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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교육방법

1. 선생의 예수

니고데모가 조용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이신줄 아나이다](요3:2).그의말은 매우 정확한 판단이다. 예수의 교훈 비록 전세계 많은 사람이 이 교훈과 관계없이 지내고,그의 추정자들 까지도 그 교훈에 무관심하고 , 또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지만 그 교훈은 실로 세상에 어떤 선생이라도 예수님만큼 감화를 끼친 스승은 없다.

그분은 홀로 모든 선생들 중에 가장 위대하신 분이다. 복음서를 읽는 사람은 누구든지 예수의 생애중에 많은 시간과 정력이 교훈하는 일에 바쳐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의의가 있는 일이다.

그는 어떤 교안을 작성했는가? 그는 자기에게 교육 받는 사람들을 어떻게 접촉했는가? 어떤 방법으로 그가 받고 있는 진리를 제출했는가?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는가! 이런 질문들은 예수의 교육 방법 연구에 있어서 필요할 뿐 아니라 현대 교육 방법 혁신에 있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라 하겠다.

또는 이런 내용과는 달리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교육 방법을 논함에 있어서 다음 두가지 조건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여기서 말하는 [방법]이란 말은 분명한 설명이나 형식화 한 어떤 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특징 있는 교육 방법은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활용하시는 그것이다. 이것이 모든 규칙을 능가하는 방법이다. 둘째, 예수님은 한분의 선생이었다. 나면서부터 선생이었으며, 가장 위대한 선생이었으나 그분은 선생 이상의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약성경에 전해오는 교훈만이 그분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이상의 기대할 것이 그에게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특별한 의의가 없는 일이요 따라서 세상은 이미 파멸의 심연에 빠져 버렸을 것이다.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은 그 교훈보다 훨씬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이기에 앞서 예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오신 이라기 보다는 전할 복음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으로서 보여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한 테일 박사의 뜻깊은 주장이 결코 무리가 아니다.

이 두가지 점을 인식하고 예수님의 교육 방법을 연구하자.여기에서 두 가지 점을 밝혀야 한다. 즉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수한 점이 무엇이었던가? 또 그 교육의 일반적인 원칙은 무엇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2.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

그는 무엇보다 구전교육 방법을 사용했다.글로 써서 가르치지 않고 이야기로 가르쳤다. 그는 단 한번 글씨로 쓰신 일(요8:18)이외에는 모든 경우에 친히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가르치신 아름다운 금언, 명구,신앙과 도덕 등 결정적으로 규정 지은 모든 말씀 곧 [하나님의 신학] 은 모두 갈릴리 농부와 어부들의 기억을 정리하여 문자로 기록된 말들이다.

그 구전식 교육에 위험부담은 없었는가? 시간이 흘러가면 그렇게 말로만 전해들은 교육이 망각되어질 위험성은 없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안다.씨를 뿌린 농부는 그 곡식이 결실할 때까지 항상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땅과 또 다른 결실을 한다. 예수님은 한번 사람의 마음 속에 뿌린 말씀은 뿌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항상 돌보아 주셨다. 그 말씀은 해가 거듭할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박혀 영원히 자라는 생명이 되었다. 그의 말씀은 종이에 기록할 필요가 없었다. 생명을 가진 씨앗을 마음에 뿌리쳤다. 이 씨앗은 한번 마음 속에 뿌리를 박으면 세기에서 세기를 연결하여 죽지 않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란 작품에서 제 4세기 로마황제 줄리안의 독백을 이렇게 표현했다. 즉 [그가 지금 어디 있느냐? 골고다의 사건이 일어난 후 그는 어디서나 일하고 있느냐? 그는 지금 어디 있느냐? 그가 고통을 받고 죽고,또 세계에서 세게로 계속하여 정복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로써 예수의 기사를 썼다.

