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비유 해석 논리

성경에는 여러 문학의 장르가 있다.

역사, 시, 이야기, 편지, 비유 등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장르가 문학, 시,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구약에 메시아로 예언 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과 역사를 인간이 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명하고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여러 문학의 장르를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역사를 계시하신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여러 가지 장르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치는 방법 중에 가장 중요한 장르 중의 하나가 비유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비유의 수는 상당히 많으며 공관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교훈 중의 삼분의 일이 비유로 추정된다.


로버트 H. 스타인, 오광만 옮김, 「비유해석학」(도서출판 엠마오, 1993), 15. “No less than 35% of our Lord's teaching is in parable. The amounts of parabolic teaching, vis-a-vis straight teaching, in the four Gospel sources are these: Mk:16%; Q:29%; M:43%; L:52%”( A.M. Hunter, Interppreting the Parables: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14:70).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중에서 비유를 통한 가르침의 중요성을 말해주지 않는가? 그렇다. 많은 학자들이 비유의 이해와 해석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시대에 탁월한 성경해석자요, 신학자요, 목회자로 인정받는 칼빈의 비유해석에 대한 연구는 대단히 적은 편이다. 성경은 비유를 사용하여 교훈을 가르치고 있지만 집중적으로 비유로 가르치는 성경은 공관복음서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주로 공관복음서의 비유를 중심으로 해서 칼빈의 비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논리를 살펴보고자 한다.


칼빈의 비유 해석 논리

I. 비유의 의미


1. 사전적인 의미

영어사전 혹은 백과사전에서 내린 비유의 정의는 대체적으로 “어떤 진리나 도덕적인 교훈을 전할 목적으로 사용되는 짤막한 우화(allegorical story)”나 “도덕적, 영적 진리를 밝히기 위해 일상생활의 사건들, 혹은 사실들을 사용한 간단한 이야기”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서 보여 지는 특성을 보면 도덕적 영적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사실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를 통해서 도덕적인 교훈이나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비유를 정의하는 것은 비유의 전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을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2. 희랍적인 의미

비유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볼레(παραβολη)이다. 구약이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쓰여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신약 성경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점을 다 고려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신약 성경은 히브리 사상과 헬라적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희랍사상에 있어서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comparison), 예증(illustration), 유비(analogy)라는 의미로 쓰였다. 따라서 희랍사상에서는 파라볼레라는 말은 비교, 예증, 유비라는 말로 이해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살았을 당시에 예수님의 모국어는 희랍어가 아니라 아람어였다(마 6:24; 12:27; 13:33; 5:22; 10:25; 16:17; 막 9:47; 15:34; 3:17; 5:41; 14:36; 요 1: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희랍어를 읽고 쓰셨음에 대한 개연성을 말하고 있다(막7:24-30, 31f; 15:f).


그래서 파라볼레가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기위해서는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파라볼레라는 말이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파라볼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는 마샬(לשׁמ)이며 아람어로는 마슬라(malthla)라는 말이다. 주전 2-3세기에 경에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은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 성경이 70인 성경 혹은 셉투젠트(Septuagint/LXX)이다. 이 성경에서 히브리어 마샬이라는 단어가 헬라어 파라볼레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파랄볼레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마살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봐야한다.


3. 구약에서 마샬(לשׁמ)의 의미

구약에서 마샬이라는 단어는 ~과 같다(to be like)는 동사에서 유래되었다. 선지자 에스겔이 말한 “무릇 속담하는 자가 네게 대하여 속담하기(לשׁמי)를 어미가 어떠하면 딸도 그렇다 하리라”(16:44)에서나 삼상 10:12에서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לשׁמל)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내가 입을 열고 비유(לשׁמ)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시편 78:2).

이와 같이 구약에서 마샬의 의미는 속담(proverb/잠언)의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마샬은 웃음거리 말(byword),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소의 말(word of derision)을 언급하기도 한다.

로버트 H. 스타인, 「비유해석학」, 18. 로버트 스타인에 의하면 비유란 “천상적인 의미를 지닌 세상의 이야기”(an earthly story with a heavenly meaning)라고 주일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다. 이 비유에 대한 정의가 완전한 것이 아닐지라도 이해의 인식이 완숙하지 못한 어린애들에게 가르쳐진 점에서 본다면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란 세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천상적인 의미를 보여주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4. 신약에서 파라볼레의 의미

신약성경에서 사용된 파라볼레라는 용어는 의미는 속담(잠언/proverb)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παραβολη)을 인증하여 내가 말하기를...”(눅4:23) 뿐만 아니라, 파라볼레는 비유적 말(figurative saying) 혹은 은유적인 비유(metaphor)를 의미하기도 한다.

은유와 직유는 서로 다르지만 그 차이는 극소이다. 은유는 두 상이한 사이의 은근한 비교(implicit comparison)를 말하는 반면 직유(simile)는 ~러첨(like), ~같이(as), 마치 ~인 것처럼(as if), ~보이다(seems)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여 직접적인 비교(explicit comparison)를 말한다. 비유적인 말이란 이와 같은 것의 확장(expansion)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All we like sheep have gone astray)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라는 말은 직유(simile)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마16:6)에서 “누룩”은 은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수사학」(Rhetoric) 2권 20장 2항에서 직유와 은유의 차이점이 거의 없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직유도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둘 사이의 차이란 극소이기 때문이다. 만약 시인이 아킬레스(Achilles)에 대해 말하기를, “그는 사자처럼 질주했다”고 했다면 이는 직유이지만, 만약 그가 “사자”, 그가 질주하였다고 했다면 이는 은유가 된다. 직유나 은유로 표현된 것 모두가 용감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아킬레스(Achilles)를 그 의미가 내포된 사자라고 부른다(Loeb). Robert W. Funk Language , Hermeneutic, and Word of God(Harper & Row, 1960), 137. 펑크에 의하면 직유는 단순히 예증적인 것인 반면에 은유는 의미의 창조, 즉 의미가 발견되어지는 수단이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에서 직유와 은유는 극소의 차이가 있다 했다. 그러나 직유와 은유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선한 목자다”(요10:11)라는 문장과 “나는 선한 목자와 같다”에서 전자는 확장된 은유(παροιμια/ extended metaphor or metaphorical saying)이며 후자는 직유이다. 전자나 후자에 있어서 “나”는 예수님을 가르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라는 말과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같다라는 말의 의미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이 선한 목자라는 말은 요한 복음에서 보면 양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직접 버리신 유일하신 분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와 같다는 말에서는 유일하신 선한 목자라기보다는 그럴 수 있는(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 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직유는 예증적이지만 은유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게 된다.


