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자들

교회를 분열시키면서까지 그들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장님이 만진 코끼리


우리는 불신자들로부터 종종 “기독교는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여러 교파로 분열이 되었냐?”라는 비난을 듣게 된다. 이 교파의 분열은 불신자들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비난받는 문제다. 요즘 각종 사이비단체가 장로교나 그밖의 정통교단을 표방하며 자생하는 것도 이 교파 분열의 균을 틈탄 행동이다. ‘교파’(敎派)의 ‘파’(派)는 ‘물이 근원에서 흐르다가 중간에 사방팔방으로 갈라져 흐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갈라진 ‘파’가 있다면 먼저 갈라지기 전의 근원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오늘날 많은 교파가 있을지라도 그 근원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의 교파분열은 새신자들을 전도하는데 방해물일 수도 있고, 이단이나 사이비단체의 온상이 되기도 한다. 교파라는 말은 기독교회 내의 여러 파를 가리킨다. 먼저 교파는 역사적, 지리적 상황에 따라 독일의 개신교는 루터파, 프랑스의 개신교는 개혁파, 영국의 개신교는 성공회와 감리교회라 일컫는다. 그리고 교파는 교리적 강조점의 차이에 따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교파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교파가 있다. 전자가 칼빈주의라면 후자는 웨슬리안주의라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강조점만 다를 뿐 본질은 “하나님의 주권하에” 라는 분명한 원칙을 세우고 있다. 종교개혁당시 루터, 쯔빙글리, 칼빈이 나눠진것도 지극히 작은 부분이었다. 15개의 교리가운데 14개부분은 일치하고 한개의 교리 즉 성만찬교리에서 일치하지 못했는데, 이를 시작으로 개신교의 분열은 지금껏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종교개혁의 성과못지않게 큰 아픔이라 할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독교교리의 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기 때문에 생긴다. 이런 모습은 마치 소경 여럿이 각자 코끼리를 만져보고 평가하는 것과 같다. 말하자면 본질은 그리스도이고 그들이 강조하는 부분적인 것들로인해 교회는 오늘도 수없이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1.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준비


쯔빙글리(Ulrich Zwingli)는 루터보다 7주 늦은 1484년 1월 1일 스위스에서 명망 있는 시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화려한 교육경력을 지닌 인테리라 할수 있다. 1506년 바젤에서 석사학위받고 바젤에 있는 동안에 비텐바흐(Thomas Wyttenbach) 박사의 영향을 받는다. 비텐바흐 교수는 면죄부의 악용을 지적하면서 “교회의 열쇠에 의존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 있는 죄 용서를 보며, 오직 믿음의 열쇠로 거기에 접근할 수 있음을 알라!”고 가르쳤다.


용병제도의 죄악상 폭로


그는 1516년 군목으로 용병에 참가했다가 그들의 죄악상을 목도하게 된다. (나바라전투1513, 28세와 마리그나노 전투1515, 32세에 참가)

그는 교황, 신성로마황제, 프랑스 국왕 등에게 고용되었던 스위스의 용병 문제점과 참상을 종군신부로 참전하면서 체험적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첫 번째 싸움에서 승리하자 기독교인 용병들이 점령지역을 잔인하게 약탈하는 것을 목도했고, 두 번째 싸움에서 패배하자 일만 명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참상을 목격했다. 이때부터 그는 용병제도의 죄악상에 대하여 설교하기 시작한다. 쯔빙글리는 교황청에 파송하는 용병과 교황청으로부터 받는 연금의 잘못을 파악하고서 본인에게 지급되는 연금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리고 1522년 취리히 교구민 사제직을 사임하고, 시의회가 그를 전체 도시의 설교자로 임명하면서 쯔빙글리는 교황청과 결별을 선언한다.

