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시작 (2)
- NYSKC
- Jan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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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의 예물 (레 2: 1 -3)
들어가는 말
아담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 제사를 드렸을 때,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인즉 가인의 제사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농작물 즉 식물성 제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농작물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못 드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농작물로도 제사를 드릴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받으시기도 하십니다.
그것이 소제라는 제사입니다.
소제는 농작물로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레 2:1).
불로 익힌 곡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네가 화덕에 구운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레 2:4)
"번철에 부친 것으로 소제의 예물을 드리려거든"(레 2:5)
"네가 솥에 삶은 것으로 소제를 드리려거든"(레 2:7)
"너는 첫 이삭의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거든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너의 소제를 삼되"(레 2:14).
이상의 말씀으로 보아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경우 굽거나 부치거나 솥에 삶은 것으로도 드릴 수 있고, 볶아 찧은 것으로도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곡식으로도 제사를 드릴 수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또 이런 제사를 소제라고 한다는 것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를 좀더 자세히 상고해 보십시다.
첫째,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때는 통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고운 가루로 만들어 드리는 것이 필수입니다. 그리고 이때 만드는 고운 가루(레 2:1)란 자기 희생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자기 희생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 출발부터 자신이 죽는 것입니다. 딱딱한 밀 알이 고운 가루가 되기까지는 여러 번 기계를 거치면서 부셔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고운 가루란 "나"라는 존재가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아픔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고운 가루란 밀 알 자체의 희생만이 아닙니다. 농부의 희생도 그 속에 포함됩니다. 땅을 경작하는 수고와 추수하는 수고와 고운 가루를 만들기까지의 수고 등은 매우 힘겹고 어려운 수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농작물의 제물은 힘이 들어가고 노력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운 가루로 예물을 드리는 것은 자신의 힘겨운 노동의 대가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일수록 자신의 수고와 땀이 포함되어야 값진 것입니다. 불로소득의 일부를 드리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둘째, 고운 가루 위에는 기름을 부어야 합니다(레 2:1, 4, 5, 7, 14-15). 이 기름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
기름은 인간의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선 모든 음식물은 기름으로 조리를 합니다. 또 이스라엘의 여행객들은 대개 기름을 지참하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를 입거나 독충에 물리면 그 상처에 기름을 발랐고,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 때에도 기름으로 가격을 정하고 교환하였습니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돌에다 기름을 부었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돈보다도, 내 몸을 보호하는 물건보다도, 하나님을 더 의지하겠다는 결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소제를 드릴 때에 기름을 부으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합니까?
기름은 내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이것들보다 더 귀하고 존귀한 분이니 그 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겠다는 결단의 표시가
첫 번째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의미인데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뜻합니다.
그래서 기름을 제물에 붓는 것은 성령으로 충만한 제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도 기름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히여 드리는 예배라야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셋째, 유향도 함께 드려야 합니다.
유향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향기란 예수 안에서 사는 성도들의 올바른 생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후 2:14).
여러분! 하나님께 아름다운 소제를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교회에서 예배만 열심히 드리지 말고 이 세상에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도록 하십시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려면 "나"라는 딱딱한 밀 알과 같은 존재가 부셔져야 합니다. 고운 가루와 같은 존재가 되지 않으면 향유를 부을 수 없습니다.
소제의 제물을 드리려면 고운 가루와 같은 나의 절대적인 희생과 성령의 기름과 선한 생활의 향기가 한데 어울려야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소제 제물을 만들 때 절대적으로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 번째, 누룩을 넣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떡을 만들기 위하여서는 누룩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드리는 제물에는 절대로 누룩을 넣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누룩은 부패와 부정, 죄와 타락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삼가 바라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마 16:6)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어리둥절하였습니다. 저들은 바라새인이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정도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 말씀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잘못된 교훈을 조심할 것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
부패한 교훈은 누룩처럼 번져 많은 사람을 오염시키고 또 그릇된 길로 가게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에는 이런 부패의 요소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거룩한 소제를 드리기를 원하는 성도는 항상 자기 주변의 생활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악한 누룩 때문에 심각한 중독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를 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에는 악한 누룩이 너무 심각하게 퍼져 있다고 하실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드리는 예배는 누룩이 들어 있는 예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드리는 헌금은 누룩이 들어 있는 헌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봉사는 누룩 봉사라고 규정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이 어떻게 받으실 수가 있을까요? 이들이 어떻게 독실한 크리스챤이 될 수 있을까요? 소제는 누룩이 없어야 합니다. 순결하고 거룩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썩은 것이 없어야 합니다. 죄와 상관없는 삶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룩을 빼라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소금을 반드시 넣어야 합니다. 소금을 넣으라고 하시면서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이라고 하였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3)
언약의 소금이란 무엇입니까?
