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건제의 의미 레 5 : 14-19
어떤 경우 돈이 없으면 예수도 못 믿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예수를 믿으려고 해도 돈이 좀 있어야 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 놓고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과연 교회는 돈 이야기나 하는 곳이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돈이 있어야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으로 제물을 드렸는데, 그런 짐승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는 범했고 용서는 받아야 하겠는데 가세가 빈곤해서 짐승의 제물을 드릴 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돈 많은 사람만 상대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십니까?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위한 규례를 마련하셨습니다.
"만일 힘이 어린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속하기 위하여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여호와께로 가져가되 하나는 속죄 제물을 삼고 하나는 번제물을 삼아"(레 5:7-10).
지난주일 속죄제에 대하여 말씀드리면서 일반 서민의 죄는 암염소나 어린양으로 속죄제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재력이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둘기로도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것도 구할 수 없으면 어찌합니까?
"만일 힘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둘에도 미치지 못하거든 그 범과를 인하여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예물로 가져다가 속죄 제물로 드리되 이는 속죄제인 즉 그 위에 기름을 붓지 말며 유향을 놓지 말고"(레 5:11-13).
고운 가루라도 좋으니 죄를 속하기 위하여 반드시 속죄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것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속죄야말로 죄인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속죄는 받아야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구원과 속죄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비둘기와 고운 가루의 속죄제물입니다. 이것이 관용을 베푸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믿으십시오.
이스라엘이 속죄 제물을 드리는 것은 마치 나를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고 죄의 용서를 받으며 구원에 이르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예수는 돈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해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모든 사람들 앞에 크게 열어 놓으시고 기다리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으로 감사로 받으십시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속건제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속건제는 어떤 경우에 드리는 제사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성물을 범한 때에 드리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힌 경우에 드립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나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힌 경제사범의 속죄 방법이 속건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속건제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리되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러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의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것이요"(레 5:15).
하나님의 성물이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 혹은 예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성물을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규정대로 드리지 않고 착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성물은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모든 소출의 첫 열매 혹은 첫태의 난 새끼는 모두 하나님의 성물입니다. 또 모든 수입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성물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이행하지 않았을 경우 속건제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종종 자발적인 헌물을 드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을 서원제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으면 이는 속건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경우를 종합하여 보면 고의적으로나 혹은 욕심으로나 인색한 마음 때문에 하나님께 의무를 감당하지 아니하면 속건제를 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속건제
대인관계에서도 속건제의 조건은 경제적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치 못하여 범죄하되 곧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 잡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레 6:2-3).
속건제는 대인 관계에서도 특별히 경제와 관계가 있습니다.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범죄 행위는 속죄제에 해당하지만 경제사범은 속건제에 해당합니다.
속건제의 방법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은 어떠합니까?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손해에 대하여 변상을 하는 것입니다.
"너의 지정한 가치를 따라 성소의 세겔로 몇 세겔 은에 상당한 흠 없는 수양을 떼 중에서 끌어다가 속건제로 드려서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5분의 1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레 5:15-16).
이 말씀의 요점은 첫째,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아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 "성소의 세겔 대로 갚아야 한다"는 것이며 셋째, "5분의 1을 즉 20%를 가산하여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소의 세겔이란 무엇입니까? 성소의 세겔은 보통의 시장에서 유통되는 세겔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즉 성소의 세겔은 보통 시장에서 유통되는 세겔 보다 약 2배정도 많은 분량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배상하는 방법은 지금까지 드리지 못한 것의 2배를 더하고 그 위에 5분의1 즉 20%를 더하여 하나님께 변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경제 사범에 대하여는 배로 배상을 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도적질 한 물건으로는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 죄란 아픈 대가를 지불하여야 용서를 받는다는 것을 실감시키려는 것이고, 셋째,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은 자신의 땀과 노력의 결정체여야지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예 부정한 방법으로 번 것은 헌물로 드리지 말라고 까지 하셨습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성도의 삶은 항상 거룩하고 정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인 손해를 입혔을 때에도 배상부터 먼저 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배상하는 규례는 여러 가지입니다 .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의 5분의1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레 6:5)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가벼운 사건은 본전과 20% 정도의 이자를 가산하여 도려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그 이웃의 집에서 봉적 하였는데 그 도적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할 것이요"(출 22:7-9)라고 하였습니다.