따라서, 비유에 있어서 직유와 은유는 한 가지 점을 비교함에 있어서 직유는 직접 비교하며 은유는 은근히 비교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차이점이 있다. 비유에 있어서 직유가 명백한 비교의 차원을 넘어서 그림(picture)의 차원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이를 유사 비유(similitude)라 하며, 그림의 차원에서 이야기 차원으로 발전될 경우 이를 우리는 이야기식 비유(story-parable)라 한다. A.M. Hunter는 이야기식 비유와 유사 비유의 차이를 말하면서 유사 비유란 서로 유사한 진리나 과정을 기초로 하는 반면 이야기식 비유는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한 사람이 무엇을 하였는가에 즉 과거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다. A.M. Hunter,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 14:72. 예를 들면 잃은 양의 비유는 유사 비유이지만 탕자의 비유는 이야기식 비유이다.


5. 비유와 풍유 (allegory)

비유와 풍유는 하나의 문학의 장르라는 점에 있어서는 풍유나 비유가 비슷하다. 비유는 대체로 보다 길어진 직유의 한 형식이지만 풍유는 보다 길어진 은유의 한 형식이다. 마이클슨은 비유와 은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A. 버클리 마이켈슨, 성경해석학, 김인환 옮김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5), 301-2.



은 유 비 유하나의 주동사복수의 주동사와 시제의 혼합 직접적 비교 직접적 비교 비유적으로 사용된 말 복수의 비교점들보통 시간과 상관없는 진리 강조지시된 특수한 사물과 동일시된 심상기사가 특수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도록 사실적 경험과 비사실적 혼합시킨 이야기 심상이 왜 실재와 동일시되는지 그리고 어떤 특수한 진리가 가르쳐지고 있는지를 보여줌으로 설명


비유와 은유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용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유는 인간의 일상생활에 기초해 있고 단 하나의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풍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그 일례이다. 번연은 여러 가지 종류의 풍유를 사용하여 거룩한 순례자의 여정을 실감 있게 이야기식으로 묘사한다.


II. 비유의 목적

예수님께서 비유라는 문학의 장르를 사용하셔서 무리들과 바리새인 서기관들에게 천국에 대한 교훈을 주셨다. 문제는 성경에 여러 가지 문학의 장르가 있는데 왜 비유를 사용하여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셨는가? 여기에 비유에 대한 중요한 독창성이 있다.


1. 감추인 것을 드러냄

마태복음서 13:34-35에서 마태는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 마태의 말을 들어보자: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譬喩)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ερευξομαι κεκρυμμενα απο καταβολης κοσμου)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13:34-35). 마태는 시편 78:2절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시편 78:2-3 말씀은 다음과 같다.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 에서 비유라는 말은 히브리어 마샬(לשׁמ)이다. 시편기자에 의하면 마샬을 사용하여 감추어진 옛 비밀을 선포한다(I will open my mouth in parables, I will utter things hidden from of old)는 말이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비유란 창세 때부터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유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말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을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사실적으로 실감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놀라운 방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상생활의 사건이나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여주었다. 결국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말하거나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랑, 은혜, 심판, 보호하심, 인도하심, 통치, 주권, 부르심 등을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해 주셨다.

여기에 비유의 독창성이 있다.


2. 마음의 깨우침 (to awaken the heart of human being)

비유는 알레고리처럼 직접적인 대화방법(a form of direct communication)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법(a indirect form of communication)이다. 알레고리는 알레고리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심볼)을 청중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비유는 일상적인 것을 통해서 천상적인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갖게 해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며 일상적인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것을 새롭게 보게(seeing something in a new way)한다.

즉 비유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비유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방법이 아니라 독자의 잠재력을 발동시켜서 비유에서 보여준 대로 살도록 도전한다. 즉 결단을 촉구한다. 따라서, 비유해석이란 청중이 비유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비유에 의해서 해석되어지는 것이다.

Sallie McFague, Speaking in Parables(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77.

제자들이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비유의 말씀을 깨닫는 자에겐 비유가 의미가 있지만 비유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면 그 의미가 은폐(to conceal) 됨을 말씀하셨다(마 13:11-17). 비유를 이해하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

“들을 귀”란 은유로서 육신적인 귀를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님의 조명과 감화에 의해서 들을 귀가 생겨야 한다는 말이다. 귀가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비유를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비유를 이해할 수 있다. 말씀을 간절히 듣고자 하는 심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고 늘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하셨다.

“깨우치다”란 말은 희랍어로 수니에미(συνιημι)로서 “함께 모으다”(bring togather)라는 말에서 왔다. 신약에서는 26번이 나오며 그중에 18번이 공관복음서에 나온다(마태복음9번, 마가복음 5번, 누가복음 4번).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수니에미는 은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동사로서는 “이해하다,” 그리고 명사로서는 “영적인 통찰력”(spiritual insight)이라는 의미로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메세지와 관련을 갖고 있다.

Exeget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Vol. 3, Hortst Balz and Gehard Schneider(Michigan: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93), 307. 예수님은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에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마음으로 깨달음을 의미한다(마13:15). 마태복음 13:15 ‘눈으로 보며,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이해한다’라는 문맥에서 깨달음의 의미를 보면 하나님 말씀의 이해는 머리로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마음으로 이해하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음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깊은 이해를 의미한다. 성 어거스틴은 자신의 「참회록」에서 자신은 로마의 서사시인 버질을 마음으로 이해했다고 고백했다. 칼빈도 그의 회심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깊은 이해란 사랑의 단계에 접어들어야 한다. 관계에서도 사랑의 관계성이 가장 깊은 관계성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아주 흥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성경을 잘 알고 신학도 공부한 사람이 말하는데 성경을 읽는데 재미가 없다고 고백했다고 한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재미로 읽어야 하는가? 재미로 읽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만화책은 재미로 읽지만 성경은 재미로 읽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며, 책망을 받으며, 책망 받은 것을 고치며, 의로운 생활을 훈련 받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딤후 3:16-17). 따라서, “깨우침”이란 비유에 의해서 자신이 해석되어져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알게 된 그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깨달음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는 거울과 같이 우리 자신과 사회와 기독교 공동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3. 사실성과 생동감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청중에게 생동감을 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정말로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해준다. 가령 얼굴이 예쁘다고 할 때 그냥 예쁘다하면 얼마나 예쁜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달처럼 예쁘다고 할 때 “예쁘다”는 말은 얼마나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는가? 마찬가지로 탕자의 이야기식 비유처럼 집을 나간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식 비유가 아니고서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그렇게 사실적으로 생동감 있게 묘사할 수 있는가?


