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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예배의 대상

(사도행전 17:24-25에서 나타난 말씀을 중심으로)


예배란 마땅히 드릴 자에게 드려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받을 수가 없는 어떤 대상을 만들어 놓고 무조건 정성만 쏟으면 예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이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소요리문답 1조)이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예배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자는 자신의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면 알수록 바른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될 때 자기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고 그때 비로소 진정한 예배의 모습을 스스로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사람의 제일된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경외와 봉사와 생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계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알 때 먼저 나의예배와 섬김을 받으실 분으로 계신다는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생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예배할 자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의라는 것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지으신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이시라는 사실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고대 아테네 지역을 돌아다닐 때 수 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집)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4-25)고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조성자시요, 주인이시요, 다스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셔야 하는 것이고 우상을 섬기듯이 그런 방식으로 해서도 안되는 것임을 가르칩니다. 예배는 오직 천지의 주재자만 받으셔야 할 것이며 그는 분명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분이시며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면 거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지 자신들의 종교성에 의하여 종교예식을 행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악하고 불경건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예배사의 저자 오스카 하드만(Oscar Hardman)의 말대로 예배란 지극히 높은 가치에 대한 피조물적인 자각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의 가치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알고 자신이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예배는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로마서 2:20절 이하를 읽어봅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아니하며 감사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계속하여 25절에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우리 피조물들은 하나님을 마땅히 경배할 자로 알아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우상을 섬기고 따라서 많은 윤리적 부패와 불경건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모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께 마땅히 예배를 드려야 하는 피조물인 것을 깊이 자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각성이 있다면 어찌 감히 하나님 예배를 게을리하거나 소홀히하거나 경거망동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돌보심)하시나이까?

많은 피조물들 속에서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본다면 이러한 진정한 자기 성찰과 아울러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명칭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품성)이나 존재하심을 알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심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이라는 명칭은 주를 의미하며 대체로 위엄과 권위를 표현하고 하나님은 우주 위에 위엄과 권위의 대주재이심을 뜻하고 이에 따르는 {엘로힘}은 강하고 유력한 경외의 대상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하나님은 창조주와 통치주이심을 가리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도나이}(주)라고 불렀던 것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다스리신다는 의미로서 하나님은 모든 것의 굴복을 받으시며 사람을 종으로 가지시는 자이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권능을 가지시고 통치하시며 그의 나라를 이 땅에 두시고 그의 백성들로부터 섬김을 받으시는 존귀하신 어른이심을 보여줍니다.

이 하나님 앞에 인간들은 다만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보듯이 그들의 예배는 바알숭배와 같은 위복사상의 제식과는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에서부터 출발되는 예배하고 일반종교의 기복주의적인 의식행위와는 결코 같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자도 될 수 있는 반면에 피조물을 섬기는 우매자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섬기고 다만 그를 경배하지 않는 것은 피조물의 주권이 창조주의 주권보다 큰 곳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의 창조는 신적계시의 시작과 기초이며 모든 윤리적 종교적 생활의 기초가 됩니다.


느헤미야는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송영하기를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 경배 하나이다''(느 9:6)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주재자이시며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또 보존하시기 때문에 이 사실로서도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셔야 할 분으로 충분합니다. 모든 하나님 나라의 영적 존재들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시고 여기에 거룩하신 나라를 건설하시고 경영하여 나가시는 일을 보고 경배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히브리인들의 예배도 이교도들의 다신론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인위적이며, 순간적 표현방식의 예식과는 달리 유일신론적이며 창조주와 피조물간의 엄격한 구분에서 오는 윤리적, 인격적 복종과 모든 일을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순응과 원칙적으로 통일된 표현방식에 의한 예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상 창조적 신앙이 없는 곳에는 다신론과 범신론 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시편 100편에 보면 시편 기자는 이 창조주 신앙이 확실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배자의 영역, 태도, 대상, 그리고 예배자와의 관계를 훌륭하게 묘사하여주고 있음을 봅니다. 시인은 먼저 ''온 땅이여''라고 함으로서 예배의 영역을 확장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 모든 우주 만물, 삼라만상을 통하여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는 특별한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께서는 목자처럼 우리를 은혜로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는데 그 통치하시는 통치의 성격은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성실하심(5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할 근거는 바로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 뒤따라오는 통치자와 백성, 목자와 양의 관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깨달음과 이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응답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 관하여"라는 책을 쓴 맥스웰(W.D.Maxwell)도 이 점을 동감하여 ''우리의 예배는 창조주시요 모든 자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충성하는데에 그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하나님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2). 인간은 타락한 이후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도 허망하여지고 마음도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 가운데서 특별히 정하신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이 땅에 두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영혼들은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소원과 열망을 가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앞에 예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의 예배를 받으실 때 먼저 은혜를 베푸시고 그 은혜에 감사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나아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베푸신 크신 사랑에 대한 인간적 표현으로 이루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음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아울러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구원되어졌다는 사실은 더욱 그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사는 속죄적 성격과 아울러 감사의 예배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들이 드리는 물질들은 감사와 예물의 표가 되었으며 그 은혜에 대한 헌신의 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원되어진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삶을 예배에다 중심점을 두고 살아가게 됩니다.


