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skc Movement 와 영적부흥
예루살렘 신앙의 재건(느8:1~13:31)
1. 영적 부흥(8:1~10:39)
1) 말씀에 의한 영적 부흥(8:1~18)
2) 회개에 의한 영적 부흥(9:1~38)
3) 언약 갱신에 의한 영적 부흥(10:1~39)
가) 언약을 세우고 인친 자들의 명단(1-27)
나) 남은 언약 백성들의 맹세(28-39)
(1)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30).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다(31).
(3)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32-39).
들어가는 말
예루살렘에 정착한 백성들은 성벽재건에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계속 재건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외면적인 재건이 아닌 내면적인 재건이었습니다. 이 내면적인 재건에도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는 말씀에 의한 부흥, 회개 운동 마지막으로 주어진 계명에 순종하겠다는 서약 운동입니다.
느 8장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마음에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나아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기쁨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9장에서 백성들은 더 깊은 영적인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더 큰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생활 태도를 바꾸고, 자기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역사하여 모든 백성이 자기의 죄 뿐 아니라 조상들의 죄까지 함께 회개했습니다. 그때 일어난 마음이 바로 "하나님과 새롭게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거기에 인을 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느9:38)."
죄를 철저하게 고백한 자들에게 위대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더 확실한 것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헌신 작정서'에 서명 날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언약서를 세워 기록하고 그 위에 자필로 서명 날인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를 회개하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삶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 수 없고, 이 수준에서 머물 수 없다는 강한 결단입니다. 나는 자라나야 하고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한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본 론
1. 언약을 세우고 인친 자들의 명단(1-27)
이제 본문 10장은 그 인친 자의 명단과 나머지 백성들의 맹세를 기록합니다. 본문 1-24절까지 말씀은 그 인친 자의 명단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본문 1절입니다.
"그 인친 자는 하가랴의 아들 방백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느10:1)"
본문은 그 인친 자의 명단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습니다. 본문은 1) 제사장 그룹(1-8) 2) 레위 사람들(9-13절) 3) 백성의 두목들(14-27절)로 나누어집니다. 이 사람들은 백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리더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느헤미야를 선두로 하여 모두가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일에 헌신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교회의 주목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헌신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이 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만드는 영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지도자가 안일한 마음을 품고 매사에 적극적이지 않을 때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모든 공동체가 안일한 마음을 품고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로 세워진 사람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신 목적은 공동체를 안일하게 만드시고자 함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헌신하는 공동체를 만드시고자 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남은 언약 백성들의 맹세(28-39)
백성의 지도자들의 언약대로 살아가기로 서약했을 때 나머지 백성들이 이에 동참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이들은 그 언약서에 서명하지는 않았지만 이 언약에 동참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본문 28-29절입니다.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 아내와 그 자녀들 무릇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가 다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로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느10:28-29)"
'그 남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 형제 귀인들을 좇아" 지도자들이 서약한 맹세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도자들의 솔선수범이 남은 자들을 의로운 길로 이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언약백성들은 언약에 동의하고 언약을 준수하게 됩니다. 언약을 알고 동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언약을 준수하고 삶을 바꾸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자가 바로 진정한 언약백성이요 Nyskcian 입니다.
오늘 본문에 "무릇 지식과 총명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 세상과 죄악을 즐기면서 자기를 지식과 총명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말씀대로 사는 자들을 조롱하며 총명이 없다고 비난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율법을 좇아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기로 다짐한 자들을 가리켜 '지식과 총명있는 자'로 인정합니다. 참된 칭찬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법입니다.
"그들은 저주로 맹세하였습니다." 이 말은 언약한 내용대로 준행하지 않을 때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고 맹세했다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서에는 항상 "축복과 저주"가 기록되었습니다. 이 언약을 준수할 때에는 축복이요, 이 언약을 준수하지 않을 때에는 저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그 시대적인 말씀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에도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각각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 것에서 나타납니다. 바로 오늘 백성들이 저주로 맹세했다는 말은 내가 반드시 이 언약대로 살 것이라는 강한 다짐을 나타냅니다. 언약을 어길 경우에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백성들의 맹세는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1)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30).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다(31). 3)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32-39).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결혼, 안식일 그리고 성전 문제였습니다.
1) 이방인과 통혼하지 않겠다(30)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느10:30)"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는 이미 출애굽 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이 유대인들에게 치명적인 것은 그들로 우상숭배에 빠지게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방인과의 결혼은 언약백성들에게 믿음을 빼앗을 수 있는 위험한 장난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도 신앙의 유산을 물려줄 수 없는 분위기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것만 다를 뿐 완전히 영적인 이산가족인 셈입니다.