III. 칼빈에 있어서의 비유의 목적

1. 독자를 깨우침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목적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한 주된 목적은 단순히 교훈을 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독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사용한다. Jesus uses continuously parables "not so much for the purpose of instruction, as to keep the attention of his hearers awake tell a more convenient time."(CC, vol.16, 2nd volume, 128, Matthew 13:34) 여기서 깨우친다는 말은 중요하다. 진리는 설명하기보다는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독자로 하여금 진리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서 깨달아 알도록 도전하고 깨우치고 주의를 집중시킨다.


2.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줌

예수님은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진리의 말씀을 유기 된 자를 위해서는 숨기는 역할도 한다. The use of allegories and figures "tend to show that Christ was treating of the hidden mysteries of God , and to prevent his doctrine from being despised."(CC, Vol. 16, 2nd volume, 129, Matthew 13:35).


3. 독자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비유는 독자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정진하도록 자극하고 도전한다. Jesus employ parables "to excite his people by continual spurs to make progress."(CC, Vol.16, 2nd volume, 409, Matthew 20:1).


4.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비유는 직접적인 말씀보다 마음에 감동을 주는데 더욱 더 힘 있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비유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무엇을 말하는가(regarder comment)를 아는 것은 비유해석에 아주 중요하다. "figurative discourse has greater energy and force than if it had been simple: by which meant, that it is not only fitted to produce a more powerful impression on the mind, but is also more clear. So highly important is the manner(regarder comment) in which any thing is said."(CC, Vol.16, 2nd volume, 102, Matthew 13:10.


5. 거울로서 비유

비유(haec similitudo) 는 거울과 같은 역할(quasi in speculo)을 한다."This parable presents to us, as in a mirror, a lively portrait of this sentiment, that men do not live by their abundance."( CC, Vol. 16, 2nd volume, 148 Luke 12:16. CO, 23, 385). 다시 말하면, 비유는 독자가 자기 자신을 드려다 보도록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6. 비교로서 비유

히브리말로 비유라는 말은 Meshalim(מ״לשמ )로서 “비교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Meshalim signifies "comparison" applied to "weighty sentences," because comparisons generally impart beauty and energy to a discourse"(CC, Vol.16, 2nd volume), 129. 그래서 비유 이해에 있어서 비교점이 무엇인가를 설펴보는 것이 비유해석에 중요하다.


IV. 비유의 해석사

비유의 해석사를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중심으로 해서 풍유적인 해석을 시도했으며 안디옥학파에서는 문법적 역사적인 해석방법을 시도했다. 전자는 비유에서 한가지 의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 말에 있는 여러 의미를 부각시켰으며 그 일레가 성 어거스틴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의 풍유적인 해석을 들 수 있다. 후자는 문자적인 의미를 선호했다.


크리소스톰은 마태복음 설교에서 비유는 각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비유의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First Series, Chrisostom Homilies on Gospel of Saint Mathew, Philip Schaff ed.(Hendrickson Publishers, 1994), 392, 394. Matt. 18:34, 35; Matt. 19:27(The saying is parable, wherefore neither it right to inquire curiously into all things in parables word by word, but when we have learnt the object for which it was composed, to reap this, and not to busy one's self about anything further).

종교개혁에 이르러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풍유적인 해석에 반대해서 문자적인 의미를 주장하게 되었다. 칼빈은 루터보다 성경 해석에 일관성이 있으며 문자적인 해석에 더 충실했다.

칼빈은 공관복음서의 비유해석에 중요한 통찰력을 준다. 그는 포도원 비유(마20:1-16)의 주석에서 “이 비유의 내용을 상세하게 조사하려는 것은 소용없는 호기심의 발로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려고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말아야한다”고 말했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6 (Michigan:Baker Book House, 1989), 409. 번역은 로버트 스탄의 「비유해석학」 80에서 인용. 뿐만 아니라 칼빈은 비유해석에 있어서 풍유적인 해석처럼 여러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요점과 의미를 찾으라고 권면한다. 윗책, 176. 비유가 말하려는 한가지 의도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드러내도록 칼빈은 권면한다.


근대에 와서 비유해석사에 하나의 획을 그은 신학자는 아돌프 율리허(Adolf Julicher), 다드(C. H. Dodd),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이다. 율리허는 「예수 비유의 강설」(Die Gleichnisreden Jesu)에서 비유의 해석은 풍유적인 것이 아니라 비유란 단 하나의 비교점(a single point of comparison)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에버하르트 융겔은 율리허의 비유해석에 대한 요점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비유의 기본 양식은 비교화법이다.

2. 비교화법은 두 개념의 유사성에 구성된다.

3. 비유는 논리적 판단들로서 이해된 두 명제의 유사성에 의해 구성된다. 4. 이 명제들은 개념들의 관계들로서 이해된다.

5. 이 개념관계들은 비유의 구상부(具象部)와 내용부(內容部)로서 서로 구별된다.

6. 이 둘 사이에는 하나의 오로지 비교점(vergleichspunkt), 하나의 비교점 (tertium comparationis)이 있는데, 이것은 두 명제 사이에서의 판단관계 로서 구상부와 내용부 사이의 유사성을 구성한다.

7. 이 유사성(ομοιον)은 동일성(ισον)의 근소치로써 이해될 수 있다.

8. 비유는 증명수단으로 이해되면서 회의의 극복에 도음을 주며 동시에 이해력으로 이해력을 극복하는 바, 이때 우리는 분명히 판단 능력, 즉 논리적 판단들(명제들)을 형성하는 능력으로 이 이해력을 이해해야 한다.

9. 비유는 지식의 확대를 위해 이른바 인식 수단으로서 이용된다. 에버하르트 융겔, 「바울과 예수」 (이화여자대학출판부, 1990), 147-48.


율리허의 비유해석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비유의 의미를 구약 성경보다는 헬라적인 전통에서 보려고 한점이 취약점이다. 뿐만 아니라 비유에 있어서 하나의 의미를 도덕적인 면에서 조명하려고 한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다드와 예레미아스는 비유는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종말론적인 이해를 통해서 분명해질 수 있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인 이해를 의미한다. 다드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란 현재적이고 미래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사역을 통해서 이미 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전체(in its entirity)가 왔으며 그 나라는 현재적이라는 것이다.


