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주일학학교의 진정한 위기는 무엇인가?
어느 때부터인지 “주일학교가 위기이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수적인 성장의 멈춤을 뜻하고 있다. 즉, 우리 어린이들이 예전처럼 교회에 잘 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터넷, 컴퓨터 시대에 어린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회학교의 어린이들에 감소현상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성경학교에 어린이들이 잘 참석하지 않고, 총동원전도주일을 해도 수백명씩 모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원인”에 따른 결과이지 위기의 실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위기의 실체는 무엇인가?
지금 교회에 나오고 있는 어린이들조차 쉽게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위기이다.
지금 교회에는 나오고 있지만 언젠가는 떠날 어린이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이 위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교회에 나와 앉아 있으면서 절대자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 결과 예배시간에 떠들고 장난하고 왔다 갔다 하기 일쑤이다.
기도시간에 눈뜨고 할 일 다 한다. 모든 게 자기 맘대로 인 어린이들........그들의 모습에서 어떻게 진지한 예배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을 감각하지 못하는 어린이들, 하나님 의식이 전혀 없는 어린이들, 그들 속에서 우리는 무슨 기대할 수 있으며 이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어린이들에게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신앙의 자세 혹은 예배의 자세를 배우지 않았거나 혹은 은혜가 없는 결과 때문이다.
그렇다. 단적으로 주일학교의 위기는 교회학교의 존재이유인 구원을 어린이들에게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들이기에 자세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또 성령에 충만할 수 있도록 기도에 힘쓰도록 가르쳐야 한다
애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떠들고 장난하고 딴 짓 하는 게 아니라 신앙에 기본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성경공부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문제는 그와같은 교육의 부제이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배우면 당연히 은혜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많은 지도자들은 어리다는 이유하나로만 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
예컨데 무 은혜, 무 체험 속에서 아무리 전도를 많이 하면 뭐하는가?
하는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
교회에 와서 장난만 치고 떠들고 놀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름성경학교를 거창하게 열면 뭐하는가?
여름성경학교가 끝나면 뒷문이 휭하고 열려 다시 제자리걸음인데 말이다.
총동원주일을 통하여 어린이들이 교회에 가득 차면 뭐하는가?
어린이들의 마음이 십자가의 보혈로 물들지 못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간다면 말이다.
이 모든 원인은 교회가 교회의 본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설도 좋아졌고 교재도 좋아졌고 교사의 지적 수준도 좋아졌는데 교회의 본질을 놓쳤기에 이렇게 안타까운 한국교회 교회학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학교는 교육공동체, 교회는 예배공동체
교회는 학교와 차별된다. 학교는 어린이의 혼을 책임진다면 교회는 어린이의 영을 책임지는 곳이다. 영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코에 불어넣으셨던 생기, 프뉴마이다. 하나님과 통하는 채널이다.
주일학교는 영을 책임지는 곳이다.
영을 책임진다는 것은 “어린이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시켜야 한다” 는 것이다. 지옥을 향해 정처 없이 걸어가고 있는 어린이의 발걸음을 천국 길로 옮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 거듭나게 해야 할 책임이 교회학교에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이유는 바로 영혼구원이다.
지옥을 향해 가던 인간을 천국으로 전환시키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이 보다 더 앞설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 주일학교에 출석하고 있는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구원의 확신이 없다.
이것이 위기의 실체이다.
우리 주일학교에 나오고 있는 어린이들이 누가 은혜을 체험하여 자발적이며 감동적인 신앙생활을 누리고 있는가.
신앙은 언제부터 싹이 트는가.
구원의 감격이 넘쳐흐르고 예수님의 존재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은혜를 받을 때가 아닌가.
진정으로 주일학교의 위기를 통감하는 주일학교만이 그 위기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살아날 수 있다.
지식적인 믿음은 시험 앞에서 쉽게 넘어진다.
베드로가 하인의 질문에 눈앞에 계신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하듯 말이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체험 후 베드로는 로마의 창과 칼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하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의 행복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사들이 진정으로 주일학교의 부흥을 원한다면 이 위기를 타개하면 된다.
교회는 예배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에 매진하면 된다.
할렐루야! 언제부턴가 꺽이지 않는 무릎을 꺽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온 교사가 기도로 한 목표, 한 꿈을 꾸며 교회학교의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어린이가 5명이든 50명이든 5천명이든 반드시 예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요6:63) 거듭나면 모든 것이 다 저절로 된다.
