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먼저 성경 자체의 증거를 살펴보기 전에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상관관계에 관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견해를 다음의 네 가지로 분류해 보았다.
(1)성경을 단순히 사람의 책으로 보는 견해: 그들은 성경을 유교나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종교의 경전이나 다를 것이 없는 책으로 분류하여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서적 중의 하나로 간주한다.
(2)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견해: 그들은 성경이 신앙과 생활에 관한 진리를 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포함할 수 있으나 그곳에도 오류를 포함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견해를 갖는 사람들에게는 성경이 어디까지가 사람의 말이고 어디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를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도 되고 또 단순한 사람의 글도� 되므로 천차만별의 신앙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어 소시니안 (Socinian)이나 유니테리안 (Unitarian)등 비 기독교적인 신학들까지 허용하게 된다.
(3)사람이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견해: 이러한 견해는 심히 주관적인 것으로 성경이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의 주창자들인 바르트(Barth)나 부르너(Brunner)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속에 있으나 단지 그 잠재성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다. 성경이 우리를 �발견� 했을 때에 한하여 그 부분이 비로소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만한 객관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는 교묘한 이론이다.
(4)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믿는 견해: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신 즉 성령께서 사람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임을 믿는 견해이다.
이중 네 번째가 NYSKC 견해이고 이 글의 내용이다. 이제 성경 자체의 증거를 들어보자.
v 성경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완전성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내 입에 이를 명하셨고 여호와의 영께서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사야 34:16)
v 성경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충족성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온전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 (딤후3:16-17)
v 성경자체가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유기성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양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하나님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심문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유기체와 같이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성경은 한 인물(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묘사하고 있고 그를 통하여 세 인격으로 계시된 성삼위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이고 있다. 이를 기초로 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적인 증거들을 찾아보기로 하자.
v 성령이 저자이심을 성경 스스로가 증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 후서 3장 15-16절에서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γραφὴ graphe)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여기서 �하나님의 감동으로� 란 말은 헬라말의 한 단어로 - θεόπνευστος (theopneustos) 곧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은� 이란 말이다. 또 15절에 사용된 성경이란 말은 글자들 (γράμματαgrammata)로서 유대 어린이들이 모국어를 배울 때 사용하는 히브리어의 알파벳이다. 이 글자들이 시편 119편에서는 완벽한 구도로 사용되고 있다.
즉 시119편은 모두 176절로 되어 있는데 이는 8절씩 22개의 구문으로 나뉘며 각 구문을 히브리 알파벳 22자의 순서와 일치시켜서 각 구문 속의 여덟행이 각각 매 행의 첫 단어에 히브리어 자음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각 글자 한자 한자의 중요성과 정확한 구도를 볼 수 있다.
성경자체의 또 다른 증거로서 베드로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이는 옛적에 주신 예언이 사람의 뜻으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 하심을 받아 말한 것 임이니라.� (벧후1:20-21)
라고 했고 복음서 기자 누가도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눅1:70)
라하여 �주께서.. 말씀하셨다� 고 했다.
v 예수님께서 하신 증거
가장 중요한 증거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태도이시다. 주님 당시의 성경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같은 것으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오히려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결단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라고 말씀 하셨다. 여기서 �점�이라 함은 히브리 글자 중 가장 작은 글자(י yod)를 말하는 것으로 창세기 처음 5절에만도 30번 쓰였고 1장 전체에 237번이나 쓰였다. �획�은 글자 끝에 붙여 그것으로 두개의 유사한 글자를 구별한다. (예: ר와 ד ). 분명히 우리 주께서는 성경의 문자 하나 하나의 중요성을 강조 하셨다.
v 성경은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구약 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에 관한 책이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우주 만물이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하여 왜 창조되었으며 그 후 지구 역사가 어떠했는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은 어떠했으며 그들의 범죄와 저주와 죽음의 시작도 보게 된다.
또한 마귀가 인간을 꾀어 항상 죄와 죽음 가운데로 끌고 가는 사실과 죄에 빠진 인간을 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우리와 한 몸이 되게 하신다는 진리의 말씀이다.