다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근접해 있을지라도 미래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자 한 철저한 종말론이 아니라 현제에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한다. C.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New York:Charles Scribner's Sons, 1961), 35. 다드가 미래에 완성될 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이미 현재로 예수님의 사역에서 이루어졌음을 강조함으로서 미래적인 종말을 무시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에레미아스는 다드의 종말론적인 비유해석을 더 상세하게 발전시켰다.


다드와 예레미아스의 종말론적 비유해석은 비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찾는 것을 중요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비유가 말해진 삶의 정황 즉 말해진 콘텍스트를 중요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비유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키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이란 저자의 의도와 상황과의 대화가 있어야 한다. 해석이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기 때문이다.


“the reader's understanding of others belong to somehow to one's own understanding, not only of the past but of oneself."(Kathy Eden, Hermeneutics and the Rhetorical tradition,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5). 칼빈의 비유해석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다. 저자의 의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스타일로 말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V. 언어적인 접근

비유해석에 있어서 언어적인 접근은 푹스(Ernst Fuchs)에 의해서 시작된다. 푹스는 비유해석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해석이나 삶의 자리를 중요시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인 각도에서 비유해석을 시도를 한다. 언어를 통한 비유의 해석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푹스는 자신의 책 「해석학」에서 비유들을 “신약성서에서 움직이는 언어활동들로서” 설명하며 예수의 선포를 명시하는 “언어사건”(sprachgeschen)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언어사건이라는 말은 언어를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말이다.


비유와 연계시켜 생각한다면 비유는 비유의 언어양식 즉 비유의 내용(content)과 형식(form)을 분리시키지 않고 이해되어져야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비유는 비유의 언어양식에 의해서 이해되어져야한다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 가령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말해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지배를 비유로서 화제에 올린다.


비유들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가 표현되어 있고 비록 감추어진 형태로 표현되어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과 사명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청중의 응답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자신에 대한 응답이다.


푹스의 비유해석에 대한 언어 접근적인 방법은 비유해석에 새로운 점을 부각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푹스는 언어의 생명력이나 언어가 갖고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의 언어의 힘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취약점이 있다. 푹스는 일상 언어의 사용에다 성경언어를 대치시킴으로 성경의 언어를 이해하고자한다.


이것은 불트만처럼 실존상황에 성경언어를 적용시키는 것과 같다. 그렇게 함으로서 푹스는 택스트의 지평보다는 해석자의 지평을 강조함으로 성경의 객관성을 무시함으로서 주관적인 성경해석이 된다. James M. Robinson and John B. Cobb, Jr. eds., New Frontiers in Theology Vol. II. The New Hermeneutic(New York: Harper & Row, Publishers, 1964), 111-146.


VI. 칼빈의 비유해석

칼빈은 시몬 구레네우스에게 보낸 증정 서문에서 성경해석자의 주된 업무는 저자의 의도(mentem scriptoris)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The Epistle Dedicatory, John Calvin to Simon Grynaeus, A man of worthy of all honour. Ioanis Calvini Opera Exegetica, Vol. XIII, Eididerunt T.H.L. Parker. 다시 말하면 해석자의 임무를 저자의 의도를 드러내는 것으로 칼빈은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안디옥학파는 성경본문에서 theoria를 찾았고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allegoria를 찾았으며 칼빈은 저자의 의도 즉 scopus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1. 저자의 의도와 의미

에라스무스와 멜랑톤과 더불어 칼빈에 의하면 궁극적으로 성경의 의미는 저자의 의도에 있다고 봤다. Kathy Eden, Hermeneutics and the Rhetorical Tradition(Chapters in the Ancient legacy & Its Humanist Reception)(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1997), 95. 저자의 의도는 해석자로 하여금 성경의 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을 제공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본문(scriptum)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의도(mens scriptoris)를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은 텍스트에서 allegoria나 단순히 theoria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에 기초해서 텍스트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Ad Litteram, 118. theoria is derived from the literal or the historical sense


2. 저자의 의도와 문자적인 의미

저자의 의도를 찾는 것은 성령님이 텍스트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다. Ad Litteram, 120. 칼빈의 입장에서 보면 해석은 일차적으로 본문 분석이라기보다는 성령님이 성경 텍스트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이다.


Searching for author's intention means listening for the voice of the Divine author speaking through the text(Ad Litteram, 120). 듣지 않고 어떻게 선포할 수 있는가? 듣지 않고 어떻게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한 점을 잘 아시기 때문에 우리의 능력에 맞게 자신의 의도를 언어(문자)를 통해서 전달하신다.

그래서 성경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는 자연스럽고 분명하다. literal meaning of the text is to reveal verbal meaning. verbal meaning derives from lexical meaning, grammar and syntax(AD Litteram, 107). 여기서 저자의 의도와 문자적인 의미와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인 의미는 저자의 의도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의도가 문자적인 의미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3.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인 의미

칼빈에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란 자꾸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영적이고 자연스럽고 명료한 의미이다. 칼빈의 갈라디아서 4:22 주석 문자적인 의미는 사전적(lexical), 문법적(grammatical), 구문론적(syntax), 역사적, 상황적(circumstances/circumstantiae)인 언어의 의미를 포함한다.


Ad Ltteram, 107. 저자의 의도와 택스트의 의미가 일치하지 않을 때 상황(circumstantiae)을 생각해야한다. 상황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어디서, 누구의 도움으로, 어떻게, 왜, 언제 행했는가를 질문해야한다(Hermeneutics and Rhetorical Tradition), 88. 문자적인 의미가 영적인 의미이다.


영적인 의미는 문자적인 형태로 오기 때문이다. “The letter is 'spiritual' and that the spirit comes in the form of the letter"(AD Litteram, 149). 이와 같은 원리의 적용은 비유해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칼빈은 저자의 의도라는 말을 콘텍스트에 따라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VII. 칼빈의 비유해석

1. Quorsum (의도)

칼빈은 마태복음 13:24-30 주석에서 비유로부터 영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의도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 비유의 유용성을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의도(qurosum tendat Christus)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님이 밭에는 나쁜 씨가 좋은 씨와 섞여 있으며 가라지가 곡식으로부터 구별되는 날도 오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두 가지 비유가 동일한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이 비유와 앞의 것을 연결시키고 있다. 존 칼빈, 성경주석, Vol. 1, 공관복음 I, 칼빈성경주석 출판위원회편역(성서원), 518. 그러나 칼빈은 가라지의 비유의 의도는 다르다고 본다.


