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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란 무엇인가 ?

예배란 무엇인가 / 윤사무엘 목사(부학회장)



예배는 하나의 공동체의 축제이다. 구약에서도 신년축제, 감사절, 유월절 축제로서의 공동체 예배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하나의 예술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절기예배로 부활절, 성령강림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송구영신예배, 교회설립예배, 임직예배등 축제의 기분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각 나라에서는 자기들의 문화와 맞는 예배의식을 개발함으로 예배의 토착화를 시도해 볼 수 있다. 세계교회협의회가 펴낸 <전도와 선교 에큐메니칼운동신조>에서 문화적 토착화(inculturation)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1): “각기 다른 문화권 속에 교회를 세우는데에는 복음의 문화적 토착화에 대한 적극적 자세가 요구된다. 옛날의 교회들은 수세기에 걸쳐 그 백성의 문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들의 토양에 교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문화적 토착화는 화육(incarnation)의 신비안에서 그 근원의 발상을 찾을 수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여기에서 육신은 예수님의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피조된 실체를 뜻한다. 그러므로 문화적 토착화는 그리스도교 선교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된다. 만약 복음선포가 선교를 선포되어야 할 말씀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문화적 토착화는 이들 말씀이 특별한 개인, 공동체, 제도 또는 문화 속에서 취하는 육신, 또는 구체적인 화육(incarnation)의 관점에서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한국의 문화적 다양성 속에 심겨진 복음의 내용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예배의식을 과감하게 토착화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까운, 교회 건축 양식, 전통음악, 의식등을 토착화의 관점에서 연구해 볼 과제가 남아 있다.


문화 속에 산재해 있는 합법화된 의식들의 다양한 상대주의를 낳고 그것은 계속해서 어떤 한 가지 의식이 그 참여자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감소시킨다. 문화가 우리의 생활에 미치는 부분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하다가, 다른 문화 안에 처해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교회의 예배생활과 그 교인들의 일상 생활은 어떤 특별한 문화적 배경 가운데에 나타난다. 니이버(H. Richard Niebuhr)는 그의 책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교회와 문화 간의 가능한 관계들을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누면서,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는 문화를 피하려고 애쓰며 자신의 독특한 대항 문화를 정립시킨다. 그 반대 편 극단에는 문화의 그리스도가 있어서 자신이 처한 문화 속에 스스로 완전히 용해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이러한 극단에 까지는 미치치 못하는 것이 두가지 있다. 문화의 위에 있는 그리스도는 문화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취함으로써 종합을 이루려고 하는 반면 그리스도와 문화를 택하는 입장은 좀더 비관적이어서 서로 다른 현실을 다룸으로써 필연적으로 긴장관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2) 니버의 다섯번째 가능성, 즉 문화를 변형시키는 그리스도를 제시하는데 이 입장은 문화를 긍정적으로 보기는 하나, 문화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항상 개혁되고 새로와질 필요하에 있다고 본다.


교회의 예배가 문화를 회피하거나 용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교회는 문화안에서 성육신되어야 한다. 이 성육신이 쉽지 않는 종합이나 내적 갈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안스카 추풍코 신부는 예배의 문화적 적응에서 적응의 두가지 형태, 즉 문화 병용(acculturation)과 문화화(enculturation)를 간단히 설명한다. 문화병용이란 성찬 예식과 모순되지 않는 문화적 요소들을 합치시키는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 안에서는 기도가 소박하고 솔직할 수 있는데 반해 다른 문화 안에서는 극적이고도 정교할 수 있다. 상징과 상징적 행위에 관해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문화병용이 정립된 문화적 요소들을 사용함으로써 예배 의식을 변경시키려 한다. 그것의 목표는 문화에다가 복음의 정신을 주입시키는 것이다. 또 문화병용이나 문화화는 모두 다 대응의 원칙을 지키지만 그 어느 것도 간단하지 않다.


예배생활과 일상 생활이 조화를 이루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성을 유지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개별 문화의 특수성과 관련을 맺게끔 해야 한다. 예배 생활을 어느 정도 문화에 적응시키는 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적응이 동시에 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도들이 부적절할 때에 우리가 성찬식을 거행하고 실천하는 것 사이에 분열이 일어난다.


예배형식을 엄숙하고, 아름답게, 의미있게 하기 위해 장식예술, 음악, 찬미, 종교건축, 종교축제 등을 발전시킨다. 건축예술이 발달됨. 예배자는 제2의 창조자가 되어 문화를 창조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현현하는 장소를 거룩하게 해야 한다. 예배감정이 우러나게 해야 한다. 개신교는 비종교화 되어 있는데 재종교화가 일어나야 한다. 축제로서의 예배로 갱신되어야 한다.3)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예배 공동체로 모이기 시작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체험한 이 후의 일이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서로 나누며 기쁨의 축제를 가진 것이 기독교 예배의 원초적인 모습이다. 이전에 지켰던 안식일 예배가 아니라, 부활의 감격을 서로 나누며 주일날에 성만찬식을 가지며 축제의 분위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원초적인 예배의 모습은 이런 축제로서, 주일날 종일 성도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며 사랑의 교제를 하였다. 감사의 찬양과 기쁨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불려졌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예배의 축제적 성격이 많이 퇴색되어 갔다. 그것은 예배속에서 축제의 성격을 따로 분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즉 축제절기 (부활절, 성탄절, 감사절등)에만 축제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일반절기는 축제성을 배제한 보통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배 그 자체가 축제성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배음악은 바로 이 축제성을 잘 살린다. 모인 회중들의 마음을 이끌어 나가고 분위기를 주도하는 요소가 바로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음악은 보조적이고 종속적인 위치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음악의 역할이 감소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이후 종교개혁시대부터였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설교말씀 중심한 예배가 보편화 되었다. 이후 예배는 점점 형식화 되고 예식화 되었다.


