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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는 회복이다

예배는 회복이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福音)의 시작이라. (2) 선지자(先知者)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豫備)하리라. (3) 광야(曠野)에 외치는 자(者)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主)의 길을 예비(豫備)하라 그의 첩경(捷徑)을 평탄(平坦)케 하라 기록(記錄)된 것과 같이, (4) 세례(洗禮) 요한이 이르러 광야(曠野)에서 죄(罪)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悔改)의 세례(洗禮)를 전파(傳播)하니, (5) 온 유대 지방(地方)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自己) 죄(罪)를 자복(自服)하고, 요단강(江)에서 그에게 세례(洗禮)를 받더라. (6)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石淸)을 먹더라. (7) 그가 전파(傳播)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能力)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堪當)치 못하겠노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洗禮)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聖靈)으로 너희에게 세례(洗禮)를 주시리라(막1:1-8)

들어가는 말

Nyskc World Mission의 대표회장 최고센 목사는, “교회는 어떻게 생명력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예배가 침체되는 순간 교회는 침체되고 나라와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배가 소중히 여겨지고, 예배가 바로 드려지는 곳에는 교회가 살아나는 것 뿐 아니라 나라가 살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이라면 예배일 것이다.

예배를 빼놓고 신앙을 말할 수 없고 살아 있는 예배가 없이 전도가 있을 수 없고 선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부흥은 물론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을 논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예배가 바로 신앙의 본질이라고 피력했다.


필자는 교회를 연구하면서 교회가 조직화 되어가고 있는 것에 갈등을 느끼면서 교회가 교회 되지 못하는 것은 결국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교회가 성령 강림으로 태여났을 텐데, 교회가 태여 났다 함은 결국 유기체(organism)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교회가 조직체(organization)로 세워저 가기 때문에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기체 적인 교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교회 자체 안에서 생명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라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만나며, 그 속에서 생동력을 가지게 되므로 organism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1A.예배가 무엇인가?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祭祀)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義)로운 자(者)라 하시는 증거(證據)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禮物)에 대(對)하여 증거(證據)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1b.예배에 대한 신구약의 관점

구약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사건은 물론 출애굽 사건등 모세 오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즉 제사적 요소는 물론 예언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면서 왕권시대의 왕의 권세와 나라의 평화가 예배에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줌은 물론 백성들의 삶에까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함이 중심적요소로 나타난다.

신약시대에 회복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형상회복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곧 예수님임을 보여주는 골격을 이루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어 부활의 사건 역시 예배와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2b.예배는 예배시간보다 삶 자체가 중요하다.

예배는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삶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형식은 틀렸다라고 하는 뜻은 아니다. 형식적인 예배 형식에 메인 예배 형식을 앞세우는 예배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예배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경배이다. 그것이 하나님이길 하나님은 바라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도 실패할 수도 있고, 또 성공할 수도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살펴보면 예배의 성공과 실패의 극단적인 모습을 찾아본다. 가인은 실패했고, 아벨은 성공했다. 그러면 통상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 이들의 성공과 실패가 제물의 차이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가장 궁극적인 요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듣기의 차이였음을 알 수 있다.

1c.제물의 차이

그들은 무엇으로 제사를 드렸는가? 가인은 땅의 소산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드렸다. 그들의 제사를 일러주는 성경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다. (창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그들의 성패여부가 그 제물에 있는 듯하다.

잘 알듯이 가인은 농사꾼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어 거둔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다. 그와는 달리 아벨은 목동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른 양떼 중에서 양의 첫 새끼를 한 마리 잡아 제물로 바쳤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것이다.

성경은 민수기 15장 4절에, 소제와 번제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데, “그 예물을 드리는 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기름 한 힌의 사분지 일을 섞어 여호와께 소제로 드릴 것이며” 가인은 이 법대로 드렸습니다.

레9:2“아론에게 이르되 흠 없는 송아지를 속죄제를 위하여 취하고 흠 없는 숫양을 번제를 위하여 취하여 여호와 앞에 드리고” 아벨은 이 법대로 드렸습니다. 둘 다 하자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의 제사에 대하여 다른 반응을 하신다.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고,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셨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셨고,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2c.믿음의 차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맘에 안 드시고, 아벨의 제물은 맘에 들어 하신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인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인의 제물은 자신의 생각을 드린 것이고, 아벨의 제물은 하나님의 생각을 드린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과 같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즉, 가인은 믿음이 없이 드렸고 아벨은 믿음을 가지고 드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가지시는 생각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가진 자의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결국,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제물이 아니고 믿음이었다.

3b.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는 성공할 수 있다. 반대로,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는 실패하고 만다.

아벨이 드린 제사가 믿음으로 드린 것이라면, 가인이 드린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이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의 차이는 바로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의 차이이다.

삼상15:22“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믿음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는 것은 자기 맘대로 산다는 것이다. 믿음의 반대는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대로 사는 것을 말하고 있다.

4b.예배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Peter Bruner는 예배는 “하나님의 봉사”(Gottesdienst)라고 정의했다.

예배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배설하신 잔치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가장 귀한 것들을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부터 예배는 시작된다. 이것을 에모리 대학 교수 Don E. Saliers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ethos”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섬김으로부터 예배가 시작된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격하여 드리는 인간의 섬김으로 예배는 완성되어진다.