소금은 그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입니다. 만일 소금에서 짠맛이 사라지면 그것은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소금의 짠맛은 변하지 않는 것 같이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언약도 변함이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확인시키기 위하여 소금을 치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중동지역에서는 사람들이 약속을 할 때, 반드시 짐승을 잡아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언약 당사자가 지나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이 언약을 위반할 경우, 이 짐승처럼 쪼개어져 죽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약속을 준수 하되 죽음으로서 준수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과의 약속도 그와 같이 불변하거든 어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 변질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약이 변하는 것은 하나님편이 아닙니다. 갈대와 같이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마음 때문에 하나님과의 약속은 파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소금을 두라고 하신 것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소금이 맛을 잃을지언정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은 불변할 것을 믿으며, 이를 믿는 나의 마음도 변함이 없을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불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는 믿음도 불변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을 받은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와 서로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믿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엡 6:24).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우리 서로를 변함없이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은총을 더욱 충만히 받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사 드리는 방법도 번제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첫째, 소제는 많은 분량의 제물을 가져올지라도 매우 작은 분량만을 드립니다.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로 가져 올 것이요 제사장은 고운 기름 한 줌과 그 모든 유향을 취하여 기념물로 단 위에 불사를지니"(레 2:2).
"그 소제 물 중에서 기념할 것을 취하여 단 위에 불사를지니"(레 2:9).
"제사장은 찧은 곡식 얼마와 기름의 얼마와 모든 유향을 기념물로 불사를지니"(레 2:16).
번제에 대하여 말씀 드릴 때, 번제는 소이든 양이든 비둘기든 모두 남김없이 불에 태워서 드려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소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극히 일부분만을 드립니다. 한줌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소제를 극히 일부분만 드린다고 하여 조금만 가져와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양으로 제사를 드릴 때는 에바 10분의 1을, 염소로 제사를 드릴 때는 에바 10분의 2를, 소로 제사를 드릴 때는 에바 10븐의 3을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분량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래도 드리는 것은 한줌입니다.
둘째, 남는 것은 제사장이 가집니다.
여기에는 깊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깃들여 있고 또 신자가 마땅히 하여야할 본분을 제사와 관련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속적으로 쉽게 이해하면 단순히 레위 자손은 세상의 생업이 없으니 그와 같이 하여 저들의 생활을 보장도록 하려는 섭리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단순히 제사장들에게 먹고 살 것을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 고 하였습니다. 소제의 제물 중 극히 작은 부분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사장에게 돌리는 것은 저들에게 영적으로 빚진 것을 육신적인 것으로 갚으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노력 없이 얻은 것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내가 수고하고 땀 흘리고 노력한 것을 가지고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감사의 실천이요 신앙의 표현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애당초 사도 바울을 대하기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같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 이단이 들어와 신앙의 순수성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처음 사랑의 빛은 바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사도 바울을 원수와 같이 여기게 되었습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이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너희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 만 있었더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갈 4:14-16).
신앙이 있으면 하나님의 종의 고마움을 압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든지 은혜가 상실되면 고마움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소제를 드리는 이스라엘에게 제사하다 남은 것을 구제품 던지듯 제사장들에게 던져 주라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내가 수고 한 것을 나누어 드리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준 제사장에게 대한 사랑의 빚을 갚고 저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고마움과 하나님의 종의 축복기도에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소제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소제라는 단어의 뜻에서 명확하게 들어 납니다.
소제란
첫째, 소제란 히브리 단어로 민카입니다.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내가 들에 나아가 땀흘려 수고하여 거둔 것을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고 하나님의 제사장들에게 선물로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때 선물로 드리는 것은 내 것을 기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니 모든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린다는 뜻으로 바치는 것이요 제사장에게 선물을 하는 것도 신령한 은혜를 빌어 주어 평안하고 형통하였으니 이에 감사하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뜻으로 선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둘째, 소제에는 피가 없습니다.
속죄의 표시가 없습니다. 따라서 소제는 독립적으로는 제사가 성립되지 못합니다. 반드시 피의 제사가 동반하여야 합니다. 첫 서론에서도 가인의 제사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피의 제사가 동반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감사하든지, 제사장에게 감사하든지 이 모든 것은 인간적인 고마움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 안에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근원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나가는 말
하나님께 아름다운 소제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내가 고운 가루가 되기 위하여 부서지는 밀알이 되고 바쳐지는 기름과 유향이 되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누룩이 섞이지 않도록 삶의 순결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십시다. 언약의 소금을 치듯이 확고부동한 신앙을 가지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서로의 사랑을 항상 확인하십시다. 여러분의 소제에 주님의 보혈이 임하여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