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말하는 십일조 이해
Ⅰ. 서론
교회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신부가 신랑을 향한 사랑만 가득하듯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가득해야 한다. 예수의 명하심은 교회의 순종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의 계명을 지킬 때 비로소 교회는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15:10).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진리이다. 대 다수의 신학자들은 십일조를 율법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예수는 대제사장이 되심을 말씀함으로 율법과 진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율법은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모양으로 말씀하셨으나, 진리는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진리이다.
본고에서는 율법의 전형으로 여겨졌던 십일조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율법과 진리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고, 십일조의 의미와 십일조가 진리임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예수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으로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임을 밝히고, 더 나아가 교회가 소유한 믿음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고자 한다.
Ⅱ. 율법과 진리
성경은 율법과 진리라는 두 가지 큰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 율법이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요 1:17).
율법과 진리, 이 둘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나 그 목적은 각각 다르다. 율법과 진리에 대하여 바로 알아야,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많은 교회가 십일조에 대해서 그릇된 생각을 가진 것도 율법과 진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이다.
1. 율법
율법은 십계명과 다른 모든 계명을 포함한다. 때로는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킬 때도 있고, 모세 오경 또는 십계명만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율법은 그리스도 이전에 나타난 모든 것을 포함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 범법함을 인하여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으로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맡겨 두신 것이다(갈 3:19). 마침내 예수께서 오셔서 율법에 용서를 더하시므로 완전케 하셨고, 예수의 오심으로 율법의 용무는 마침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죄를 깨닫게 하는 법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한다. 즉 율법을 통해 죄가 죄로 드러나게 한다. 율법이 없을 때도 죄는 세상에 있었으나 죄를 죄로 여기지 않을 뿐이었다(롬 5:13). 그러나 비로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심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임이 드러났다(롬 3:23).
인간은 자기 허물과 죄를 자각함으로써 자신들이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율법은 용서가 없는 법이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만이 그 가운데서 살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갈 3:12). 그러나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아무 육체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 줄 수 없다(갈 3:11). 따라서 율법대로 살 수 없는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의 강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 전체를 행할 능력을 가진 분은 예수 한 분뿐이시다(갈 5:3). 성경은 오직 예수만이 의인임을 말씀한다.
결국 율법이 있음으로 죄가 죄로 인정되어 인간의 본질을 자각할 수 있다. 즉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법이다(롬 3:20).
2) 진리로 인도하는 법
율법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시인하게 된다. 비록 율법이 없는 이방인일지라도 자기의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함으로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롬 2:14). 그래서 율법이 있는 자나 없는 자나 율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
율법을 몽학선생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이다(갈 3:24).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요 1:45). 그러므로 율법을 알면 예수를 알게 된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눅 24:44)
율법의 용무는 죄를 깨닫게 하고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죄인으로 저주받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에게로 안내하여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용무이다.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율법을 통해 예수의 죽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율법은 죄인을 심판하는 법이나 마침내 예수께로 인도하는 안내서와 같다. 결국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2. 진리
성경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특히 복음서에서는 진리이신 예수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진리’라는 어휘는 오직 요한복음에서만 쓰이고 있다. 그럼 성경에서 진리는 어떻게 말하는가 살펴보도록 하자.
1) 진리이신 예수
예수는 진리이시다. 그가 진리라는 것은 곧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진리의 아버지 시며, 예수는 진리가 되신다. 하나님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예수를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실존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를 통해 나타났다(요 1:14). 그리고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다시 한번 분명하게 확증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형상 이 시요 그 본체(히 1:3)이신 하나님의 실상이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하신 일과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실상을 보여 주셨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은 진리이다. 오직 진리이신 이가 진리를 보여 줄 수 있다.
2) 진리를 행하신 예수
진리이신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은 진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예수께서 ‘나는 … 이다’라고 말씀한 의도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라고 할 때, 이는 예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 행하신 일을 말한다. 곧 그가 행하신 일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뜻한다. 예수는 진리이시기에 그가 행하신 모든 것이 변치 않고 영원하다.
예수는 자의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것만 행하셨다.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진리이다. 아버지께서는 보여주시고, 아들은 행하시고 성령께서는 이를 보증하신다.
사도행전 1`장 1-2절에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말씀한다. 곧 예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은 성령으로 하셨다고 말씀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행하심은 아버지와 성령의 역사 하심이 있다.
3) 진리를 말씀하신 예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자의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신 것이므로, 아버지의 보증이 있다(요 12:49-50). 성경은 곳곳에서 예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요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 8:40)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요 8:45-46)
이와 같이 예수는 이 땅에 계실 동안 진리를 행하시며 또한 말씀하셨다. 그가 하신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믿는 자들을 통해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증거 되고 있다.
