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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질을 높이라

설교의 질을 높이라


들어가는말


‘하나님 앞과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달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따라서 설교의 커뮤니케이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중요하다. 또한 예배는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사건이다 이러한 만남은 신학적으로 언약의 사건이다. 예배는 언약의 회복사건이다. 예배를 통해서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1.기업을 주신 언약의 주 되심과 2.상실 되어버린 기업을 회복해 주시는 언약의 주되심,)을 알고 경배하게 되는 것이며, 그의 백성으로의 정체성과 사명을 확인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배는 세상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전통적으로 예배는 교회 사역의 중심을 이룬다. 예배는 교회가 교회됨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Müller 1994:390). 예배학은 설교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는 가장 중한 계기로 본다. 하나님은 설교의 방편을 통해서 그의 백성에게 오셔서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신다(허순길 1992:58). 이러한 만남의 사건으로서 예배의 근본적인 두 가지 요소는 remembering과 celebrating이라고 할 수 있다 (cf. Müller 1992). 설교는 말씀을 통한 remembering 사역이다.


설교사역


1.설교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의 정체성을 세우는 사역이다


설교학은 전통적으로 ‘설교의 학문(art)’로 정의되는데, 그 기원은 헬라어 homiletike, 즉 the art of conversing라는 의미이다. 설교는 비록 설교자의 단일담화(monologue)이지만 본질적 으로 대화(conversation – homilia)이다. 설교의 기원은 우리에게 설교가 대화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눅 24:14, 행 24:26). 이러한 토대 위해서 설교는 계시가 갖는 대화적 성격 을 따라 계속되어졌다. 대화적 설교가 갖는 목표는 본문과 회중 사이에 대화를 창출하는 것 이다.


설교학에서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새설교학(New Homiletic)에서 특별히 크레독

(Craddock), 로우리(Lowry), 멕클러 (McClure) 등 설교학을 이끌어가는 학자들에 의해서

귀납법적 설교, 이야기 설교, 서사설교, 공동작업으로서의 설교사역 등 여려가지 설교의

이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2 신앙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나누는 설교


오늘날과 같은 세속화되어 있는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설교의 사역은

remember의 사역이 되어야 한다. 부르그만(Brueggemann)에 의하 면 이 기억하는 일은

‘해석적 행위’라고 말한다(Brueggemann 1988:135). 기억하는 일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창조적 비전을 그러낸다.


개개인의 신앙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개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공동체의 신앙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이 개개인에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이, 그리고 공동체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들이 기억되고 나누어 질 때, 비로서

공동체의 신앙의 정체성이 확립될 수 있다.


3. 공동체가 되는 행위로서 설교


설교는 공동체를 세우는 사역(an act of upbuilding of the church)이 되어야 한다.

말란 넬(Malan Nel)에 의하면, 교회를 세우는 사역은 지역 교회의 본질, 목적, 기능에 대해

서 이해하는 것이다 (Nel 1990:1). 넬(Nel)은 이것을 개혁의 사역이라고 정의한다. 즉

회중들로 하여금 교회의 정체성을 규명하고 찾도록 인도하는 사역이다(2002:1).


4. 종이 되는 행위로서 설교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로 이루어지는 것은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리커가 말하

는 것처럼 용서는 본질적으로 자기의 고난의 관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난의 관점에서

종으로서 섬길 때 일어나게 된다. 이런 이해 속에서 설교사역은 단순히 언어적 사건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윤리적 삶까지 고려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 속에서 설교는

단순히 event가 아니라 말씀을 수행(performance)하는 여정(journey)이 되어야 한다

(cf Lash 1986; Campbell 1997; Bartow 1997). 설교는 설교시간에 선포되는 말씀을 듣는

사건(event)에서 선포된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이 공동체 개개인들의 삶 속에 실현될 때

까지 말씀의 순례(journey)가 되어야 한다 (Lischer 1992:90-92; 1993:128-130). 레슬리

뉴비긴(Newbigin)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공동체(a community of hermeneutics)

라고 했다. 즉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설교사역이 단순히 event가 아니라 journey가 되기 위해서는 설교는 단순히 말씀을 선포

하고 듣는 사역에서 선포된 말씀을 수행(performance)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Lash 1986).


