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영목사(GTS Prof)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 !


눅14:15-24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오늘 본문은 구원이 어떻게 이방세계로 흘러가게 되었는가 하는 과정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구원의 잔치를 배설하시고 세상 만민을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은 강권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Nyskcian들은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일꾼들입니다 우리 모두가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워 온 힘을 다해 하나님과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Ⅰ. 큰 잔치 (15-17)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식사를 하시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14:1절을 보면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 두령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두령이라고 한 것을 보면 바리새인 중에서도 지위가 높은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큰 잔치를 벌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사건건 예수님을 물고 늘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식사에 초대받아 간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초대를 순순히 받아들여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시면서 금욕생활을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시고자 기꺼이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제하셨습니다.

그런데 분위기는 마음 편이 음식을 먹으며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는 빨리 식사를 하고 물러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몸이 붓는 고창병 환자를 고쳐 주신 후 안식일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율법의 참된 정신임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2-6).

그리고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보시고 겸손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7-11).


또 예수님은 식사 초대에 숨어 있는 위선과 사치의 모습을 보시고 어떤 자를 초청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식사 초대는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서 답례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자들, 곧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초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13).

그러면 의인들의 부활시에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4). 이렇게 예수님은 식사 초대를 받아가서 단순히 음식만 드신 것이 아니라 할 말을 다 하셨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의인들의 부활과 그날에 받을 축복에 대해 말씀하시자 함께 음식을 먹는 사람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그는 자신과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예하여 그 영광을 누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자들이 하나님의 잔치를 맛볼 수 있는가를 한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큰 잔치'라고 한 것을 보면 이는 보통 잔치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2:2절에서는 어떤 임금이 황태자의 혼인 잔치를 준비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황태자는 장차 왕권을 계승받을 자이기 때문에 그의 혼인 잔치는 임금이나 아들이나 백성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잔치입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왕에게 초청을 받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축복이요 특권이었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큰 잔치'는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하신 어린 양의 혼인 잔치입니다 (계19:9). 이는 하나님께서 오랜 세월 동안 준비하시고 마침내는 독생자 예수님을 통해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요 생명의 잔치입니다.


이 잔치에 참예하는 자는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 계시록 19:9절은 말합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이 구원의 잔치는 참예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구원의 잔치에 참예하지 못한다는 것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잔치를 할 때 준비가 부족하면 참석한 사람들은 불평불만이 가득하게 되고 주인은 망신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 때는 차라리 잔치를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잔치를 잘 준비하면 참석한 손님들에게는 큰 은혜가 되고 이를 준비한 주인에게는 큰 영광이 됩니다.


주인은 잔치를 준비하되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잔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맛있는 음식을 풍성하게 마련하는 것입니다. 왕은 궁중의 일류 요리사들을 동원하여 갖가지 음식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풍성히 준비했습니다.


무엇보다 피곤한 영혼을 소생케 하고 영혼을 살찌울 수 있는 풍성한 생명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1년 전부터 각계 각층의 귀인들에게 초청장을 발부하여 미리 허락을 다 받아 놓았습니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잔치 날이 이르렀습니다.

주인은 잔치할 시간이 되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정중히 모셔 오도록 했습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그러면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는 말속에 담긴 영적인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 직후부터 인류 구원 역사를 계획하시고, 오랜 세월 동안 선지자들을 보내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셨습니다.


마침내 때가 되자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죄로 병든 각종 죄인들을 섬기시고 마침내는 인류의 모든 죄짐을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치루어야 할 죄 값을 다 치루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인간들을 죄와 죽음이 주는 무서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구원의 은혜를 기초로 일생 감당할 수 있는 고귀한 사명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는 부족함이 없이 풍성합니다. 생명도 풍성하고 은혜도 풍성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소망도 풍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모든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셨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으로 초청에 응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100%로 완전히 준비하시고 우리 인생들을 간절히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Ⅱ.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 (18-20)


주인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이미 약속을 했기 때문에 잔치에 오는 것을 거절하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다 일치하게 사양했습니다. 당시 풍습은 일단 초대를 받고 난 후 두번째 초대를 거절하면 주인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했습니다.