둘째로 예수의 교육 방법의 특성은 그의 교훈 대부분은 충분한 원인을 가진 사건과 현장에서 추출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수한 사건에도 미리부터 생각하고 목적한 사실을 말하고, 그 특수한 진지를 설명했다. 회당에서 반신불수를 만난 일(마12:10).길에서 만난 귀족청년과의 대화(마21:16)제자들의 돌연한 논쟁 (눅 9:46),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이 옮으냐,그르냐 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마22:17)등, 이 모든 사건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자기가 목적하는 교훈을 주셨다.

이런 교훈은 그 적응성이 순전히 지방적이며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오늘날에도 꼭 그렇게 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교훈을 통하여 가르쳐주신 진리는 변함이 없다. 예수의 교훈 대부분은 분명히 어떤 특별한 사건에 관련하여 주신 것이지만 지금도 그 교훈은 진리이다. 교리나 철학은 가르치는 방법으로 체계를 세운 어떤 것을 말씀하셨다면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나고 또 그와 친히 사귄 남녀들의 가장 절박한 현실에 응하여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토록 확실하게 남아 있다.

사상의 체계는 시대를 따라 변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변하지 않는다. 인간이 눈은 유혹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눈물은 여전히 눈에서 흘러 나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세계 모든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일정한 요구에 응하고 있다.

세째로 그의 교육 방법의 특색은 언제나 그가 가르치신 교훈은 듣는 청중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데 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말씀을 듣는 청중의 입장이 되어 피교육자의 처지에서 교훈을 시작하셨다. 모세의 율법이 과연 그들에게 활동적인 종교였는가?에 의문을 가지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으로서 자기의 말씀을 전개했고, 거기서 또한 하나님의 더 좋은 율법의 높은 말씀을 전하셨다.

청중은 또한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신이 나라 없는 백성의 처지에서 영적 국가인 하늘 나라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언제나 그는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의 처지에서 이야기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부터 발전해 나갔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가 쓰시는 말씀은 단순했다. 직접적이고 단순하고 박력있는 그의 용어는 - 분명히 그가 쓰시는 용어는 그 당시 직업 종교가들의 것과는 달랐다 - 듣는이에게 쉽게 이해되었고 또 사람들이 잊어버리거나 등한시 할 수 없으리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그리고 그는 또 성급하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는 제자들을 결코 조급하게 만들지 않았다. 한걸음씩,한걸음씩 그들을 인도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16:12). 그는 거룩한 보류의 마음과 침묵으로서, 그는 그의 계시를 미리 다 말씀하시지는 않았다(예를 들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등). 그리하여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기까지 보류했다.

이런 실제적인 문제들은 오늘날에도 강조되어야 한다.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믿으라고 요구하지는 아니하였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 불완전한 신조 때문에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돌아서게 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면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자기 민족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므로 주민들은 할 수 있는대로 예수에게로 모이고 있었다.

초신자들도 예수를 환영했다. 처음 만날 때는 중요시 하여 누구에게든지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실 때처럼 친구로 삼고 한 걸음 두 걸음 그 자신의 깊은 신비에 까지 인도해 가며 제자로서의 안전한 영광을 누리게 했다.

그의 방법의 특색 하나는 그의 교훈에는 비유적인 요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의 설명, 그의 경우, 역설이나 어떤 무엇보다도 비유를 가장 순직한 예술적 수완보다 은총의 산 계시로 그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사로서 생명, 운명,하나님등,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과 설명의 창문을 열어 자신이 실제로 말하고 있는 그 진리를 청중으로 하여금 확실히 보게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의 심중에 한 그림으로 화하도록 하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상상력이나 생각하는 두뇌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도 그 말씀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광경을 보게하여 [내가 본다] [나도 본다]는 부르짖음을 가지도록 했다.예수 앞에 나오기까지 인생 문제에 대하여 눈이 어둡던 사람이나 잠든 사람처럼 몽롱하여 인생의 영광스러운 문제에 한번도 접하지 못한 사람들도 예수에게 나와서는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영안이 밝아져서 생명의 원리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 그에게 감사를 드렸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사람들에게 환상을 주시는 분이었다.


