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예배의 회복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www.theologia.pe.kr)
1. 루터의 청소년기의 안페이퉁(Anfechtung)과 종교개혁
종교개혁의 핵심은 루터에 의해 제기된 바울적인 기독교의 옛 교리의 회복(restoration)이며, 중세신학의 남용의 개혁(reformation)이며, 교황제도의 오용에 대한 혁명(revolution)이라고 파악한 하르낙은 종교개혁에 있어서 루터의 위치를 강조하여 “루터가 종교개혁 자체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교리적, 신학적 체계를 확립하거나 당시의 부패한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려는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청소년기의 루터를 괴롭힌 영혼의 고통(Anfechtung)에서 벗어나 영혼의 평화와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는 혼신의 투쟁과정에서 루터는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수도원에서는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피나는 수련과정을 통해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였으나 그 한계를 느끼고, 마침내 성서연구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루터의 신학의 골자인 의인론(義認論)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체험적인 성서적 통찰이 중세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중세의 교회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의 촉매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내적 불안과 공포로 인해 수도원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카톨릭적인 여러 선행을 통해 염격한 심판을 무마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틸리히는 이러한 루터의 심경을 배경으로 하여 “불안이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라고 단언하고 이러한 불안이 중세 말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먼저 청소년기의 루터를 번민 속에 빠트리고 불안에 전율케 한 것은 체벌 (지겨운 몽둥이질)과 성적인 충동과 미신적인 악마 공포증과 죽음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 이었다. 루터는 인간으로서는 전무후무하게 극심한 영혼의 고통에 사로잡혀 비참한 죄책감, 죽음과 최후 심판에 대한 불안, 그리고 악마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구원의 확신과 영혼의 평화를 얻기 위해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청소년기 루터에게 있던 영혼의 번민은 이처럼 복잡한 배경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를 특수한 용어로서 “안페이퉁(Anfechtung)”으로 묘사하여 왔다. 믿음의 시련, 영혼의 고통을 뜻하는 이 단어는 도무지 한 마디로 번역하기 어려운 특수한 개념이라고 한다.
2. 수도원 생활과 로마교회의 가르침의 한계
루터는 1505년 7월 2일 스토테른하임 마을 가까이서 갑자기 뇌우를 만나 극심하고도 발작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수사 서원을 하고, 일 년간 수습 수사가 되기 위해 어거스틴 계통의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다. 로마 교회는 죄에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를 받고 세례 이후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철저한 금욕적인 생활과 엄격한 고행에 힘쓰도록 가르쳤다. 다시는 죄의 올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철저한 수도생활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불식간에 죄를 지었을 경우에는 사제 앞에 나아가 철저히 회개 자복하여 사죄를 받도록 가르쳤다. 사제들은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였으므로 이 땅에서 ‘매고 푸는(마 16:19)’ 즉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고 주장하여 왔기 때문이다.
1) 수도생활과 선행에 대한 한계와 의심
루터는 자신을 수도원으로 들어오게 한 것이 마귀이든 하나님이든 그가 어엿한 수사로서 수도원의 특권으로 주어진 완전한 덕목을 실천하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 검소, 자선, 순결, 가난, 순종, 금식, 철야, 육신의 극기 등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는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남김없이 실천하기로 했다. 그는 정해진 규칙 이상으로 철야 고행과 기도에 전념하면서도 한편으론 정말 제대로 하고 있는지 늘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후일 루터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난 성실한 수도사였어. 내 종단의 규칙을 얼마나 꼼꼼하게 지켰던지 그 놈의 수도사 생활로 수도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나를 두고 한 말일 거라는 자화자찬까지 늘어놓을 정도였으니까. 그 때 나와 함께 수도원에 있던 형제들은 이 사실이 정말이라고 말해줄 거야. 아마 그 일을 더 이상 계속했더라면 철야, 기도, 독서 그리고 다른 일로 죽고 말았을 걸.”
그러나 ‘너 자신을 깨끗이 할수록 너는 점점 더 더러워진다’고 말한 바와 같이 금욕적이며 고행에 가까운 선행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서려고 하면 할수록 자신의 더러움이 더욱 노출됨을 깨닫게 된 것이다.