나는 상당히 다르게 본다. 경건한 자들이 좋은 것과 추악한 것이 혼란스럽게 혼합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싫증이나 진저리를 느끼지 않도록 주님께서는 철저한 구별을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가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 없도록 자신의 피로 이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지만 그러시면서도 교회가 자체 안에 갖고 있는 결점 때문에 노력하도록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육신의 약점들을 성도들 안에 일부러 남겨두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의 약점들을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중생된 이후에도 싸우면서 견디어 나가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자기의 적은 양떼를 모아놓으시자 마자 위선자들이 기어 들어오고 수많은 패역자들이 잠입하여 많은 약한 사람들까지 그 양떼 가운데로 들어온다.


이렇게 되어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로 구별시키신 거룩한 모임이 수많은 더러움에 의해 불결하게 된다. 교회가 그 품안에 경건치 못한 자들과 신앙 없는 자들과, 그리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고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모순으로 보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어디에서도 절대적인 순결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이 자기 소원대로 되지 않으면 열심이란구실 밑에서 많은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행동을 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분노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당황하고 자신이 가진 엄격한 표준에 맞지 않으므로 자기가 가진 신앙까지 망쳐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의도(parabolae scopus)는 단순하다고 본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 길을 가고 있는 이상 그 안에는 좋고 신실한 자들과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하고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철통같은 신앙을 지속해야한다. "In order to reap the advantage of this parable, it is necessary to ascertain the object(quorsum) which Christ had in view(tendat Christus)"(CC, 16, 2nd volume, 118. Ioannis Calvini Opera Exegetica et Homiletica, vol.23, 367.


칼빈에 의하면 가라지 비유의 의도는 신앙의 외적인 고백을 만족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순례 길에 있어서 세상의 일어나는 일이나 교회에서 일어나는 경건치 못하는 일에 실망하지 않고 인내와 굳은 신앙을 가지고 나아갈 것을 말해준다.


2. parabolae scopus (비유의 의도)

마태복음 13:24-30 주석에서 가라지 비유의 의도(the design of the parable/parabolae scopus)는 단순하다고 칼빈은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의도(parabolae scopus)는 단순하다고 본다.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상 그 안에는 좋고 신실한 자들과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하고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철통같은 신앙을 지속해야한다.” "In my opinion, the design of the parable is simply this"(CC, Vol.16, 2nd volume, 119, CO, Vol.23, 368). 여기서 "단순하다"는 말은 비유해석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는 단순하며 분명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체가 단순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해석이 어려운가? 해석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말씀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잘 못된 사고에 있다는 것이다. “The word of God, in its own nature, is always bright, but its light is choked by the darkness of men"(CC, Vol.16, 2nd volume, 102). "Still it remains a fixed principle that the word of God is not obscure, except so far as the world darkens it by its own blindness."(CC, Vol. 16, 2nd volume, 102-103). 따라서, 비유해석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복잡하고 철학적인 의미보다는 단순하고 분명한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3. summa huius parabolae(비유의 목표)

누가복음 16:1-15의 주석에서 이 비유의 중요한 목표(summa huius parabolae/the leading object of this parable)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에 우리의 관대함에 의한 결과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 이웃을 인도적이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유는 어렵고 무리한 내용을 지닌 것 같이 보이나 그 결론은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도(Christi consilium)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비유의 각 부분을 지나칠 정도로 상세하게 검토하는 자들은 훌륭한 신학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사기, 토색, 탕진, 그리고 악한 사무관리의 과실들을 선물로서 속하라고 명하고 계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에게 주신 온갖 선한 일에 대한 청지기로 세우셨으므로 어느 날엔가 계산을 해야 하는 때에 극한 엄중한 사태로부터 우리를 경감시켜 줄 하나의 방안이 있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The leading object of this parable is, to show that we ought to deal kindly and generously with our neighbours"(CC, vol.16, 2nd volume, Luke 16:1-15, 176. CO, Vol.23, 403.)


칼빈에 의하면 비유의 의도를 망각하고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는 것보다는 지나친 본문 분석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은 훌륭한 신학자가 아니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되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훌륭한 신학자란 현학적인 사람이 아니고 성경 저자의 의도를 자연스럽고 분명하게 드러내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4. Christi Consilium(예수님의 의도)

마태복음 20:1-16의 비유 해석에 있어서 예수님의 의도(Christi consilium)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는 천국의 영광의 자질이나 경건한 자들의 미래 신분에 관하여 논하고 계시지 않는다. 대신에 주님은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때때로 못 본체 하시는 것 같은 자들을 부르셔서 첫째 가는 자들과 대등하게 하시든지 오히려 그들 앞에서 오만하지 말 것을 선언하고 계실 뿐이다.


이 비유의 세미한 면을 검토해보려는 생각은 공연한 호기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려는 의도(Christi consilium) 그 이상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말한바 같이 주님의 한 가지 목적은 자기 백성을 계속 진행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자극하시는 것이었다.


태만은 항상 자신의 결과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치 목적지에 도착이나 한 듯이 경주로의 중간에 주저앉아 있다. 바울은 우리가 스스로를 격려하여 힘 있게 달릴 수 있도록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고 앞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하라고 명하고 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것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말씀을 일관하여 살피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And therefore we have nothing more to inquire than what was the design of Christ(Christi consilium) to teach."(CC, Vol.16, 2nd volume, Matthew 20:1-16, 409. C0, Vol.23, 547. 존 칼빈, 성경주석, 공관복음 II, 200.


마태복음 13:11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저자의 의도(Christi consilium)를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그러나 본문 말씀의 의미를 확실히 알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해주신 말씀 배후에 숨은 의도(Christi consilium/the design of Christ)와 이유를 더욱 상세히 알아보아야 하겠다.

첫째로 이 말씀 중에 나타난 비교는 제자들에게 주신 은혜를 그리스도께서 찬양하고 계심을 보여주려고 의도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복음이 특혜와 함께 그들에게 부여되었고 모든 자들에게 무분별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CC, Vol.16, 2nd volume, 103. C0, Vol.23, 358.


5. finis parabolae (비유의 요점)

누가복음 17:7-10 주석에서 비유의 의도는 다음과 같다고 했다.


이 비유의 요점(finis huius parabolae)은 하나님께서 그의 권한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시고, 우리를 자기의 종(nexuque et mancipio)으로 소유하실 경우, 우리가 우리의 모든 의무를 이행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해주셔야 하는 어떤 부담을 갖지 아니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의 소유인 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갚으실 아무런 빚을 지고 계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은 하루 종일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주인이 그만 하라고 명하실 때까지 계속 일하는 한 종에 관한 직유를 베풀고 계신다.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을 위해서 일해 주는, 고용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 아니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받지 못하고 일이나, 보살핌이나, 노동이나, 그 생명에 있어서까지 주인에게 구속된 신분을 가진 옛날의 노예의 신분에 못지않게 구속되어 있음을 가르치고 계신다.