창세기 2장 24절에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집을 떠나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한 몸을 이루시는 임마누엘 (עמנו�א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 이 되실 것을 처음부터 보여 주고 있다.
또 3장15절에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꾀어 범죄하게 한 마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하리니 그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셨는데 이 말씀 역시 죄에 빠진 우리들을 마귀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결정� (Decree)을 보여 주심과 동시에 앞으로 �여자의 후손� (이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신다)을 보내셔서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과 마귀도 그를 십자가로 해 할 것이나 그것이 마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 같음을 보여주고 있어 성경 전체의 내용이 이 한 귀절속에 모두 담겨져 있다. 이와같이 성경은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완전히 조화되고 그 내용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한 권의 책으로 어느 한 부분도 삭제될 수도 또한 부인될 수도 없는 책이다.
v 요나의 이야기 -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주께서 구약의 선지자 요나에 관하여 말씀하신 부분은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요나의 이야기를 사실이 아닌 우화나 비유적인 이야기로 믿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나의 이야기를 사실로 다루신 것 자체를 들어 예수님도 잘못 알고 계셨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 요나의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적인가를 살펴보자.
주께서는 마태복음 12장에서 먼저 용서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네 말로 네가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절)고 하셨다. 그 후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마 12:39-40절)
라고 하셨다. 주께서 사실로 인정하신 이 요나의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구약의 요나서를 읽어보면 그 이야기가 얼마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가를 알 수 있다. 요나서 1장 5절에
�요나는..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한 것은 그 이유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요나는 갈릴리 지방의 마을 가드-헤벨에서 살았다고 했다.
(요나는 구약성경의 하나이다. 열왕기하 14:25이 요나를 여로보암 2세의 통치와 연관시키고 있는 연고로 해서 요나서에 있는 이 일들은 여로보암이 통치하던 기간(B.C. 793-753)중에 기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지방은 북으로부터 오는 적들에게 제일 먼저 침략을 당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북쪽 왕국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용서의 복음을 전하라는 명을 받았을 때 요나의 느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명을 어기고 남쪽으로 도망하여 가드-헤벨에서 급히 제즈릴 평지로 내려와 평지를 건너 맞은 편에 있는 갈멜산맥을 넘어 약 55마일의 샤론들을 내려와 욥바에 이르렀다. 또
�선장이 내려가서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욘 1:6)
할 때 요나는 일어나 사실을 진술하고 문제의 원인이 자기이며 자신을 바다에 던져야 파도가 잔잔해지고 승선한 자들이 살 수 있다고 했다. 비록 요나 자신은 죄인이었으나 자신을 죽음에 던진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범법함을 인하여 스스로 죽으심을 택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요나의 사실을 통하여 잘 보여준다.
요나는 불순종했으나 우리 주께서는 온전히 순종하셨고 두 분 다 타인들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도록 내어주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스올의 뱃속까지..�(2:2절) �산의 뿌리까지..�(2:6절) �물이 내 영혼을 둘렀으며 바다 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2:5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기력을 잃었나이다..�(2:7절).
여기서 �스올� (שׁאול)이라 는 말은 구약에 65번 나오는데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 되었다. 또 마태 12:40절의 �큰 물고기�(κήτους)는 희랍시인 호머(Homer)도 오딧세이(Odyssey) 에서 �바다 괴물�(Sea Monster)이라 표현했다.
요나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의 선포는 너무나 강력하여 니느웨성 전체는 물론 왕까지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이 요나서는 분명히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에 따른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보이고 있어 신약 성경의 진리 나아가서는 성경 전체의 진리와 놀라운 조화를 이룬다.
v 시편, 애가 및 잠언에서 볼 수 있는 완벽한 통일성
구속자에 관한 사상은 �히브리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시편 (Acrostic Psalms: 매 행의 첫 단어 첫 자음이 히브리 알파벳 22자의 순서로 쓰여진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시편 중 일곱 편이 이러한 구도로 쓰여졌는데 이 시편들을 세밀히 살펴보면 (1) 성경 원본의 위대하고 장엄한 문학적 구도와 (2) 성경 전체를 통해 마치 �혈관�속을 흐르는 것 같은 속죄와 구속의 사상을 보게 된다.