2) 고해성사에 대한 의심
당시의 로마교회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이 교회의 성례를 통해 우리들에게 전해 진다고 가르쳤다. 특별히 세례 이후의 지은 죄에 대해서는 사제 앞에서의 고해성사를 통해서 이 땅에서 사죄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루터는 철저한 수도생활과 더불어 행여나 부지불식간에 지은 죄가 있을까 하여 고해성사를 통해 이 비상한 사죄의 은총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하루에 몇 차례 씩, 어떤 때는 내리 여섯 시간을 고해했다. 그는 영혼을 샅샅이 뒤지고 기억을 이 잡듯이 털어 갖가지 동기를 저울질하였다. 당시 고해성사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체계로 고안된 여러 죄의 항목들 말하자면, 5가지 감각의 죄, 7가지 큰 죄(교만, 탐심, 욕정, 분노, 과식, 시기, 나태)와 십계명의 조목조목을 훑어 내려가면서 고해하였다. 한번 고해할 때마다 이 죄목 가운데서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고해 후 그 내용을 수정하고 보충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그의 고해 사제가 지겨운 나머지 “이봐요, 하나님께서 당신께 화내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께 화를 내고 있군요”라고 화를 내었다고 한다. 그의 스승 슈타우피츠(Staupitz)는 “여보게, 사죄를 받고 싶거든 뭐 좀 용서할 근거를 가지고 들어오라고. 그따위 시시껄렁한 자질구레한 죄가 아니라 부모살해나 간통과 같은 걸로 말야”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의 진지한 고해마져 진지하게 받아들이길 거부한 사제의 태도는 그를 더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했다. 그는 그 순간마다 죽은 시체가 되어 버리는 것 같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더욱 괴로운 것은 그의 비상한 머리로서도 자기가 지은 죄 가운데서 잊어버리고 기억이 되지 않은 죄에 대하여서는 더 이상 고해를 할 수 없다는 사실과 인간 편에서는 죄를 저지를 때나 저지른 후에도 그것을 죄로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 고해의 필요를 깨닫지 못하는 행위 가운데에서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명백히 죄로 정죄 받을 행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 가 없었다. 그의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게 되자, 그는 고해성사의 근본적인 한계를 통감하게 되었다.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죄나 스스로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행위는 고해의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고해제도로서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죄 때문에 루터는 다시금 번민과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다.
각자의 기억나는 죄와 각자가 죄로 인정하는 죄만이 고해성사의 대상일 뿐이라는 루터의 발견은 고해성사에 기초하여 중세 로마교회가 가르쳐온 신앙체계의 근본을 뒤흔든 중요한 발견이었다. 루터가 이러한 고문당하는 듯한 영혼의 절망의 심연에 처해 있을 때, 그의 스승 슈타우비츠(Staupitz ?-1524)를 통해 치유적인 암시를 받게 된다. 그는 “참 회개는 형벌하시는 신을 무서워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사랑함으로 시작 된다”고 가르쳤다. 신의 사랑을 기대하여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 자체가 이미 신의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로 인해 고해에 대한 루터의 의심에 급진적인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루터가 도덕적으로 진지하고 종교적으로 민감하며 비범한 지능을 지닌 청년인 것을 확신한 그는 루터에게 대학의 설교와 성서 강의를 명하였다.
3) 성서연구와 탑의 체험
루터는 시편 강의(1513-14)와 바울의 로마서 강의(1515), 갈라디아서 강의 (1516-17)을 맡아 성서연구에 몰두함으로써 청소년기의 안페히퉁(Anfechtung)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루터는 시편을 통해 히브리의 위대한 신앙인들이 자신이 겪은 안페히퉁과 똑같은 처절한 고통을 호소한 참회시들을 발견하고는 큰 위로를 얻게 되었다. 영혼의 번민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특히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면서 시 22편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참회시의 대목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부르짖은 말씀(마 27:46 병행)과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루터는 히브리의 위대한 신앙인과 마찮가지로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고 내팽개침을 받은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도 안페히퉁(겟세마네 기도, 채찍, 가시 면류관, 버림받음 등등)이 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루터가 한 시간의 십분의 일이라도 견딜 수 없어 죽을 뻔 했던 그 고통을 왜 예수가 당하셨는가? 루터는 죄인인 자신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는 알 수 있었으나, 죄 없는 예수의 고통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불의를 짊어지셨다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터는 후에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감추어져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극복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청소년기부터 그리스도에 대해 품었던 무지개 위의 심판관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사실상 십자가 위에서 버림받은 자임을 성서에서 발견하고 놀라게 되었다.