예배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되기 때문에 거기에는 귀찮은 것이나 형식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인간의 공리적 심사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예배자의 관심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구원의 확신은 말하여도 예배의 기쁨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는 아닌지요?

우리의 예배생활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 속에는 반드시 감사와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배생활 속에 감사와 기쁨이 없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생활의 위기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찌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1).

"그에게 가며 그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하나님의 구원은 예배자의 무한한 기쁨이 되며 심적 동기가 됩니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하).


영이신 하나님

우리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만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이루신 사역(창조, 보존, 구원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앞서 보았으나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존재형식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존재하시느냐에 따라 우리의 예배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일 어떤 우상과 같은 형식으로 존재한다면 우리의 예배도 마치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처럼 예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우리들의 신관이나 신 지식의 수준 즉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계시에 따라 얼마나 바르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예배의 차원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나 그의 존재하심, 또한 사역들을 알고 전심으로 그 앞에 엎드릴 때 예배는 바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아론에 의하여 주도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금송아지 숭배사건은 바로 이 점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자기들을 구원하여주신 하나님을 숭배하기는 해야겠는데 그들의 신관은 저조하여 자기들이 보아왔던 애굽의 표현방식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의 우상(금송아지 형태의 아피스)을 만들어 거기에다가 자기들을 구원하여 주신 여호와라는 이스라엘적 신 개념을 집어넣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냈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에서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주신 사실들을 많이 경험하고 감격하여 그를 섬긴다고 할지라도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를 체험하였다고 그가 금새 하나님을 정당하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듯이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숭배 심리가 자신들의 공리심사와 깊숙히 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좋을 때는 서둘러서 자기네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행위는 창조주와의 관계에 의한 것이나 하나님의 존재형식에 대한 깊은 인식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현실적 유익과 혜택과 깊이 관련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현실감과 정열, 종교적 감정이 넘치는 이방의 우상숭배에 의하여 항상 영향을 받아왔고 때로 거기에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 도중에 발람의 책략으로 우상의 제전에 나아가 타락했던 것도 여기에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격을 알고 섬긴다면 그러한 기복주의적인 촉감으로 날뛰는 낮은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해 주셨는가와 아울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합니다. 전자의 감정은 후자의 지식에 의하여 통제되고 인도되어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표현방식이 지극히 유치한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형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제일로 큰 문제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인격적이신 분으로 대우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금세안심 내세복락을 위하여 존재하는 분이나 되는 것처럼 비좁은 신지식을 가지고 기독교가 운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주의와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위치한 저회하고 유치한 형태의 기독교입니다. 이러한 심사는 이스라엘 전 역사 과정에 뿌리 깊히 박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던 원인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예배와 관련하여 긴 역사적 배경을 안고 그들의 심리를 잘 반영하여 주는 일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예루살렘에서 드려야 하는냐 그리심산에서 드려야 하느냐?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심산은 일찌기 모세 시대에 축복의 산으로 부각되면서(신 11:29) 포로 후 사마리아 지역의 성소로 인정되어졌는데 이때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사이는 심한 불화가 있었고 특히 사마리아 총독 산발랏의 딸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 마나세가 결혼을 하였는데 이스라엘에서는 마나세가 산발랏의 딸과 이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추방하여 버리므로 산발랏은 마나세를 맞아 그리심산에 성전을 짓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취임시켰습니다. 이때부터 그리심산 예배는 예루살렘 예배와 경쟁적인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의 처소를 주님께 질문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주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23절)고 하셨습니다.


이는 예배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스라엘에게만 계시되어진 이유 때문에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하나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고 이제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정신과 자세가 더욱 중요한 것이 되어집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이 가견적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성격 때문에 그 시대에 있어서는 장소도 중요한 의미를 가졌지만 실은 미래의 실체를 내다보며 똑같은 바른 자세로 지향되어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상 구약 경륜의 때가 아니고 보다 신령한 실체의 시대가 도래하였으므로 예배에 있어서도 그 실체에 따른 예배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예배는 상당한 제한적 현상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 영적 요소를 강화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가 바른 영적 예배가 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사실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말씀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다른 존재나 사물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지신 분이심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적 존재 속성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의 전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떤 제한도 받지 않으시며 어디에나 계시며 예배자의 마음의 자세를 다 살피십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영이신 분으로 깨닫는다면 훨씬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는 오직 영이신 하나님만 받으실 수 있으며 영이신 하나님을 가시화하려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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