오늘날도 팔레스틴에서는 두번째 초대를 거절할 경우 선전포고로 간주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잔치에 오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약속을 위반했을 뿐만 아니라 주인의 인격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이 잔치에 오기를 거절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그들이 주인의 잔치에 참여치 않은 것은 고의적인 것이며 주인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들이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며 정중하게 거절하는 것을 볼 때 겸손한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주인을 우습게 여기는 엄청난 교만이 그 배후에 숨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도 결국에는 자기 의에 기초한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롬 10:3,4).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게 된 근본 원인도 바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롬 1:21). 그들이 주인의 초청을 거절했을 때 잘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했습니다. 교만은 언제나 패망을 불러옵니다.


둘째로, 그들은 주인의 초청을 소홀히 여기고 자기 일을 더 중시했습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고, 또 한 사람은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못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두 핑계에 불과했습니다. 밭은 언제든지 볼 수 있었고, 실제로 밭을 보지 않고 살 수 없었습니다.


또한 소는 언제든지 시험할 수 있었으며 소를 시험하기 전에 돈을 지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장가 간 사람은 얼마든지 부부 동반하여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핑계는 주인의 초청을 우습게 여기고 고의적으로 거절한 것임을 보여 줍니다. 만일 그들이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귀히 여겼더라면 만사를 제쳐놓고 참석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관심이 주인의 잔치에 있기보다 다른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인 것보다도 물질과 육신적인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재산을 늘이는 데 관심이 있었고 육신의 쾌락을 즐기는 데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일보다도 세상 일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일에는 관심이 많지만 영적인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육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말씀 공부할 시간을 내는 데는 인색합니다. 잔재미를 즐기기 위해 전자 게임을 할 시간은 많이 있지만 말'씀 공부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육신의 일입니까?

영혼의 일입니까?


셋째로, 그들은 특권만 누리고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사명을 수반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것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하기 위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권을 누리기는 좋아했지만 사명을 감당하기는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는 세계 만민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이즘에 빠져 이 축복을 감당치 못했습니다. 그 때 그 축복은 이를 감당할 만한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갔습니다.


Ⅲ. 강권하는 사랑 (21-24)


21절을 보십시오.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주인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잔치는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잔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과 저는 자들은 세리나 창기와 같이 율법적으로 정죄 받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하여서 밭을 살 수 없고 소를 시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이 죄만 지는 자들이기 때문에 자기 의가 없고 겸손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본래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로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방적인 은혜로 초대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임한 말할 수 없는 은혜였습니다.


주인은 빨리 가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구원의 잔치는 결코 연기될 수 없고 시급히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 줍니다. 구원의 복음은 영적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빨리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가까이 있는 친구가 복음을 알지 못하고 갑자기 병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것을 볼 때 그에게 빨리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에게 지체치 않고 빨리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며 예배회복을 강권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명한 대로 순종하여 많은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그래도 오히려 자리가 비었습니다. 이때 주인은 종들에게 무엇이라 명했습니까? 23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여기서 길과 산울 가는 이방세계를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은 구원의 소식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로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우상숭배를 하며 영적으로 흑암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는 전혀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이르게 되었습니다 (롬11:11). 하나님은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롬 10:11,12).


사실 우리도 본래 이방인으로서 이 은혜를 받을 아무 자격이 없는 자였습니다.

하나님도 없고 약속도 없는 자들로서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 풍속을 좇고 불순종의 영을 받아 진리를 거스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엡 2:1-5).


이 비유에서 우리는 주인의 안타까운 심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길과 산울 가로 가서 사람을 데려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을 강권해서라도 데리고 와서 내 집을 채우라고 하십니다.

