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

1. 들어가는 말


종교개혁 기념일을 맞이하여 종교개혁의 전통과 그 정신을 이어가는 개신교회에서 종교개혁과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책임적 과제에 속하는 사회봉사 즉 디아코니아를 종교개혁운동과 연관해서 고찰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운동은 기독교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재발견이요, 바른 신앙운동이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과 책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하에 일어난 교회갱신운동이었기 때문이다. 한국개신교회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운동과 그 정신 그리고 교회역사적 발전과정을 통하여 나타난 여러 신학사상들의 영향을 받고 교회갱신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짧은 선교의 역사 속에 빠른 교회성장의 모습을 가지고 발전해 오고 있다.


본 논문에서 우리는 종교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독일교회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스위스 제네바의 존 칼빈(John Calvin)의 디아코니아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종교개혁에 나타난 사회봉사의 발자취와 교훈을 찾아보고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위하여 활용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2. 중세시대의 디아코니아

6세기경 서로마시대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끝나고, 중세시대로 가면서 본질적인 봉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교회의 집사직분은 예전적인 섬김과 장로직분을 위한 통과단계의 의미에 머물게 되었다. 민족이동의 물결이 좀 퇴조 되자 교회는 전반적으로 교회의 활동들을 새롭게 정비하고 조직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되었다. 현존하는 교회의 활동들을 다시 파악하고 새로 유입된 인구들에게 집중적인 선교활동을 통해 기독교를 믿게 하는 일이 중요했다. 칼(Karl)대제가 정치적인 면에서 대통합을 이루어 봉사적인 의무를 자기 자신의 과제로 받아 들이는 모습이 처음으로 보여지고, 프랑스와 독일 이태리 등을 포괄하는 제국의 정치적 기관들이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여 빈민들이나 병든 자들, 포로들이나 과부들을 보살피는 의무를 지게 된다. 지방 영주들에게 그 지역에 속한 모든 사람들, 특히 부자유한 자, 예속된 자들을 보살필 책임이 부과되었다. 봉사의 임무는 고대 제국교회 때처럼 주교나 교회기관들에게 지시되지 않았으나, 황제 스스로가 나중에는 각 영주들로 하여금 봉사의 직무를 책임 있게 느끼도록 하였다.

중세에는 고대교회에서처럼 교회가 빈민을 돌보고 병원 등의 기관이 사랑의 행위를 전하는 중심지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감독 중심의 봉사활동이 타락한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 때는 감독의 빈민구제담당 보조자로서 큰 역할을 했던 집사장 (Archdiakon)이 이제는 법적인 권한을 가진 관직이 되어 버렸다. 집사들은(Diakon) 본래의 봉사적 기능을 상실하고 예배 의식적인(liturgische)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목사가 담당하는 독자적인 지역에서의 구제활동은 그 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대량으로 밀려오는 걸인들과 빈민들을 돕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이런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봉사 시설들(Hospitäler)이 대처해야만 했다. 그들은 민족 대이동기 이전까지 가장 효과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또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에 와서는 여러 수도원(Kloster)들이 생겨남으로써 고대교회의 봉사 기관이었던 외부인 숙소, 빈민수용소, 고아원, 유아원, 양로원 등의 사업을 계승할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가난한 농민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베네딕트 (Benedikt) 수도원의 규칙인 ‚기도하고 일하라‘ (ora et labora) 는 원칙을 명상하고 반추하는 승려들이(Mönche) 엄청나게 확장된 사회적 보살핌의 과업을 감당하고 교육이나 교양의 임무를 감당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수도원 생활의 개혁이나 새로운 수도원의 설립은 봉사활동을 크게 부흥하게 만들었다.

중세말에 와서는 봉사사업이 더 이상 수도원에만 제한되질 않았다. 더 이상 성직자들의 수도회가 기관을 운영하지 않고, 시민들의 봉사로 물론 기독교적으로 영향을 받은 형제단 자매단들이기는 하지만 이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중세시대는 봉사활동이 분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얻게 된다. 한편으로는 수도원과 수도회 또한 도시별로 조직된 조합들의 봉사사업을 통해 놀라운 활동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개체별 지역교회나 교회조직 전체로는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에 대한 돌봄의 책임을 전혀 수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성시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회사업을 규정하는 하나의 법칙을 하늘나라의 상을 받기 위하여, 영혼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힘써 일한다는 것이었다. 탁발수도회 (Betellorden)나 시민병원으로 넘어가면서부터는 평신도들이 봉사사업에 참여할 권리를 갖게 된다.