Peter Bruner는,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의 이토스가 인간의 파토스(pathos)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준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 파토스가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vulnerability)이 예배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함이라는 이토스와 만나게 될 때, 변화와 능력의 예배가 되어 진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자기 주심과 창조의 은총 앞에 감격으로 응답하여, 자기 드림의 행위가 예배인 것이다.

2A.예배의 기준

예배의 질을 높이라고 했으니까, 예배의 질, 즉 Quality가 도대체 어떤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물론 예배의 Quality에 대하여 보는 사람들의 관점과 생각이 다른 것만은 사실이다. 다른이들의 견해나 보는 각도를 이야기 하기 보다는 성경적으로 볼 때 필자는 예배를 회복으로 보고 싶다는 것이다. 즉 내가 생각하는 예배의 기준이 뭐고 예배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의 도구다!”라고 보는 것이다.

1b.왜 예배가 회복이냐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만물을 다 관리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사용하는데는 아무런 조건을 두지 않았고 하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는 먹지 말라고 했다 그 이유는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년 죽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실과를 보고 있는데 뱀이 와서 유혹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13)

그리고는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은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고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게 된다

그러니가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회복되어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성경말씀에 이 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히 교제할 수 없는 존재요 죄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담 하와의 불순종이 죄를 만들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신 말씀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람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다

하나님의 피하여 나무 뒤에 숨어야 하는 인생이 되었고 또 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려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사망이라는 처벌이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5-19)

이런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3:21)

이 말씀은 죄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된 사람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그리고 자비하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물을 잡아 만들어진 “가죽 옷”이었다

이 가죽 옷의 의미는 아주 깊다

여기에 '가죽옷'이라고 하는 것은 동물이 대신 피를 흘려서 그 가죽으로 아담과 하와를 입혀 준 옷을 말한다 동물의 가죽 옷이라고 하는 것은 장차 인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돌아가실 속 죄 양을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러 가셨을 적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던 것이다.

롬3:20절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라고 하였으며 롬3: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다.

모든 아담의 후예는 죄 아래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 가운데 죽어 심판 받아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존재들입니다. 자기 자신이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가리운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죄를 은폐하거나 가리울 수가 없다. 무화과 나무 잎사귀로 자기의 죄를 가리우고는 하나님 앞에 결단코 나아 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가죽 옷을 입고 나갈 때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엡2:8-9절에 보면 "너희가 그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또 요1:13절에 보면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하였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죄 중에 있는 저들을 통해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것에 따라 아벨도 하나님께 동물로 드린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의 부모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였는가를 보았다(창4장)

그 근거로 저들이 드린 제사 중에 아벨 것을 받은 것을 볼 때 분명하다

왜냐하면 본대로 배운대로 그는 믿음을 가지고 양의 첫새끼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 뒤로 인류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마다 양이나 염소 그리고 소를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들고 나아갔던 것은 이스라엘의 문화적 환경적 조건 때문이 아니라 보고 듣고 배운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다(goshen choi 예배회복운동 176)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까지 이러한 제사방법은 계속된 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대로 행하여 왔기 때문이다

한편 아담과 하와에게 이 가죽 옷을 입혀주신 하나님은 창조하실 때 가장 기뻐하셨다고 하셨고“우리의 형상에 따라 우리가 만들자”한 저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 곧 예배받으시고자 하는”그 뜻대로 이루어가시기 위하여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 옷에 의미에는 “예배가 들어 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는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었고 부르심에 대답할 수 없었으며 자신들의 몸이 벌거벗어 있음을 부끄러워 하여 무화과 나무 잎으로 몸을 가리웠고 또 나무 뒤에 숨었지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만들어 주어 입게 하셨을 때 그들은 에덴 동산에서 좇겨나게 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거니시던 하나님을 볼 수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인과 아벨이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드린 것을 보아 그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을 만나려면 동물을 잡아 올려 드릴 때 비로소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1c.죄에 대한 바른 생각

우리는 죄 하면 도둑질, 사기, 음란 같은 것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죄의 결과일 뿐 죄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죄는 원어로 “하말티아 aJmartiva” 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것이다. 화실이 과녁을 빗나가는 것은 정조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원하시기에 우리는 우리 모든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세상, 물질, 명예, 쾌락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다.

우리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지 않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는 것이 바로 죄이며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가 없는 것이 바로 죄다.

2c.과연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가?

오늘날 우리 사회 속에서 뉴스를 보면 이 시대의 죄악이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는 다 짓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가정이 파괘되고 사회가 극 진보주의로 흘러가고, 심지어는 청교도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가 사회주의 사상으로 물들여져 가는 상황 속에서 개인적으로 나라 적으로 낙천적인 것 보다는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가 없었고 죄를 짓다가 멸망하여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됐다. 비참한 포로생활을 통해 그들은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그발 강가에 모여서 70년간 눈물의 회개를 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눈물과 하나님 뜻대로 살려는 의지를 보시고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위로하고 회복을 이야기 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 교회이고, 또한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형식 보다는 예배 한사람 한사람의 바른 자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고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이스크 대표회장이신 최고센 목사의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 (2)”에서 예배의 특성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예배는 다른 종교가 가질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면서 예배의 구심점의 하나가 말씀선포라고 했다. 이 말씀 선포를 통해서 우리는 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

3c.예배는 모이는 것이다.