"And yet the design of this parable(finis tamen huius parabolae) is perhaps different."(CC, Vol.16, 2nd volume, 194, Luke 17:7-10. C0, Vol.23, 413, CC, vol.16, 2nd volume, 133, C0, Vol.23, 376). 존 칼빈 성경주석 공관복음 II,12.


6. Christo propositum (비유의 의도)

누가복음 19:27 주석에서 비유의 의도를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이 비유의 두 번째 부분이 되는 이 말씀 중에서 주님은 특별히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게시는 것 같다. 그러나 부재중에 계시는 주님을 대항하여 반역하는 모든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의도(Christo propositum)는 그같이 두려운 보복에 관한 위험으로 이런 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이 충성스럽게 순복하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많은 사람들의 반역과 반항으로 분산되는 것을 볼 때 신자들은 큰 시험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란 중에서도 침착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재림하실 것과 재림 당시에 불경건한 반역행위를 보복하시겠음을 말씀하신다. CC, vol.16, 2nd volume, 445. CO, Vol.23, 570. 존 칼빈 성경주석, 공관복음 II, 231.


요약하면 칼빈에 있어서 비유해석은 성경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깨우침이 필수적이고 context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저자의 의도라는 말을 칼빈은 qurosum, parabolae scopus, summa parabolae, Christi consilium, Christo propositum, finis parabolae라는 말을 콘텍스트에 따라서 다른 말로 사용하지만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비유해석에 있어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VIII.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

예수님의 비유는 교훈적인 면도 있지만 그것이 비유의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했다. 이것은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를 시사해준다.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더군다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어느 한 국가의 개념에서 본다면 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국이나 미국과 같은 한 나라의 국가개념으로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희랍어로 나라라는 말은 바실레이야(βασιλεια)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선명하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는다.


바실레이야는 히브리어로 말쿠스(תוכלמ/malkuth)로서 왕도(kingship), 왕의 지배(kingly rule or rein), 하나님의 주권(sovereinity)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특히 선지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미래적인 대망으로 이해되어졌다. 이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주권자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의 성취를 의미한다. 「구석사와 하나님의 나라」, 오광만편역 (풍만출판사, 1989), 139. C. H. Dodd, The Parables of the Kingdom, 22-23.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서 시작되었으며, 예수님의 사역(기적, 복음 선포, 십자가와 부활)을 구체화되었으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적이다.


1.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말한다. 겨자씨의 비유, 누룩비유, 가라지의 비유 등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이며 현재형으로 서술한다. “for the kingdom of God is like”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희랍어 현재형이 현재이면서 현재진행도 포함한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다고 비방한 무리들에게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했다(눅11:20/ But if I drive out demons by the finger of God,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NIV; RSV; KJV:is come upon you).


여기서 임하였다는 동사는 에프사센(εφθασεν)로서 파사센(φθανω)의 부정과거(the aroist tense)로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나라가 이미 왔음을 시사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세례 요한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고 전했다(마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정말로 그가 전파한 예수님이 참으로 오실자인가를 확인하고 싶어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 사실여부를 질문할 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말함으로 대답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더라”(눅7:22)고 말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직접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도래(사29:18-19)를 암시하는 것을 예수님 자신이 행하시는 이적과 연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약속의 성취이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는 획기적인 새로운 사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침과 전파하심 속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안토니 A. 후크마, 유호준 역(기독교문서선교회, 1990), 64.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서 이미 왔으며 진행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2.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함에 있어서 그이 처음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다고 선포하고 있다. 마가복음 1:15에 “가라사대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때(καιρος)가 차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보내셨다. “때가 찾다”는 말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때가 지금 찾고 그 왕국은 지금 예수님 자신의 인격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ηγγικεν) 라는 말은 에기소(εγγιζω) 현제완료형으로서 “임박하다,” “가까이 오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번역에 있어서 현제완료형인 에기소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에기소가 현제완료형이지만 “임박하다,” “가까이 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실재적 영향은 예수님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메세지를 받아드림으로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회개하고 믿으라”는 예수님의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초청이다. 이 초청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이 영접되고 영접하고 회개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시작한다. Calvin's Commentaries, Vol.16, i, 224-225.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살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며 거룩한 순례자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살아가고 있다.

비유를 통해서 묘사된 하나님의 나라는 첫째,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유토피아나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도덕적인 성향이 아니라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인간을 입으시고 역사 안으로 오심(the decisive intervention of the living God on the stage of human history for man's salvation)에 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the proclamation of an act of God in Jesus Christ)의 선포 즉 복음의 선포에 있다. A.M. Hunter, I. “The Interpreter and the Parables,” Interpretation(Jan., 60), 16:84. 따라서,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의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해준다고 볼 수 있다.

스타인은 그의 저서 「비유해석학」에서 “현재적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 “결단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 “비유에 나타난 성부하나님,” “최후신판”으로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 지운다. 다드는 그의 저서, The 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비유(parables of crisis) 성장에 대한 비유(parables of growth)로 나눈다. 예례미아스는 그의 저서, The Parables of Jesus에서 예수의 비유의 메시지라는 제목에서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특성을 다룬다.


3.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위에서 말하는 학자들처럼 현재적이냐 미래적이냐의 논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에 맞추어져 있다. 성경에서는 로마서 1:2-4 말씀을 복음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 복음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다.

첫째, 구약을 통해서 믿음의 조상들에게 약속되어 온 “구원의 계시”에 대한 증거가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약속의 모든 축복일 뿐만 아니라 이 축복에 대한 본질적인 계시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존 칼빈, 성경주석, Vol.16, 공관복음 I. II(서울: 성서원, 1978), 42. “사망의 저주와 심판이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끔 우리의 죄를 씻어 없애주는 속죄는 그의 희생적 죽음에서만 찾을 수 있으며 칭의, 구원 그리고 영생의 행복은 그와 부활에 비탕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타락한 세상을 새롭게 하고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다는 사실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다.


” 존 칼빈, 성경주석, 42-43.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권원하시고 성령님을 통해서 거듭나게 하셔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heaven)라고 부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새로운 축복의 삶을 말하여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고 부른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인 개념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시작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마지막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역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와 주권적 통치에 있다.