3.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아

3.1. 마틴 루터의 디아코니아 이해와 신학

디아코니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책을 쓴 G. Uhlhorn은 „루터가 기독교적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더 새로운 높은 단계의 프로그램을 발전시켰다“ 고 평가하였다. 독일교회의 대표적인 디아코니신학자 T. Strohm교수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자극과 동기 자체가 바로 루터가 이해한 디아코니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디아코니아 신학에 대한 루터의 출발점은 바로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핵심적인 동기유발을 일으킨 하나님의 의에 관한 이해와 직접 연결되고 있다고 하였다. 곧 루터는 포괄적인 신학연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에게 참되고 의롭게 만드는 사랑과 자비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진 의를 인간적인 행위로부터 따르는 의와 대조시키므로써 그는 의로운 행위로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스콜라학파적인 신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를 갈라놓는 타락된 인간의 의는 인간을 교회적인 통치의지에 굴복시켰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서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의를 방해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받아들임이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준비대기상태와 그의 뜻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일깨운다. 자신으로부터의 해방, 사랑, 겸손한 하나님 경외 등이 루터가 새로운 인간의 삶의 특징으로 서술한 범주이다. 이 범주는 루터가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참된 인간의 모습의 변화에 관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상에로의 변화에 관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적인 주요문서와 프로그램문서들 안에 „그리스도인들의 자유에 대하여“ (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라는 글은 그리스도인의 왕적 그리고 제사장적인 기능을 하나님의 실재 안에로 들여놓고 그것으로부터 규정되기를: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영예와 우수함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의 왕국을 통하여 그는 모든 것을 힘 있게 하고, 그의 제사장직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의 힘 있는 존재가 된다. 믿음을 통하여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에 대하여 조정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는 다시 자신 안에서 그 사랑을 통하여 조정된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 그것은 모든 다른 자유가 하늘과 같이 땅을 초월하는, 올바른 기독교적인 자유이며, 마음을 모든 죄와 율법과 계명들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기독교적 자유이다.“(WA. 6, 340ff) 이 글들은 Strohm은 기독교복음의 종교개혁적인 해석의 왕관을 형성하며, 동시에 루터가 언급한 것과 같이 ‚디아코니의 신학’ 의 기초가 된다고 보았다.


위에서 소개한 루터의 글“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는 루터가 목회적인 어려움의 문제들을 다룬 최초의 신학적 문서인데, 루터에게 있어서 신학과 목회는 둘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하나의 일치성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루터는 신학을 하나의 목회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루터의 이 글과 실제로 루터의 목회상담의 활동 내용을 비교분석한 Jentsch는 루터에게 있어서 목회는 복음 아래서의 재난구호이며, 루터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확실하게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완전하게 돌보았다고 하였다. 그는 억압 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목회자 루터는 억압의 현상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케 함의 원칙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루터가 이해한 목회 안에서 목표로 설정될 수 있는 자유는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되는 참 자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루터는 평상시에 편지쓰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일평생 총 2585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 중에 적지 않은 양의 편지는 바로 목회적으로 쓴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루터에게 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문제들까지도 편지로 루터에게 상담을 요청하였으며 질문하였다. 이에 루터는 편지의 답장을 통하여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줌으로써 그들을 정신적으로 자유케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변호사의 자격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증인의 자격으로 자기가 쓴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에게 자유를 얻게 하려고 돕기를 원했던 것이다.


루터는 편지를 통한 봉사적인 목회상담에 크게 힘을 썼다. 공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나, 잘 알려져 있지 않는 숨겨져 있는 사람들, 성직자들 까지도 그의 상담을 원했다. 그는 말하기를 „한 사람이 실족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그러나 기적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하나님은 슬픔의 하나님이 아니요, 위로와 기쁨의 하나님이시다.“ „나는 당신의 돌봄에 만족합니다. 나는 당신과 모든 천사들이 있을 때, 더 나은 돌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돌봄은 탁아소에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오른 손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염려가 없습니다.“ 등 위로와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목회상담적 언급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험이 든 목회자에게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고, 한 부인에게 루터는 „연약한 믿음도 역시 믿음이다.“라고 하면서 용기를 더하여 주었다.


루터는 „인간에게서 생명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믿음은 사랑 안에서 서로 활동하고 있다.“ 고 믿었다. 순수한 사랑이 될 수 있기 위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염려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야 하고, 믿음의 사랑은 그가 그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사람에게,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선물하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믿는 자는 자기 스스로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랑의 도구를 가동시키지 않고, 도리어 믿는 자는 이미 실현한 사람이며 그러므로 이웃에 대한 조건 없는(유보 없는) 봉사에 자유롭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그 창조적인 사랑은 세상의 처음과 나중이다.


3.2. 화해의 디아코니아는 곧 십자가신학


루터에게 있어서 화해의 섬김에는 상처 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을 위한 모든 가치의 가치변화가 뒤따른다. 십자가신학이라고 불리우는 루터의 신학에는 구원과 창조에 동시에 관계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화해의 디아코니아(Diakonie der Versöhnung)는 하나님의 질서의 뜻에 따라 창조의 갱신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에는 „사랑의 의무“의 질서와 한계에 대한 스콜라주의적인 가르침이 루터의 가르침에서 다시 언급되고 있다.


바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란 무엇보다도 갱신된 도덕적 존재이고, 루터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란 무엇보다도 용서 받은 죄인이다. 그래서 루터에게서 구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인격관계의 회복을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덕적 실천을 말한다. 루터와 바울에게 있어서 이 올바른 관계의 근거와 담보는 인간을 위해서 고난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들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인 것이다. 루터는 사랑과 이성의 규칙으로서 황금률에 대하여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내었다. 그 황금률은 그에게 있어서 분리될 수 없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 의 구체화를 위한 열쇠이다. 그것은 사랑의 기본법이며 이성의 기본법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비그리스도인과 같이 만드는데 유효하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항을 비텐베르그 대학교회인 성교회의 문에 내어 걸었는데, 여기에 나타난 43항에서 51항까지의 내용은 면죄부를 살 것이 아니라 이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이웃사랑의 실천을 강한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루터는 하나님 자신에 대하여 사변적으로 아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맺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성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진정한 기독교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고난 속에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단순히 신적인 덕, 경건, 지혜, 의, 선 등을 아는 것만으로는 영광의 신학에 불과한데, 십자가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인간성, 연약성, 어리석음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파악하는 역설이 핵심을 구성한다고 하였다.


