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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식교수의 믿음의 본질

믿음의 본질

(The Essence of Faith)

히 11:1-3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 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 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믿음의 사람들”(Faithful people)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What really is the faith?)라고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끔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8:26)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8:31)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17:20)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막4:40)


어떤 때는 이렇게 칭찬도 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마9:22)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마8:13)


믿음이 무엇이길래 믿음이 작을 때는 호되게 꾸짖기도 하시고 믿음이 클 때는 칭찬도 하셨을까요?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두 번쯤 해보는 물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토록 이 질문을 가슴에 담고 씨름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믿음을 한마디로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히11:1-3에서 ‘믿음의 본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두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둘째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실상과 증거” 두 가지로 히브리서 기자는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실상’은 무엇이고 ‘증거’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실상’은 희랍어로 ‘휘포스타시스’라고 하는데 이는 ‘아래에’라는 ‘휘포’와 “서게하다”, 또는 “확립하다”는 의미를 가진 ‘히스테미’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휘포스타시스’는 “실체, 기초, 확증”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지는 단어입니다. 이는 ‘실상’이 주관적 실체가 아닌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주는 근거가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정의함으로 믿음(faith)과 바람(hope)을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이는 곧, 믿음은 확신을 주는 소망이며 반드시 이뤄지는 실체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믿음은 실체들이 확실하게 존재하는 소망입니다. 믿음은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미래지향적임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에 주어질 확실한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둘째로 ‘증거’는 희랍어 ‘엘렝코스’(ἕλεϒχος)라는 법률용어로서 ‘객관적인 증거’ 혹은 ‘증명’을 의미합니다. 이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임을 가리킵니다. 이는 미래에 대한 증거가 분명히 우리 안에 있으니 실체가 보이지 않더라도 믿음의 삶을 가능케 하는 역동적 힘이 생깁니다. 그 힘이 곧 성령님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 안에는 성령님께서 살아계시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흐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라고 말함으로 믿음은 확실한 실체가 있는 미래의 소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함으로서 미래의 소망을 이루어 내는 보이지 않는 역동적 힘, 곧 성령의 힘이 믿음 안에 있음을 알게 합니다. 믿음은 미래의 소망을 이루어가는 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땅이지만 확실한 실체가 있는 실상(substance)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 힘은 실체를 바라보는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보지 못하는 증거(the evidence)입니다. 그 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까지 인도해냈습니다. “보이는 것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진들이 보여준 증거였습니다.


지난번에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책 “내일을 던져 버리지 말라”(Don't throw away tomorrow)는 책에서 저자인 슐러 목사님은 “믿음”에 대한 분명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믿음’이라는 말과 씨름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할 때 교수들 앞에서 “믿음”에 대해 설교를 했답니다. 지난 60여 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믿음’이었답니다. 지금까지 35권의 책을 썼는데 그 모든 책들도 ‘믿음’을 탐구하는 서적들이었답니다. 그런데 80세가 넘고 나니 ‘믿음’을 확실하게 알고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그는 믿음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첫째 믿음(faith)은 ‘환상’(fantasy)이 아니라 ‘사실’(fact)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가상’이 아니라 ‘실체’라는 것입니다(Faith is a fact, not a fantasy).


뉴톤은 “왜 사과는 아래로 떨어지나? 왜 사과는 바람에 떠돌아다니지 않는가?”(Why did that apple fall down, and why didn't it float away?)라는 질문을 통해서 ‘중력’(gravity)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인간도 반드시 발견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믿음이 이끄는 피조물’(faith-driven creatures)이라는 사실입니다.


믿음에 의해 창조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되어갑니다(become the creative and progressive people). 슐러는 그래서 인간을 ‘가능을 생각하는 사람들’(possibility thinkers)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이기에 실체가 있는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신앙은 ‘사실’(또는 실체)이지 결코 ‘환상’(fantasy)이 아닙니다.


둘째로 믿음은 하나의 가치(value)가 아니라 힘(force)입니다(Faith is a force, not a value). 믿음은 그 자체가 도덕을 초월하는 하나의 힘입니다(amoral force). 믿음은 하나의 연결하는 힘(connecting force)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생각들을 성취로(ideas to achievement) 연결시키고, 계획안을 가능성으로(projects to possibilities) 연결시킵니다.


이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면 믿음이 핸드폰이라면 핸드폰은 힘입니다(Faith is the cell phone; that is power). 그러나 가치(value)는 핸드폰이 전달해 주는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파이프라인이라면 가치는 그 안을 흘러가는 물이나 기름에 불과합니다. 믿음이 비행기라면 그것은 힘입니다.

가치는 그 안에 실려가는 화물에 불과합니다. 이 힘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산을 옮길 수도 있습니다.


셋째로 믿음은 결단이지 토론이 아닙니다(Faith is decision, not a debate). 흔히 사람들은 신앙은 언제나 가설(assumption)에만 근거하여 말한다고 비웃습니다. 가설만 갖고 토론만 하는 것이 종교라고 공격합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천국이니, 영생이니, 축복이니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사람들,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모든 사람은 가설에 기초하여 살아갑니다. 다만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불가능하다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부정적 가설’(a negative assumption)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요(Atheism is a negative assumption in an impossibility thinker's mind),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 긍정적 가설을 갖고 사는 사람들입니다(Theism ins a positive assumption in a possibility thinker's mind).


9월호 가이드포스트(Guide posts)에 표지모델로 장윤주양이 실렸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패션모델이 되고 싶어서 학원에 다녔답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넌 팔자가 거세다”면서 안 된다고 했답니다.

날마다 울었답니다. 그런데 본인과 어머니는 그런 말을 집어던졌습니다.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어머니는 ‘윤주야. 그건 다 거짓말이야 그 말에 속아서는 안 된다. 넌 하나님의 딸이야’ 격려하며 일천번제 기도에 들어가셨습니다. 윤주양도 교회에서 실시하는 예수제자훈련학교에서 6개월간 훈련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패션계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모든 디자이너가 새로 지은 옷을 그녀에게 입혀보고 싶어 합니다. 그는 믿음으로 부정적인 말들을 이겨내고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불가능만 생각하는 사람들 속에서 부정적 가설만 갖고 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삽니다. 어둡고 불안한 불가능한 삶을 살 뿐입니다. 가능성을 생각하는 사람들 안에서 긍정적 가설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밝고 희망찬 삶을 삽니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여 사느냐는 바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선택은 자신의 결단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헌신이지 결코 논쟁이 아닙니다(Faith is a commitment, not an argument). 신앙은 가치에 근거한 선택이요 기회입니다. 따라서 선택은 언제나 헌신을 뒤따르게 합니다.

내가 비록 잘못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선택을 위해 내 심장을 바칩니다(I might be wrong, but I am giving my heart to my mission). 헌신은 언제나 무서운 힘을 가능성 있는 곳으로 옮겨 놓습니다(Commitment delivers awesome power to possibility thinking).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요14:6)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해답입니다. 예수님만이 미래를 주관하는 영적실체(Spiritual reality)입니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We cannot change the world).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세계는 바꿀 수 는 있습니다(We can change our world).


그렇습니다. 당신은 세계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세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You cannot change the world, but you can change your world). 당신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환상이나 가상이 아닌 실체의 소망을 바라보며 분명히 능력 있는 힘을 가진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는 당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결코 내일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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