시 31편은 루터에게 새로운 인식을 일깨워 주었다. “주여, 내가 당신께 피하오니 나로 결코 부끄럽게 마시고 당신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라는 귀절을 통해 “이 구절은 ‘나의 의’로 라고 말하지 않고 ‘당신의 의’, 즉 신앙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의해 우리의 것이 되신 나의 하나님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게 된다. 루터는 철저한 수도원 생활을 통해 행위로써 흠이 없도록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털끝만한 죄일지라도 철저히 고해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최후 심판 시 의로운 자로서 인정받아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나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시편 31편 1절의 말씀은 구원에 대한 이제까지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구원론에 있어서 일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야기시켰다.
시편의 말씀에 이어 로마서 연구를 통해 루터는 새로운 구원의 체험에 이르게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로마서 1장 17절을 통해 루터는 ‘천국의 문이 열려짐’과 같은 구원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소위 탑상체험(Turmeriebnis)으로 일컬어지는 이 말씀의 빛을 통해 지금까지의 절망과 불안과 공포와 번뇌(Anfechtung)가 일시에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기쁨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후일 루터는 그 때의 체험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밤낮 가리지 않고 곰곰히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수동적인 의(Justitia passiva)라는 것을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 의가 최후 심판 시에 나타나는 의인을 의롭게 한다고 가르쳐 왔다. 그리하여 청소년기의 루터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그 때 나타날 하나님의 엄격한 의의 심판 앞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영혼의 시련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 로마서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 죄인을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카톨릭 교회는 나의 의로 내가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으나 성경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내기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는 구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Justitia Dei)를 능동적인 의(Justitia activa)와 수동적인 의(Justitia passiva)로 구분하였다. 전자는 의로운 하나님이 불의한 죄인을 벌하는 엄격한 법의 시행자임을 뜻한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불의한 죄인을 의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바울의 표현을 통해 루터는 하나님의 의의 개념이 ‘의인을 의롭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총을 통해 ‘죄인을 그 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인정하는 義認(Justitication)’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3. 95개조 항의서의 핵심-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교회가 가르치는 고해가 아니다.
루터는 교회의 가르침으로 얻지 못한 구원의 확신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확실히 깨닫고 청소년기 때부터 자신을 괴롭혀 온 안페히퉁(Anfechtung)에 벗어나 천국 문이 활 짝 열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이다. 이 체험으로 인해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루터는 면죄부 판매와 교황권의 남용과 연옥설 등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의 여러 모순들을 깨닫게 되고 이 모든 잘못된 교회의 가르침의 근본모순의 고해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고해제도로 인해 교황과 사제의 사죄권이 강화되고, 면죄부 발행이 가능해 졌고, 연옥설이 실제적인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세례 받은 사람이 다시 범죄하였을 때 사제 앞에 가서 고해하라는 것은 단지 교회의 가르침일 뿐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서 중세 카톨릭 교회의 교리체계의 근간인 된 통회(Contrition), 자복(Confession), 보속(Satisfaction), 사죄(Absolution)의 4단계로 체계화된 고해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이 고해제도에 근거하여 주장된 교화권과 면죄부 그리고 연옥설을 조목조목 비판한 95개조항의 항의서를 내건 것이다. 그리하여 루터는 95개조항의 항의문의 제1,2,3조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서가 가르치는 ‘회개’는 교회가 가르치는 ‘고해’가 아님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던 것이다.
“제 1논제, 우리의 주님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마태 4:17)고 하신 것은 신자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 2논제, 이 말씀은 한 사제의 주관 하에서 수행되는 성례전적 참회로는 이해될 수 없다.
제 3논제, 그러나 이 말씀은 내적 회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만일 이같은 내적 회개가 육욕에 여러 가지 외부적 극기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성서 연구를 통해 루터는 마침내 교회에서 가르치는 고해(poenitentia)는 성서가 가르치는 회개(metanoia)와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중세교회는 라틴역(Vulgate)을 사용하였는 데, 라틴역에는 회개라는 말을 고해의 뜻으로 번역하고 그러한 의미로 가르쳤기 때문이다. 루터는 95개 조항 해설서에 희랍어 원어 ‘μετανοειτες’를 라틴어 poenitentia로 번역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성서 희랍어는 고해하라(do penance)의 뜻이 아니라 회개하고 뉘우치라(be penitent)는 불신앙에서 신앙으로 돌아서는 마음의 상태의 변화를 뜻하므로 라틴어로 번역한다면 차라리 ‘transmentanini’가 더 정확한 번역이라고 한다고 했다.
