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의 ‘피’와 언약의 ‘몸’2010년 09월 13일 (월) 06:34:38장진광 목사
파스코 한인 장로교회 담임목사 (플로리다 주)
예배회복운동(NYSKC World Mission, Nyskc Learned Society) 회복신학 연구학회 실장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장신대 졸업, Univ. of Dubuque Theological Seminary, STM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은 유월절을 기념하는 예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 하셨으니 곧 성찬예식의 제정이다. 잔을 저희에게 주시며 너희가 이것을 다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28)라고 하시며 잔의 의미를 분명하게 선포하셨다. 그렇다면 떡을 주시면서도 떡에 대한 어떤 의미부여를 하셨어야 하지 않는가? 잔을 언약의 피라고 하셨다면 떡을 언약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을 법도 한데 전혀 언급이 없음을 보게 된다. 떡을 주시며 가장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시면서 보충적인 설명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성찬예식을 거행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기념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언약을 기념하는 피 언약이라면 그리스도의 몸으로 맺은 언약을 기념하는 몸 언약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찌하여 몸 언약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가? 전통적인 신학에서도 전혀 언급이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 제기가 잘못된 것인가. 엉뚱한 생각인가. 이단적인 발상인가.
우리는 언약의 양면성을 기억해야 한다. 편무언약과 쌍무언약의 두 속성이 언약 안에 존재 하듯이 새 언약 안에는 피 언약(편무언약)과 몸 언약(쌍무언약)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십자가 언약과 부활언약이 그것이다. 전통신학에서는 몸을 기념하면서 오직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몸으로 해석함으로 피 언약에 흡수 통일 시켜버린 오류가 있었다. 두 언약을 대등하게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이 올바른 신학적 입장이 된다.
언약의 피는 정당한 강조를 받아 왔지만 언약의 몸이라는 차원은 상당히 무시되어 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성찬예식에서 우리가 받는 떡은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몸일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몸이라는 사실이다. 그 떡은 오히려 부활하신 몸이라고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이 점을 강조하지 못한 신학이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피와 몸을 내어 주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율법의 저주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피를 내어 주셨고 율법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의 몸을 내어 주셨다. 그의 몸은 율법을 완성하신 몸이다. 그 공로를 우리에게 덧입혀 주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셨다’(롬 4;25)고 하신 말씀하신 것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성경은 ‘죽으심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살으심으로 말미암는 구원’(롬 5: 9-10)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 언약과 몸 언약을 나누어 각각을 강조해야 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첫 날 저녁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성찬 예식을 완성하신다(요 20: 19-23). 그것은 몸 언약에 대한 보충적인 설명을 추가하심으로 성찬예식을 보충하고 완성하는 장면이다. 최후만찬의 자리에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피 언약을 강조하셨고 이제는 부활하심으로 몸 언약을 선포하시는 자리였다. 공통점은 둘 다 마가의 다락방이 그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찬예식의 이중적 완성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두 번에 걸쳐 평강을 선포하신다. 첫 번째 평강의 선언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평강이고 두 번째 평강은 의롭다함으로 말미암는 평강이다. 피 언약으로 인한 평강이고 몸 언약으로 말미암는 평강이다. 그것은 또한 십자가로 말미암는 평강이고 부활로 말미암는 평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 평강을 말씀하시며 피 흘린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다. 피를 통해서 주시는 평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강(요 14:27)이었다.
두 번째 평강은 의롭다함으로 말미암는 평가인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강이다. 의를 공급함으로 인한 평강을 말한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를 통해서 주는 의(칭의)와 부활을 통해서 주는 의(성화를 위한)를 구별해야 한다. 피로 말미암는 의는 심판을 면하게 하는 ‘사면의 의’다. 한편 부활로 말미암는 의는 ‘복권의 의’다. 칭의(Justification)를 위한 의와 성화(sanctification)를 위한 의를 구별해야 한다. 그것들을 구별해야 하지만 결코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개혁신학은 순종과 행위문제에 대한 태생적인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여기 까지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죄사함과 의롭다함’에는 양면성이 있다. 칭의를 위한 죄사함과 의롭다함이며 성화를 위한 죄사함과 의롭다함이다. 소유권 언약으로 얻는 죄사함과 의롭다함 그리고 위임권 언약으로 얻는 죄사함과 의롭다함이다. 믿음으로 얻는 죄사함과 의롭다함과 순종으로 얻는 죄사함과 의롭다함이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성경의 해석이 지극히 난해하고 애매모호한 설명이 되어 진다. 구별해야하지만 분리할 수 없는 관계로 연결 되어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러한 두 측면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주시며 의인으로 간주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며 죄를 용서하는 차원의 의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는 차원의 의를 구별하면서 이중적인 은혜를 언급했지만 간단히 이야기 했고 자세한 설명은 없다. 칼빈이 말하는 전가된 의란 성화를 위한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화를 매우 강조하면서 이신칭의가 구원론의 전부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의와 평강을 주시면서 파송하신다. 그 의는 심판을 면하기 위한 의가 아니라 일하기 위한 의다 하나님의 의를 세우기 위한 의롭다함이다.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고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으니 이것은 재 창조의 사역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창세기 2장에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사건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매우 의미깊은 상징적 사건이다. 이 때 주신 성령은 창조의 성령이다. 창세기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이 숨을 내쉬며 하나님의 신을 불어 넣으시매 수면에 운행하시던 그 성령이시다.
새 언약으로 새 창조를 이루시는 역사적인 장면이다. 여기서 새 언약이란 조건적이며 무조건적인 언약이라는 두 측면이 있다. 새 언약이 조건적 언약이라는 의미는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두면 그대로 있으리라.’(요 20:23)는 말씀으로 맺은 언약이기 때문이다. 조건적이며 쌍무적인 언약이다. 이 말씀은 십자가 언약이 아니라 부활의 언약이다. 사죄권을 말하고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사죄권을 말씀하심은 사죄권 그 자체를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사죄권은 모든 권세의 백미를 이루고 있는 권세다. 십자가와 부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회복하신 예수님께서 그 권세를 위임하고 있는 장면이다. 새 언약의 권세를 부여하고 있는 장면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누리는 권세다. 자기 의를 반납하고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는 자들이 구현하는 권세다. 그 권세를 죄사함의 권세로 상징하였다. 대통령의 권세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특사권인 것처럼 본문에서 사죄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회복하신 그리스도의 권세를 위임받아 행사하는 권세의 언약 그것이 부활언약이다. 이것은 또한 성화의 언약이기도 하다. 아담이 하나님과 맺은 선악과 언약(위임권 언약)과 같은 성격이다. 부활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부활의 언약은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 창조의 영으로 그리고 새로운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언약이다. 성찬예식에서 떡으로 기념하는 내용이다.
요한복음 20: 19-23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가 겔 36:24-28에서 예언한 내용이기도 하다. 에스겔 36장에서 ‘고토에 들어가서’는 신약의 용어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에 해당하는 표현이고,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는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됨을 의미하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는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말씀이며 새 시대의 도래를 예언과 관계된다.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는 새 언약으로 무장된 마음을 준다는 것이고,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로 부르심을 말한다. 그리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말씀은 새 언약으로 말미암는 언약의 백성으로 회복됨을 예언한 말씀이다.
오늘날 우리는 성찬의 회복이 필요하다. 성찬예식에서 언약의 피와 언약의 몸, 그리고 피 언약과 몸 언약을 기념하며 그 언약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실천적인 예식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