교회를 에클레시아, ejkklhsiva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성령에 의해 결합된 공동체를 일컫는 명칭이다. 신약에 있어서교회로 역된 그리스원어 [에클레-시아 ejkklhsiva]는 신약에 112회 씌어져 있는 말인데, 복음서에는마 16:18, 18:17에 씌어져 있고, 사도행전 이하의 글에 빈출되어 있다. 이 [에클레시아]는 [에크 카 레오- ejkklevw](불러내어 모은다)에서 온 말로서, 시민의 공적(公的) 목적으로 모이는 집회를가리키고, [모임](assembly)으로도 역되어 있다(행 19:32,41,에베소 시민의 이 의미에서의 집회를 가리킨다).

우리가 잘 아는데로, 주님께서 이땅에서 말씀해 주셨을때에 제자들을 향하여,“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中)에 있느니라.” (마 18:20)라고 하셨는데, 주님이 함께 하시는 이유가 바로 예배를 받으시기 위함이시다. 믿은 자들이 함께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모여서 주님께 예배드리는 것으로 주님의 세계로 회복되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저기서 각각 있어서는 예배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 예배가 되면 교회가 살아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예배를 회복시킬 것인가를 관심 있게 봐야 하는 것이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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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왜 예배가 찬양과 경배이냐?

1c.찬양의 깊은 의미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찬양이라는 것을 음악으로 생각하는 시간부터 찬양의 깊은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적 찬양의 의미는 하나님을 계속 말할 때에 우리가 찬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찬양이 음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음악으로 끌고 가는 것이 큰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시편에서 다윗이 찬양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노래는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께 향한 경배였다는 것이다. 다윗의 찬양 속에서는 그가 절대주 하나님께 향한 “드려지는 모습”이지 결국 나타내려는 것은 없었다.

2c.찬양은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In the Presence of God인데, 찬양이 음악이 아니면 결국 하나님의 임재를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 일이다.

물론 경배란 말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무릎을 꿇다, 엎드리다, 마음을 드렸다, 이마를 땅에 대었다.” 등등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임재에 전적으로 수궁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3b.신령과 진정으로 예배가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신령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진정은 말씀이 육신된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난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되어 있지 않으면 “예배의 질을 높일 수가 없다.”

1c.성령을 받아야 한다 (막 1:1~8)

1d.주님은 예비자로 오신다. (vv. 2~3)

“...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막1:2-3)


만군(萬軍)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使者)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豫備)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求)하는 바 주(主)가 홀연(忽然)히 그 전(殿)에 임(臨)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思慕)하는 바 언약(言約)의 사자(使者)가 임(臨)할 것이라.(말라기 3장1절)


외치는 자(者)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曠野)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豫備)하라. 사막(沙漠)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大路)를 평탄(平坦)케 하라.(이사야 40장 3절)

물론 이 말씀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을 의미하지만, 우리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들이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준비자”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그 교제를 잃었던 것은 우리들이 불순종함으로 인해 죄를 얻은 결과이다. 이 내용을 그저 세례 요한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러 온다고 만 생각하면 너무 단편적이가. 그러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우리들이 가는 길을 준비하러 오시는 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2절과 3절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2d.첩경을 평탄케 하라 (v. 3)

본문에는,“...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라고 했다. 이 말씀을 풀어보면 결국은 “나의 길을, 내 길을 예배해 줄 분이 오시는데, 너는 그 분이 속히 오실 수 있도록 너의 굴곡이 되어있는 너의 자신, 다시 말하자면 울퉁불퉁하고 삐뚤삐뚤한 너의 심장을 똑바로 해 라”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다고 해서 모두가 평탄한 길을 걸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도 사람이 준비된 그릇이 아니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 온 것인지 세상의 소리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준비가 더디면 주님이 오시는 것도 더디게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들의 갈망은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원하는 것인데, 우리들이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참다운 예배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준비를 하는가? 그것은 그 다음 구절에 표시가 되어 있다.

2c.어떻게 성령을 받는가?

1d.회개가 있어야 한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있다. 회개라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구하고 그 다음에 물세례를 받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물세례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세례 요한은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 때에 사람들은 모두가 요한에게 나와서 자신들의 죄를 자복했다.

결국 마가복음 1장에서 말씀하는 것은 “회개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은 예배의 참 대상이신 그 분이 오실 때까지 마음과 행실을 청결하게 하여 그 분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2d.거룩해 져야 한다.

거룩해라! 라는 것은 구약적으로 볼 때에 율법의 적용이다. 자기 죄를... 예배를 통해서, 또한 말씀을 통해서, 나의 죄를 알려 가면서, 한 쪽으로는 내가 자신을 고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인본주의 적이기는 하지만, 내가 죄를 짓지 않고 주님께서 거룩하시니까 그 거룩을 닮아 갈려는 힘씀이 우리들의 죄를 구체적으로 알게 하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구약의 율법이 우리들의 죄를 드러내고,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내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바르게 갈려고 할 때 그 순간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신 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들이 해야할 일들인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성령이 오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만히 있는데 성령이 부어지는 역사는 없다.”라는 것이다. 내가 어리석고, 부족하고, 미련하고 죄가 많고... 이런 통찰력이 있고, 말씀을 통해서 이런 통찰력이 주어졌을 때 나는 가난해 지고 가난해 진 나는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3c.말씀이 육신이 되어야 한다.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과 진리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들의 삶에 오기까지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것을 우리는 복종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순종하기 앞서서 우리가 율법적으로 표현한다면, 복종의 과정이 필요한 것인데, 그 복종의 과정을 통해서 그것이 깨달아 졌을 때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린 시절 우리가 부모님들에게 복종하며 지내다가 철이 들었다 할 때 순종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서 처음에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전도가 되어 교회에 왔다가 점점 복종하다 보니까 나중에 accept가 되어서 순종으로 돌아서는 과정을 우리는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된다 신이 된다 결국 말씀의 옷을 입는다