쯔빙글리는 용병제도를 반대함으로써 교구민들에게 배척을 받아 1516년(32세) 4월 순례지로 이름난 아인지델른(Einsiedln)으로 목회지를 옮긴다. 그때 그는 순례나 각종선행들이 구원과 아무런 상관없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내용을 과감하게 설교하였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성경을 암송하였으며, 오리겐, 암브로스, 제롬,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등 교부들의 글을 읽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의 사상에는 대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나님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 인간적인 교훈들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직접 배우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종교개혁의 서막-성경에 의한 목회 현장 변혁

쯔빙글리(1518-22는 친구 미코니우스(Myconius)의 추천으로 취리히 대성당 교회의 담임사제로 간다. 물론 교리적인 측면에서 자유분망한 그의 교리는 초기에 문제가 되었지만, 1518년(34세) 12월 27일 이곳에 도착한 후 개혁은 놀랍도록 진행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다. 그는 1519년 1월 1일부터 강단에서 헬라어 성경을 가지고 마태복음부터 시작하여 요한 계시록까지 6년간(1525)에 걸쳐 강해 설교를 한다. 이러한 설교는 몇 년 뒤에 취리히 시민들이 종교개혁을 완전히 수용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더욱이 1519년 8월 취리히에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 7000명의 주민 가운데 2,500명이 죽었는데, 이러한 고통에 쯔빙글리가 적극 나서서 환자들을 돌봄으로 9월에 이르러는 자신도 아프기 시작했으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된 믿음에 이르게 된다. 물론 루터의 사상에 접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성경을 연구하고 하나님을 체험하여 루터와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는 1518년부터 교회개혁에 대한 자각을 하였으며, 1519년에 복음적인 설교를 시작하면서, 로마 천주교를 평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루터보다 과격한 편이었다. 루터는 가톨릭의 관습이라도 성경에서 금하지않은 것은 그대로 두라고 하였지만 쯔빙글리는 관습이나 전통까지도 성경에서 하라고 한 것만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쮜리히의 수많은 성상조각들을 파괴하였고, 결국 로마천주교의 관습, 관행, 예식, 가르침을 검토한 후, 금식, 성인추앙, 연옥, 성상숭배, 음악, 성직복 등을 폐기하였다.


쯔빙글리와 루터


쯔빙글리의 성향은 냉철하고 실천적이라면 반면 루터는 신앙적, 신학적이었다.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영성(spirituality)에 대하여 강조하고 신비적인 종교의식을 혐오하며 철학과 이성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는 점에서 에라스무스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루터가 죄에 대하여 기도하고 번민함으로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해 복음을 찾았다면, 쯔빙글리는 다른 인문주의자들처럼 이성으로 판단하는데서 해답을 찾았다. 그는 죄에 대해 루터처럼 번민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에서 출발하고, 하나님이 주신 성경을 신앙의 원천으로 알고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그의 조국이 경험하고 있는 용병제도의 모순, 일반대중이 빠져있던 미신과 성직자들의 부패 등을 비판하면서 그가 열심히 읽은 신약성경에서 신앙의 기준을 찾았던 것이다. 루터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님이었지만 그는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로 생활속에서 적용하는 것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더 중요했다. 루터가 시작한 개혁사상을 가지고 그는 삶에 적용하고자했던 것이다. 루터가 수도원의 골방에서 세상을 등지면서 죄성과 싸우면서 진정한 복음을 깨달았다면 쯔빙글리는 조금더 현실적이었다. 생을 즐기는 인문주의자로서, 군목으로서 현실적인 정치가요 신부로서 세상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루터가 고뇌하며 죄의식에 눌리고 어둠속에서 두려워하며 내면세계에 눈을 떴다면 쯔빙글리는 에라스무스처럼 이성을 동원해서 성경연구를 통해 개혁의 의미를 찾았고 그렇게 실천해 나아갔다.

그리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는데, 성경에 의한 가톨릭 제도와의 대결에서 그는 쯔빙글리는 자신의 주장을 67개 조문으로 정리하였다. 복음의 의미,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말씀의 최고성,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중보자와 구세주 사역의 충족성,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의 교제 의미를 지닌 교회 본질의 파악이었다. 교황의 대제사장 직분, 희생으로서의 미사, 성자들의 중보를 요청하는 기도들, 의무적인 금식, 순례, 면죄부 판매 등 가톨릭의 가르침을 비판하면서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와서 성경이 스스로 판단하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에서 쯔빙글리가 승리하여 시의회는 모든 신부들에게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지시하였다. 그래서 수도원이 문을 닫고 병원과 학교로 사용되었으며 세례를 독일어로 시행하였다.