그러나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현제냐 미래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축복된 삶과 영생에 있다. 여기에 내린 결론은 공관복음서의 잠정적인 결론이며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IX. 비유해석의 실재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서(마태 13:1-9; 막4:1-9; 눅8:4-8)에 나온다. 다소 뉴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공통점이란 다 같이 씨 뿌리자의 비유를 다룬다.


1) 비유의 주제

마태복음 13:2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큰 무리를 가르치셨다. 왜 큰 무리가 예수님께 모여들었는지 구체적인 말씀은 없지만 이 무리들이 의에 굶주리고 영적인 양식을 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른 것은 아니다.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주옥같은 산상수훈 주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복음을 전파했지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비방하는 바리새인도 있었다(마12:25).


예수님은 그 당시를 말하여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라고 하시며 자신의 마음 아픈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르기 때문이었다(요6:26). 이러한 무리에게 예수님은 비유로 천국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가? 비유로 가르치셨다.


호크마 주석에 의하면 씨 뿌리는 자의 주제는 “천국복음 전파와 이에 따른 반응을 보여주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고 했다. 레마 주석에서는 주제는 “땅”에 있으며 그래서 “네 종류의 마음”이라고 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령한 가르침(교리/doctrine 마땅히 믿어야할 교리)을 씨에 비교한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씨의 교리” 혹은 “복음의 교리”(the doctrine of gospel)이다. 이 교리는 아무데서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땅(잘 가꾸어진 밭

/ fertile or well cultivated soil)에서 열매를 맺음을 알려준다고 했다. Calvin's Commentaries, V.16: ii, 100.


칼빈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열매 맺는 마음에 초점이 있다. 칼빈의 주제가 말씀에서 뜨지 않는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주제를 좀더 구체화 시킨다면 마태복음 13:19에서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13:18-23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해석이다.

씨는 천국의 말씀(the word of kingdom/τον λογολ της βασιλειας)이다. 이렇게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주제는 “천국 말씀의 교리”라고 볼 수 있다.

천국 말씀은 자체가 항상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씨와 같지만, 사람 안에서 열매를 맺는 것은 인간 밭(마음)의 성질에 따라서 다르다. Calvin's Commentaries, V.16:ii, 114. 여기서도 천국 말씀인 씨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 마음의 밭이 문제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마음의 밭에 심어야 잘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가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다.


2) 비유의 전개과정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의하면 인간은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의 밭을 가지고 있다. 길가와 같은 마음의 밭, 돌밭 같은 마음, 가시나무 밭같은 마음, 좋은 밭과 같은 마음이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열매를 맺는 마음의 밭과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의 밭으로 나눌 수 있다. 본문이 제시하는 데로 나눈다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로 대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국의 말씀은 인간의 머리에 심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야한다. 그런데 말씀이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렇다면 비유에서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 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본문에서 “깨닫는”(συνιεις)다는 말의 의미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음의 밭의 문제를 아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영적인 통찰력이라고 할 수 있다.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가르쳐도 이해를 하지 못한다. 인간에게서 깨달음이란 무엇에 의해서 깨닫는 것이지 억지로 넣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 넣어줄 수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병원 의사가 처방하듯이 머리가 아프면 아스피린을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깨달음이란 그것과는 또 다른 논리를 갖고 있다.


본문에 보면 천국 말씀을 듣고 살다보면 그것 때문에 환난이나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말씀으로 견디고 이기면 신앙의 뿌리가 자라게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환난이나 핍박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믿음의 뿌리가 자라게 하는 비료와 같은 것이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다. 세상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지나친 애착심을 가지면 이러한 세상 것이 우리 마음을 오염시켜서 말씀이 자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결국 천국에서 사는 신자의 깨달음이란 고난과 핍박과 세상의 염려와 유혹에서 견디어 냄으로써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누가복음 8:15에 보면 “무엇을 하지 말라”는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말씀을 굳게 붙드는데 중점이 있다(눅 8:15/hearing the word, hold it fast in an honest and good heart).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면 배가 흔들리지만 굳게 닻을 내리면 파산하지 않은 것처럼 천국 말씀을 우리 마음의 닻으로 삼고 굳게 붙잡고 있으면 다소 어려움은 있지만 오히려 어려움이 어려움이 아니라 믿음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열매를 맺는 풍성한 삶을 살게 한다.


마가복음에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드린다고 했다. 여기서는 말씀을 듣고 받아드린다는데 역점이 있다. 말씀을 받아드린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히8:5). 그렇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마음 안에 심기워진 천국 말씀은 순종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화분에 심기운 나무는 물을 주어야 자라지만 우리 마음에 심기워진 천국 말씀은 순종함으로 자라가는 것이다.


3) 주제 비유의 적용

우리 주님은 천국 말씀을 큰 무리에게 가르치셨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이 천국에서 100배, 30배 60배 결실을 맺는 풍성하고 감격에 찬 삶을 살도록 원하신다. 그래서 비유로 가르치신 것이다. 2003년 전에 비유로 무리를 가르치신 주님은 동일하게 오늘 우리에게 천국말씀의 교리를 비유로 말씀하신다. 우리 주님의 천국 말씀의 교리를 마음에 받아드리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밭에 심기워진 하나님의 말씀이 순종을 통해서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우리는 누구나 천국에서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살고 싶어 한다.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비록이 세상은 고난과 핍박이 있으며 세상에 유혹과 염려가 있을지라도 두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우리 믿음의 뿌리를 자라게 하여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천국 말씀을 굳게 붙들면, 우리의 마음은 옥토와 같은 마음의 밭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감격과 환희가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 것이다. 깨닫지 못한 자에게는 천국의 비밀은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2. 잃은 양의 비유

1) 비유의 주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우리 주님께 나아왔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우리 주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가? 하며 원망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세 가지 비유로 가르치신다. 잃은 양의 비유(3-7), 잃은 드라크마 비유(8-10), 탕자의 비유(11-32)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그 중의 하나이다.


본문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은 당시에 죄인들로 취급받았던 사람이다. “악한 사람과 접촉도 하지 말고 율법을 가르치지도 말라”는 랍비의 가르침에 따라 천한 직업의 종사자들, 병약자, 세리 가난한 사람과는 식탁을 같이 안했다고 한다. 「레마」, Vol. 5, 누가복음 하(임마누엘, 1991), 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이라는 말은 실감이 잘 가지 않은 말이다.


어떤 주석가는 사람은 모두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올 수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또한 레마 주석을 보면 “죄인들을 영접하시는 예수”가 주제라고 한다. 이것은 죄인을 영접하시는 예수님(눅15:1-2)에 초점이 맞추고 있다.