3.3. 새로운 생활형태로서의 디아코니아


루터에게서 디아코니아는 믿음의 분명한 열매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걸행위(Bettel)는 „하나님의 질서와 계명의 모든 위반의 기본스프와 수집이며, 모든 악덕의 시작이며, 탐욕의 뚜껑이며,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친절을 베풀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로부터 친절을 받기를 원하는 이웃사랑에 대항하는 것이다. “ 구걸행위는 인간의 가치에 저항한다: 구걸행위는 직업교육과 노동창출을 통하여 나쁜 혐의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즉 질병과 부양자의 죽음 등을 통하여 운명적인 가난의 타락에 빠져 있는 것 둘 중의 하나이다. 즉 사회가 질서 있는 형태 안에 있는 생명의 부양을 안전하게 하는 것에 의무적인 것이다. 많은 도시들에 이미 잘 정리된 빈민구호의 출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그의 디아코니적인 신학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회가 성취시킨 사회적인 권리를 증진시키는 한 사회복지의 타개를 목표로 하였다. 루터는 경제와 교회공동체와 그리고 정치공동체의 범위에 있는 수많은 관료들에게 그들이 창조의 전체세계에서의 봉사자로서 더 향상시켜야 할 특별한 강조점을 주고 있다. 이 신분과 그들의 직분자들은 루터의 신학에서 „기독교사랑의 공동체적인 기사단“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 이 사랑은 계급과 같이 창조적인 법조문이 아니고, 그의 지체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왕국의 기능인 것이다.


루터는 모든 사람들의 신분을 세 가지 삶의 영역과 연관하여 첫째, 교회공동체(kirchlichen Gemeinde:status ecclesiasticus), 정치공동체(politischen Gemeindewesen: status politicus), 경제공동체(Ökonomie:status oeconomicus), 의 영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그 신분으로서의 삶이 전체 피조물을 위한 섬김의 삶으로서의 의미로 평가하는 특별한 강조를 나타내고 있다. 즉 루터의 신학에서 그들의 신분과 직분은 „기독교적인 사랑의 세속적인 단체“와 같이 여겨진다. 이 사랑은 신분과 같은 창조에 의한 법령이 아니고, 그리스도왕국 안에 있는 기능이다. 그 사랑은 의무성취를 위하여 도우며, 동시에 이웃사랑을 능력 있게 하며, 세상에 있는 필연적인 고난을 책임진다. Status ecclesiaticus (교회공동체적 신분)은 영원한 의와 영원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생동감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것에 반하여 status politicus(정치적인 공동체의 신분)는 시대적인 정의와 평화와 생명의 생산, 수령, 향상에 관한 세상적인 관료와 직분에 관한 것이다. Status oeconomicus(경제적 신분)에서는 생물학적인 삶의 토대의 보호와 향상, 창조와 가정과 노동과 생계에 있어서의 봉사에 관한 문제이다.


3.4. 루터의 3중적 디아코니아


루터는 1519년의 성만찬에 관한 설교에서 기초적인 삶의 실행에서의 서로 나눔은 기쁨과 초대교회적인 공동체의 강함을 형성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므로 각자는 자기의 슬픔을 교회로 가져오고, 영적인 몸의 전체 무리에게서 도움을 찾아야 한다. 상호적인 봉사는 살아있는 교회, 잠재적으로 교회의 모든 지체들, 즉 그들의 만인사제(allgemeine Priestertum)의 힘 , Diakoninnen und Diakone, 의 표시라고 하였다. 루터에게서 디아코니아의 일은 그 봉사위탁이 새로운 창조와 화해된 세상의 기본요소가 되는 것과 같을 만큼 „화해의 디아코니아“와 „그리스도의 정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구체적인 신분관계와 남자집사와 여자집사 직분으로 있는 것이다. 루터에게서 디아코니아는 J. H. Wichern이 그에게서 영향을 받고 주장했던 3중적인 디아코니아(dreifache Diakonie)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기본적인 디아코니아인데 기초적인 삶의 영역과 가정과 직장의 환경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에 관계된 디아코니아인데 개교회적 차원의 믿음과 배움의 훈련에서, 형제적인 기독교적 일치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인 의미에 맞는 세상의 갱신차원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셋째는 지방자치적, 정치적인 디아코니아인데 재난, 기아, 질병의 원인에 투입하고, 도시(지방자치공동체)의 시민들을 위하고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다양한 지방공동체들의 공존을 위한 공급, 안전, 생명가능성의 역동적인 발전에서의 그들의 긍정적인 과제들이다.