성찬논쟁 - 인간의 한계, 종교개혁의 한계를 드러냄


마르틴 루터와의 결별: 루터와의 입장의 차이는 특히 성만찬에 대한 가르침에서 두드러진다. 루터는 성만찬의 자리에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같이 있다고 가르쳤지만, 그는 본질과 외형을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단순히 상징할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1526-8년 사이에 루터 측과 격렬한 논쟁이 전개했는데, 루터는 복음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1529년 마르부르크 성에서 쯔빙글리와 모임을 갖는다. 여기에 종교개혁의 중요한 지도자 즉 루터, 멜랑톤, 부쳐, 외콜람파디우스, 쯔빙글리 등이 참석했다. 여기서 15개조항의 신앙고백을 논의하였는데 14개 항목에는 합의했으나 성찬식에서 이견(異見)을 좁히지 못했다. 루터는 “이것이 내 몸이다”(마 26:26)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몸이 실질적이고 본질적으로 임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츠빙글리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요 6:63)는 말씀에 의거하여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며, 그리스도의 몸은 천상에 구체적으로 물리적으로 좌정하시고, 다만 영적으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기념설의 입장을 취하였다. 성찬식에 대한 이러한 명백한 차이점은 양편의 연합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서로 영구히 결별하고 말았다. 쯔빙글리가 주도하던 취리히의 종교개혁은 빠른 시간 내에 스위스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나 모든 곳에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은 확산되지 못하고 1566년에 이르러 칼빈주의에 흡수되었다.


2. 칼빈(John Calvin,1509-64)의 종교개혁


칼빈은 루터나 쯔빙글리보다 한 세대 늦은 1509년에 태어났다. 칼빈은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을 계속하고 발전시켜 완성하였다. 이제 제네바가 개신교의 로마가 되어,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교회의 개혁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루터는 62세에 죽었고, 쯔빙글리는 47세에, 그리고 칼빈은 5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칼빈은 루터와 쯔빙글리가 닦아 놓은 터 위에 건물을 세우는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칼빈은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을 체계적으로 종합화한 목회자요 신학자요 개혁가라 할 수 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던 지역인 스위스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을 펼쳤으나 그의 영향력은 전 구라파에 미치는 광범위한 것이었고, 제네바를 세계적인 개혁운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칼빈은 성직자로서 다음엔 법률가로서, 그리고 인문주의 학자로서 최상의 훈련을 받았다. 그의 천재적인 두뇌와 이러한 교육은 개신교를 체계화하고 그것을 신자의 삶에 적용시키는데 기여했다. 루터가 용기있게 종교개혁의 처음 길을 열었던 개척자라면, 칼빈은 프로테스탄트의 교리들을 한데 묶어 체계를 이룩한 심오한 사상가였다. 의심할 여지없이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집대성한 인물이 바로 존 칼빈이다.


출생 및 성품


칼빈은 1509년 7월10일 루터가 95개조를 비텐베르크 성문교회에 내걸던 바로 8년 전 프랑스 북부 피칼디주 노용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 코뱅(Gerard Cauvin)은 뱃사공으로 노용시에서 유력한 인사가 되었다. 성직자회의 공증인과 후원자가 되었으며 교회의 서기와 회계직분을 맡았다. 1501-1525년까지 지방의 유지라야만 차지하게 되는 노용지역 주교의 비서로 있었다. 칼빈은 이러한 부친에게서 지식욕과 조직적인 두뇌를 물려받았으며 부친은 비록 평민이지만 상류계층과 어울리는 신분을 힘입어 어려서부터 상류계층의 자녀들과 자주 어울리게 되었다. 모친은 신앙이 경건한 여성으로서 칼빈에게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에 심취하도록 인도하였으나 일찍 돌아가셨다(1515년경). 모친이 신앙의 위인들과 성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따라서 칼빈은 모친의 경건한 신앙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부패한 종교, 타락한 교황청에 대한 개혁을 할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었다.