4. 루터의 종교개혁과 예배 회복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은 한편으로 중세시대의 "잘못된 예배"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마틴 루터(M. Luther)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을 게시하였을 때, 그는 중세교회가 지키고 있는 잘못된 예배절기(liturgical calendar)를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성절(All Saint's Day) 전야인 10월 31일 밤을 선택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에서 제시된 예배회복의 주요한 내용들을 살펴 보면 나이스크 정신의 기본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 루터는 예배는 신앙을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무엇보다도 마틴 루터는 예배의 반복되는 제사적인 의례와 형식 보다는 그 형식을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신앙의 응답을 더 중요시하였다. 「교회의 바벨론 포로」(1520)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미사를 인간이 제단에서 피흘리지 않고 반복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사로 여겼고, 미사를 드리는 것을 성례적인 행위의 공로로 본 것을 비판하였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롭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 주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 형벌을 받게 하시고 그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찬 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은총의 선물인데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를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선행과 희생제사(opus bonum et sacrificium)로 바뀌어 버렸다고 비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은총을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로 전도시켰다는 것이다. 1530년에 발표한 「성례전을 위한 권고」(the Admonition to the Sacrament)에서 “기념(Memorial)한다는 것은 감사의 제사로 간주 될 수 있다. 하지만 성례전은 결코 제사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다.”고 하였다.
루터는 성찬 예식이 중심이 되어 행해지는 미사는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너희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마 26:26 이하, 눅 22:19 이하)는 말씀과 “내 피로 세운 새 언약”(고전 11:25)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죄 사함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 이므로 미사의 본질은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였다. 이 믿음이 없이는 사랑도 소망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참된 미사 즉 예배의 목적은 “각자의 개인적 신앙에 자양분을 공급해주고 강하하기 위한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톨릭 교회는 미사를 선행이요 회생제사로 보았기 때문에 신앙이 없어도 미사의 희생 제사를 바치는 자는 그 행위 자체로서 실제적인 제사의 효과가 있다는 사효성(事效性, opus operatum)을 주장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루터는 성례를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신앙으로 받을 때에만 효력이 있다는 은효론 또는 신효론을 주장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만이 예배로서 효과를 지니고 그 결과 믿음을 회복하고 지속하고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나이스크가 지향하는 철저한 예배 회복의 선구자였다.
2) 루터는 예배의 중심이 희생제사가 아니라 말씀의 선포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예배 회복 지침서인 「미사규정집」(1523)를 통해 전통적인 미사의 대부분 순서들을 그대로 남겨두고 대신 설교를 강조함으로써 복음에 대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했다. 루터는 이를 위해 예배의 어느 위치에 설교를 넣을 것인지에 대해 많을 고민을 했다. 기존의 틀을 따른다면 사도신경(the Creed) 다음에 위치해야 하는데 그는 설교를 예배의 앞부분에 배치하여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 회중의 심금을 울리도록 했다.
루터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real Christians)을 위해 참된 복음적(truly evangelical) 예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예배는 한 신자의 가정에 모여 드려지는데 기도, 말씀읽기, 성찬, 세례 등으로 이루어지고,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성도간의 교제가 깊어지게 된다. 하지만, 루터는 이 예배에 대해 구체적인 절차나 형식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았으나 말씀읽기에 큰 비중을 두었다.
루터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이 신앙의 유일한 규범(sola fidei regular)이므로 “성서로 돌아가라”는 종교개혁의 원리에 따라 말씀과 성례가 참된 교회의 표식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예배에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낭독되고 애독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확신은 그들로 하여금 자국어 성경을 번역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였다. 이는 하늘의 만나(Yielding for Manna)이요 영혼의 양식인 성경을 애독하자는 나이스크의 정신이기도 하다.
3) 루터는 종교개혁의 성공은 기도의 응답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후일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하였다. 루터의 종교개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이를 불태워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루터는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개혁파들에게 기도할 것을 독려하였다. “사탄은 분노를 나타내고 있다. 경건치 않은 수도사들이 공모하고 있으며 우리는 궁지에 몰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과 기도로써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고 권할 것이다. 그리하면 원수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복되어 잠잠하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급한 것은 기도이다. 이 싸움에 사용되어야 할 무기는 오직 성령의 검뿐이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종교개혁의 큰 능력은 밀실의 기도에서 나왔다. 루터는 하루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것도, 연구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을 그렇게 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성공의 개혁자들의 기도의 응답이라고 보았다.