3.5. 루터의 종교개혁과 디아코니적 의미


루터의 종교개혁사상은 사회봉사의 면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는 평을 할 수 있다. 루터의 믿음과 사랑에 대한 분명한 구별은 믿음에는 확실성을, 사랑에는 자유를 회복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로부터 그리스도에게 돌려져야 할 것과 이웃에게 바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서 자신을 넘어 하나님께 이르고, 하나님으로부터는 사랑을 통해서 다시금 자신에게 돌아온다.“ 고 했다. 루터는 „믿음의 열매가 사랑“이라고 하면서 행위의 무리한 요구나 법칙성을 경계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나 업적을 보아 의롭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은총의 말씀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복 주시는 것이라고 했다. 집사들에게는 짐을 덜어주기 위하여 본래적인 사명에만 충실하라고 부탁했다. 즉 집사들이 예배 시에 강단에 올라와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으며, 그 대신 물질을 나누어 주고 아픈 사람들을 돌아보고 결핍된 자들과 고통 당하는 이들을 찾아보라고 했다. 사회봉사를 직업적으로 담당하는 요원들의 짐을 덜기 위해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교회에서 이웃에 대한 도움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루터는 사실상 모든 교회가 사회봉사기관을 설치하고 국가기관의 도움 없이도 봉사의 책임을 스스로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행정이 교회사업을 독립해서 수행하는 것까지 주장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까지는 못했다.


믿음과 사랑의 연관성에 있어서의 기본적인 의미부여, 즉 모든 믿는 자들의 만인 제사장설의 형제관계(Bruderschaft)는 종교개혁의 커다란 업적이다. 교회적인 디아코니아와 루터가 크게 칭찬한 고대 기독교적인 모범이 된 디아코니아에로의 걸음은 성취되지 않았다. 루터는 처음에는 우리 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종교개혁자 루터는 소심해서 결단성이 부족했던 것 같고 많은 경험들이 그를 실제적으로 두렵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공무원으로서의 관리적인 조정권을 가지고 있는 시에 의한 디아코니아는(Städtische Diakonie) 더 이상 차단될 수 없었다. 도시공동체(지방자치)와 교회공동체는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의 중립적인 해결을 모색하고 찾았던 것이다.

투레의 역사적 기술에 의하면, 종교개혁시대에로의 이행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여러 지역의 교회들에서 상이한 상황들이 전개되었다. 그 시대의 사회봉사기관들이 그대로 유지되기도 했다. 새로 창립된 개신교회들은 특히 농민전쟁 으로 어렵게 된 농민들의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사제들의 특권의식과 수도원의 부정들을 고발하고 비판함으로써 루터는 결과적으로 사회봉사의 기능을 수행하던 수도원을 없애버리게 되었다. 사회사업기관들 중에서 시나 마을에 건립했던 시설들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시의회나 마을 행정기관들이 교회의 행정에 예속하지 않고 이들을 관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교회가 경영하던 큰 기관들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개개의 도시나 마을들이 종교개혁의 편에 서게 되고 나서는 병원이나 빈민원 등을 자기의 관할 하에 두게 되었다.

3.6. 교회법과 디아코니아

새로운 교회법들이(특히 Bugenhagen법) 제정되면서 사회적 책무를 규정하는 법들도 생기게 되었다. 예를 들면 1522년에 나온 비텐베르그 헌금규정(Wittenberger Beutelordnung) 에 보면 모든 예배 때에 연보대(Beutel)를 돌려 헌금을 모아 빈민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조해 주고 모든 결핍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되어 있다. 1532년의 라이스니히 구제함 (Leisniger Kasten Ordnung)은 그곳 시의회의 요청으로 루터가 함께 참여해서 만들었는데, 모든 부동산 기금에서 나오는 수입과 헌금들을 하나의 모금함(Kasten)에 모아 가난한 이들의 구제에 쓰는데 열 명의 이사들이 관리하도록 규정되었다. 이 구제함법이 유명해지면서 루터는 이를 빈민구제의 모델로 삼으라고 권장했으며 이 영향으로 독일 동부의 여러 도시들 (마그네스부르그, 브레스라우, 쾨니스베르그)과 뉘른베르그, 스트라스브르그, 아우그스부르그에 까지 파급되었다. 도시들마다 인정할 만한 사회구제사업들이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곧 한계가 드러나게 되었다. 구제함에서 나온 돈으로만은 모든 빈민을 돕는다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루터의 교리에서 분명히 밝힌 봉사의 가르침들이 개신교회에서 그렇게 효과적으로 실천되지 못했다. 게다가 개신교회들은 빈민에 대한 봉사의 과제와 함께 학교의 설립이라는 새로운 사명감을 강렬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선사업에다 교육사업이 덧붙여진 것이다. 교육봉사(Erziehungsdiakonie) 는 사실 루터가 청소년들의 교육과 인격 형성을 교회의 중요한 과제로 상정한 데에 근원적인 뿌리를 갖고 있다.