신이 된으로 되고, 그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하면 결국 성령의 역사가 우리 속에 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은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예배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예배가 회복이 되는 것이고, 전에 말씀드렸듯이,“예배가 회복의 도구이고, 예배가 구원의 도구”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예배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물로 오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배 속에서 제물로 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나아가고, 그 제물을 어떤 물질의 모습으로 보지만 그 자체가 대단한 영적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헌물을 드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거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결국 회복자이심을 우리가 믿는 것이다.

3A.예배의 질이 높혀지지 않는 이유

1b.예배의 유형들

오늘날 각 교회의 예배를 돌아보면 예배들을 드리는데, 뭔가 빠진 것을 찾게 된다.

그것은 예배의 본질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가 분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의 예배는 현상을 추구하는 것이지 실제로 본질을 추구하는 것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일정한 예배 시간과 다른 예배 순서로 인해서 10분, 또는 20분 정도의 메시지 절달... 물론 예배에 모든 순서들이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적인 말씀 강론의 부족으로 인해서 영적인 약식이 잘 공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에서는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 생긴다고 했는데, 믿음은 말씀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인데 일 주일에 10분, 20분의 설교를 통해서 과연 신앙 생활에 보탬이 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찬양 속에서도 메시지가 있다. 찬양을 부를 때에 그 가사도 분명히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 속의 메시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곡을 부를지를 분명히 선택을 하고 매 찬양 속에서 들려지는 그 가사도 역시 정검되어야 한다고 본다.

1c.열린 예배 (Open Worship)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린 예배가 절정에 올랐다고 볼 수 있다. 이것에 초점은 당연히 사람들이었다. 인본주의 적이었고, 또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중심에서 이루어진 것이 본다. 그래서 미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까지 이 열린 예배가 한참 붐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없어졌다. 그 열린 예배의 결과가 무었이냐?

그런 것들이 새로워서 도입 했지만 그것이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2c.구도자 예배 (Seeker's Sensative Service)

구도자 예배는 열린 예배와 비슷하지만, 주목적은 전도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덜 주고 교회도 세상과 비슷하게 만들어서 이들을 초청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실패하고 말았다.

실패한 원인은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부터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을 보고 그 “거룩성”이 없는 것을 보고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3c.현대 감각에 걸 맞는 교회 내부 시설

한국에 어느 교회에서는 교회 한 구석에 흡연실을 만들어 놓고 흡연자들을 구원하려는 의도가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health center, 수영장 등등을 구비해서 인근 지역 주민들을 이끌려는 의도로 내부시설을 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전도를 하기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라고도 볼 수가 있지만, 결국 놀이는 놀이로 끝나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물론 내부시설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얼마든지 현대 감각에 맞는 내부 시설을 하는 것을 좋은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러한 놀이 문화들이 결국 거룩성을 파괴하는 일이 되므로 예배에도 지장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룩이란 자체가 장소를 말하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주님이 어디에 계시느냐에 따라서 거룩성이 표현되는 것이다.

주님께 가까이 오면 올수록 거룩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코이노니아라고 하는 것이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거룩성을 연습하고 나타낼 수 있는 아주 유일한 souce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2b.찬양에 대한 잘못된 견해

1c.찬양 사역자들의 태도

예배의 질을 높이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것 중에 또 하나의 이유는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과 찬양을 듣는 사람들의 자세이다. 열린 예배나 구도자 예배에서 가장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찬양 팀과 찬양 사역자들인 것이다.

결국 이들의 찬양하는 모습이 공연화 되어지고 있고, 또한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여 예배 시간에 콘티를 준비해서 성령의 인도하심보다는 스케줄에 의해 진행되는 예배를 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중요하게 나타나는 것은 찬양 사역자들이나 복음 성가 가수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관, 교회관, 믿음관, 구원관 등이 옳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찬양을 그저 음악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예배가 무너지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심이나 아니면 거듭남의 체험들이 불투명하기 때문에 공연으로만 끝나고 마는 것이다.

2c.찬양은 음악이 아니다.

찬양은 가장 높으신 곳에 계신 하나님께 그 존귀함을 높이 올려 드리고, 주님께 향한 예배자들의 감사와 찬송과 예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음악으로 끌고 가게 되면 결국 공연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찬송을 부를 때에 찬송가 위에 적어놓은 메트로놈 표시에 맞추어서 불러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장하이 틀리면 매우 불쾌하고 상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찬송가의 메트로놈 표시는 메트로놈이 발견된 후에 정해진 것이고, 그 전에는 그것이 없었다. 그것이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닌데, 비 본질의 것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이것이 음악적으로 흘러 은혜가 안 되는 것이다.

또하나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성가대, 즉 찬양대 중에서 쏠리스트를 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이 되어진다. 그것은 교회 안에는 합창은 있어도 솔로는 없는 것이다.