이 일곱 편의 시편들은 25, 34, 37, 111, 112, 119, 145편으로 특히 119편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히브리 알파벳 한 글자에 여덟절씩 배당되어 있고 앞의 7개의 시편을 종합해 볼때 히브리 알파벳 22개가 총 14번 사용되었다. 특히 이 일곱편 중에 제 25편과 34편 끝에는 �페�(פ)로 시작되는 �구속하소서� (פדה padah)가 부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 (출13:13참조).
즉 25편에는
�구속하소서 이스라엘을 오 하나님이여, 그 모든 환란에서.. � (시 25:22절 � 참조: 23절이 아닌 이유는 25:5 한 절 속에 2 글자에 해당하는 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고 시편 34편에서는
�구속하시나니, 여호와는 그 종들의 영혼을� � (시 34:22절 � 참조: 여기서도 23절이 아닌 이유는 34:6 한 절 속에 2 글자에 해당하는 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 되어있다. 구약에서 �구속자를 신뢰하라� 한 것은 신약에서 �그의 피를 믿음으로� (롬 3:25)와 같은 뜻으로 성경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상이 이곳에도 강조되고 있음을 본다. 과연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심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시편 이외의 글에서도 비슷한 구도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곧 예레미야 애가(슬픈 노래)는 전 다섯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처음 4장은 위에서 언급한 시편과 같이 매 행의 첫 단어의 첫 자음이 히브리 알파벳 22자의 순서로 시작되는 노래들이다.
처음 두 장은 각각 한 번씩 알파벳의 순서로 사용되었고 셋째 장은 알파벳의 한 자를 세 절씩 반복하는 구도로 �슬픔의 사람�을 묘사하고 있다. 넷째 장은 다시 한번씩 알파벳의 순서로 쓰여졌고 다섯째 장은 22절로는 이루어져 있으나 그 구도가 완전히 깨진 형태로 되어 있다.
이곳 애가에서는 1장, 2장, 4장에서 각각 한번씩 전 알파벳 22자를 사용하고 3장에서는 알파벳 22자를 세 번 사용하여 여섯번은 질서 정연히 알파벳 순서로 쓰여지고 일곱 번째는 (5장에서)22절로 겉 형식은 유지하나 그 속은 완전히 무질서한 깨진 상태로 이 애가가 끝을 맺었으나,
잠언 31장 (예언적 잠언)에서 이러한 구도가 다시 이어져서 완전한 구도인 �7회째�가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잠언 31장 10절에서 31절까지의 22절에는 �완벽한 신부�가 묘사되어 있다. 분명히 예레미야 애가의 �슬픔의 사람�이 잠언 31장의 �완벽한 신부�와 결합하여 7회에 걸쳐서 전 문자의 사용 구도를 완전하게 이루고 있어 �슬픔의 사람�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완전한 신부인 그의 교회� 그리고 �홍색 옷을 입은 그 집 사람들�로서 다시 한 번 성경 전체의 진리와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음을 본다.
v 성경에는 예언이 있고, 그 예언에 대한 성취가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가 검을 쓰려고 할 때 주께서는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마26:53-54)
라고 하셨다. 이는 성경을 이루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임을 보이신다.
v성경은 하나의 책이다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 주께서
�이에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및 모든 선지자의 글에서와 모든 기록들에 쓴 바 자기에게 관한 것들을 풀어�� (눅 24:27)
를 가르치셨다. 특히 구약 성경을 세 부분 즉,
(1) �창세기에서 신명기까지: 율법 (Torah תורה)
(2) �여호수아에서 말라기까지: 선지서 (Nuviim נביאים)
(3) �시편에서 역대하까지: 기록들 (K�tuvim כתובים) 또는 그 첫 책의 이름을 따서 �시편�이라고도 함. (참조: 눅 24:44)
모든 성경이 자기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과 성경의 중심인물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해 주셨다.
v 구약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심을 신약성경이 세 가지로 증거하고 있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한결같이 구약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고 성경의 저자는 역시 성령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특히 히브리서의 기자는 구약성경 세 부분을 인용하면서 성령께서 성경 각 부분의 저자이심을 말한다.