5. 증거자가 되는 행위로서 설교


설교사역은 교회가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세상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특별히 교회가 어떻게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가 하는 증거의 방식을 고려

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대조 공동체(alternative community)로 있음으로 세상 속에

서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성경에서 형성된 언어와 삶의 체계

를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대조 공동체의 모습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의 선포는 증거(testimony)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자기가 경험한 삶의

방법, 체계를 증거하는 것이 설교이어야 한다. 이러한 증거는 첫 번째로 공동체를 위한 증거

이지만 - 즉 공동체를 세우는 증거이지만 - 또한 세상을 향해서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그 공동체에 들어오라고 초청하는 overhearing이 될 것이다 (Brueggemann 1998). 즉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종류

1.one-way communication, Monological communication

2 Two-ways communication, Dialogical Communication

3.쌍방향적 커뮤니케이션의 신학적 이해

1) 계시는 dialogue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

2) 의사소통의 정황으로서의 회중은 대화적 교회(dialogic church)이다.

3) Dialogue는 크리스쳔의 기본적인 태도이다.

4) 설교에서 의사소통의 구조는 dialogue이다.


설교의 형식 속에 다양한 전개 구조


설교의 구조와 연관해서 역동적인 전개(dynamic development)를 고려해야 한다. 버트릭(Buttrick)은 이것을 move라고 부른다(Buttrick 1987). 즉 설교의 movement는 마치 영화같이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로우리(Lowry)는 plot이라고 부른다(Lowry 1980; 2001). 이 plot은 청중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설교학적 신학적 strategy이다.


1.초점(focus)과 기능(function)을 가지고 시작하라


설교 형식을 만들기 위해서 토마스 롱(Long)이 제시하는 초점과 기능 즉 무엇을 말하고 무엇

을 할 것인가의 목표를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Long 1989a). 이를 통해서 설교는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다. 설교에서 초점과 기능을 이루는데 필요한 것은 설교 구조 속에 집어넣고,

설교의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제외한다.


2.설교의 전체적인 목적을 세부적인 부분(목적)으로 나누어 본다


이것은 한꺼번에 이루어 질 수 없다. 설교 안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작은 목표들로 세분하는 것이 필요하다.


3.목적이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 순서를 정하라


1) 설교의 흐름(movement of sermon)이 본문의 흐름(movement of text)을

따르게 하라.

2) 본문 안에서 서로 대립된 요소(the opposing of the text)가 설교 안에서

대립된 요소 (the opposing forces in the sermon) 가 되게 하라.

3) 본문에 있는 핵심 통찰력(the central insight of the text)이 설교의 핵심

통찰력(the central insight of the sermon)이 되게 하라.

4) 본문의 무드(the mood of the text)가 설교의 무드(the mood of the sermon)를 조성하게 하라.


설교의 형태


비록 순수한 설교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고 서로 혼합되어 있지만 대략 다음과 설교 형식을 구분할 수 있다 (cf. Vos 1999). 설교의 형식은 설교자가 의사소통을 위해서 다양한 설교형식을 알고 이것을 적용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의 형식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기억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설교에 접근이 가능할 수 있어야 한다.


1) Homily: Homily는 좁은 의미로 verse-by-verse강해를 의미한다. 강해가 주어지고, 적용은 청중에게 남겨진다. 일반적으로 강해는 각각 구절에 대한 토론으로 이루어지고 이 과정에서 청중은 그들의 삶에 적용을 하게 된다.

2) Narrative: Narrative설교는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네러 티브 설교에서 청중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narrative의 흐름을 따라, 정점에 이르 고, 거기에서 개인적인 선택을 하도록 이끌어진다.

3) Text-thematic: Text-thematic 형식은 논증과 설명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본문의 메시지 는 설교의 서론, 본론, 결론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주제는 설득력 있게 제시되는데, 설명과 예시를 통해서(적용까지 포함됨) 이다.

4) Thematic: 주제설교는 어느 특정 본문에 근거하지 않고, 특정 주제를 성경과 신학 전반에 걸쳐서 논증하고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설교의 다양한 전개형태


시드니 그레이다누스(Greidanus)는 설교의 형식 안에서 다양한 전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Greidanus 1988). (이 부분은 앨런(Allen)의 topical preaching의 11-18p까지 참조)


1) 연역적 전개(Deductive Sermon)


연역적 전개는 일반적 진술에서 특별한 진술로 흘러간다. 연역적 설교에서 설교자는 설교 시작에서 설교의 주요 요점을 말하고 그것을 특별한 방식으로 주요 요점을 발달 시켜 나간 다. 또한 일반적 진리에 연관된 것들로 전개할 수 있다. 설교자는 실례를 들 수 있다. 먼저 일반적인 주제를 진술하고, 그 다음 주제의 다양한 면들을 하나씩 차례로 보통 요점들을 제 시하는 식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교훈적 설교에서 취하는 일반적인 양식이다. 이 러한 연역적 전개의 유리한 점은, 처음부터 설교의 요점이 분명히 드러나고 이것이 설교 내 내 강조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청중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데, 그 까닭은