유명하게 된 것은 die Witternberger, die Leisniger, die Altenburger, die Nürnberger Kastenordnung (비텐베르그, 라이스니히, 알텐부르그, 뉘른베르그의 구제함규정)이다. 루터가 하나의 과도기를 위한 재난해결방법으로서 노력했던 것은 무력화되었으며, 이 빈민구제규정에 있어서 지도적으로 참여했던 시행정당국의 대표들은 맨 처음에는 그들에게 가까이 놓여있는 기독교일반적인 입장으로서의 시행정의 중요한 관심사인 것으로 생각했다. 라이스니히 구제헌금규정에서 루터가 농부들을 포함한 모든 신분들로부터의 징수의무를 원했을 때, 그것은 처음부터 올바르게 수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개신교적인 도시들에서 하나의 새로운 차량과 계획이 생겨나고 그리고 사람들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부양을 다르게 그리고 진지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여 새로운 용기를 창조했다. 왜냐하면 오래된 구빈원들이 거의 다 과포화상태이고 사람들은 새로운 길들을 계획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집(성전, 교회)에서의 헌금 수입들과 세상적인 입장으로부터 단순하게 계산되어지지 않았던 수도원부동산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수입들은 최악의 재난을 경감시키고, 마지막 자포자기 이전에 지켜주기를 원했던 교회적-시민적 디아코니아를 끌어올리는데 도달하지 못했다. 제국도시들의 가난하게 된 것은 세계무역의 빗나감과 교회를 완전히 가난하게 만들었던 30년 전쟁에 이르기까지의 정치적인 재난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복지적인 과제로부터 그리고 국가 내지는 도시국가의 순수한 관심사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차단되었다. 공적인 사랑의 행위는 거의 완전히 이 시당국적인 행정에 맡겨졌다. 기독교적 공동체(교회)는 시립 내지 국립적인 주무관청이 그들의 이 과제를 빼앗아 간 것에 적응했다.


3.7. 라이스니히 공동체금고


라이스니히의 공동체 금고는 맨 처음에는 시교회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된 네 개의 성을 가지고 있는 금고였다. 이 규정은 물론 그들의 재산을 뜻하는 그 성들의 내용의 전체 행정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지역공동체금고라고 불리운다. 행정은 확실히 시의회의 회원들의 손에 놓여 있었으며, 기독교적인 공동체(교회)에 속하는 다른 세상적인 주인들이었다. 자주 목사들이 이 공동체금고의 행정에 관계되었다. 라이스니히 공동체금고를 위한 규정은 공동체를 통한 목사선발의 종교개혁적인 요구를 제일 중요한 자리에 놓았다. 수입들의 계산은 중세후기적인 조세의 다양한 모습에로 눈을 돌리게 한다. 많은 걸인그룹들이 도시들과 시골에 편만했던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동시에 인적 사례비, 건축비, 이 규정의 지원 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이고 있다. 공식적인 계산법이 공동체의 강력한 협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 라이스니히 공동체금고규정은 무엇이 종교개혁운동의 안내를 공동체에 새로운 모습에로 가져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된다. 루터는 그가 이 규정을 제목 밑에 서명함으로써 그의 동의를 나타내었다.


몇 가지 중요한 내용들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Benediktiner, Zisterzienser, Cölestiner와 같이 도시 밖에 있는 수도원들에 대하여 가장 좋은 방법 첫째로는 사람들이 그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들이 원할 경우에는 복음이 그것을 허락하는 것과 같이 밖으로 나가게 하고, 서로 자유롭게 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당국이 그의 수도원들을 통합시키는 것인데 인적 자원은 증가시키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믿음과 복음에로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도원에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나이와 먹는 것과 양심을 위하여 불친절하게 그들을 내몰지 말고 그들의 생명을 오래 즐기게 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당국이 취한 이 수도원들의 재산은 세 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첫째는 사람들은 그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생계를 돌보아야 한다. 둘째는 사람들은 수도원을 떠난 사람들을 그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하고 어떤 신분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얼마 만큼의 액수의 돈을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일평생의 생계부양급료를 떠났기 때문이다. 셋째는 사람들이 모든 모든 나머지 사람들을 공동체기금의 하나의 공동재산을 얻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공동체기금은 사람들이 기독교적인 사랑에 의하여 지방에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귀족이나 시민이나 사람들이 기금계약과 뜻을 성취하고자 주기도 하고 빌리기도 하는 것이었다.

3. 이 운영방법은 지방과 도시들과 다른 재산들이 속해 있는 주교(감독)권, 재단, 자본에 대한 자리에 있다. 왜냐하면 이 감독들과 재단들은 감독도 아니고 재단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사실상 영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주인들이다.

4. 수도원들과 재단들의 재산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성직자들의 녹(사례비)이 아주 많이 지금 모든 세상에서 „재판매“라고 불리는 소작료(공물세)에 기인했다. 이 재산을 사람들이 계약적으로 유언으로 양도한 재물들을 소작료나 공물과 같이 분리시켜야만 한다.