제자들이나가 두루 전파 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시라(막 16:20)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변치 않으시는 분이시기에 그의 말씀 또한 변할 수 없다. 변할 수 없는 그의 말씀은 진리이다.
4)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예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오 완전케 하려 하심이다(마 5:17). 하나님께서도 율법을 초월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아들일지라도 세상에 보내어 율법으로 죽게 하셨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것이 진리이다.
율법은 사망의 법이고 진리는 생명의 법이다. 율법의 기능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으나 진리이신 예수를 죽음에 가두지는 못했다. 예수는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응 하셨을 뿐 아니라(롬 8:4),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진리는 생명의 법임을 증거 하셨다.
율법도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는 비유와 모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오시기 전까지 맡겨두신 것이기에 예수가 오시면 율법은 완성된다. 예수께서 “이 성전을 헐라”(요 2:19)고 말씀하신 것이 그 증거이다. 모형인 땅의 것은 이제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비로소 그 성전이 예수의 육체를 말씀하신 것을 깨달았다.
Ⅲ. 십일조
성경에서 말씀하는 십일조는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율법 이전의 십일조, 율법의 십일조, 그리고 예수께서 명하신 진리의 십일조가 그것이다.
1. 율법 이전의 십일조
십일조는 율법이 있기 전에도 있었다. 창세기 14장 18-20절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와 창세기 28장 20-22절에 야곱이 하나님께 약속한 십일조가 그 예이다.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멜기세덱에게 드림으로 복을 비는 자에게 복을 받았고(히 7:6-7), 야곱은 평안히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면 하나님께 십일조 할 것을 서원 했다. 그 안에 담긴 기본적인 원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자원해서 드리는 예물이며 둘째,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 드리는 예물이고 셋째,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안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표시로 드리는 예물이다.
이 당시의 십일조는 율법이 있기 이전이었으므로 율법에 속하지 않았다. 율법이 있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과 야곱은 하나님 앞에 십일조로 믿음을 고백했다.
2. 율법의 십일조
율법의 십일조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나타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1) 레위기의 십일조(27:30-33)
레위기에 나타난 십일조 법은 봉헌 예물들의 속량을 규정하는 본문 속에 입법화된다. 그리고 그 특성은 첫째, 역사적 연속성은 언약의 실행이라는 기본 틀 속에서 보존되었다. 이미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십일조에서 그 유래가 존속되고 있다.
둘째, 십일조는 봉헌 적인 것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 때에 드리는 자발적인 것이다.
셋째, 이 법은 십일조의 대상을 규정했다.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과 같이 땅에서 나는 모든 것과 가축에서 나는 모든 것이다. 결국 그 대상들은 약속된 땅에서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종류의 재산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속량 할 수 있는 십일조와 속량 할 수 없는 십일조간에 구별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곡물 십일조는 속량할 수 있으나 생축 십일조는 속량 할 수 없었다.
2) 민수기의 십일조(18:20-32)
민수기에서의 십일조 법은 성전 봉사자들의 의무와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규정하는 법과 연관지어서 규정된다. 이 규정은 이스라엘 백성이 내는 모든 십일조의 사용과 십일조에 대한 레위인들의 의무를 규정한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법은 십일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전을 운영하는 데 있었다. 모든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에게 바쳐져야 한다고 규정한다(21, 24, 28절). 레위인은 제사장에게 바치는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제외한 모든 십일조를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
둘째, 십일조법의 구속력에 따른 그 효력은 영구적이다(23절). 23절에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고 말한다. 레위인의 의무가 영원하면 하나님의 돌보심도 영원하다는 것이다.
셋째, 십일조는 제사장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소득에 대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넷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위와 같이 민수기에 나타난 십일조의 특성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레위기의 십일조와 비교해 볼 때, 그 본질적인 변화를 찾아볼 수 없다.
3) 신명기의 십일조
(12:6; 14:22-29; 26:12-15)
신명기의 십일조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를 위한 것으로, 제의 적 생활의 중심 화를 규정하는 법 속에서 언급된다. 신명기의 십일조 법은 이전보다 더 방대하고 완전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율법의 십일조는 두 가지 사실을 제시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야곱의 십일조 약속에서 나타난 기본 틀을 반영한다는 것과 각각 본문들이 십일조의 사용과 연관된 또 하나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3. 진리의 십일조
예수께서 명하신 십일조가 진리의 십일조이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리라(마 23:23)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눅 11:42)
위의 말씀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께서 명하신 십일조는 수입의 십일조에 의와 인과 신을 더하여 하는 것이다.