물론 헌금 송을 할 때에 솔로나 중창을 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성가대에서 솔로자를 정해놓고, 심지어는 월급가지 줘 가면서 이들을에게 베푼다면 이것 또한 찬양을 음악으로 끌어가는 것이다.

3c.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해서 다 성곡은 아니다.

음악의 세계를 보면, 음악가들 중에 성가곡을 안 지은 사람이 거의 없다. 또한 대중 가요 가수들 가운데 가스펠 송을 안 부른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는 미국의 Elise Presly도 가스펠 송은 많이 불렀다. 물론 클래식 작곡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을 만들었어도 그들이 진정 하나님을 믿었다고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마치 느브갓네살처럼 하나님을 칭송하고 인정했지만, 자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런 것들에 속지 말고, 교회의 담임 목사들은 신중하게 교회에서 불려지는 찬양들을 점검해야 하고, 또한 이것들을 바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3b.교회에 열정이 없다.

교회에서 또 한 가지 예배에 질을 높일 수 없는 것은 교회 안의 공동체 속에 열정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열정, 즉 Passion인데, 이 Passion은 Spirit에 의해서 뜨거워진다. 성령의 감화 감동을 통해서 뜨거워 져야 하는데, 이것을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육체적으로도 뜨거워짐을 이야기한다. 성령에 사로 잡혀 사는 사람들은 유체적으로 뜨거움을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뜨거움이다.

성령께서 나의 삶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 믿음에 대하여, 교회에 대하여, 섬김에 대하여 더 나아가서는 예배를 드리는데 있어서 뜨거워지는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았다고 해서 열정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자들이 이런 잘못된 것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결국은 어떤 특정한 일에 흥분되어 지는 것이다. 물론 그 흥분이 사람에게서 왔기 때문에 곧 식어지고, 식어진 사람은 또 다른 방법을 찾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1c.예배가 이벤트로 전락하면 안 된다.

남가주에 Saddleback Community Church 라던가, 시카고의 Community Church는 모든 것이 event화 되어 버린 것이다. 특별히 윌로크릭의 빌 하이벨 목사는 자신의 사역을 회고해 보면서 그의 실수들을 재검토 해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그의 저서 “Reveal”에서 피력한바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자신들의 목회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고 새로 고치려는 의도는 너무나 훌륭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교회는 이들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정 없이 그대로 진행해 나간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Saddleback Church나 호주의 Hill Song 교회와 같은 곳에서도 Event 중심의 예배를 권장하고 있는데, 처음에 시작했을 때에는 대단한 열정과 열기였지만, 지금은 서서히 그 열기가 식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찬송이나 찬양에 다시 재 조정하는 모습을 본다. 요즘에 나오는 CCM CD를 보면 전통적인 찬송이 심심치 않게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카고의 Willow Creek 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남가주의 수정교회와 같이 비영리 단체에서 영리 단체로 옮겨져 가더니 결국은 파산하였다 이와 같은 교회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교회란 말 보다는 채플 또는 조직 (Organization) 또흔 협회 (Association)등으로 새롭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예배를 통한 어떤 사업회 형체로 옮겨간다는 의미도 된다는 것이다.

2c.프로그램 중심의 교회

수십년 목회와 선교사역을 감당해 오면서 가장 마음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프로그램 중심의 목회와 사역이었다. 물론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교회의 목회나 사역이 프로그램 중심이 되면 결국 그 열기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그 교회의 성격에 맞는지 검증도 안 해보고 무조건 프로그램을 도입하였다가 실패한 교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람들은, 특별히 목회자들은 자신의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발전과 교회 부흥을 위해서 끝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아 다닌다. 그리고는 그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잘 세워 볼려고 하고 있다. 물론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각 프로그램 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또한 그 프로그램을 창출해낸 사람이나 아니면 발전시킨 사람은 그 프로그램에 대한 일각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보다 앞서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 프로그램을 인도하는 사람의 영적 상태인 것이다. 만약에 프로그램이 교회 성장과 부흥을 가져온다면, 그 프로그램을 하는 교회는 모두가 다 성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네비게이토에 2.7 씨리즈 성경공부가 그 중에 하나이다. 2.7 씨리즈가 모든 교회에 성장과 부흥과 또한 교인들의 성숙을 책임질 수 있다면, 2.7 씨리즈를 하는 교회는 다 성공해야하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그것을 지도하거나 인도하는 사람의 열정과 뜨거움으로 성공과 실패가 정해지는 것이다.

2.7 씨리즈로 교회가 왕성한 교회는 와싱톤 중앙 장로교회(노창수 목사)인데, 그 교회는 다른 여러 많은 프로그램도 있지만, 교인들의 성숙을 2.7 씨리즈로 훈련을 시켜 예배 및 다는 교회 사역에 큰 도움을 준 교회중의 하나니다.

3c.교회관이 불투명한 선교 단체 및 사역

한국 교회는 선교 사역으로 많은 칭찬을 받고 있다. 또한 한국 선교는 확실한 교회관의 부족으로 인해 많은 단체로부터 교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한국 교회가 선교에는 미국 다음으로 큰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성경적 중심의 교회관의 부족으로 현지인들에게 지탄을 받고 또한 지역교회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일이 많은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선교 단체들은 지역교회의 도움없이 또는 교회란 context에서 벗어나서 선교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지역교회를 완전 죄인 취급한 경우가 많다.