이와 같은 주제가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주제는 본문의 초점에서 다소 빗겨간 주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주어진 비유의 동기를 무시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보면 잃은 자란 말과 찾는다, 회개라는 말이 많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다. 예수님은 눅 5:32에서 의인을 불으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온 것이라고 자신의 오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눅 19:10에 보면 인자의 온 것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고 우리 주님의 오신 목적을 말하고 있다. 본문을 잘 관찰 해보면 잃은 양의 비유를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셨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러 온 죄인과 세리들과 주님이 함께 먹고 마심을 보고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를 그들에게 주신 것이다.

눅 15:7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라는 결론 부분에서 보면 잃은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게 주신 것이라기보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본문의 주제는 하나님께 속한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회개시키려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떤 것보다도 값진 회개한 자를 기쁨으로 영접해야함을 가르쳐준다. 칼빈주석, Vol.16, 공관복음 II., 142.


2) 비유의 전개과정

예수님이 누구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주셨는가? 당시에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으려고 왔을 때 우리 주님은 그들을 영접하고 함께 먹고 마시셨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접하시고 함께 먹고 마시셨다.

그런대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원망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세리와 죄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선입견으로 그들과 우리 주님의 행동을 본 것이다. 주님의 눈으로 사람을 보지 못할 때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말이 원망하는 말일 것이다. 아무리 성격이 온순한 사람도 원망을 들으면 참기가 힘든 것이다. 모세같이 겸손이 지면에 깔린 사람도 백성들이 am리바에서 물이 없음을 원망할 때 하나님이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였는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침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민20:1-13). 그러나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원망을 들으면서도 그들에게 잃은 양의 비유를 주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기를 원망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참으로 우리 주님이 되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면 비유에서 잃은 자란 누구인가? 어떤 점에서 회개해야 하는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잃은 자란 세리와 죄인들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서기관들이다.


전자는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잃은 양이다. 잃은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와서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서 그들은 회개했다고 볼 수 있다.

후자는 어떤 점에서 잃은 자인가? 그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안했다. 그래서 잃은 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잃은 자이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죽은 자라고 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살아 있으나 죽은 자와 같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어떤 점에서 회개해야할 죄인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당시의 종교지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었다. 천하의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생명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런 자를 찾아서 회개시키며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문제점이다. 회개해야할 점이다.


말씀을 들으러 온자의 신분이 누구이든 간에 영접하고 함께 먹고 마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려는 마음이 없는 것이 그들의 문제이다.

예수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다고 했다(눅19:10).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서 헤매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나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사람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선한 목자가 아니다. 삯군 목자와 같은 자들이다.


한 마리 잃은 양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할 때 목자의 기쁨은 차고 넘친다. 목자의 기쁨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회개하고 이런 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잃은 양 비유를 주신 것이다. 이것이 천국에 사는 자들의 기쁨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말씀이 있고 회개와 용서와 기쁨이 있는 곳이다.


3) 비유의 적용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 주님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에게 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비유이다. 우리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아닌가?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잃은 양이며 회개해할 사람인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서 회개시키고자하시는 우리 주님의 마음이 없는 자가 바로 바리새인이요 서기관이다. 삯군 목자이다. 예수를 주님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길 잃은 양과 같은 것이다.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헤매시며 찾아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목자가 되어야 한다.


XI. 정리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의 나라는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왔으며, 우리 주님의 사역,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의 특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이다.


우리 주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천국비밀을 보여주셨다. 우리 신자는 천국에서 사는 천국백성이다. 천국백성은 천국말씀을 먹고 사는 자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백성으로서 살아야할 우리에게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도 있다. 그러나 천국백성으로서 천국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굳게 붙잡고 순종함으로서 살아갈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 핍박, 유혹, 염려는 어려움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를 자라게 하는 비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찬양케 하는 찬송이 될 것이다.


천국말씀은 머리에 심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심어야 한다. 심기워진 말씀이 자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은 고난을 수반한다. 주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히 8:5). 이것이 천국의 비밀이다. 천국비밀은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밀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썩지 않는 밀알이 되는 것이다.

잃은 양의 비유는 잃은 한 영혼에 대한 우리 주님의 한없는 사랑과 마음을 배울 수 있다. 주님은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구원하려 이 땅에 오셨다. 잃은 한 영혼을 찾아 회개시켜 구원하러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참 목회자요 전도사요 신자이다.


오늘날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누구인가? 한 영혼을 찾아 구원하시고자 오신 우리 주님의 마음을 배우지 못한 자이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자이다. 들을 귀가 없는 자에게 비유의 의미는 은폐된다.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존 번연은 그의 명저 「천로역정」를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로 시작한다. 그는 자기가 쓴 책을 읽고 깨달음이 없다면 「천로역정」은 신자가 천성을 향하여 가는 거룩한 순례 길에서 조심하고 피할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순례 길을 가야하는가를 제시하는 여로가 아니라 하나의 꿈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결론에서 말했다.

마찬가지로 비유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비유를 통해서 보여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천국 비밀은 비밀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상이 아니라 악마가 지배하는 지옥 같은 세상이 될 것이다.


비유해석은 비유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비유에 나오는 저자의 의도를 찾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는 단순히 본문 분석을 통해서 찾기보다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이 필수적이다. CC, Vol.20, 113 (I Corinthians 2:12 주석): ("Understanding and confidence concerning the things of Christ are not acquired in a natural way and not attained be mental capacity but{depend] entirely on the revelation of the Spirit."), 113.


비유해석은 한편으로는 저자의 의도를 성령의 내적조명을 통해서 비유에 나오는 성경의 언어를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봄으로서 비유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들어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비유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들어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로 표현되도록 적용시켜야 한다.

19th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정기학술대회 개최 공지

Nyskc Symposium '21 개최 Main Subject: “Spirituality of Nyskc Movement" Nyskc Learned Society는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입니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 주최로 열리는 제19차 Nyskc Symposium (정기학술대회)가 5월24-27일까지 미국 뉴욕을 중심해 열리게 됩니다. 이번 학술회는 Co

회복의 신학연구 학회 개론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언제 설립되었습니까? Nyskc World Mission 대표회장 최고센 목사에 의해서 지난 2003년 뉴욕에서 Nyskc Learned Society(회복의 신학연구학회)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Gardena, California 대흥장로교회(권영국 목사)에서 Pastoral Forum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인 2004년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dk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들어가는 말 본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