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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의 세 가지 용도 (2)

율법과 성령(Exkurs)


3. 칼빈은 루터나 멜란히톤이 말하는 율법의 시민적 용도(제 1용도)를 자기의 기독교 강요 초판은 물론 최종판에서도 두 번째 용도로 다룬다.


칼빈도 위의 두 사람의 경우처럼 그 출발점을 부패한 인간의 본성에 둔다. 이런 점에서 "율법의 정치적 용도의 이념은 실제적인 인간본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라고 칼빈을 해석한 Donald MacLeod의 말은 정확한 것이다.

칼빈은 자연인을 가리켜 "제멋대로 부패한 생각을 가슴속에 간직하는" "날 뛰는 정욕을 공공연하게 발산하고자 하는" "자기를 억제할수록 정열의 불길은 강하게 되며, 마음속이 뜨겁게 끓어오르는"(II,7,10) 존재 등으로 표현한다.


칼빈은 심지어 이런 인간은 율법 자체를 미워하며 입법자이신 하나님을 저주해서, 될 수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을 없애려고 함을 주목한다(ibid.). 바로 이런 인간에게 율법이 '벌을 받으리라는 공포심을 일으켜' 죄를 억제한다는 것이다(II,7,10[1]). 또 "율법은 육의 미친 듯한 정욕, 버려두면 한정없이 뻗어 나가는 정욕을 억제하는 굴레와 같다"(II,7,10[10])라고 말함으로써 율법의 시민적 용도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암시한다.

칼빈은 율법의 이러한 용도를 통해 야기된 의를 '억제된 또 강요된 의'(coacta expressaque iustitia)라고 표현한다(ibid[8]). 이로써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의 시민적 또는 정치적 용도와 연관하여 칼빈은 멜란히톤과 연관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우선 이 용도의 근거를 멜란히톤 처럼 딤전 1:9-10에 두는 것이며(II,7,10[11])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을 이것과 연관시키는 것이다(II,7,11[1]).

칼빈은 율법의 시민적 용도가 자기 義사상을 지닌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불행을 깨닫게 해서, 교만을 꺾고 겸손하게 만들어, 지금까지 자기에게 없는 줄을 몰랐던 것을 구하게 되도록 그들의 마음을 준비케 함을 지적하는 동시에 정욕이 날뛰는 인간에게 굴레를 쒸어 아직 중생하지 못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한 때까지 안전하게 보존하심을(ibid., [6]) 말하여 몽학선생으로서 율법의 의의를 지적했다.


이런 '교육적 용도'의 발언은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도 부르심을 받기 전에 또 성결의 영을 받기 전에(롬 1:4) 어리석은 육의 정욕대로 날뛰는 동안은 이런 감독을 받는 것이 유익하다'라는 말과 통한다. Inst II,7,10[9]). 라틴어 원전은 "여기 감독을 받는다는 말"을 paedagogia exerceri로 표현해서 교육의 의미를 드러낸다.

칼빈의 주장을 요악한다면 율법이 공포심이나 수치심을 불러 일으켜서 인간의 야성을 조금이나마 꺾어서 사회를 평안하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침내 구원을 얻는 싯점에 도달하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칼빈의 경우도 죄를 어거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의 용도가 드러난다.


인간이 이 세상을 인간답게 살려고 할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질서일 것이다. 우리는 전쟁을 통해 사회 질서가 파괴되었을 때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근래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절감한다.

눈 앞에서 부모 형제가 적에 의해 총살을 당하는가 하면 가옥이 불타고 갑작스러운 피난명령 때문에 빈털털이로 도망온 사실이나 피난 행령에 자녀들을 잃어버려 목이 쉬도록 울부짖던 일 등은 사회질서 체제가 무너졌을 때 당하는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 질서가 파괴된다는 것은 사실상 사망의 상태 속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정상적인 생존도 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더더구나 자기 존재의의를 실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비로 범죄하고 타락했어도 정상적인 삷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루터는 율법의 제 2용도를 legis usus Theologicus seu Spiritualis(율법의 신학적 또는 영적인 용도)로 표현했다.