처음부터 청중이 여행의 목적지를 알게 되며 따라서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을 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2) 귀납적인 전개(Inductive Sermon)


크래독(Craddock)에 의해서 제시된 방법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설교는 하나님 의 말씀을 나누는 큰 사건이다. 이것이 여행이긴 하지만, 결론을 내릴 지점에 도달해서도 결 론을 제시하지 않는, 단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을 위한 여행은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귀납적으로 진행해 가면서 설교의 주제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것들을 주의 깊게 조사해 보는 작업을 한다. 마찬가지로, 설교자가 청중에게 그

결론을 손쉽게 건네주어서는 안되고 청중 스스로가 그 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식 설교에 대한 개념적 이해


1.이야기식 설교의 기본 요소로서의 플롯


이야기식 설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는 플롯(plot)이다. 플롯이란 우리말로는 ‘얽어 짜기’로 번역할 수 있는데, 부분과 부분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완전한 이야기를 형성하게 될 때 그 이야기는 일정한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플롯이란 전체와 부분이 해설자의 의도에 따라 일정한 방식으로 조직적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플롯은 문학 작품뿐 아니라 이야기식 설교에 있어 생명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설교 방식이 일정한 진행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라이켄

(Leland Ryken)이 플롯을 이야기의 중심부에 있는 갈등이 해결을 향해 나아가는 장치라고

정의했을 때 그것은 곧 이야기식 설교가 갖는 이야기성(Narrativity)을 충족시키는 필요충분

조건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플롯의 구성은 매우 다양하지만 현재는 마틴(Martin Wallace)이 독일의 프레탁의 이론에서 추출한 4단계를 규범적인 플롯의 모형으로 꼽는다: A―B―C―D. A-B에서는 해설이 제시되고 B에서는 갈등이 소개된다. B-C는 행동의 발생 곧 갈등이 복합 또는 발전되는 단계이며, C는 절정, 행동의 전환을 의미한다. C-D는 갈등이 해결되는 단계이다.


2.이야기의 특성과 역할


에이모스 윌더(Amos Wilder)는 복음의 바로 핵심적인 본질은 이야기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예를 들어 예수님이 이야기를 즐겨 사용하신 것은 청중들 의 관심만을 끌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적인 특성 때문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은 잘 갖추어진 논증을 통해, 즉 일련의 개념들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정 의하고, 삼단논법과 같이 논증하는 것도 아니며, 종교적인 정의를 열거하는 것도 아니다. 그 러므로 복음의 메시지를 삼단논법이나 지적인 논증, 혹은 정의로 바꾸어서 전한다면 복음 그 자체의 본질적인 특성을 변형시키는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크래독(Craddock)은 복음 "메시 지의 본질적인 구조는 언제나 이야기(narrative)의 특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과 어떻게 언약을 맺으시고, 어떻게 다스 리시며,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

다스림 가운데서 살아가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3.이야기 설교(Story sermon)

1) 웁스(Oops)!: 첫째는 평형을 깨뜨리는 단계이다.

2) 우(Ugh)!: 두 번째로는 모순 혹은 불일치를 분석하여 심화시키는 단계이다.

3) 아하(Aha)!: 세 번째로는 해결의 실마리는 보여주는 반전의 단계이다.

4) 와(Whee)!: 넷째로는 복음을 경험하게 하는 단계이다.

5) 예(Yeah)!: 다섯 번째로는 결과를 기대하는 단계이다.


P.D.P.(Positive Dialectic Preaching)변증적 설교


성경은 항상 결론을 앞에 두고 상황과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예를 들면 가롯유다는 이미

예수를 팔자라고 시작되었고 3년 동안의 행적이 기록되면서 변증해 나간다 그러므로 그

내용을 깊이 연구할 때 본문의 Fact가 가장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사건의 내용을 보면서

성경의 짝을 찾아야 하며 또한 모형과 상징을 성경안에서 찾아 내어 본문을 강화하며

가져온 모형과 상징을 통해서 변증하며 스토리텔링(Storytelling)해나가는 설교이다


이것이 이야기 설교(Storytelling Sermon)과는 아주 다르다 물론 이야기 형식이라는 점

에서는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관점(Theocentricism)라는 연역적(deductive) 형식과 또한