어린이 말씀 기도 찬양으로, 예배 회복으로 교회학교를 살려야 한다
찬양의 틀을 세우라
현재 한국 주일학교의 찬양수준은 매우 애석하기 짝이 없다. 찬양이라기보다는 “싱얼롱”식의 함께 노래 부르기조차 잘 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래 다음이 찬양이다. 노래도 안되는데 무슨 찬양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찬양을 잘하는 교회학교가 되게 할 수 있겠는가?
1)찬양담담교사 임명
교사 수급의 문제가 어렵긴 해도 “찬양담당교사”를 선임해야 한다. 사모님이 직접 담당하시든 교사 중에서 선발하든 은사가 있는 한 분을 세워라. 그리고 훈련시켜라. 자신이 무단히 노력하게 기회를 주라. 찬양은 가창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학벌로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직책이기에 그렇다.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 예를 들어보자.
현재 검단중앙교회 교육전도사인 ‘신영옥전도사’는 3년 전에 그 교회에 부임하면서 ‘몸찬양단’을 조직하였다. 이제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당사자인 어린이들은 한 어린이가 100여곡의 몸찬양을 암송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행복한 어린이들이 되었다.
2)찬양이 살아나는 두 가지 지름길
첫째, 선곡의 비밀 : 곡속에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주님, 아버지‘의 내용이 하나라도 들어 있지 않으면 과감히 빼 버려라.
‘무슨 곡을 부를까?’ 는 좋은 찬양의 시작하는 문이다. 아무리 반주가 좋고 몸찬양이 좋아도 선곡에서 실패하면 그 시간은 하나님의 외면을 받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둘째, 암송의 비밀 : 짧고 쉬운 곡부터 숙련하라.
곡이 길다고 저절로 찬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렵고 힘든 곡이라고 찬양이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수님 만나고 싶어요”를 시작하여 “예수 가장 귀한 그 이름”, “예수 샤론의 꽃”, “좋으신 하나님” 등등 주옥같은 곡들을 암송하며 부르라.
기존 찬송가에서 놓치지 말 곡들:144, 214, 300, 411 등등
이제 시간문제이다. 찬양은 불가능을 가능케 했고(수6:1-21),찬양은 묶인 것을 풀어주며(행16:25-34), 찬양은 인간의 본분이다.(사43:21) 어린이들도 맛(?)을 보지 못해서 그렇지 일단 찬양의 맛을 느끼기 시작한다면, 뜨거운 한 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정신없이 먹듯이, 바람 몰아치는 겨울밤에 군고구마를 달콤하게 먹듯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붙잡혀 그 분 때문에 기뻐하고 그 분 때문에 울고 그 분 때문에 살맛을 찾는 생동감 있는 신앙생활을 누리게 된다.
사실 어른보다 어린이가 더 맑고 깨끗하기에 더 깊이 더 폭 넓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
찬양은 하나님과 잘 통하는 길이다.
어떤 어린이가 찬양하며 왔다 갔다 하는가?
어떤 어린이가 찬양 중에 장난을 치는가?
어떤 어린이가 찬양 중에 딴전을 피우는가?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보고 계시고 나의 찬양을 기뻐 받으시고 복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어린이는 말이다.
찬양을 잘하는 주일학교, 결코 꿈만은 아니다.
희망사항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찬양의 틀을 어서 세우라. 성령님께서 역사 해 주실 것이다. 교회학교가 변화될 것이다.
2. 기도의 틀을 세우라
주일학교의 위기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기도를 너무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상하리 만치 기도를 못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기도가 잘 안되는데도 그 처방을 내리지 못하는 교사들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스스로 안위한다. “아직 어리니까 그럴꺼야. 조금 있으면 언젠가 잘하겠지!” 언젠가 잘되겠지 하는 사람들 치고 정말 잘하는 경우가 있는가?
기도 잘하고 싶습니까”
“큰 소리로 아멘 해 보세요”
“기도를 잘하고 싶어요?” “아멘”
그렇다. 교회에 출석한지 오래된 아이들도 자신 있게 기도를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교회학교의 현실이다. 아무리 성경을 잘 알면 뭐하는가? 아무리 아브라함을 알고, 모세를 알고, 베드로를 알면 뭐하는가. 기도를 못하는..... 오히려 그런 잘 몰라도 기도를 잘하는 어린이가 장래에 소망 있는 인물이 된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어린이들이다.
첫째, 기도를 가르치라.
기도는 기도자의 사모함과 훈련의 결과이다. 할수록 더 잘되는 것이 기도이다. 그런데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기도를 안 가르친다. 그 결과로 어린이들이 생명력이 없다. 예배 시간에 잘 떠든다. 프로그램이 좋지 않아서 어린이들이 떠드는 것이 아니라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떠드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라.
(1) 확실한 가르침
1) 기도의 정의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사실을 가르켜 주어야 한다.