5. 도시들에 있는 탁발수도원으로부터 소년 소녀들을 위한 좋은 학교들을 만들 수 있다. 나머지 수도원들로부터는 사람들은 도시가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집들을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감독들을 통한 봉헌은 그것들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규정들의 제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거룩하고 나누어지지 않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아멘, 목사직의 임명 (자유롭게 선택), 하나님의 말씀의 청종, 하나님의 영광과 계명의 보호, 걸인지역의 극복, 탁발수도승과 입양의 처리(구걸 못 하게), 외국인 학생들의 구걸의 처리, 걸인의 처리(아무도 도시나 시골에서도 교회지역에서 구걸하지 못하게 함), 공동체금고로부터의 지출과 부양, 목사직을 위한 지출, 음식의 수입과 빈민금고와 기부금함에서의 돈, 공동체금고의 행정, 네 개의 상이한 성들을 가진 금고의 폐쇄, 지도자는 매 주일에 함께 있어야 한다. 모든 수입과 부채, 두 사람 건축가의 직책, 외국부채의 처리, 목사직의 재산과 헌물의 수입, 형제관계로부터의 수입, 성물 간수인을 위한 지출, 학교를 위한 지출, 범죄자와 가난한 노인들을 위한 지출, 공동체금고가 매년 행해야 할 과제들, 매년 3회의 공동체 전체 총회의 회집, 의장을 통한 완전한 매년 결산의 시행, 고아와 가난한 아이들의 부양에 대한 지출, 수치스러워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양, 외국인의 부양, 건물의 유지와 세움에 대한 지출, 공동의 저장을 위한 곡물매매에 대한 지출, 새로운 의장의 선출 등.

1523년 라이스니히에서.

비텐베르그 규정은 1522년 1월 24일에 확정됨


4. 칼빈과 디아코니아


칼빈과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있어서의 디아코니아와 집사직에 관한 가장 대표적인 학문적인 연구업적은 프린스턴신학대학교의 맥키교수(Elsie Anne McKee)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그의 책 ‚Diakonia in the Classical Reformed Tradition and Today’ 는 오늘날 독일에서는 하이델베르그 대학교 디아코니연구소에서 ‚Erneuerung des Diakonats als ökumenische Aufgabe’ (에큐메니칼적인 과제로서의 집사직의 갱신)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한국교회에서는 ‚개혁교회 전통과 디아코니아’ 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었다.


4.1. 칼빈주의 개혁교회 전통의 복수직제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전통에 있어서 근본적이면서 변함이 없는 두 가지 직무는 예배와 실천적인 봉사를 위한 대표적인 지도자인 장로와 집사이다. 영적인 필요를 보살피는 장로와 세속적인 필요를 보살피는 집사는 각기 예배의 지도력과 이웃을 섬기는 지도력으로 서로 다른 역할을 감당해 오고 있는 것이다. 장로와 집사는 일정한 공동의 은사를 필요로 하지만 이 두 기능은 서로 다른 은사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한 개인은 이 두 가지의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한 가지의 직무에만 집중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나님의 용서와 칭의의 은총을 선포하는 것은 중생과 가난한 자에 대한 봉사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장로의 기능이 우선적이었다. 그러나 이웃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장로는 목사와 함께 성도들의 일상의 삶을 감독하기 위해서 선출된 평신도 교회지도자였다. 그들은 분쟁의 해결을 돕고, 상담하고, 권고하고, 삶과 신앙에서 견책이 필요한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꼭 필요한 때에 치리했다. 칼빈주의 개혁교회 신학자들은 권고하는 것과 교정하는 일은 단순히 국가에 위임할 수 없는 교회의 필수적인 교역의 기능이라고 주장했고, 집사직은 더 이상 신부들의 예배보조자가 아니라, 그들의 직무는 가난한 자와 불행한 자들을 돌보는 교회의 교역이며, 교회 안에서 영구적이어야 하는 직제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칼빈주의 개혁교회들 사이에서 발전된 복수직제의 교리는 목사, 교사(신학박사로서 신학교 교수를 의미함), 장로, 집사의 사중직이 되었다.


4.2. 디아코니아 직제의 다양성


여러 교파의 전통들은 디아코니아를 위한 교회의 가시적 구조의 필요성에 대해서 각기 다른 다양한 모습을 띄고 있다. 일부 교파에서는 빈민구제를 위하여 일하는 집사들을 두지 않기도 했다. 카톨릭교회는 집사란 명칭을 예배를 위해 일하는 직무로 사용했고, 사회적 관심에 대한 책임을 어떠한 특수한 직무에 부여하지 않고 디아코니아 기능을 모든 기독교인에게 확산했다. 루터파와 쯔빙글리파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디아코니아를 실행하기 위한 집사직을 설립하였으나, 이러한 봉사직무는 평신도 지도자인 기독교인 국가 통치자에게 양도되었다. 결국 이러한 복지기능은 교회적 기능이 아니라 단순히 시의 기능으로 이해되었다. 자신들의 공동체가 시민사회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를 원했던 급진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한 집사직을 설립하였지만 더 확대된 사회를 위해 사회복지 기관들과 관계를 맺는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교회는 세상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다는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해석은 정부의 복지 프로그램과 겹칠 수 있는 교회의 디아코니아 직제이론을 이끌어 내었다. 당시에 시의 복지기관들과 협력할 수 있었던 교회의 집사제도를 설립한 것은 실천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집사직제에 대한 칼빈주의 개혁교회의 이해는 이론적으로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는 상황에서도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고, 실천적으로 인간복지를 위해 비교회적인 조직들과도 협력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세계의 지구촌 안에서 윤리와 예배를 온전하게 연결시키기 위한 최고의 유형 중 하나를 제시한 것으로 맥키교수는 보았다.