율법은 믿음의 최소 한계를 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믿음의 최소의 표현을 십일조로 모세에게 가르치셨다. 각 개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이 무제한적이나 하나님은 그 믿음의 최소의 표현으로서 십일조를 명하셨다. 그래서 자기 소산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우리 전체를 드린다는 표현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믿음을 고백했다. 이것이 모세로 말미암아 율법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진리에 속한 성도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의 십일조를 드림으로 믿음을 고백한다. 소득의 십일조에 의와 인과 신을 겸한 예물, 이것이 바로 진리의 십일조인 것이다.
Ⅳ.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다. 교회는 만물을 지으신 예수께서 머리가 되신다. 십일조는 믿음의 고백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다. 이는 성도의 믿음의 초보가 된다.
1. 하나님
1) 태초에 계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다(요1:1, 14).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를 ‘말씀’이라 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을 때를 ‘예수 그리스도’라 한다. ‘태초에 계신 말씀’(요 1:1)은 ‘하나님의 입으로 선포된 말씀’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인격의 말씀’을 뜻한다.
예수께서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실 때는 아버지와 함께 영화를 가지셨다(요 17:15). 그러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빌 2:6-8). 곧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죽음을 경험하신 것이다.
예수는 이 땅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부족함이 없으셨다. 이는 하나님의 본체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를 믿음의 눈으로 본다면 창세 전에 하나님과 함께 가지셨던 영광을 볼 수 있다.
2)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사람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을지라도 그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사람과 같이 되신 분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가 그의 아들로 인해 이루어 졌다고 말씀한다(요 1:2-3).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아들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말씀한다(골 1:16).
교회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다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나아가 창조는 아들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예수로 말미암아 더욱 확실히 알게 된 것이다.
3) 믿음의 근본이신 하나님
예수는 믿음의 근본이시다. 곧 그는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을 보여 주신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아버지는 만유 보다 크시니이다’(요 10:29)라고 말씀하셨듯이 만유보다 크신 아버지를 알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 기록된 메시아가 오셔서 믿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리셨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 말씀하심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상고하는 성경이 곧 자신을 말씀함을 밝히신 것이다(요 5:39).
예수를 알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로만 알 수 있다. 진리되신 이를 알 때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예수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 때, 아버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할 때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했다. 곧 예수를 아는 것이 믿음의 근본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2.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1) 멜기세덱
① 창세기에 나타난 멜기세덱
창세기 14장 18-20절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다. 아브라함은 승전 후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십일조를 했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8-20)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의 하나님을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바친 것은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이 믿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통해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이 모든 신들을 지배하는 참 하나님이시며 자신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유일하신 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②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멜기세덱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의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히 7:1-10)
히브리서 7장 1-10절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로, 멜기세덱은 제사장이며 왕이다.
창세기에서와 같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에 더하여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한’ ‘의의 왕’이자, ‘평강의 왕’으로 표현된다.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이다. “평화”를 의미하는 살렘이 어디에 있는지 확실치 않으나 후에 예루살렘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살렘이란 왕도로 사용되었던 곳이 후에 예루살렘이란 왕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한다.
또한 멜기세덱은 살렘의 왕이면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제사장의 주 임무는 이름 그대로 제사지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제사장의 임무를 가장이 맡았던 것으로 보이나(욥 1:5 ; 창 8:20; 22:21) 후에 부족 국가가 성립되면서 부족의 우두머리인 왕이 제사장을 겸했다고 본다.
둘째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과 레위의 제사장들 보다 높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했다는 것을 볼 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축복을 받음으로 멜기세댁이 자신보다 높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또한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던 레위도 아브라함과 함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멜기세덱이 레위의 제사장들보다도 높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7장 4-8절에 나타난 멜기세덱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제사장 직분을 이은 제사장들보다 높은 자로 나타나 십일조를 받았던 존재인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
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는 시작한 날도 없고 끝 날도 없는 영원한 대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서 전혀 다른 제사장이 되신다. 곧 예수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제사장이 되었다(히 7:15-16).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히 7:11)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히 7:15-16)
만약 지금도 레위 지파로 부터 제사장이 나온다면 율법을 좇아서 대제사장을 해마다 바꾸어야 하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영원히 율법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대제사장 직분을 담당해 본 적이 없는 유다 지파에서 나셨다. 그래서 교회는 율법을 좇아 하나님과 만나지 않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진리로 하나님을 만난다. 즉 교회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나신 별다른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다.
② 십일조를 받으시는 분
멜기세덱에 관한 것은 믿음의 초보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에 관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로 취급하고 있다. 곧 아직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히 5:12).
아브라함은 승전 후 돌아오는 길에서 멜기세덱을 만나 축복을 받고 십일조를 드렸다. 즉 멜기세덱은 십일조를 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믿음의 초보’이다. 멜기세덱을 알고 있다면 그가 십일조를 받을 만한 분이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멜기세덱은 십일조를 받을 만한 분이신데 그가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상이다. 곧 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받을 만한 분이시면, 예수 그리스도 또한 십일조를 받을 만한 분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는 십일조는 예수를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이다.