2) 기도의 자세 : 모든 것은 자세가 있다. 식사하는 것, 잠자는 것, 일하는 것, 기도도 자세가 있다. 일단 두 손 모으고 고개 숙여야 기도가 된다. 이것을 지나치면 기도가 안된다. 딴전을 피우게 된다. “두 손을 예쁘게 모아 정성스럽게 가슴 앞에 모으고 겸손히 예수께 감사하듯 고개를 숙이세요“라고 분명하게 기도 자세를 안내한다.
3) 기도의 순서
기도는 순서가 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순서도 없이 중언부언할 수는 없다.
기도순서1. 하나님을 부르세요.(하나님, 아버지, 고마우신 하나님 등)
기도순서2.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세요.(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절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기도순서3. 용서를 구하세요.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내 맘대로 살았어요.
내 고집대로 살았어요. 엄마에게 대들기도 잘 했고
거짓말도 잘했어요. 이 시간 예수님의 피로 다 씻어주세요.)
기도순서4. 부탁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절 사랑하시죠?
절 좀 붙잡아 주세요. 절 좀 인도해 주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기도순서5.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2) 기도훈련
첫째, 기도제목을 분명히
기도는 관심과 연결된다. 어린이들의 관심, 요구, 바램을 지도자는 확인해야 한다.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 회개기도? 왠지 어울리지 않죠. 그 땐 지혜를 구하고 믿음을 구해야 어린이들이 바짝 달려들어 기도할 수 있다.
어린이들에겐 분명한 기도제목을 제시하면 제시할수록 기도문이 열리게 된다. 갑자기 기도 줄을 잡게 된다. 주일학교에 나오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에겐 아래와 같은 공통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1.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함.
2. 기도를 잘하고 싶어 함.
3. 축복을 받고 싶어 함.
4. 지혜를 받고 싶어 함.
5. 은혜를 받고 싶어 함.
6. 큰 꿈을 갖고 싶어 함.
7.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함.
8. 천국 가고 싶어 함.
9. 나쁜 일에 빠지고 싶지 아니함
10. 죄짓고 싶지 아니함.
11. 막살고 싶지 아니함.
둘째, 다양한 기도의 접촉점을 찾으라.
금식기도 철야기도 단독기도 합심기도 공중기도
3.예배의 틀을 세워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4:24)
예배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학교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어린이들이 예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간식이나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나 선물에서 은혜를 받으면 안된다. 그것은 생명을 주지 못한다. 그것이 생명을 주는 도입부는 될 수 있지만 그것에 목매다가는 예산낭비만 하고 만다.
예배에 성공하기 위하여 최선의 준비가 요구된다. 선생님들 스스로가 이 분위기를 창출하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아무런 기대 없이 기도 없이 노력 없이 그 어떤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다. 진정한 영혼구원과 어린 영혼을 사랑한다면 지금의 교회학교 예배 분위기를 확 뜯어 고쳐야 한다.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 속히 장난분위기에서 은혜분위기로 바뀌어야 한다.
1) 예배의 의미
하나님의 백성은 예배를 통해 영적 체험에 이르고, 그리고 그 영적 체험은 다시 예배에 대한 더 큰 갈망으로 이어집니다. 예배의 대상은 우리를 예배에로 이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와 씨름하며, 그의 환심을 사려고 애쓰고, 그에게 간구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다가갈 수는 없고 다만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꺼이 다가와 주실 뿐입니다. 예배란, 개인에게든 공동체에게든, 살아 계신 하나님의 현존과의 강력한 만남입니다.
(1) 진정한 예배란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인이 예배하는 것은 성서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독교인들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의 핵심요소는 말씀선포, 자선, 주의 만찬, 기도 등이다.
(2) 기도(요 14:14;요 15:16), 설교, 가르침(행 5:41), 그리고 자선(마 18:5; 행 3:6)은 모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로마서 8장에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말을 해석하면서,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예배 역시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3) 칼빈은 예배를 성령의 역사로 보았기 때문에, 예배는 단순한 인간의 행위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a Eliade)가 "의식을 넘어선 호소(transconcious appeal)"라고 불렀습니다.