그리스도의 교육방법의 원칙

이제 우리는 그의 특수한 교육방법으로부터 시선을 옮겨 그 일반적인 원칙을 연구해 보자. 첫째,그의 교육은 무엇보다도 권위가 있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대로 [무리가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마7:28).예수님의교훈에는 [아마]라든지 [그럴 것이다], 혹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등의 불확실한 상상적인 이야기는 없다.

언제나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와 같이 자신의 말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명확히 했다.[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는 말은 서기관들은 항상 [모세는 이렇게 말했다]라든지 [랍비 000는 이렇게 말했고, 율법과 예언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인용했다.

이렇듯 서기관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의견을 자신 있게 밝히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종교는 낡은 책에 의존하는 종교였다.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서 말하게 되는 종교였다.

서민층까지도 그 종교가 다른 사람의 손을 거쳐온 대변이라는 것을 알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느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는 서기관들을 매우 멸시하고 있었다. 에머슨이 세네카(로마 철학자,B.C.54-A.D.39?)를 평가한 말이 서기관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사상을 자기 스스로 말할 수만 있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사상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왜냐하면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경험하지 않은 사실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릴리 나사렛 사람 예수님에게서는 새로운 말씀이 흘러나왔다.

[옛 사람도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이렇게 그는 서기관들의 사상과 그 처지를 일축해 버리고 전설을 기초로 삼고 있는 그들의 사상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옮겨 놓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웃고, 또 놀라고, 경이롭게 바라보았지만,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권위 있는 그 태도에 결국 군중은 감격하고야 말았다.

그가 말하고 있는 사실은 친히 체험 가운데서 나온 말씀이며 정말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하는 분을 만났다고 믿어주고, 그분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교훈하실 수 있는 분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오신 분인 것을 믿게 되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예수님의 교육이 지방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원성을 지닌 것임을 재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이 정치나 사회문제 내지는 도덕과 종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옛 전통의 구습을 깨뜨리고 권위 의식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부딪친 시대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가 취하신 원칙을 외면하고서는 어떤 항해도나 나침판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정신상태와 양심에 주신 그의 교훈은 지금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다음의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예수의 교훈이 비록 권위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그 교훈이 어떤 지나친 의미의 교훈이거나 교리적이거나, 또는 강제로 동의를 요구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그가 가르쳐야만 할 사람에게 대하여 놀랄만한 인내를 지니고 계셨다는 점이다. 강제성을 띠고 이끌기를 거절하시고,그들에게 자기의 의지대로 강요하시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을 매우 존종하셨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풀 수 있는 기적의 힘을 아무렇게나 쓰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현혹을 주고 판단을 그르치게 하지 않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길지 않은 기간 훈련을 시키시고는 제자들을 지방으로 파송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은 실로 위태로운 일이었다. 왜 그렇게 위험 부담이 있는 모험을 시도 하셨는가? 그 이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얼마나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가 보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의 기본되는 말씀은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너희를 친구라 하리라](요15;15)였다. 만일 제자들이 이 말씀을 기억할 수만 있었다면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전할 때 강요의 방법을 써서 무오의 교리를 짊어지게 하여 사상적으로 질식시키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 아니고 친구라] 그는 결코 [이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받으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하리라]고 말씀하시지 않고,[나는 진리이니 나와 함께 있으면 너는 진리를 발견하리라]고 권유로 하셨다.[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 교훈을 알리라](요7:17).그의 교훈은 참으로 권위 있었으며, 결코 강압적이거나 독단적이 아니었다.