루터는 모세 율법의 첫째 목적이 율법을 통해 죄가 성장하고, 특히 양심에, 번성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본다.

루터에 의하면 바로 율법의 제 2 기능이 이 역할을 한다고 본다.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율법의 고유의 직분은 사람들에게 그의 죄, 맹목, 비참, 악함, 무지, 하나님을 미워하고 무시함, 사망, 지옥, 심판 그리고 잘 예비된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는데 있다". 루터는 멜란히톤처럼 제 2의 용도가 율법의 고유의 으뜸되는 직분으로 본다.


위의 단순한 정의만으로는 루터의 의도하는 바를 다 이해할 수 없다.

루터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그림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괴물이 있고 이 괴물을 쳐부수는 무기 내지 망치가 있는데 이 망치가 이 괴물을 어떻게 처치하는지 그 과정이 루터의 말하고자 하는 바의 내용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① 이 괴물은 무엇인가? ②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③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④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⑤그 결과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대답을 하면 될 것이다.


①이 괴물은 무엇인가?:

루터는 이 괴물을 외식자들 또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궤변자들과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義(의)나 자기 자신의 義(의)의 외람됨에 따라 사는 모든 자들을 가리켰다.

루터는 이런 자들을 좀 심하게는 "자기 자신의 의의 외람됨에 술취한 자기 義(의) 사람들"이라고 표현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져있는 페스트병과 같은 외식자들이다. 여기에는 물론 일반자연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해당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율법주의자들이나 의식주의자들 그리고 행위의 의에 따라 사는 승려들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와 연관하여 루터는 매우 주목할만한 발언을 한다. 즉 이런 괴물들은 결고 율법의 제 2용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外飾하는 자들이 뻔뻔스러운 이유는 율법의 제 2용도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현대교회 내에 외식자들이 많다는 것은 현대 교회가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지도자들의 무지로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어떤 점에서 이 괴물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한 것인가?:

루터는 이 괴물들의 이성이 이런 외람된 인간적인 義(의)사상으로 오만해져서 이 의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공상함을 지적했다. 또 이들은 바리새인들의 경우처럼 외적인 죄는 범하지 않지만 마귀들에게 사로잡힌 체, 자신의 선행에 의존하며 자기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맹세함을 지적했다.

루터는 또 이런 자들 속에 자기 義(의)사상이 남아 있는 한, 매우 교만하고, 자기를 신뢰하며, 잘난 채 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동시에 은혜와 자비를 멸시하며 약속과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했다.

루터는 심지어 이런 인간을 사나운 짐승(bestia)이라 부른다.

루터는 바로 이런 사람들의 마음과 오성 속에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죄사함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본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거대하고 단단한 암벽과 같은 자기 義사상에 둘러싸여 하나님의 사역이 임해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기 義사상을 거대하고 소름끼치는 괴물이라고 부르면서 이것은 또 거역적이며 고집이 세며 목이 곧은 짐승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이런 자들은 자기 스스로 성(城)을 쌓고 그 성 속에서 하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겠다는 자율성의 인간이라는 말이다. 사실 성경이 정죄하고 타도하는 인간은 바로 이런 육신(싸르크스)인 인간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율법이 저주하는 부패한 인간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③ 이 망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 마디로 그것은 바로 율법인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께서 이 괴물과 같은 짐승을 공격하기 위해 어떤 헤라클레스와 같은 것을 파견하신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이다.

루터는 율법이 견고한 바위와 같은 이 '옛 자아'를 파괴하는 것을 예레미아의 말을 이용해서 매우 정확하게 표현했다. "내 말이 불같이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셔뜨리는 방망이 같이 아니하냐"(렘 23:29) 루터에 의하면 이 율법은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거대하고 강력한 망치인데 하나님께서는 이 망치로 자기義-사고방식을 파괴하신다는 말이다.