도적질이나 사기행각, 혹은 부동산투기 등 악한 방법으로 손해를 입혔을 경우는 갑절을 배상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회개를 상고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하였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이 말은 구약의 속건제를 아는 사람이 경제적인 혐의를 벗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기 위해 취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말씀이고 또 진정한 회개의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회개할 때 어렷을 때 남의 밭에서 무를 뽑아 먹은 것이 생각나서 무 대금을 봉지에 넣어 그 밭 그 자리에 꽂아 놓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것도 속건제의 방법입니다만 사실 이런 방법은 속건제라고 하기보다는 양심청결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즉 무밭 주인을 찾아 회개하면서 돈을 돌려주어야 진짜 회개가 되겠지만 무밭 주인을 찾을 길도 없고, 그렇다고 그저 지나치면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에 봉투작전이라도 하는 것인데 이런 경우를 양심청결 즉 내 마음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참고를 하는 박스톤 주석에는 "이웃집에서 낡은 우산을 빌려쓰고 왔으나 부주의하여 분실하였을 때에는 씩 웃으면서 사과만 하지 말고 헌 우산 값에 20%를 더하면 새 우산을 구입할 수 있으니 새 우산으로 변상을 하고 속건제의 회개는 하나님께 하라"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삶은 모든 면에서 깨끗하고 반듯해야 하지만 더욱이 돈 문제는 더욱 깨끗하고 반듯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려면 피곤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그저 적당히 살아야지 하는 분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킬빈은 그의 주석에서 "그런 생각이 바로 마귀의 소리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마귀가 유혹하는 소리입니다. 불법도 불의도 거짓도 사기도 처야 잘 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소리는 마귀의 소리입니다. 그리고 지금 많은 성도들이 이런 마귀의 소리에 넘어가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런 현상이 사회에만 있는 일입니까?
요즘 교회 안에도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재물이라도 거액의 헌금만 내면 손뼉을 쳐주고 환영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돈은 하나님께 헌금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와 사회에 배상을 하고 속건제를 드려야 할 조건의 돈입니다. 그러나 오늘 교회는 그런 것을 가릴 정확한 신앙의 기준이 없다는 것이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우리 모두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손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도 남에게 손해 끼치지 말며, 진짜 깨끗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은 제물 처리방법
제물의 남은 부분을 처리하는 방법도 특이하면서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속죄제의 제물은 모두 진 밖으로 가지고 나가 태우는데 속건제의 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곳에서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 성경은 눈으로 보시며 귀로 들으십시오.
"희생 제물을 죽여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레 7:2)은 속죄제와 같습니다. 또 "희생제물의 내장과 그 주변의 기름을 태우는 것은 화목제"(레 7:3-5)와 같습니다. 그런데 "지극히 거룩하니 이것을 제사장의 남자마다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을찌며"(레 7:6)라고 한 부분은 다릅니다.
첫째, 속건제의 제물은 제사장이 거룩한 장소에서 먹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먹는 행위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제물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물을 드린 사람들은 제사장이 거룩한 장소에서 제물을 먹는 것을 보고는 죄 사함을 받은 것을 확신하며 안심하고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제사장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는다는 것은 오늘 교회에 나아와 먹어야 할 식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제사장인 신약의 성도들은 무엇을 먹어야 하고 무슨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까?
신령한 하늘 양식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썩을 양식입니까? 우리 영혼을 풍성하게 하고 윤택하게 하는 말씀 양식입니까? 아니면 세상 소식이 담겨 있는 신문이나 잡지입니까? 우리가 사모해야 할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 또 다른 양식이 있는 것입니까? 이것을 구별지어 주는 말씀입니다.
셋째, 박윤선 박사는 그의 주석에서 너무 마음에 와 닫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을 거룩한 곳에서 먹어야 한다는 것은 성도들이 바친 헌금으로 사는 목사님들이 사례비로 받은 돈을 거룩한 곳에서 음식을 먹듯이 거룩하게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서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주님께 받은 것을 어찌 부정하게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매일 매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서 음식을 먹는 제사장들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경제적인 사범은 단순히 하나님께 제물만 드려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경제적인 보상을 하여야 합니다.
이 교훈은 우리 성도들이 사회생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활동에서 얼마나 순결하고 반듯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속건제의 원리를 알고 순종하며 따르므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십시다. 이런 생활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삶이요 빛이 되는 삶이요 풍성한 삶이요 축복된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