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거짓 회개가 낳은 변화는 마지 못해 행한 변화이다.
거짓 회개가 낳는 변화는 부분적이고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강요되고 강제된 마지못해 이루어지는 변화이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의 변화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변화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죄를 향하는 성향이 없다. 그 심령 안에서 성경의 약속이 성취된다. 그는 "지혜의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잠 3:17)는 말씀의 참 뜻을 알게 된다. 그는 구세주의 멈에가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는 것을 실제로 체험한다. 하나님의 계명들이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임을 느낀다. 하나님의 계명이 금보다도 정금보다도 더 사랑스럽고, 꿀보다도 더옥 달콤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거짓 회개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율법적인 회개요, 사랑의 소산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말미암는 회개이다. 그것은 이기적인 회개요, 죄로 인한 불순종에서 순종으로의 자유롭고 자발적이며 진정에서 우러나온 변화가 아니다. 우리가 거짓 회개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자신이 죄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 때문에 피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죄를 혐오하기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에 거리낌이 되거나, 우리의 영혼을 잃게 될까봐, 또는 우리의 소망이나 명예를 잃게 될까 두려워 죄를 피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말씀들을 근거로 한 의무를 행하도록 떠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에 대하여 변명하고, 의무를 회피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 방식에는 큰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그들이 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감히 거역하여 달아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없다면, 그들은 죄를 범할 것이다. 그러나 참 회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위대한 사랑의 법에 위배되는 일을 혐오하며,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하여 명백하게 명하셨든 명하지 아니하셨든 간에 당연히 그것을 피한다. 그런 사람이 독한 술을 마시거나 만들거나 파는 일을 그만 두는 데에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필요하지 않다. 그는 그것이 위대한 사랑의 법에 거슬린다는 것을 알며, 그것을 진정으로 혐오하며,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도둑질하거나 다른 혐오스러운 짓을 행하지 않는 것처럼, 더 이상 그와 같은 일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동료들이 자기를 핍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릇된 일을 전혀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한 사람은 당연히 죄악된 일을 미워하며 행치 않을 것이다.
(6) 위선적인 회개는 독선을 낳는다.
위선적인 회개를 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의 유일한 구세주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구원을 위하여 그를 믿고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실제로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보다는 자기의 행위의 변화를 의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 본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기대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의 속죄보다는 자신의 변화를 더 강조하며, 그것에 희망의 토대를 더 강하게 둔다. 그는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자신의 독선을 꾸며 맞추는 것이다.
(7) 위선적인 회개는 거짓된 안전을 기대하게 한다
위선적인 거짓 회개를 한 사람은 자기가 행한 세상적인 근심이 참된 회개라고 생각하며 그것에 의지한다. 그들은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느껴본 적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죄 때문에 근심하였으므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당연히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근심한다. 그런 다음에는 안심하여 더욱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충심으로 의지하고 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8) 거짓 회개는 마음을 완악하게 한다
이처럼 세상적인 근심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근심을 한 횟수에 비례하여 마음이 더 완악해진다. 그가 뉘우치는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고서 마음이 깨지지 않는다면, 감정의 샘은 점점 더 고갈될 것이며,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진정으로 회개한 참된 그리스도인을 살펴보자. 하나님 앞에서 그를 깨지게 하기 위하여 그에게 진리를 증거해 보자. 그는 그때마다 점점 더 부드럽고 아름다워지며, 더욱 쉽게 감동을 받고, 자극을 받으며 용해되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고 영원히 그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 안에서 깨질 것이다. 그의 마음은 깨달은 것을 뉘우치며 사는 데 익숙해진다. 그는 어린 아이처럼 쉽게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유순해진다.
여기에 큰 차이가 있다. 부흥회를 통해서 세상적인 회개만을 한 교회나 개인은 잠시 죄에서 깨어나 회개한다고 크게 소란을 떨고는 다시 냉담해진다. 이런 행위가 거듭되면, 죄에서 완전히 깨어나기가 더욱 어려워지며, 점차 지옥의 연자맷돌처럼 굳어져서 마침내 어느 누구도 그들을 다시 소생케 할 수 없게 된다. 참된 회개를 한 교회들과 신자들은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계속적인 소생을 경험한다. 그들은 소생하도록 부르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즉시 빛을 내고 타오르며, 그 일을 할 준비를 갖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러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점점 더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온화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이 차이는 빛과 어두움의 차이처럼 크다. 우리는 모든 교회들과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서 이러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한 소생을 거듭 체험한 후에도 신앙을 비웃고 욕하는 죄인들에게서 이 원리가 예증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머리 위에 자비의 하늘이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주의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교회들과 그 지체들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참된 회개를 한 것이 아니라면 온갖 새로운 자극도 그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고, 그들이 진리에 이르는 것을 더욱 어렵게 할 것이다.
(9) 거짓 회개는 양심을 마비시킨다.
거짓 회개한 사람은 진리가 그 마음을 비출 때 처음에는 번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이 뉘우치는 것처럼 깊이 뉘우치지는 않는다. 참 그리스도인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자마자 곧 평안해진다. 그리고 뉘우침이 거듭될 때마다 그는 점점 더 죄를 경계하게 되고 온화하며 주의깊게 된다. 그의 양심은 눈동자처럼 예민해져서 악의 모습만 보아도 치를 떨게 된다. 그러나 죄에 대한 진정한 거부를 낳지 않는 거짓되 근심은 마음을 전보다 더 완악하게 하며, 달구어진 쇠처럼 양심을 점차 무디어지게 한다. 이런 근심은 사망을 낳는다.
(10) 거짓 회개는 소망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한다
거짓 회개한 사람은 자신의 변화나 근심, 그 밖의 다른 것에 의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 즉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매일 수고하는 신뢰를 이루지 않는다.
(11) 거짓 회개는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이런 회개는 분명히 후회를 낳는 회개이다. 거짓 회개했던 사람들은 전에 느꼈던 깊은 회개의 감정을 점차 부끄러워 할 것이며, 그것에 대하여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혹시 그것에 대하여 말한다 해도 경멸적이고 냉담한 태도로 말할 것이다. 아마 그들은 부흥회 때에는 매우 열정적이었으며, 제일 열심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부흥회가 끝나면 옛날로 다시 돌아가, 자기가 열심을 냈던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회개했다는 사실 자체를 후회한다.
그런 사람들은 죄 고백을 위한 속죄의 자리인 앞좌석에 나왔던 것을 부끄러워할 것이다. 고조된 부흥의 순간이 지나가면, 그들은 지나치게 열성적인 것을 반대하며 신앙에 있어서 좀 더 냉정하고 일관된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행하는 것은 나중에 후회할 회개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부흥회에 참석하여 회개하고 개종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그 고백의 근거였던 표준들과 수단들, 그리고 교리들을 거역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다. 참 그리스도인은 결코 회개를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부흥회 때에 느낀 고조된 감정을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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