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교회는 어떻게 생명력이 있는 예배를 통해서 주어진 복음의 명령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예배가 침체되는 순간 교회는 침체되고 나라와 가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예배가 소중히 여겨지고, 예배가 바로 드려지는 곳에는 교회가 살아나는 것 뿐 아니라 나라가 살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이라면 예배일 것이다
예배를 빼놓고 신앙을 말할 수 없고 살아 있는 예배가 없이 전도가 있을 수 없고 선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교회의 부흥은 물론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을 논할 수 없다
구약에서의 예배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사건은 물론 출애굽사건등 모세 오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방향을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신다
즉 제사적요소는 물론 예언적인 요소가 조화를 이루면서 왕권시대의 왕의 권세와 나라의 평화가 예배에 있었음을 명백히 보여줌은 물론 백성들의 삶에까지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함이 중심적요소로 나타난다
신약시대에 회복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과 형상회복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곧 예수님 임을 보여주는 골격을 이루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어 부활의 사건 역시 예배와 관련된 것임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우리가 예배하여할 대상에 대해서 보여주는 동시에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난다
주일은 부활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당연이 모이게 되었고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말씀과 성만찬은 예배에서 말씀예전과 성만찬 예전이라는 것으로 보여지고 구약의 제사의 제도가 다시 신약의 예배 예전으로 질서를 갖추게 된다
하지만 5세기가 지나면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인 것 같으면서도 예전의 형식과 전통에 매이기 시작하면서 중세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의 예배는 갖가지 미신적이고 비성경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특별히 성만찬과 관련하여 예배는 하나님이 현현하시는 하나의 신비(mystery)가 되었고, 화체설과 같은 교리들이 예배의 본질을 혼란케 하고, 예배의 변질을 야기하면서 중세 교회는 예배에 있어서 긴 흑암의 터널로 들어갔다
이후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면서 개신교의 예배는 여러 분파로 발전 및 형성되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였던 Peter Bruner는 예배는 “하나님의 봉사”(Gottesdienst)라고 정의했다.
예배의 출발점은 하나님의 자기희생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배설하신 잔치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부를, 가장 귀한 것들을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부터 예배는 시작된다. 이것을 에모리 대학 교수 Don E. Saliers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ethos”라고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섬김으로부터 예배가 시작된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격하여 드리는 인간의 섬김으로 예배는 완성되어진다.
Peter Bruner는, “하나님의 선물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헌신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의 이토스가 인간의 파토스(pathos)를 불러일으키며, 인간으로 하여금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해 준다.
그러므로 예배는 인간 파토스가 가지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vulnerability)이 예배를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함이라는 이토스와 만나게 될 때, 변화와 능력의 예배가 되어진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자기 주심과 창조의 은총 앞에 감격으로 응답하여, 자기 드림의 행위가 예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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