4.3. 제네바의 상황과 칼빈주의 집사직제


제네바는 서구 유럽의 프랑스, 이태리, 독일어권 영역들의 무역교차로상의 작은 도시-국가였다. 1530년대에 제네바는 영주주교를 거부하고 스스로 프로테스탄트 도시로 선언했다. 새로운 자치도시가 된 제네바는 자선단체들을 중앙집권화 하고 분리되어 있었던 중세적인 자선기관들을 1535년에 새로운 병원(General Hospital)로 대체했다. 과거의 기부재산들이 병합되었다. 그러나 제네바는 프로테스탄트 도시가 되기 위한 투쟁의 대가로 농촌지역의 많은 부분을 이웃 나라인 사보이(Savoy) 혹은 베른(Bern)에 빼앗겼기 때문에 그 기금의 가치는 다소 축소되었다. 제네바 정부는 병원의 재정을 모금하는 책임이 있었고, 이러한 자금들이 때때로 국가 재정의 나머지와 혼합됨으로써 정부는 자선제도의 주요 지원자가 되었다. 결코 세금이 법제화 되지 않았고, 자발적인 기증이 격려 되었고 구걸은 엄격하게 금지 되었다. 칼빈은 제네바시의 복지운영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칼빈은 목사로서 또한 관심 있는 시의 거주자로서 정부의 복지정책이 잘못 운영된다고 믿었을 때 관계 당국자들에게 불만을 표시하였다.


제네바시로 프랑스 등지에서 피난을 온 위그노파 피난민집단들은 제네바시민들을 위한 시 빈민구제제도에 상응하는 자원봉사조직으로 비제도적인 형태의 집사직무를 조직화 하였다. 가장 초창기에 세워졌고 잘 알려진 난민 자선기금은 ‚프랑스기금’(Bourse française)이었다. 이것은 프랑스어를 말하는 피난민들에 의해 조직된 핵심자금 혹은 계정이었고 그들이 선출한 사람들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칼빈은 이 자금의 강력한 후원자였고 자주 후원금을 기부했다. 난민들은 집사직무를 감당하는 사람의 임무를 시 빈민구제 제도와는 약간 다르게 구분했다. 즉 제도화된 공적 복지제도와 비제도적인 자발적 단체 양쪽은 곤경에 빠진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재정을 관리하고 친히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개혁교회 전통의 집사직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즉 국가공무원으로서의 공식적인 복지제도의 집사직과 비공식적인 사적인 복지를 맡았던 직분도 모두다 집사직으로 불렀고 인정되었던 것이다.


4.4. 16세기 집사직의 일반적 이해


16세기 중세 후기의 전통적 집사는 예배에서의 신부의 조력자였다. 집사직제는 그 본질적인 정체성을 잃었고 대체로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과정의 한 단계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어를 사용하는 개신교인들 특히 쯔빙글리 개혁교회 전통은 목사의 보조자에게 ‘집사’라는 이름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움이 필요한 빈민들을 보살피는 일을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평신도 지도자로서 이해되는 시의 구호담당 관리에게 위임했다. 또한 집사라는 명칭은 때때로 시의 복지를 관장하는 관리자에게 사용되었다. 일부 재세례파공동체들 가령 후터파(Herrnhut)는 그들의 ‘말씀의 집사’와 병행하여 물질적 필요를 담당하는 집사제도를 설립했다. 물론 재세례파는 시의 빈민주제 제도와는 아무런 관련도 갖지 않았다. 칼빈주의 개혁교회 전통은 거의 예외 없이 집사명칭을 교회의 직제로서 유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직제의 임무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프로테스탄트 유형으로 재규정했다. 시의 구호담당 관리들은 실제로 교회의 집사로 인정되었고, 국가 당국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수행하지만 우선적 지위는 교회의 교역자였다. 칼빈주의 개혁교회 전통의 집사직무는 그 근본적인 기능이 교회적이기 때문에 비제도적인 형식에서도 기능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집사들은 국가의 복지담당 관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국가의 권한 안에서도 존재할 수가 있었다.


4.5. 집사직무에 관한 칼빈의 이해와 가르침


집사의 직무에 대한 칼빈의 가르침을 단순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돌보는 영구적인 교회의 직제 또는 인간의 육체적 고난에 대한 몸 된 교역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이후에 완전히 발전된 집사직무는 장로, 목사, 교사에 이어서 네 번째에 오는 교회의 직제로 이해된다. 한 개인이 평생 동안 활동하는 집사로 있을 수는 없지만, 직무로서 집사는 꼭 필요하고 영구적인 것이다. 칼빈은 집사직무가 두 가지의 주요한 기능을 갖는 것으로 이해했다. 즉 재정의 모금과 관리, 그리고 실질적이고 물질적이고 직접적인 보살핌이었다. 칼빈은 이러한 과제를 봉사인력의 두 종류 관리자와 보살피는 자 혹은 남자와 여자의 일로 구분했다. 남자집사들은 여성보다 우위에 있었고 안수를 받았다. 나이든 과부가 여성집사로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주로 어려운 사람들이었고 교회를 섬기면서 교회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집사직무를 영구적인 직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칼빈은 주 종류의 집사의 역할을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첫번째 집사는 구제물품을 나누어 주는 집사이고, 두번 째 집사는 빈민과 병자를 돌보는 집사였다. 여성들은 빈민을 돌보는 것 외에 다른 공적인 직무를 맡을 수 가 없었다.


