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안식"이라고 하면 "안식일"만을 생각하곤 한다. "하나님께서 육일간의 창조 행위를 마치시고 일곱째 날 쉬셨다. 이것을 기초로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구약시대에 이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는데 신약시대에는 일요일로 바뀌어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을 '주일'로 지킨다…" 이 정도가 사람들이 "안식"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잘못된 지식에서 얻어진 개념일 뿐이다. 성경에는 이 외에도 몇 가지 안식이 더 제시되는데, 히브리서 4장에서는 이 안식들이 네 종류로 분류되어 설명되고 있다. 각각의 안식들은 일련의 연관성을 갖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거대한 안식인 천년왕국으로 귀결된다.
1. 최초의 안식(히 4:4)
(히 4:4) "제칠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육일 동안 창조하시고 칠 일째에 쉬신 것을 말한다(창세기 2:2-3). 하나님 자신이 쉬신 이 "안식"(rest)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안식일"(sabbath)을 주셨다. 그리고 이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의 "표적"이 되었다. "또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징(sign)이 되어 내가 여호와 너희 하나님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리라 하였노라"(겔 20:20).
(창 2:2-3)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표적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언약의 정표"인 것이다. 이 표적의 목적은 그들이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맺어졌다. 그러므로 현 교회시대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안식일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그가 유대인이 되기 전에는 안식일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다.
이 안식일을 자기들에게 주어진 것인 양 착각하는 안식교야 말할 것도 없이 비성경적인 것이지만, 많은 교회들이 "주일"이라고 불리는 일요일에 안식일의 개념을 적용하여 지키는 것 또한 비성경적이다. 그들은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넘겨졌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지, 안식일이 이방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오직 유대인에게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간의 칠일 째 되는 날에 쉬셨지만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까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일주일에 하루를 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때까지는 "안식일"이라는 말조차 사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스라엘이 민족적으로 탄생되는 그 때, 모세를 통해 이 날을 법으로 제정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어진 하나의 표적인 것이다.
이 안식은 장차 이루어질 천년왕국의 예표가 된다. 창조주간 칠일을 각각 일천 년씩 계산하는 것을 "칠칠체계"라고 하는데, 6일 동안의 창조를 인류역사 6천 년으로 계산한다면 마지막 일곱째 날은 일곱 번째 천년, 곧 천년왕국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곱으로 일하신다. 날은 기본적으로 칠일로 이루어져 한 주간을 이루고, 그 마지막 날이 안식일이라면, 일곱 안식일을 계산하여 49일 다음 날은 오순절이고, 해도 일곱 번째 해가 안식년이며, 일곱 해를 일곱 번 지난 후 오십년째 해를 "환희의 해"(Jubilee) 즉, "희년"이라고 불러 지킨다.
"날"과 관련해서 일곱의 개념은 "날"이든지 "달"이든지 "해"든지 특별히 중요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이다. 그리고 각 일곱 번째 마다 "안식"의 개념이 들어간다. 이 중 가장 큰 안식은 일곱 번째 천년이며, 다른 "일곱 번째"들은 모두 이 "일곱 번째 천년"의 예표이다.
2. 팔레스타인의 안식(히 3:11)
(히 3:11) "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이 안식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였던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안식이다. 이 땅은 안식의 땅으로 알려졌으며, 그들은 방황을 끝내고 그 땅을 차지하였다. 이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그들은 매우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 안식은 그들이 가데스 바네아에 있을 때(민 13,14) 제시되었으나 열 명의 정탐꾼들이 믿음 없는 "악평"(민 13:32)을 하고 그 백성들이 그 악한 보고에 귀를 기울임으로 말미암아 연기되었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주로 이 사건과 비교하면서 미래에 안식에 들어갈 환란기의 백성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민 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래서 이 안식도 미래에 있을 천년왕국에서의 안식의 예표이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안식에 들어간 백성들은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안식은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대환란을 통과한 유대인들도 천년왕국이 되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업을 차지할 것이다.
당시 열 명의 정탐꾼들이 악한 보고를 하는 동안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만이 선한 보고를 하였다. 이것을 히브리서 4:2은 "복음"이라고 말한다. 이 복음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마지막 때에 한 세대의 히브리인들에게 다시 주어질 것이다. 이 복음에 있어서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메시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그들의 조상들이 여호수아를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갔던 것과 같다.
(히 4:2)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 점에 있어서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대장으로서 그들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이라는 안식의 땅으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스라엘의 대장으로서 그들을 천년왕국의 팔레스타인 땅으로 인도할 것이다(히 2:10; 4:8).
(히 2:10)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 4:8-9)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3. 천년왕국의 안식(히 4:8-11)
(히 4:8-11)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안식이 바로 첫째와 둘째 안식의 모형이 되었던 근본적인 안식이다.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이 안식을 이루시고자 안식의 많은 예표들을 두셨다. 이때에는 창조 이후 6천년 동안 쉬지 않고 고생해온 땅이 안식을 취하게 된다. 아담의 타락과 더불어 저주받았던 땅이 그 저주로부터 풀려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시대에 환경운동을 운운하며 열심히 노력해도 결코 회복되지 않을 자연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펼쳐질 안식의 천년에서는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이다.
이사야서 11장에서는 사자들이 소처럼 짚을 먹고 어린 아이가 독사굴에 손을 집어넣는다는 묘사로 이 땅의 안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 될 것이다. UN같은 기구가 없어도 모든 민족은 평화롭게 지낼 것이다. 전쟁은 사람들의 손에서 사라질 것이다(사 2:4). 온 세상을 미혹하는 마귀가 천년 동안 갇혀 있고 화평의 통치자이신(사 9:6)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이 땅은 평화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사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현재 교회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휴거를 거쳐 이 땅에 들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 그러나 휴거 되지 못하고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서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믿음과 더불어 끝까지 지키는 "행위"가 있어야 이 안식에 들어오게 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끝까지 견뎌야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매우 중요한 교리가 될 것이다(마 24:13; 25:14-30, 계 12:17; 14:12).
(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계 12:17)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히브리서는 바로 이 안식을 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안식도 이야기하고 팔레스타인의 안식도 여러 가지 대조를 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4. 영적 안식(히 4:9-10)
(히 4:9-10)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이 안식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쉬는 안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안식은 마태복음 11:28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누리고 있는 영적 안식을 말한다. (물론 이 안식에 들어간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서 영원히 쉬는 안식과 궁극적인 안식인 천년왕국에 참여하게 된다.)
이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서 죄인들은 어떠한 노동도 할 필요가 없다. 죄인들은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그 분의 흘리신 피를 신뢰하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이미 완성해 놓으신 일 안에서 쉬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안식을 얻은 후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헌신하고 그 분을 위해 신실하게 일은 하지만 그것은 안식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안식은 오직 십자가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히브리서의 네 안식 뿐 아니라 성경의 모든 곳에서도 안식을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안식으로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히브리서 4장의 영적 안식조차도 전체적으로는 천년왕국을 강조하는 문맥 속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이 영적 안식이 매우 중요하며,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 영적 안식에 대한 교리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영하시는 경륜 속에서 이 안식은 천년왕국의 안식을 향해서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하라.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면 당신도 천년왕국의 안식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