루터는 견고한 성채와 같은 외식자들의 자아의 城을 파괴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제 2용도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이런 외식자들을 죽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이들을 죽이시는 이유는 거짓선행과 자기 의(義)사상을 가진 자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내지 경외가 없는 곳에는 은혜와 생명에 대한 갈증도 없는 법이다고 한다.

루터가 옛사람의 자아의 城이 이렇게 견고하다는 사실을 매우 깊이 알았다는 점에서 그는 종교개혁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교개혁운동은 사실상 인간의 비뚤어진 사고방식을 파괴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 인간을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④ 이 망치는 그 기능을 어떻게 발휘하는가?:

루터는 율법이 죄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이 엄습하도록 함을 통해 자기의 비참함을 깨닫게 만드고 겸손하게 만든다고 했다.

그는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번개와 천둥과 나팔소리와 벼락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두렵게 만들어 자기 義사상이라는 짐승을 불태우고 분쇄하는 것 같이 율법이 우리에게 그렇게 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죄를 밝히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보여주어 그들로 하여금 절망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은 하나님의 은혜나 의 그리고 생명이 아니라 죄, 사망,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음 우리 모습 그리고 지옥을 보여주고 밝히는 불빛과 같은 것이다.


예컨대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인간의 죄를 나타내며 하나님의 분노의 사역을 수행하며, 죄를 고발하고, 공포에 떨게 만들며, 인간의 마음을 절망의 지점까지 가도록 만드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MacLeod가 율법의 직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동사로 표현한 것은 어울린다: accuse, terrify, condemn.


⑤ 그 결과는 무엇인가?:

루터는 우선 율법의 제 2의 용도를 통해 시민적인 범죄에 제동이 걸린다고 본다. 영적이지 못하며 미개한 사람들의 방종을 율법의 두려움으로 어거한다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의 경우 제 2용도는 제 1용도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루터에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님 없는 사람에게 이런 주장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민 생활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제 2용도가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은 영적인 범죄를 고발하기 때문에 인간은 절망에 빠진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율법의 제 2용도는, 루터의 경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루터는 그 이유를 성경의 신관을 언급하여 설명한다. 즉 성경의 하나님은 절망에 빠져 겸손하게 된 죄인을 높이시는 분으로서 마침내 죄인을 칭의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율법의 제 2용도가 칭의론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임을 본다. 사실 루터의 경우 율법의 용도는 세 가지 의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칭의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열거한 멜란히톤의 주장과는 달리 인죄론 중심적이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에 대한 내용은 율법의 공포에 질려 살다가 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맛본그 자신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성경의 가장 심각한 문제인 육의 문제를 공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율법의 으뜸가는 기능 내지 고유한 기능으로 본 것도 그는 이 속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총체적으로 조직화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루터의 율법의 제 2용도론은 현대인들의 값싼 은혜를 매우 강력하게 비판한 본 회퍼를 생각나게 한다.

왜 이들은 값싼 은혜론에 빠지게 되었을까?

이는 방망이처럼 두둘기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실존이 무너져 보지 않는 사람들은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의 귀중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타락하는 현대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또 루터가 율법의 제 2용도를 신자들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는 점에서 현대 교회에 경종을 주는 것이다.

루터에 의하면 제 2용도는 기독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며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을 받은 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그 내용을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다루겠지만 이런 점에서 루터의 경우 율법의 제 2용도는 제 3용도와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그 동안 죄의 문제를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것은 목회를 하면서 또 학교에서 강의 하면서 그리고 Nyskc Movement를 하면서 위로와 사랑 그리고 죄에 관용과 덮어주는 것을 사랑이라는 말로 "하나님은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라는 얄팍한 인본주의 은혜를 주고 있다

죄개념은 무속종교가 말하는 죄 또는 일반 자연종교가 말하는 죄 개념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또 이런 죄에 대해 하나님의 분노의 반응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는 일에 등한히 한 것 같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율법의 제 2용도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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