강권하라는 말씀은 폭력을 사용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사랑과 이성으로 설득해서 데려오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영적무지 때문에 구원의 잔치에 오기를 꺼려합니다.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지 못합니다. 또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잔치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죄악된 본성이 있고, 오랫동안 형성된 죄악된 습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두움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죄의식과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강한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스스로 빛 가운데로 나올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강권해서 데려와야 합니다.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에는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인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도 멸망 받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벧후 3:9).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잔치에 참예하여 영생을 맛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미지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열이 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들을 보면 몸에 열이 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덧입게 되면 몸에서 열이 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덧입고 몸에서 열이 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국에 최초에 선교사로 온 아펜절러는 열정에 불타는 사람이었습니다. W.E.G.라는 분은 아펜젤러를 가리켜 "사자처럼 용기 있고, 여인처럼 부드러우며,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는 사람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네비케이트의 창시자인 도슨 트로트맨도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휴더트 미첼은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도슨은 투지가 넘치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살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에는 언제나 힘이 넘쳤습니다.


도슨은 신학, 헬라어, 히브리어 등을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었으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교제를 통해 그의 믿음을 키워 갔고, 이것이 그가 바로 쓰임을 받게 한 이유였습니다." 그의 삶의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과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에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열심히 암송했는가를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하루 한 구절 암송을 목표로 해서 천 날 동안 천 구절을 외었습니다.

나에게 100% 달성을 위한 강한 열망이 없었다면 결코 이 일을 해 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역을 처음 시작하던 날 당시 우리의 목표는 하루에 한 영혼을 만나고, 하루 한 구절씩 암송하며, 하루 한 시간씩 개인적으로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열정을 가지고 이것들을 실천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956년 6월 18일에 물에 빠진 한 소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어 그 소녀가 구조될 때까지 물속에서 그녀를 떠받치고 있다가 소녀가 구출되는 순간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복음역사를 감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13,14절은 말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는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결코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웠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불타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갈수록 이 열정이 식어지고 미지근해졌습니다.


말씀 공부하는 것도 미지근해지고, 기도하는 것도 미지근해지고, 찬송하는 것도 미지근해지고, 전도하는 것도 미지근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미지근한 신앙입니다.


계시록 3:14-1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 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 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우리는 때로 별 소원도 없는 사람을 억지로 데리고 오는 것이 너무 비인격적인 것이 아닌가?

꼭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볼 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신사적으로 하셨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Nyskcian의 끈질긴 사랑 때문에 마지못해 말씀공부를 해 주다가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어떤 분은 Nyskcian이 너무 귀찮게 예수님들 전도하면서 Nyskc Conference에 참여해 보라고 강권하기에 할 수 없이 참석하였다가 완전히 변화를 받아 에배가 회복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의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두움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말씀 잔치에 참석하기보다 죄의 쾌락을 즐기고 싶습니다.

노는 데 쓰는 돈은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말씀 잔치에 참석하는데 드는 비용은 돈이 있어도 내기 싫습니다.


그러므로 강권하여 데려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격적으로 대한다고 하여 양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파멸하도록 버려 두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영적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은 거리에서 갈 길을 몰라 방황합니다.


천국 잔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 쾌락을 좇아 살다가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이들은 영적으로 중환자와 같습니다.

중환자는 스스로 병원에 나아올 수 없습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병원에 나아올 수 있습니다. 중환자를 그냥 내 버려 둔다면 죽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말씀 잔치를 허락하셨습니다.

Nyskc Conference는 생명을 주는 구원의 잔치입니다.

Nyskc Conference는 예배회복을 위한 천국의 잔치입니다

세상에 많은 잔치가 있지만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잔치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에게 진정한 신앙생활의 회복을 위한 잔치가 얼마나 있습니다

대부분이 일회용 이벤트요 지속적이고 연속적인 훈련과 배움을 통하여 회복을 일으킬 잔치가 어디 있습니다


예배회복을 통하여 교회와 나라와 가정이 살아나는 잔치가 어디있습니까? 우리에게 참다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주고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잔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를 괴롭히는 죄 문제를 해결해 주고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잔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 천국 잔치에 하나님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중환자들을 초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생명이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이 땅에서 범사가 잘되는 회복의 역사가 있어나는 가운데 충만한 삶을 살아가가는 축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예배가 회복된 분이라면 복음을 강권하시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Nyskc Conference는 이처럼 여러분을 회복시킵니다

여러분을 강권에 신앙을 갖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또한 예배회복을 통하여 강권에 신앙을 가진 분들은 이웃들에게 강권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Nyskcian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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