또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레 27:3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요 3:16).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요 10:30). 십일조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인데, 예수께 십일조는 하는 것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Ⅴ. 믿음
교회의 믿음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때, 교회는 세상을 이길 수 있다(요일 5:4-5)
1. 하나님의 약속
1)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성경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하나님이 보증하시는 약속이 담겨 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진 능력이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그들 종교는 나름대로 경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진 교리를 논리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즉, 성경은 구약과 신약의 두 가지 약속을 담고 있다.
교회가 가진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딤후 3:16),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시기 전, 4백여 년 전에 이미 완성된 책이고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침례를 받으신 이후의 시작된 책이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오신 예수
성경은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요 5:39). 곧 예수는 성경에서 이미 하신 약속을 따라 오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자는 예수를 알 수 있고, 예수를 안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이미 체험한 것이다.
예수는 부활하시고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먹으신 후 자기의 살아나심을 보이셨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라고 하시면서 성경이 예수 자신을 말씀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셨다(눅 24:44).
3)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 약속은 이루어졌다. 이제 그가 다시 약속하신 것은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는 것’과 ‘다시 오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눅 24:49)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성취되었고 지금도 믿는 자 안에 계속 성취되고 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행 2:4)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행 10:44-45)
이제 남은 한 가지 약속인 재림은 속히 이루어 질 것이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4)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십일조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표이다.
내게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 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되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7-8)
그리고 예수께서도 십일조를 하되 십일조에는 의와 인과 신이 있어야 된다고 말씀하신다(마 23:23).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이다.
십일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이것은 십일조를 하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는 약속이다(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진정한 축복은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 다스릴 수 있는 권리이다. 율법의 중재에 의한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을 요구하나 예수님의 중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물질의 복을 부어 주실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하나님께 있는 부유를 성도가 소유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 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다.
2. 순종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듣고 청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복종하며 준행한다는 뜻이다.
순종의 모범이 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의 지체된 교회는 예수의 순종을 따라야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요 15:10).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행하실 때 자의로 행하지도 말씀하지도 않으셨다(요 12:50). 오직 아버지의 일만을 나타내시고, 그의 뜻을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순종’이다. 예수의 순종은 아버지 앞에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의 뜻만 성공하게 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앞두고도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다(눅 22:42). 이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 받은 계명이기 때문이다(요 10:18).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그는 죽음까지도 받아 들이셨고, 마침내 아버지는 모든 무릎을 그 이름 앞에 꿇게 하셨다(빌 2:9-10).
2) 교회의 순종
교회는 예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본분을 다한다. 예수의 말씀을 생명으로 아는 것이 교회요(요 6:63), 그 말씀을 절대 인정하는 것이 교회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교회에 성령을 보내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하셨으니,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교회는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와 연합하고(롬 6:5), 성찬을 함으로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사명을 가졌다(고전 11:26).
십일조하는 것은 초보의 믿음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돌아 왔다는 표요,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교회의 소망은 상 주심을 바라는 것이다(히 11:6). 교회가 예수께서 다시 오실 그 길을 예비하면서 기다리는 것은, 모든 수고와 핍박을 상으로 갚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기 때문이다.
Ⅵ. 결론
교회는 진리를 앎으로 진리에 속한 예수의 지체이다. 진리이신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진리에 대하여 확실히 알리셨다. 그리고 교회는 이제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행하신 예수를 알 수 있고, 말씀하신 진리를 성경을 통해 보고 들어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다.
교회는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곧 교회가 있어야 할 이유이다. 교회가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진리와 무관하다면 교회가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교회는 진리에 속해 진리를 말하고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질 수 있다.
십일조는 예수께서 명하신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의 믿음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속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것이다. 율법에 속한 자들이 율법을 어김으로 그들의 육체가 멸망 당했다. 그렇다면 진리에 속한 자들이 진리에 순종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는 어떠하겠는가?
교회는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행하는 것이지 두려움으로 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있다면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한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십일조는 믿음의 초보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며, 더 나아가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에 순종함으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채찍에도 맞으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교회는 예수를 닮아야 한다. 예수의 향기가 나야 된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 같이 교회는 예수의 계명을 지킴으로 그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해야 한다.
구약에서 서원은 “어떤 선물이나 봉사를 하나님께 바칠 것이라고 하는 엄숙한 약속이다. 이 서원은 주로 어려운 상황일 때 행해지며, 오직 하나님께만 행해졌다. 나실인의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서원은 항상 조건적인 약속이며 그 약속의 성취는 하나님께서 간구자의 요청을 응답해 주셨을 경우에만 요구되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