전직 선교사 입장에서 지역교회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었던 것을 회고해 보면서, 선교 단체나 사역 단체들이 성경적 교회관이 분명히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열정이란 잠시뿐, 그 열기가 식어지면 결국 선교사들을 선교지에서 철수하게 되고 많은 것이다.

한때 통계로 보면 한국에서 파송된 선교사 중 90%가 미국에 와서 목회를 한다는 비공식 자료로 듣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가 선교를 하는 중요한 목적은 그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를 세운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이다.

현지에 교회를 세우는 일을 선교사들이 지향한다면 성경적 교회관이 바로 세워져야 하고, 그 교회관 속에서 주님과의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면 그 열정은 끝까지 식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4b.순종의 의가 부족하다.

1c.하나님의 권위에 붙들림이 부족하다.

예배의 질이 높아지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순종의 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찬양 속에서 주님을 말하고 있지만, 과연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서 그분의 권위에 순복하고 있는가? 라는 말이다.

물론 경배라는 말을 연구해 보면, “무릎을 꿇다, 엎드리다,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다, 마음을 드리다, 등등의 단어적 해석이 있지만, 총괄적으로 우리는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Authority에 순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권위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하나님의 Authority는 그분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다.

2c.말씀 선포는 성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즘에 영성이란 말이 아주 흔하게 나타나고 있고, 필자도 그 영성에 대하여 늘 즐겨 사용하면서, 자신의 사역을 영성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영성이 무었인가? 영성은 영어로,“Spirituality”라고 이야기, 이것은 어떻게 보면 현상을 보고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이 된다. 이 “영성”이 우리들에게 소개가 된 것은 캐톨릭 교회의 신부들의 영성 훈련이란 것에서 소개가 되었는데, 그 이후에 “영성”은 사람에 따라, 교회와 교파와 교단에 다라 그 뜻이 천태만상(千態萬象)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인 생각을 염두해 두면서 “영성”이란 단어 보다는 “성령”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누구의 권위로 이 일들을 하고 있는가? 라고 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성령의 말씀 선포로 되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성령의 말씀 선포로 우리들에게 순종의 의가 나타나고, 순종의 의가 나타난 사람이야 말고 진정으로 경배하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결국은 교회가 또는 예배가 말씀의 권위에 붙들려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야 예배의 질이 높아지는 것이다.

3c.말씀의 권위가 장악되지 않으면 결국 처세술로 탈락되고 마는 것이다.

순종이 안 되어 있는 교회, 순종이 훈련되지 않은 교회에서 예배의 질을 높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교회에서 예배의 질을 높이려고 할 때 원천적인 요소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의 삶 속에는 잘못되어진 것으로 채워져 있고, 잘못된 방식, 방법 등으로 훈련되어져 있어서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뼈를 깎는 듯한 아픔이 있다 하더라도, 예배의 질을 높이려면 이 일을 과감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순종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순종하지 않고 처세술로 목사에게 대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들면, 음악 전공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우선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과 믿음을 두 번째로 하고, 우선 성가대에서 또는 솔로하는 자로써 각광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찬양팀 리더와 복음성가 가수들도 마찬가지이다.

요즘에 와서 복음 성가 가수들이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이 흔하게 들어나는데,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볼 수가 있다.

첫째로, 이들이 찬양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집사 또는 장로의 직분으로 사역을 하니까 바른 대우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안수를 받는다고 한다.

이런 경우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목사의 거룩한 부르심도 없으면서 신학교에 뛰어 들어가 과정을 마치고 안수를 받는 경우가 있다. 또 다른 이유는 자신들의 사역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역이므로 지역교회와 달리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이동식 교 회” 물론 이런 식으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꼭 지역교회에 소속되어야 하느냐? 라고 생각하고 독단적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깊에 말을 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로 받지 않고, 처세술로 받는 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권위로 받지 않고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하는 경우도 있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기만하는 일이되고, 위선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이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보고 사람이 많이 변한 줄 알았더니 나중에 보니까 변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비유를 맞춘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고 했는데, 처세술로 목사에게 대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예비를 드린다고 하면 그 얼마나 가증스러운 모습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참 경배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 경배는 현상인데, 경배의 가장 기초가 무엇이냐? 라고 하면 그 경배의 기초는 말씀의 권위에 붙들려 있는 그 자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권위에 붙들렸다는 것은 순종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고, 말씀의 순종의 자세가 이미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이 Original의 모습이다.

4A.예배의 질을 높이 위한 방법

1b.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붙들려 사는 교회

이제는 교회가 목사님의 큰 목소리로 운영되는 교회의 시대는 아니다. 만약 아직도 목사님의 큰 소리 때문에 움직이는 교회는 아주 율법적인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붙잡혀 있으면 되는데, 그 때에는 목사님이 큰 소리 안 내어도 교회가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1c.주기적 성경공부를 해라.

물론 교회의 주인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하지만, 주님께서 목회자들에게 그 교회를 맡기시고 하나님의 양 떼를 돌아보라고 하여 위임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 자신이 자신감을 가지고 교회의 직분자, 특별히 예배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2c.목사의 비전과 꿈을 성경공부로 가르치라.

교회가 갈라지고 갈등을 하는 이유는 그 교회 담임자가 자신의 비전과 꿈을 그 교인들에게 잘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회의 방향, 교회의 장래, 교인들의 영적 상태 등등을 기도 속에서 감지하고 이것들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서로 갈등이 심한 것이다.