칼빈의 성품은 온순하고 소극적인 성격과 창백하고 신경질적이며 고집적인 성품이었다. 무슨 일이든 정확하게 판단하고 재능이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밖에서 노는 것보다 늘 책과 씨름하는 생활을 하였다. 칼빈은 명석한 두뇌를 지녔다. 더불어 어린 시절부터 오직 정의를 추구하며 공부와 기도에 몰두한 사색파였다. 어렸을 적부터 칼빈의 지각 능력과 기억력은 모든 사람들을 능가했으며, 그의 논지는 놀랍도록 명료하였다. 그는 열심에 있어서 비견할만한 상대가 없었다. 그는 적게 먹었으며, 네 시간 이상을 자는 일이 거의 없었다. 혹독한 자기 훈련 속에서 칼빈은 매일 아침잠에서 깨자마자 그 전날 배운 것을 복습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타고난 기억력은 놀라울 정도로 증진되어, 주변의 사람들이 그의 비상한 기억력을 존경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쉴새없는 지적 작업들은 그의 만성적인 위통과 전반적인 허약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때 그는 법학 공부에만 자신의 관심을 국한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학문의 분야에 자신을 내어 던졌다. 이때 섭렵한 모든 지식들을 그는 가톨릭의 부패에 대항하여 변증자료로 삼았던 것이다. 즉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 언변, 논리력, 조직력 등을 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변증하는데 그의 일생을 헌신했던 것이다.

이지력과 판단력은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겁이 많고 수줍음을 잘 타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남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소심한 사람을 들어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다듬어 가신다.


학창시절


칼빈은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몽떼규대학에 들어갔는데, 이곳은 신학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수도원과 같은 학교로써 가장 규율이 엄격하였다. 칼빈이 이곳을 택한 이유는 다른 학교들보다 좀더 종교적인 분위기를 가진 곳에서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죄와 허물을 여러 사람 앞에서 자백케 하였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케 함으로써 엄격한 윤리생활을 강요하였다. 식사는 주로 빵이었고, 13분의 1파운드 정도의 뻐터와 익힌 열매와 채소 그리고 달걀 하나 정도였다. 파아커(Parker)는 당시 몽떼규대학의 중세기적 경건훈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새벽 4시에 새벽기도를 올리고, 6시까지 강의를 듣고, 이어 미사에 참석한다. 미사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했고, 8시에서 10시까지 토론에 들어갔다. 그리고 11시경에 점심식사를 했는데, 이때에 성경과 성도의 전기를 읽었고, 12시에는 아침에 배운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고, 대체로 오후 3시에서 5시까지는 자유 시간이었다. 5시가 되면 저녁예배에 참석해야 하고, 이 예배 후에 오후시간에 읽은 것에 관하여 질문을 받았다. 그리고 저녁식사 이후 취침 전까지 또 다시 질문과 토의를 거듭했다.”

칼빈은 이와 같은 경건 훈련을 통해 큰 도전을 받았으며, 훗날에 그가 큰일을 할 수 있는 준비를 하게 되었다.


회심


1528년(19세) 문학석사 과정을 끝마쳤을 때, 부친과 노용의 주교 사이에 마찰이 생겼으며, 또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사제의 길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한 부친은 법학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래서 1528년 오를레앙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인문주의에 접했고, 부르쥬 법과대학으로 옮겨 인문주의 경향의 법률학을 통해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된다. 칼빈은 파리에 유학한 동안 당시 전 유럽을 휩쓸었던 종교개혁사상에 깊이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 그는 포르테대학에서 인문주의를 깊이 연구하게 된다.