예배의 모든 순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유기체라는 것은 살아있는 연관성을 의미한다. 즉 예배순서가 하나하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살아서 연결되어 있다. 각 예배순서를 자연스럽게 이어주는 것이 교회음악이다. 음악이 없다면 예배의 생동감도 없어지고, 순서가 맥이 끊기게 된다. 가능하면 집례자는 무언으로 사회를 하고 오르간과 찬양대가 예배를 주도하게 하면 예배 전체가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예배가 될 것이다.


예배는 하나의 문화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각 시대나 나라의 문화의 특징에 따라 그 예배의 성격도 달라진다. 흑인교회가 대부분 예배시간이 길다. 2-4시간 가운데 찬양의 시간이 반정도 된다. 유럽교회의 예배와 아시아인의 예배가 다르며, 교파에 따라 예배의 순서와 분위기가 많이 차이가 난다. 예배의 기본 형식을 같으나, 그 예배자의 문화에 걸맞게 예배 내용이 짜여 있다. 예배는 각 문화의 토양에 뿌리를 내려 특징적인 분위기를 창출하면 좋을 것이다. 예배음악도 토착화하여 우리의 정서에 맞는 노래를 개발하고, 국악찬송, 우리 가락에 마추어 작곡된 찬송들을 많이 부르면 좋을 것이다. 모든 음악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공동체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긍정적인 영향 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반유대주의를 담고 있는 음악이나, 뉴에이지운동의 조류를 타는 음악, 선정적인 음악등은 사회에 해를 끼친다. 이보철교수는 “국악과 찬송가의 토착화”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4) “한국기독교는 한국문화 속에서 ‘우리의’ 신학과 교회음악문화를 창조해 내야 할 사명이 있다. 이성천교수(서울대)의 주장대로 기독교는 이미 한국인의 종교로 자리잡은 ‘우리의 종교’이며, 한국인의 의식은 한국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 원리를 바탕으로 ‘한국의 교회’ 음악은 한국적 정서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 형성은 역사의 필연이라 생각된다. 불교와 유교에서는 토착적 음악을 수용하였는데 기독교에서는 한국의 전통 음악 어법을 수용하지 않았던 이유는 1) 한국 전통 문화에 낯선 초기 선교사들이 한국 전통 음악을 제대로 수용할 수 없었고 2) 전통 음악이 유.불.선에 뿌리를 두고 있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거부감을 갖게 되었으며, 3) 사회 신분적으로 ‘쟁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4) 일제 통치 하에서 우리 것에 대한 탄압과 5) 우리 민족의 사대주의와 열등의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 생각한다. 이런 여러 이유중 한국 기독교인들의 배타성에 큰 책임이 있다... 찬송가는 한 국가의 교회음악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교회음악 문화 형성은 교회 회중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의 우리 찬송가를 가지고는 도저히 한국적 교회음악 문화를 이룰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캐톨릭의 영창(chant), 독일의 합창(choral), 네덜란드나 영국의 시편가(psalter), 영국의 찬양(anthem)과 복음찬미(gospel hymn)등은 모두 자기 문화에 토착화한 결과이다.


음악의 내용적 기능은 일반적인 음악의 형식에 신앙의 내용을 담아서 표현하고, 전달함으로서 예배자의 신앙에 감동이나 영향을 주는 기능이라 말할 수 있다. 음악형식에 신앙의 내용을 담아 인간의 종교적 심성을 불러 일으켜서 예배자로 하여금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음악의 중요한 목표이다. 그러기에 교회음악 또는 예배음악은 예배의 부차적인, 부수적인 부분이 아니라 예배 그 자체인 것이다. 찬송이나 찬양대의 특별찬양을 통해 감사하고, 간구하고, 응답할 수 있다. 교회음악은 예배자로 하여금 예배에 더 깊이 몰입하게 만들고 각양 치유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말 할 수 있다. 오늘날 이러한 예배음악의 기능의 중요성이나 그 활용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줄어들고, 또 카톨릭 교회나 성공회보다 우리 개신교가 훨씬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다.


전주와 더불어 예배가 시작된다. 이 시간 하나님의 부르심과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시간이다. 회중찬송은 다같이 힘차게 불러야한다. 찬양대는 송영, 기도송, 찬양, 헌금송, 축복송을 준비하여 연주한다. 모든 찬송의 관객은 하나님이심을 잠시도 잊지 말자.


이런 관점에서 한국 기독교도 한국의 문화적 다양성 속에 심겨진 복음의 내용을 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예배 의식을 과감하게 토착화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가운, 교회 건축 양식, 의식 등을 토착화의 관점에서 연구의 재고의 가치가 있다. 특히 교회 음악은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예배의 토착화에 선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배에 사용되어지는 전통 음악일 경우 한국인의 심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성장할 시기에 들었던 소리에 익숙함을 느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양 음악 교육을 받고 자라난 한국 기도교인들 에게 한국의 전통 음악은 익숙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우리의 전통 음악 교육을 받고 예배에서 번역된 외국 찬송 대신 국악 찬송을 부르고 서양의 관현악 대신 한국의 소리인 북, 장고,징,종 등의 민속 악기가 동원 되어야 한다.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차임벨 소리 대신 징을 사용하고, 회중 찬송을 부를 때, 피아노나 올간 반주 대신 장고나 북을 사용하고 성가대의 특별 찬양은 가야금이나 피리를 함께 사용 할 수 있다. 건축 양식 면에 있어서 평신도가 설교자 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선입감을 없애기 위하여 강단의 높이를 낯추고 성가대는 회중석을 향하지 않고 강단쪽을 향하여 찬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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