첫째로 율법책인 출애굽기 30:10에서,
�아론이 일년에 한번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에 한번씩 대대로 속죄할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
를 히브리서 9:7,9절에 인용하면서
"오직 둘째 장막에는 대제사장이 혼자 일년에 한번 들어가되 피 없이는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니 이 피는 자기 자신과 백성의 죄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성령께서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성막이 서 있을 동안에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하였고,
둘째 부분인 선지서에는 예레미야 31:33에서,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를 히브리서 10:15-16절에 인용하여
�또한 성령께서도 그 후에 우리들에게 미리 증거하시여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속에 두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
�또한 성령께서도 우리에게 증거하시여..� 라하여 선지서의 이 글도 성령께서 그 저자이심을 확증하였다.
셋째 부분인 �기록들�에는 시편 95편에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지어다� (시 95:7-8)
를 히브리서 3:7-8절에 인용하면서,
�그러므로 (성령께서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격노하게 한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라 하였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구약의 세 부분을 각각 인용하여 구약 전체의 저자가 성령이심을 확증하고 있다.
v 성경은 한 하나님을 세 인격으로 통일성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성경의 주 인물 메시아께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사실을 살펴보자. 성경은 오실 자(הבא), 기름부음을 받은 자, 그리스도, 메시아(משׁיח)로 가득 차 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22:42)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3).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눅7:19).
이 모든 질문들은 영원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생각할 때 신 구약 성경 각 페이지마다 보여주는 메시아 그 분을 이해해야 한다.
히브리어 �하나님�(אלהים Elohim)이란 단어가 복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자. 문자적으로 하면 �하나님들� 또는 �신들�이다. 그러나 출20:3에는 꼭 같은 말을 써서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들(하나님들: 엘로힘)을 두지 말지니라�
했는데 이때에는 복수를 지칭하는 �다른�을 써서 그 수식하는 �신들� 이 복수를 나타냈으나 창세기 1:1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즉 �엘로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할 때에는 단수 형태의 동사를 썼다. 왜 꼭 같은 �엘로힘(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지칭할 때에는 단수형으로 그 동사나 형용사가 따르고 이방신을 표시할 때에는 복수형 그대로 사용 하는가? 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를 때에 �복수적인 단수�라는 신비한 단어가 쓰이게 된 것일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늘 주장하는 유명한 �쉐마-�(שׁמע 들으라!) 절에도 이 복수적인 단수를 나타내는 단어가 쓰이고 있다. 먼저 히브리어에 �하나� 라는 의미를 갖는 말이 둘이 있다. 즉,
יחיד yachiyd : 야키드
(절대적인 의미의) 하나, 유일한, 하나밖에 없는 � 이 말은 성경 다음 구절 등에 쓰였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유대인들의 주장과는 달리 신명기 6장4절에서 이 말이 쓰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창 22:2
�네 독자 이삭을 �
� thine only [son] Isaac,
삿 11:34
�그는 외동 딸로,�
� she was his only child;
시 22:20
�내 유일한 것을�
� my darling from �
אחד ekhad : 에하드
(복합적인 의미의) 하나, 하나지만 여럿으로 구성된 � 이말이 하나님께 대하여 또는 사람에게 대하여 두루 쓰이고있다. (신명기 6장4절에서는 이 말을 쓰고 있다)
그 예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살로 대신 채우시고..� (창2:21)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라� (창2:24)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또한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창3:22)
אחד, יהוה, אלהינו, יהוה, יסראל, שׁמע, (Deu 6:4)
(하나) (여호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아) (들으라)�- [읽기 시작점]
�들으라! 오 이스라엘아!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한 분 여호와시니� (신6:4)
�Hear, O Israel: Yehowah our God is one Yehowah.� (Deu 6:4)
에서 쓰이고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에 하신 말씀가운데서 이 복수적 의미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라고하여 �우리�라는 말을 3번이나 쓰셨다. 이러한 삼위의 하나님에 관한 진리는 신약에 와서 더욱 명확하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신 한 하나님으로 계시되었다.
