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일반적으로 십일조의 기원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친 일(창세기 14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비판자들은 이 일도 트집을 잡습니다. 곧 전쟁에서 빼앗은 것은 불의한 것인데, 그런 것을 바친 것이 어찌 거룩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해석은 인간적인 해석으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해석도 성경에서 찾아야 합니다. 곧 히브리서 7장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이 십분의 일을 바쳤음을 강조합니다. 십분의 일이라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하여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치고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정식 군대도 아닌 사병들을 이끌고 가서 승리하고 조카의 가족들을 다 살려낸 아브라함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우리가 혹시 마귀에게 이렇게 끌려가는 일이 생겨도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이 되기만 한다면 우리의 대장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해내실 것입니다. 엉뚱하고 간교한 말로 트집을 잡지 말고 아브라함과 같은 감격을 가지고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감격으로 드리는 십일조에는 반드시 복이 따라오지 않습니까?
② 마태복음 23:23의 예수님 말씀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보다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고 하심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고 결론지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의 십일조도 반드시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③ 누가복음 18:10-14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였고, 자기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바리새인'이라고만 하면 "외식하는 자,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선입관 가지고 대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경우도 바리새인은 악인이고, 세리는 의인이라고 성급한 결론을 내립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은 악인이니까 그의 금식이나 십일조도 모두 악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결론에 다시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바리새인도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리보다는 덜 의로웠습니다. 그는 자기를 한껏 높였기에 오히려 낮아졌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십일조는 잘못된 것이다. 십일조는 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전혀 핀트가 안 맞는 악한 결론이 아닙니까?
④ 십일조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국가에 내는 세금이었다고 강변하기도 합니다. 물론 광야시대와 사사시대에는 아직 왕도 없었고, 제정일체(祭政一體) 시대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할 때에 사무엘은 그들에게 왕을 섬기는 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사무엘상 8:10-26에 나옵니다.
거기에도 십일조라는 말이 나오는데, 곧 15절에서 "그가(왕이)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라고 하였고, 17절에서는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국가에 바치는 세금을 말하는 것이요, 민수기 18:21-26에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십일조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오늘날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세금은 십일조가 아닙니다. 나라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그 세율은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백성의 대표들이 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본래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십일조는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민 18:21)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고, 이것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기업으로 준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레위인에 해당되는 사람들, 곧 목회자와 선교사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여 일하는 사역자들은 세상 직업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백성들의 십일조를 취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 하는 것은 나중에 심판을 받을 것이고, 평신도들이 십일조를 바치느냐 마느냐로 논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⑤ 십일조에 대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말씀은 역시 말라기 3:8-12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는 아주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재산 10분의 10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그 중의 하나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주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느냐, 마느냐에 따라 복과 저주가 갈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개개인의 체험에 나타나고, 역사에 나타나며, 오늘날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를 보면 금방 알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信者), 곧 '믿는 자'가 아닙니까? 어느 것은 믿고, 어느 것은 안 믿는다면 그런 사람을 어찌 신자라 하겠습니까?
⑥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목사가 돈에 욕심이 가득하여서 십일조를 빼앗아 자기 배를 채우려고 한다고 욕을 합니다. 그들은 목사가 가난해야 한다는 것을 자기의 지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물론 좋은 말입니다. 목사는 가난하게 사는 것이 덕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청빈(淸貧)이라는 말을 사랑합니다만, 목사가 가난하다고 해서 청렴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에 대하여 고통을 받고 고민하게 함으로 목사를 타락시킬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십일조를 하지 않음으로 목사가 가난하면 교회도 가난해지고 성도들도 모두 가난해지는 경우는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쩨쩨해지고 인색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목사님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목사님께 드리는 사례비는 교회의 형편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비단 목사 사례비뿐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태도가 아닙니까?
하기는 오늘날 타락한 목사들이 너무 많아서(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부인하고, 윤리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고, 동성애자들도 목사 안수를 해야 한다고 하고, 심지어는 동성간의 결혼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비판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저로서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목사가 타락했으면 평신도들이라도 타락하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히려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서, 또는 고용주가 되어서 목사를 부려먹으면서 사례비를 가지고 목사의 목을 조르는 사람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솔직하게 말해서 누가 돈에 욕심이 든 사람입니까? 십일조를 바치라고 가르치는 목사입니까? 십일조를 내지 말라고 목청을 돋우는 비판자들입니까? 목사는 성경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가르쳐야 합니다. 목사의 주인은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⑦ 예수님은 "너희는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라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들의 백합화 한 송이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고 기르십니다.
우리가 왜 재물 때문에 걱정을 하고 죄를 지어야 합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⑧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경의 핵심 사상은 "하나님 경외(敬畏) 사상"이요(전 12:13-14), "거룩(聖潔) 사상"(레 11:44-45; 벧전 1:16)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을 이루는 길은 구별됨에 있습니다. 레위기 11장에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 정결한 새와 부정한 새, 정결한 물고기와 부정한 물고기, 정결한 곤충과 부정한 곤충 등에 대한 구별을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레 10:10; 겔 22:26; 44:23).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 곧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과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마 22:21; 막 12:17; 눅 20:25) 하셨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의 몇 퍼센트가 하나님의 것입니까? 자신을 온전히 드려서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시도록 하시지는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온전히 드려진 사람에게 복을 쏟아주시고, 그를 크게 써 주십니다. 이 마지막 때에 주님의 손에 붙잡혀 한번 멋지게 쓰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