루터는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보았다. 종교개혁 당시 사람들은 “개혁!”의 구호만을 외쳤다. 그러나 우리가 루터에게서 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하신다.”였다. 면죄부 논쟁으로부터 시작하여 새로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자신의 탁상담화와 편지에서 밝혔다. “이 일에 나는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왔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는 던졌습니다.” 루터의 이러한 철저한 헌신과 철저한 기도는 나이스크의 또 다른 정신이기도 하다.
4) 루터는 십일조 비롯한 각종 헌금(헌물)를 강조하였고 그 용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중세교회의 면죄부 발매로 교회 헌금과 십일조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팽배하여 농민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525년 2월말에 독일 슈바벤(Schwaben)에서 농민들이 제시한 "12개 조항"에는 가축에 대한 십일조는 면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루터의 답변은 십일조의 폐지는 '하나님의 것의 도둑질'이라는 강력한 입장이었다.
루터는 '교회의 헌물함에 대한 규정'(1523)을 통해 복음적인 입장에서 헌금 내역과 그 사용 및 관리에 분명한 지침을 제시하였다. 10명의 관리위원들을 정하여 일년에 네 번(사순절 첫째주일 다음의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성령강림절, 9월 14일, 12월 13일)에 걸쳐 헌물의 수익상황을 점검하고 부족함이 없는지 살펴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헌물이 목회자의 사례와 교회의 건축 관리 유지와 교회학교 교육과 그리고 고아, 나그네, 노인, 가난한 자, 병자 등의 구제에 사용되도록 구체적인 지침을 제시하였다.
5) 루터가 생각한 예배개혁의 또 다른 핵심에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보”가 자리 잡고 있다. 루터는 예배를 통해 모든 신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신앙의 교제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였다. 성자나 사제와 일반 성도들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례 받은 모든 그리스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기로 다짐한 거룩한 제사장이라는 뜻에서 만인사제설을 주장한 것이다. 루터는 초대교회와 성서의 신앙을 연구한 후에 올바른 예배는 “인간의 어떠한 공로사상이나 성자와 사제를 포함하여서 예수그리스도 이외의 어떠한 중보적 위치도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6) 루터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여겼다. 루터(M. Luter)는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에 의한 봉사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그가 존재하고 있는 사회 안에서 특정한 요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다는 소명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자들은 소명의 개념을 단지 성직자에게만 국한시킨 데 반해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에 그대로 지내라"(고전 7:20)에 근거하여 루터는 모든 사람의 모든 직업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즉 성직자는 성직자로, 장인은 장인으로, 구두 수선공은 구두 수선공으로서 각각의 직업적 부르심을 받은 것으로 보며, 이러한 선택의 권한은 하나님의 고유영역이라 한다. 또한 직업은 생계유지나 자아실현이나 이웃을 위한 봉사를 넘어서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구체적 실현으로 인식한다.
루터의 소명의 직업관은 구교의 권위와 부패에 대응하는 그의 종교적인 개혁정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예배와 삶의 일치 즉, 각자의 일상 생활과 직업을 통해서도 신앙을 증거하여야 한다는 예배의 생활화라는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존 캅(J. Cobb)은 종교를 크게 대별하여 눈의 종교와 귀의 종교를 구분하였다. 전자는 보여주는 종교로서 제사종교이고 후자는 들려주는 종교로서 말씀(계약)종교라고 하였다. 모세의 종교에 의하면 하나님을 본 자는 죽지만 그의 말씀을 들고 순종하는 자는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 보다 낫다”(삼상 15:22)는 초기 이스라엘 계약신앙의 이상을 제시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눈으로 보여주는 제사 종교로 만들었고 종교개혁자들은 이를 다시 귀로 들려주는 계약종교로 회복시키려고 분투한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중세교회가 지키고 있는 사제권과 남용이나 성당의 지나친 장식 과 불필요한 절기들(만성절, 성자숭배일 등) 등을 제사종교의 폐습이라고 비판하였다. 루터는 미사와 미사의 희생제(the sacrifice of the Mass)를 구별했다. 루터는 미사가 희생제화 되는 것을 몹시 우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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