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은/ 열음터 공동체 목사

세 개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 구원론


구원론 논박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 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000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형용사’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리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 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시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 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GBS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 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 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 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