 종파와 관련이 있었다면 필리프 2세가 그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스가 이교 종파에 소속했는지 아니면 정통 종파에 소속했는지는 알 수없다.

그의 작품에 중세의 비의적 행위들이 반영된 것만은 틀림없다.

이 점은 깁슨도 수긍한다.

다만 그의 작품을 20세기 초현실주의 논리로 설명하려고 한다든가 창작을 프로이트의 심리적 분석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시대착오라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중세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잠재의식은 중세 사람들에게는 확고한 믿음으로 신의 계시나 악마의 유혹이었기 때문이다.

보스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사람들의 신앙과 종교의식이 생활의 일부였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의 작품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 알 수 있다.

보스는 20세기에나 가능했던 심리학자가 아니었으며 관람자의 잠재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교훈적이며 영적으로 교감하기 위해 그렸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그의 작품에 담긴 내용은 매우 명확하며 의도적이고 사고적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은유문학 작품과 같이 언어의 뉘앙스와 은유의 교훈으로 받아들이며 눈으로 읽어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중세 종교와 민간 설화에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

시스티나 예배당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마찬가지로 <지상 쾌락의 동산>과 그 밖의 보스 작품들은 몰락하는 중세의 희망과 공포를 반영한 것들이다.



보스의 작품에는 상징적인 동물, 인물, 행위들이 있기 때문에 이것들에 대한 당시 통용된 보편적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작품 전체를 읽어낼 수 없다.

네덜란드인들의 전통 풍습과 그들의 생활화된 은유와 상징물들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작품의 문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보스가 처했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을 알고 작품에 표현된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에 대한 당시의 신앙은 물론 유머, 표현방식, 비판 등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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