그러다가 1533년 파리 부르줴대학 시절의 벗 니콜라스 콥이 파리대학학장 취임연설이 로마 가톨릭적이지 못하고 이단적이라 하여 파리당국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그 연설문을 칼빈이 작성했다는 혐의를 받고 경찰의 수배대상자가 되었다. 그 내용은 복음주의적 견해를 대담하게 표명했으며 신약성경을 기초로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연설문은 교회의 권위자들을 크게 분격시켜서 칼빈과 코프를 체포하려 했기 때문에 파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칼빈은 니콜라스 콥의 뒤를 따라 파리를 떠나야만 했고. 내내 실제적인 위험과 마음의 심한 혼란을 주는 여러 위험을 무릅쓰고 도피여행을 해야만 했다.

쫓겨다니던 칼빈은 파리에서 학창시절의 친구인 듀우딜레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무서운 강풍을 피하여 은신하게 되었다. 듀우딜레 집에서 칼빈은 그의 시편주석 서문에서 언급한 ‘갑작스런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 반성을 하고 있었는데 진리의 빛이 갑자기 임해서 내가 이전에 갖고 있던 온갖 거짓과 죄악을 보게 되었다. 나는 자신의 불쌍한 상태와 내 앞에 놓인 재앙을 자각했을 때 전율을 느꼈다. 오! 주여, 눈물과 부르짖음으로써 주께서 미워하시는 옛 생활을 버리고 주의 길로 가는 것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구원의 항구는 오직 하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다. 나는 나의 공덕이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다. 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교제하는 것이다.” 샤프는 이에 대하여 “그는 로마교회로부터 프로테스탄트로, 교황주의로부터 복음주의적 신앙으로, 스콜라주의적 전승주의로부터 성서적인 단순성으로 돌아섰다”고 하였다.

갑작스런 회심 후 1년이 경과하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칼빈에게 찾아와 진리(개혁신앙)에 대하여 배우고자 열망하였다. 칼빈은 드러나지 않고 은거하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여 어느 곳에서도 쉬기를 허락치 않으셨다.


기독교강요의 구조


칼빈이 바젤에 숨어 있는 동안 프랑스에서는 신실한 성도들이 화형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 소식에 대해 각국에서 강력한 비난이 쏟아지자 파리당국은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거짓된 팜프렛을 뿌려 모든 책임을 재세례파와 개혁가들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였다. 칼빈은 바젤의 띨레 집에 머물면서 그의 서재에 있었던 암브로스, 키프리안, 크리소스톰, 터툴리안, 어거스틴 등과 성경을 연구하여 1536(27세)에 『기독교 강요』를 저술한다. 가톨릭교회에 대항할 무기는 성경에 근거한 복음적인 신학논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절박감이 명민한 그의 지성과 조화되어 탄생한 것이 『기독교강요』다. 그는 진리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점점 더 복음서들과 사도들의 서한에 몰두하였다. 자신의 타고난 명민성과 훈련받은 지적 능력의 모든 기능을 다해서 가톨릭의 오류와 무지를 극복하려고 애썼다. 따라서 당대의 신학자들, 주교, 사제들의 오류를 공략하여 개신교화하고, 유명대학을 석권하여 진리를 변증, 수호하고자 애썼다. 하나님은 이러한 칼빈의 지적 열심에 지각을 열어 주셨는데, 그것이 곧 『기독교 강요』다.

거대한 신앙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강요는 그 당시의 시대적 요인과 신앙적인 요인이 합쳐져서 출간된 것이라 볼 수 있다.?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기독교강요를 저술했다. 기독교강요는 교리서의 성격과 성경신학서의 성격도 짙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부론, 성자론, 성령론, 교회론의 4부적 구조이다. 내용적 구조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2부적 구조이다. 칼빈은 여기에서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만 말하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침묵한다라는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다. 기독교강요 초판을 저술할 때 예정론을 섭리론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을 강조하기 위하여 예정과 섭리를 강조하였다. 예정론은 칼빈 이전에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어거스틴주의 신학자들 중 수많은 지도자들이 가르쳤던 성경적인 진리다


김귀춘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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