이것보다 가장 근본적인 위협은 순수한 혈통을 유지할 수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을 통해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그 혈통을 더럽히고 그리스도도 탄생할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그런데 언약백성들이 하나님께 보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보조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불신결혼의 문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 메면서 사랑을 운운합니다. 그리고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신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이 정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문제로 교역자들이 더 이상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한 하나의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통계자료에 의하면 신자가 불신자와 결혼해서 전도한 예는 극히 적습니다. 도리어 신자가 불신자의 영향을 받아 믿음의 길을 포기하는 예가 더 많습니다.
불신결혼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축복으로 시작한 결혼이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에서 견해가 다를 때에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충돌은 급기야 서로 이혼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이산가족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의 불신결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을 보시면 "우리 딸, 우리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혹은 우리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부모가 자녀의 결혼 문제에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내 자녀를 불신자들에게 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히12:4)."
2)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겠다(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느10:31)"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아마도 이방인들은 안식일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다른 날과 동일하게 사회활동을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년을 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성경적이며 회복을 이루려는 당연한 신앙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NYSKC는 영적회복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영적회복을 이루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행동의 표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역을 통해 필수품의 부족한 부분들을 보충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성벽재건을 하는 동안에도 이러한 교역은 안식일에도 계속되어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매매 자체를 안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안식을 방해할 정도로 상업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언약의 백성임을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였습니다. 이방인들 중에 그 누구도 안식일을 구별해서 지키는 민족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들밖에는 없었습니다. 이 날은 사회활동을 쉬면서 영적인 것들을 깊이 생각하는 날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이 땅에 특별한 소명이 있는 사람들임을 매주 상기시켜주는 날입니다.
지금도 성수주일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더 이상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행동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약시대이나 신약시대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교적인 사명 중에 하나가 주일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NYSKC 이며 Nyskc Movement가 추구하는 중요한 행동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백성임을 고백하는 날이 성수주일이며 또한 안식년을 바로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인들로 하여금 언약백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날입니다.
당시 뿐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보면 안식일을 제대로 지킨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것은 계속된 선지자들의 책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강한 책망에도 불구하고 안식일을 계속적으로 범하였습니다. 안식일을 범함으로 나타난 결과는 여호와께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내가 언약의 백성임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7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이것은 안식년 제도를 지키겠다는 서약입니다. 안식년 제도가 필요한 것은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1) 땅을 쉬게 하여 땅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2) 휴경지에서 자라는 곡식을 가난한 사람들이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년 제도는 땅을 위해서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를 현대에 적용한다면 매 7년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전 수확물을 기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제도는 7년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모든 빚을 탕감하려고 결정합니다. 이렇게 사회전체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 기회를 제공할 때 그들은 힘을 얻어 생활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 제도를 불신자들과 함께 지내는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적용하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힘들겠지만 7년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풍성하게 구제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리함으로 형제자매 중 핍절한 사람이 없도록 돌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지체들을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 제도와 안식년 제도는 내가 언약백성임을 만민에게 선포하는 중요한 제도입니다. 안식일을 지킴으로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특별한 소명이 있음을 선포합니다. 안식년을 지킴으로 언약백성의 공동체가 세상 공동체와는 구별됨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충분하게 드러나는 제도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언약백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3)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32-39).
오늘 본문은 "우리 하나님의 전"이라는 표현을 9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삶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은 네 가지 분야에서 이뤄집니다. 1) 성전사역을 위한 지원(32-34) 2) 첫 열매들(35-37a) 3) 십일조(37b-39)입니다.
가) 성전사역을 위한 지원(32-34)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느10:32-33)"
모세는 회막 봉사를 위해 20세 이상은 반 세 겔씩 내도록 규정했습니다(출30:11-16). 이것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시켜서 내도록 한 세금액과 일치합니다(마17:27). 하지만 오늘 백성들은 1/3 세겔씩 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식민치하에서 어려운 상황을 고려하여 임시적으로 조정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이 세금은 어디에 쓰였습니까?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그러니까 성전에서 사역하는 모든 일에 쓰이도록 하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역을 위해 사용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맹세 가운데 예배와 교회 사역을 위한 후원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오늘 이 본문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예배와 사역의 후원을 적극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언약공동체의 지체들은 예배와 선교사역을 위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마음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율법에 기록한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사르게 하였고(느10:34)"
또 그들이 성전 사역을 위해 지원한 것은 번제에 필요한 나무장작이었습니다. 모세는 레6:12-12에서 "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하라"고 율법에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나무를 백성들이 어떻게 성전에 공급해야 하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순서를 정해서 나무를 공급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했던 것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매일 죄를 지었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매일 끊이지 않는 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위해 매일 상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 제사로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 위의 불을 항상 피우는 것은 당시에 지키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 모든 일을 제비를 뽑아 각기 종족대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정한 기한에 나무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대로 여호와의 단에 사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위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은 그 당시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핑계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적당히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힘들지만 서로 힘을 나누어서 이 명령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요세푸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많은 양의 나무를 조달하기 위해 압월 14일에 거국적으로 나무를 바쳤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은 언약백성들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 후원에 적극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온 힘을 다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마게도냐 교회 지체들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풍성한 연보를 드렸습니다(고후8:3). 오늘 본문의 백성들도 적극적이며 협력하여 하나님의 사역이 중단되지 않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무관심과 나태함으로 말미암아 중단된 사역은 없습니까?