�하늘에서 증거하시는 이가 세 분이 계시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이시라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 (요일5:7)
�For there are three that bear record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1 John 5:7)
이러한 복합적이신 한 분의 진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교리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유일한 구속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시어 그 이후 계속하여 그리고 영원토록 신성과 인성 두 가지 성품을 지니신 한 분 이시다.� (소요리문답 제 21번)
v 성경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에서 메시아는 �하나님의 아들� 또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묘사되어 있다. 특히
�죽이심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창세 이후로 땅에 사는 사람들은.. � (계13:8)
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역역히 보여주고 있다.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양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혀 주셨다.(창3:21). 아담의 아들 아벨도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양으로 제사 드림으로 열납 받으셨다. 이리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대대로 어린양을 제물로 드려왔고 이 피흘림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셨던 것이다. 그러나 애굽인들은 (여기서는 세상을 나타낸다) 양을 가증히 여겼다.
�이는 애굽 사람이 다 목축을 가증히 여김이니 � � (창46:34)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속 목축업을 하며 양을 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이삭 대신에 나무에 그 뿔이 걸려있는 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준비하여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면서 참을 수 없는 비통함 가운데 젖어 있었다. 제 삼일에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나는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창22:5)
하여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다. 그는 비록 이삭을 제물로 드릴지라도 그의 씨 이삭에 대하여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 믿었던 것이다.(히11:19). 과연 아브라함은 삼일 만에 아들 이삭을 되돌려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아끼시지 않으셨으나 제 삼일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셨다. 이렇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대신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는 예수님은 유월절의 양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모세에게 흠없는 어린 양을 준비했다가 유월절 예비일에 잡아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라 명하신 일이다. (출 12장) 대신 죽은 어린양의 피가 죽음의 천사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보증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그 약속은 신약에서 이루어 졌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출12:13).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가 너희 조상에게서 받은 바 헛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의 피와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또 하나 특이한 사실은 레1:10-11절에,
�만일 그 예물이 떼의 양이나 염소의 태움제이면 흠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그가 제단 북편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라하여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 동물을 제단의 북편에서 잡으라 하셨다. 왜 북편인가? 제단은 성막 뜰 한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동편에서나 남편에서나 어디서나 잡을 수가 있는데도 꼭 북편에서만 잡으라 하셨다. (레 4:24,33, 7:2, 14:3). 이는,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요 1:29)
의 죽으실 장소인 골고다의 위치가 성전의 북쪽 언덕에 있음을 미리 보이신 것이다.
v 성경은 �피흘림의 대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성막 지성소 안에는 법궤와 그 위에 시은좌 (Mercy-seat)가 있다. 이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영광의 구름으로 임하시고 또 그곳에 대 제사장이 일년에 한번씩 피를 뿌려 전 백성의 죄를 위하여 속죄하는 자리이다. 이 시은좌를 70인 역경에서는 헬라어 �ἱλαστήριον�(힐라스 테리온)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신약 성경에서는 꼭 같은 말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가 우리의 시은좌이시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드려진 �피의 제물� 곧 �속죄제물이요 화목제물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롬3:25, 사53:10, 요일2:2).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운명하실 때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둘�이 되었다. 이것 역시 그의 육체이신 휘장을 찢으사 스스로를 제물로 드리심으로서 우리로 지성소 시은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고 세례 요한의 증거 즉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요1:29) 한 것을 이루시었다.
또한 양을 드릴 때는 흠이 전혀 없는 양을 드려야 했었다. (출12:5, 레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흠이나 죄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심을 제자들은 한결같이 증거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리스도를�� (고후5:21)
이시라고 했고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는 거짓도 없으셨으며�� (벧전2:22) 라고 증거했고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없이 하시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니라.� (요일3:5)고 했고 사도 바나바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적합하니 곧 거룩하시고 순결하시며 더러움이 없으시고 죄인에게서 성별되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히 7:26)고 했다. 주님 자신도 스스로를 가리켜
�저(마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 (요14:30)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요8:46)
라고 하셔서 흠없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심을 보여주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제 삼일에 다시 살리심으로써 창세전부터 준비해 오신 구속의 역사를 완전히 이루셨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19:30).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재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행2:32,36)
이외에도 성경은 구약과 신약 전체에서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각 페이지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는 권고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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