칼빈은 목사 교사 집사에게 안수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그것을 재건하지 못한 것을 유감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딤전3:13에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에서 아름다운 지위를 장로로 승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도리어 집사의 충실한 봉사에 대한 칭찬의 의미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칼빈은 집사직무가 때때로 장로로 선출되는 양성소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집사직을 잘 수행하는 자들은 적지 않은 명예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고상하고 명예로운 직무이기 때문이다. 빈민과 병자를 돌보는 교회의 직제는 영구적 직무로 지정되었다. 그러므로 칼빈과 그를 따르는 개혁교회 전통에서 빈민과 병자를 돌보는 집사의 직제는 필수적인 것이고 영구적인 직제가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서 16장의 뵈뵈와 디모데전서의 과부들을 성도의 구체적인 필요에 대해 친히 봉사를 행할 책임을 지닌 집사들로 함께 연결함으로써 로마서 16장과 디모데전서 5장의 문제를 해결했으며, 그래서 칼빈은 뵈뵈와 과부들을 병자와 빈민을 친히 돌보는 책임을 지닌 신약성서의 여성집사로 이해했다. 과부들에게는 안수를 하지 않았는데 칼빈도 당시 문화적인 분위기에서 문화적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여성의 예절 바른 공적인 활동과 역할은 오직 병자와 가난한 자를 돌보는 보호자 역할이라고 보았다.


4.6. 종교개혁 이후의 디아코니아


16세기의 종교개혁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난 뒤에 이어서 개신교정통주의신학이 생겨났다. 정통주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1555년 아우구스부르그 평화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 스위스 개신교도들의 신조(Formula consensus Helvitica)가 체결된 1675년까지의 약 120년간의 기간으로 본다. 신학적 관점에서 루터와 칼빈의 신학은 정경화가 되었고 모든 개혁교회의 신앙의 판단기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정통주의신학은 카톨릭 스콜라주의처럼 매우 고착화된 형식주의였으며, 매우 보수적인 입장이었다. 따라서 정통주의는 사변적이고 전통을 중요시 여겼다. 엄격한 규율에 의한 삶과 배타적 비관용, 교회와 국가간의 엄격한 분리원칙 등이 그 특징이었다. 이렇듯이 종교개혁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난 뒤에 개신교 종교개혁에 뿌리를 두고 그 영적인 활력을 새롭게 회복하고자 했던 운동이 곧 경건주의 운동이었다.


독일에서는 ‘진정한 기독교’를 써서 경건주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쳤으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함께 가야 하는 것을 주장한 요한 아른트(Johannes Arndt, 1555-1621)를 시작으로 하여, 그리스도인들의 생활하는 신앙 곧 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경건한 열망’(Pia desideria)에서 주장한 스펜너(Philipp Jacob Spener, 1635-1705), 시설중심의 디아코니아의 모델을 만들었던 프랑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헤른후트(Herrnhut:주님을 주시한다. 혹은 주님의 감시를 받는다는 뜻)라 불리우는 작은 마을을 만들어 경건한 이상을 실현하며, 많은 선교사들을 양육 파송하고, 철저한 디아코니아적인 생활공동체를 모라비아 사람들과 함께 ‘구세주의 마을들’로 건설했던 진젠도르프(Nikolaus Ludwig von Zinzendorf, 1700-1760)백작을 거쳐서 독일교회는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이루어 진 사회변동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독일교회는 19세기의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개교회의 목회자의 조력자로서 여성봉사자(Diakonissen)들을 간호사로 양육하여 지역교회와 사회를 봉사하게 했던 플리드너(Theodor Fliedner, 1800-1864)목사와 남성중심적인 디아코니아를 중심으로 독일교회 디아코니아와 사회선교의 선구자와 아버지로 불리우는 뷔헤른(Johann Hinrich Wichern, 1808-1881)을 통하여 교회의 디아코니아와 사회선교적 조직과 체계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뷔헤른이 일찍이 각성운동의 영향을 받고, 주일학교운동에 뛰어 든 이후 직접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생겨난 도시화현상에서 거리에 방치되어진 불우한 청소년들을 수용하여 기독교적 사랑으로 생활공동체를 이루어 가면서 훌륭한 직업인과 봉사자와 사회인들로 키워낸 라우에하우스(Rauhehaus)의 경험을 통해서 독일교회는 사회선교(Innere Mission)의 전국조직망(C.A: Cenralausschuß der Inneren Mission)을 구성하고 그 이후 150년이 넘게 지금까지 활발한 섬김의 사역을 조직적으로 전문화하여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 오고 있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사상으로부터 이어지는 독일 개신교회의 오늘의 디아코니아 신학은 디아코니아의 기초와 위탁과 희망으로서의 화해를 중요시 여긴다. 화해의 복음은 곧 디아코니아의 과제가 되고 있다. 디아코니아가 고통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구체적인 섬김의 행위를 통해서 기독교적인 사랑의 행위를 나타낼 때에 거기에는 화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진정한 화해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복음전파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디아코니아를 필요로 하고, 교회는 그들의 디아코니아를 소멸시키지 않기 위하여 복음전파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디아코니아 섬김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으며,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본 논문은 개혁적 측면에서의 입장에서 본 개신교회와 한국교회의 문제점을 정리한 것으로서 Nyskcism과는 달리 현실을 직시한 것이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일뿐 Nyskcism 전체의 사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 둔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