나) 첫 열매들(35-37a)
첫 열매라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그들이 먼저 드리겠다고 한 가장 좋은 것은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였습니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느10:35)"
뿐만 아니라 그들은 맏아들들과 가축의 처음 난 것을 하나님의 전에 데려갔습니다.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우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느10:36)"
또 그들은 가장 먼저 수확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갔습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느10:37a)"
이 모든 것들은 성전과 제사장들에게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니까 성전 봉사를 위해서 뿐 아니라 성전 봉사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해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그 종들을 위해 백성들이 드려야 했던 것은 그들이 수확한 가장 좋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내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이어야 합니다. 지금 백성들은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맹세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십일조(37b-39)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레위인들은 기업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지파들은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를 줌으로 생활해야 했습니다. 이것은 레위인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서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진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레위인들이 생계를 위해 기업으로 돌아가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심지어 느헤미야가 잠시 페르시아로 귀국한 때에도 이런 일은 발생했었습니다(느13:10).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느10:37b)"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으면 거기서 또 십일조를 떼어서 제사장들에게 주어야 했습니다(민11:26). 본문 38-39절입니다.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10:38-39)."
제사장 하나가 언제나 동참하게 했던 목적은 십일조의 양을 확인하고 제사장들에게 돌아올 몫을 횡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의 십일조의 십분 일은 하나님의 전 곳간에 두어서 제사장들이 필요한 곳에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성전 봉사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다른 산업으로 떠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사역에만 진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성경을 들어 "성전의 일을 하는 자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다"고 말씀했습니다(고전9:13).
교회는 전임사역자의 생계를 보장해주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배님은 늦게까지 목사님로 계셨습니다. 당시 목사님의 사례가 월 500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생활까지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 교회를 사임하고 나가실 때 5000불 정도의 빚을 지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그 목사님이 빚을 졌다는 것 때문에 그 목사님의 영성과 능력을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공급을 받아야지 빚은 왜 지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렇게 사역자를 대접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생활이 되도록 지원하는 일을 그 교회에게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는 그 목사님에게 다른 직업을 갖게 하거나 사모님에게 직장생활을 해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역자는 교회 사역에 전념할 수 없고, 늘 생활을 염려하며 거기에 묶여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미국의 이민 목회가 되었던 카나다 유럽의 이민목회가 되었던 간에 자립하는 교회의 수가 전체 교회 수에 비해서 얼마되지 않는 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목회자와 사모님들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역과 관계없이 직업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회복 영적회복을 부르짖지만 사역의 현실 앞에 쓰러지는 목회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백성들이 결정한 것은 레위인들이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계를 우리가 보장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늘 교회에 주어진 책임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이들이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않기 위해 맹세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성전 사역을 위한 적극적인 후원이었습니다. 둘째는 성전 사역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는 성전 사역에 봉사하는 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전의 모든 사역이 활발하게 돌아가도록 지원하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하나님의 전을 이토록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들에게 있어 성전은 그들의 삶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잃어버리고 포로가 되고서야 그들은 성전 중심의 삶이 얼마나 복된 삶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통 군에 들어가 보면 예배생활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를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잃어버린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 이처럼 결단하는 것을 보십시오.
진정 예배회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우리 하나님의 전'이라는 반복된 표현을 보십시오. 마치 몇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만난 애인처럼 절대로 잃어버릴 수 없다는 강한 의지를 느껴지지 않습니까?
나가는 말
하나님의 말씀과 회개를 경험한 백성들은 더 깊은 영적 체험을 원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상의 것을 경험하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삶의 변화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했고 그 언약을 굳게 지키기로 맹세했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율법의 모든 내용을 지키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이 지키기로 한 것은 세 가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Nyskcian들도 이와 같이 예배회복과 영적회복을 위하여 이방인과의 결혼과 안식일 준수 그리고 성전 중심의 삶은 언약백성의 강한 정체성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세 가지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입니다. 이것 중 하나라도 포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됨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현재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것들과 절교하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을 생명처럼 여기는 마음을 품기를 축복합니다.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