만약에 교회가 목회자의 비전을 받지 않는다면 그 교회를 나와서 새롭게 개척하라. 그리고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과 꿈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쳐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주님의 제자로 키워라.

3c.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이어야 한다.

예배는 성령과 말씀으로 드려져야 한다. 보통 우리가 이 말씀을 접할 때에 예배 속에 성령이 임재하셔야 하고, 말씀이 선포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옳은 말이다.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좀더 깊숙이 생각하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과연 예배를 드릴 수가 있겠는가? 말씀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예배에 참여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로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매우 의미 심장한 말이 되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모두가 그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이 예배의 목적인 것을 아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믿지 않는 사람이 예배를 드릴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몰몬교의 예배>

언젠가 덴버에서 함께 사역하고 계신 목사님 한 분이 Salt Lake시를 지나다가 주일이 되어서 예배를 드리기를 원했다.

그런데 그가 기왕에 Salt Lake시에 왔으니, Mormon 예배당에 가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Mornon Temple을 찾았다.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두 하얀색이다. 하얀 양복에, 하얀 넥타이, 심지어는 백 구두까지 신고 예배를 드리러 왔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장로교 목사이므로 까만 양복에 까만 구두를 신고 예배당 입구에 가니까, 안내자가,“Do you have a memberhsip?”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없다고 하니까, 그냥 돌아가라고 해서 돌아와 개신교 교회에서 주일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물론 별로 좋은 예는 아니겠지만, 심지어는 이단들도 자신들이 드리는 예배를 이토록 신중하게 하는 것을 보아 “예배”란 말을 묵상해 볼 때에 예배자는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사람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말이다.

교회의 예배위원이라고 하는 성가대원과 예배 위원과 심지어는 안내를 보는 평신도까지 담임자가 주기적으로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에 가장 기본적인 것, 즉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대하여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래만 잘 한다고 해서, 악기를 잘 다룬다고 해서 대강 그들을 예배에 사용한다면 이것도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차라리 반주 없이 찬양을 부르는 한이 있더라도 말씀의 권위를 모르는 사람은 예배에 절대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2b.철저한 회개와 자신의 죄을 인식하는 교회

“온 유대 지방(地方)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自己) 죄(罪)를 자복(自服)하고 요단강 (江)에서 그에게 세례(洗禮)를 받더라.” (막 1:5)

1c.회개하기 전에 죄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와 별도로 봐야 하는데, 죄를 알지 못하면 회개를 할 수 가 없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유대 지방의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죄를 먼저 자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자복이란 말은 엑소몰로게 (ejxomologevw)란 말인데, 이것은 “에크(밖으로)”와 “호몰로게오(고백하다)”의 합성어로 만인이 알도록 드러내 놓고 죄를 뉘우치며 고백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씀을 먹게 되면, 말씀의 권위에 사로잡히게 되면 제일 처음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죄를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구약의 율법을 이야기 할 때에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한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볼 때 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이 설정되는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합 왕과 엘리야

이스라엘 왕 중에 아합이란 자가 있었다. 그와 함께 동 시대의 인물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늘 아합과 대립하여 살았다.

아합이란 자는 회개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가 회개하지 못한 것은 그가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엘리야는 그의 초기 사역 중에 아합에게 구체적으로 아합의 죄를 묻고 회개를 촉구했지만, 아합은 절대 듣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아합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그 죄만 지적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아합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나봇의 이야기가 있다. 나봇은 이스르엘 사람이다. 그는 이스르엘에 좋은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마리아 왕 아합이 그것을 탐내어 더 좋은 포도원을 주고, 또 그값을 돈으로 갚겠다고 했으나, 나봇은 조상의 유업이니 줄 수 없다고 거절 했다. 이에 아합 왕이 근심하니 그의 아내 이세벨이 간계를 꾸몄다. 그녀는 나봇과 함께 사는 장로와 귀인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나봇을 백성 가운데 높이 앉힌 다음,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위증을 시키게 하여 그와 아들들을 돌로 쳐 죽이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들이 그대로 시행한 다음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가졌다. 여호와는 엘리야를 통하여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네 피도 핥으리라. 네게 속한 모든 남자를 멸하겠다"고 선고하였다. 그 후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왕상 21:1-24; 22:34-38; 왕하 9:30-37).

2c.세례/침례를 받은 자라야 한다.

요즘 무 세례 주의자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특별히 선교사들 가운데는 무 세례 주의자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도 그런 것이 전문인 선교사들은 성례를 집례 할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달린 한 강도의 예를 들면서 꼭 세례를 받아야만 천국에 가느냐? 란 식으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성례를 무시하는 경우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얼마든지 이해는 가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신 것 가운데 세례 받는 일과 성찬을 떼는 일을 주님 오실 때까지 하라고 명령하셨고, 심지어는 주님의 지상사명에서도 세례의 중요성을 기록하신 것이다.

그리고 특별히 오늘의 본문 마가복음 1장 5절에, 유대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회개한 후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물론 교단과 교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성령의 세례를 강조하고 있고, 물 세례는 사람들이 줄 수 있겠으나 성령의 세례는 성령님께서 임하셔야 하는 것이다.

구세주가 되시고 우리들을 천국으로 이끄시는 준비자 되신 예수님께서 분명히 성령의 세레를 말하고 그것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성령의 세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인증표가 되는 것이다. 물세례는 고사하고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예배의 질을 높일 수가 있겠는가?