(4) 기독교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놀라운 구속행위에 신앙 공동체가 집단적으로 응답하는 행동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예배 때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5) 예배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edifying)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현존과의 만남을 통하여 '성장'하여야 합니다. "유익을 주는" 예배는 기독교인을 모이게 하되,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바치도록" 그들을 파송하기 위함입니다
2) 예배의 형태
(1) 개인적인 예배
우리는 어떻게 예배드려야 하는가? 개인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고 공중적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예배는 단순히 주일날 교회에 와서 드리고 마는 주 1회 혹은 2, 3회의 행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는 거룩한 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는 예배와 개인의 삶이 분리 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2) 공적인 예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함께 예배하기 위해 모여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예배의식은 매우 단순한데, 초대교회의 규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 교제, 기도, 떡을 뗌(애찬), 혹은 성만찬의 네 가지가 포함되었습니다(행 2:42). 이제는 모든 신자들이 제사장이 되었고(벧전 2:9 ;계 1:6),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희생이 유일한 제단이었습니다(히 13:10). 어떤 거룩한 도구들(구약시대에 있었던, 번제단, 떡상, 분향단 등등)도 필요치 않게 되었습니다(요 4:20-23).
하나님의 백성은 마치 연주회의 청중 마냥 목회자가 집례하는 예배를 단순히 관망하는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합니다. 성도들은 예배드리기 위하여 모인 즉시 거룩하다고 인정받는 동일한 사람들이 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권세 있는 자나 비천한 자나 모두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공동예배자일 뿐입니다. 그들은 함께 모일 때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미리 예배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며 일단 한자리에 모이면 곧바로 예배에 들어가기 위한 마음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얻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느냐 입니다. 예배를 끝내고 나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사람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3) 가정예배
이것은 아마 가장 오래된 예배 형태일 것입니다. 한 집안의 가장(家長)은 가족들을 인도하여 하나님께 찬양과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아니라 먼저 가정에서 가르치고 실천하게 해야 말씀이 어린아이의 심령에 새겨지고 손과 발을 통해 행동으로 나오게 됩니다. 가정의 영적인 부흥은 가정예배의 회복에서 일어납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전에서 소리내어 예수님을 찬양하자,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마 21:16)라고 하셨습니다.
3) 예배의 요건
(1)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피로써 씻음을 받지 않은 채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히 10:19). 피의 제사를 제쳐두고 우리 자신의 공로를 의지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 하는 것은 "가인의 길"로 불리며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유다서 11절; 창 4:3-5). 비록 접근하는 형식이 올바르다 하더라도 삶이 불경건하면 그것은 외식된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마땅히 하나님께서 거절하실 것입니다(사 1:11-17).
(2) 하나님과의 교제
우리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으려면 예배에 앞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고전 11:27-32).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분의 선하심에 감사드리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심령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부정함과 죄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단절시킵니다.
(3)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말씀 속에 자신에 대해 계시하신 바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러한 지식 안에서 성장하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입니다(골 1:10). 우리의 내적 존재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은 번제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중요합니다(호 6:6).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알 때 우리는 실로 독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고후 4:6; 엡 4:13). 그분은 놀랍고 영광스런 주님이시며, 우리는 우리의 찬양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그분에 관해 더욱 더 많은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4) 하나님께 대한 감사
주 예수님은 두 명의 빚진 자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누가 그분을 가장 사랑하는 자인가에 대해 교훈해 주셨습니다(눅 7:41-47). 이 이야기의 요지는 가장 많이 용서받은 사람(큰 죄인)이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받은 축복을 헤아리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분 안에서 즐거워한다면 그 때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시 24:3).
4) 예배를 위한 제안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영적인 행위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예배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반면 악한 영들도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덤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세기에 보면,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이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짓는 농부이었기에 그가 지은 것 중 귀한 곡물을 예물로 삼아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벨은 목동이었기에 양의 첫 새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벨의 제물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물을 드렸기에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의 예배란, 예배 드리는 그 순간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이 예배시간에 드려 집니다. 나의 평상시 삶이 뒷받침되는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기도, 찬양, 예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받으십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5-7)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창 4:4)
이 사실은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실패할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배당에 나와 드리는 예배는 물론이고 평상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공적인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믿음이 자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키게 임하게 됩니다.
5) 예배의 종류
주일 낮 예배 : 낮에 드리는 예배. 낮에 드리는 대예배라 합니다.
주일 오후(저녁)예배 : 요즈음은 저녁예배 대신에 오후에 드리는 경향, 또 집에서 각 가정에서 가족 중심의 예배를 드리도록 권장하고 있습니다.
수요예배 : 수요일 오전이나 밤에. 성경공부나 기도회로 모입니다.
금요 심야 기도회 : 금요일 늦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기도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새벽기도회 : 매일 새벽에 기도회로 모이는데 이는 우리나라 교회만의 특징. 예수님이나 사도들도 새벽 미명에 기도하곤 하였습니다(행 5:21) 해가 뜨기 전에 주님을 만나는 교제의 시간입니다.
구역(가정) 예배 : 인근에 사는 몇 가정이 그룹을 조직하여 매주 정해진 시가네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 깊은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