그는 또한 개인의 인격을 무한히 존경했다는 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가 자기의 결정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교육 원칙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점은 모든 교육가가 본 받아야 한다. 교육자가 이 점에 실패하면 자기의 모든 일을 실패한다. 예수님은 그의 교훈으로서 세계가 일찌기 경험한 사실을 상기하게 하고 또 의문을 가지도록 크게 자극을 시키기도 했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에 해답을 주셨다기 보다는 세계에 문제를 제시하고 세계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가지도록 자극 하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언제나 직접적인 질문에 대하여 항상 직접적인 대답을 주시지 아니하셨다.

한 교법사가[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고 물었을 때에는 [어떤 사람이 여리고고 내려가는데...]로 시작하여 사마리아 사람의 착한 행실을 전해주셨다(눅 10:29이하).베드로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21:21) 라는 물음에는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느때는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물음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3)고 하셨다. 그가 말씀하신 비유는 모두 이런 방법이었다. 즉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 자신의 영적 통찰력과 영적 실제에 대한 지각력을 사용하도록 했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다(마11:외)

예수님 교훈의 목적은 모든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 준비해 두었던 해답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일 인생 문제에 대하여 미리부터 그 답을 제공할 수 있었다고 하면 안식일 문제, 종교와 정치, 주인과 고용인, 그밖의 여러 가지 문제의 해답이 대단히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에 단순한 입법자가 되려고 오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어려운 문제에 대하여 칼로 베는듯한 규칙적이며 무미건조한 해답을 주시려고 육체를 입고 인간 사회에 오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해답을 주신 목적은 그가 살으신 일과 또 죽으신 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명랑하고도 힘있게 모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새로운 상념적인 해결 방법을 주시는데 있다.바울은 [의문은 죽이고 영을 살린다](고후 3:6)고 말하낟. 이것이 곧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적 자유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자신이 교훈하신대로 실천했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에수님으로부터 애매하거나 추상적이거나 불확실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모가 그들의 눈에 구체적으로 실현되었고,사는 사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주신 교훈을 통하여 하나님에의 신앙이었다. 그가 생활에서 그렇게 가르치셨다는 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교훈인가?그의 용서는 그의 마음 전체를 모두 주셔서 용서하시는 것이었다. 단순히 어떤 잘못에만 관계하여 그 부분만을 해결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기도에 대하여 교훈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히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다. 그는 사랑과 봉사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는 교육만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친히 허리를 동이시고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를 씻어 주셨다.

형제라는 제목으로 웅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실망한자의 집을 찾아가서 형제요 친구라고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최고의 선생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가르치신 일에 대하여는 최대의 성의를 기울여 실천하셨고, 형식이 아니라 진실로 성심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그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자신을 종교에 바치지 않은 사람의 종교운동은 사람들에게 감화력을 전하지 못하며 예수의 말씀대로 산증거가 없으면 사람을 설복시킬 아무런 힘이 없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에서, 즉 그가 전하고 가르친대로 살아갈때, 그 종교는 가는 곳마다 감화를 끼친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 더 말할 수 있는 예수의 교육방법은 자기에게 배우는 사람들과 친밀한 교제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점이다.[사랑의 정신은 다른 사람에게 불을 붙인다]고 어거스틴이 외쳤다. 이 점에서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한 선생으로써의 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의 사랑의 정신 때문에 그의 모든 제자들은 항상 그 심령에 뜨거운 불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가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들 사이를 단순히 법적인 것과 같이 딱딱하게 한 것이 아니고 기쁨과, 영광으로, 그리고 로맨스로 실수하는 학생들은 그 제자들이었다.

그래서 그 선생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큰 교훈에 항상 장애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실수를 할찌라도 예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또 그들이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가 얽혀져서 신앙은 항상 사랑으로 자라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정신은 그들 속에 있는 모든 장애물을 넉넉히 제해 주었다. 갈보리와 오순절이 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저들이 배운 교훈이 일층 구속의 중심 사명이 가장 완전하게,그리고 확실하게 그들에게 알려졌고, 그 교훈 때문에 저들은 생의 의의를 발견했고, 그 구속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하기 위하여 그들 전부를 바쳐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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