3b.순종의 의를 세우는 교회

어린아이로 있을 때에는 부모의 말이 이해가 되던 안되던 복종하게 된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서 성숙하면 이것 변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은 결국 복종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복종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주어지기 때문에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도 초신자 때에는 그저 말씀을 따라 살게되면 언젠가는 그 말씀의 권위로 순종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을 알던 모르던 일단 교회 안에 있으면, 일단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그 의가 나중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에 가장 적합한 예는 사무엘의 삶에서 찾아본다. 사무엘상 3장에 보면 아주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소년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 앞에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에게 임하여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을 찾아와 “당신이 나를 부르셨습니까?”라고 했다.

하지만 엘리는 자신이 부르지 않았다고 하고 다시 돌아가 자라고 했다. 두 번째로 부름의 소리를 듣고 왔지만 엘리는 같은 방법으로 사무엘을 돌려 보냈다. 세 번째 임했을 때에 심상치 않게 생각한 엘리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라고 말이다.

이 당시 사무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없었던 때 였다고 한다. (삼상 3:7) 그가 하나님 전에서 생활하다보니까 그런 귀중한 기회를 맞게 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참 예배자들을 항상 순종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이해하고 따라가기 까지는 아직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어찌 사람이 일일이 다 이해하고 따라가겠는가! 어떤 때에는 그냥 따라 순종하게 되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가르침이 있는 교회는 순종의 의가 있어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로 순종의 의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4b.기도가 항상 있는 교회

1c.합동기도

예배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네 번째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배를 준비하는 기도모임이 조성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것은 예배 전에 예배를 섬기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오늘 예배를 위한 중보 기도를 드려야 한다. 또한 상황이 허락한다면, 예배가 1부와 2부로 나뉘면서 2부에서 자원자를 청해서 1부 예배 때 중보하게하고 1부에서 자원자를 청하여 2부 예배 때 중보기도팀을 만드는 것이 아주 효과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허락이 안되면 예배 전에 기도회로 모이고, 또한 성도들에게 잠깐 기도 모임을 예배 전에 가지는 것도 좋은 것이다.

방법이야 어쨌든 예배를 위한 중보 기도는 절대 필요한 것이다. 예배를 위한 중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교통하심을 실제적인 면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2c.개인기도

중보기도와 합동기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개인적 기도 생활이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기도 중에 하나님과 만나는 기회를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기도에 대한 이론은 너무나도 많다.

하지만 그 이론에 비해서 실전은 너무나 약한 것이다.

참 예배자가 기도 생활로 준비가 안 된다면, 어떻게 성령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으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가슴에 와 닺겠습니까?

우리가 십일조를 생각할 때마다 물질 면에서만 생각을 하는데, 시간의 십일조도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라면 하루에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간의 십일조는 목회자 자신의 시간, 즉 새벽기도회 인도를 뺀 나머지 시간, 조용히 혼자서 하나님을 갈망하면서 드리는 기도, 그 기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도들에게도 이것을 강조해야 하는데, 아직 미숙한 성도들에게는 적어도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기도해야 한다고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결 론

예배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근본적인 즉 본질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언제나 강조하지만“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예배는 행사가 아니요 show가 아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대상이신 절대자 하나님에 대한 그 관계가 바로 세우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Passion이 그 열정이 하나님께 향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현상만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회복 신학적 측면에서 예배를 볼 때, 예배가 살아야만 가정과 나라와 교회가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는자들의 중심이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예배에는 얻고자 하는 욕구보다 드리고자 하는 것이 강해야 한다.

예배에는 받고자 하는 것보다 섬기고자 하는 것이 강하게 작용되어야 한다. 앞서서 언급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내어 주셨고 먼저 우리를 섬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여 주셨고 자녀되게 하셨기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며 경외하면서 예배드리는 것이야 한다.

은혜 받기를 원하고,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원하며, 복을 받기를 원하고, 문제의 해결함 받기를 원하고, 병 고침 받기를 원하는, 예배의 중심이 “받고자 하는 욕구”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이러한 예배 경향은 기복주의 신앙형태는 양산하는 배양토가 되었다. 물론 예배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축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이미 이것은 주었으나 다만 우리들이 믿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믿음을 기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며, 독생자를 내어 주신 은혜와 구속사건 앞에 감격하여 자신의 전부를 드리려는 것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은 받으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워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은혜와 구속의 은총 앞에서 자신을 드리고, 시간을 드리고, 물질을 드리고, 아니 생애 전부를 드리려는 산제물의 자세를 가지고 예배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죄인 된 사람의 문화와 삶의 양식들은 그 목표를 즐거움의 추구(entertainment)에 두고 있다.

그래서 이벤트식을 좋아 한다 다시 말하면 show business 형태이며, 근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즐거움“(entertainment)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배의 무너짐에 따라 예배 속에 나타나는 가장 유혹적인 것은 웃음과 즐거움이다.

성도들의 욕구와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채널의 변화를 교회가 받아 들이고 있고 설교자가 이것을 응용하여 효과의 측면(effectiveness)에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 보다 달며 이보다 더한 기쁨은 없다고 하였다. 물론 예배의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도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예배의 신학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 예배의 중심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데 있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서 예배자들이 기쁨을 얻는 것이지, 자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얻기 위한 예배는 근본적으로 예배의 중심이 잘못되어 있는 예배가 되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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