변증(Dialectic) 모형과 상징으로 전개해 나간다


1.PDP의 핵심은 변증이며 또한 모형을 찾는 것이다

2.PDP Delaying the Story

3.PDP Suspending the Story

4.PDP Alternating the Story


설교에서 언어의 중요성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중대한 세계를 형성하도록 만들며, 언어를 통해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 속에 구현된다. 그러므로 김운용은 언어는 설교자가

“청중들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맺히게 하여 말씀이 제시하는 ‘세계’를

창조하도록 돕는 요소”라고 말한다(김운용 2004:361). 그러므로 설교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communication)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청중이 어떻게 듣는가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즉 설교에서 언어가 사용되어 질 때, 청중

들의 의식 속에 무엇인가가 일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1.설교에서 상상(imagination)과 이미지(image)의 역할

1)설교의 언어는 보고 듣게 하는 언어(audiovisual language)이어야 한다.

2)설교의 언어에서 메타포 언어 (metaphorical language)를 사용해야 한다.


설교의 모형(전통적 설교 방법 비교)

1.게아시를 통한 교훈 (왕하5:20-27)

2.지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야(열왕기하 5:20-27)



설교의 모형(전통적 설교 방법 비교)


1.게아시를 통한 교훈 (왕하5:20-27)


오늘 본문 말씀은 문둥병에 걸린 게하시의 이야기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왕의 군대장관입니다. 그러나 문둥병자 였습니다. 그는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미리서 은 10만 달란트와 금 6천개와 의복10벌의 예물을 준비했습니다. 나아만은 기대했던 대로 병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은 혜에 보답하고자 그 예물을 엘리사에게 바쳤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는 극구 예물 받는 것 을 사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능력으로 병을 고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병을 고치셨다고 믿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거니 받거니가 아닙니다. '받으세요. 받으세 요'가 있고 '아니요. 아니요'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한자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 이 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는 게하시 마음가운데 욕심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런데 야 고보서 1장 15절이 무엇입니까?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 니라" 게하시는 아마 여기 이 말씀을 전혀 기억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결국 게하시는 불행 하게도 물질 욕심 그것 때문에 나아만의 문둥병을 물려받았다는 불행스러운 내용이 본문 말씀입니다. 이 시간 우리 모두는 이 말씀 중심해서 게하시의 죄가 무엇인가 배울 수 있고 또 세 가지 교훈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훈들입니까?


첫째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5절인데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 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거절한 예물을 그대로 가지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게하시가 엘리사를 원망했습니다. '그런 귀한 것들을 물리치다니 자기만 싫으면 되는가 아랫사람도 좀 생각해야지'그러면서 게하시 가 어찌했습니까? 본문 20절에 보면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마음에 작정을 했습니다. 여기 "무엇이든지"라는 말은 '닥치는 대로'혹은 '아무 것이나'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탕하리라 생각하고 게하시는 엘리사 몰래 빠져나가 가고 있 는 나아만을 쫓아갔습니다. 23절을 보면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는 그것을 몰래 집에다 감추어 두었습니다. 시치미를 뗀 게하시는 엘리사 앞에 섰습니다. 그 때 엘리사의 말이 무엇입니까? 25절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무슨 뜻입니까? '네가 무엇을 했느냐? 네가 어쩌자고 이러느냐'의미 일 것입니다. 게하시가 돌이킬 수 있 는 좋은 기회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그리고 제기할 수 있는 좋은 찬스입니다. 그런데도 게하시는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구약의 가룟 유다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의 탐심이 부른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 무섭고도 더러운 문둥병이었습니다. 본문27절에 그 내용이 있습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 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엘리사의 말대로 게하시는 문둥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어느 정도 욕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욕심을 부리지 말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무근한 말로 속이지 말라는 것.


나아만은 뒤따라오는 게하시를 수레에서 내려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21절에 "평안이냐"왜 평안을 물었습니까? 게하시 얼굴에 평안이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속이는 자의 눈빛은 다르고 그 마음은 갈등일 것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평안이겠습니까? 게하시 는 나아만에게 새 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본문22절은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게하시는 엘리사 가 하지도, 시키지도 않은 말을 이렇게 무근한 것으로 나아만을 속였습니다. 나아만 만 속였습니까? 하나님의 종 엘리사에게도 거짓말을 했습니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물었을 때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다시말 하면 나아만을 쫓아간 일이 없습니다. 돈 한 푼 받은 적이 전혀 없는데요. 시치미를 떼었다는 말입니다. 게하시는 무근한 거짓말로 엘리사, 두 사환, 자기 양친도 속였습니다. 하나의 거짓말을 만들려면 열 개의 거짓말을 동원 해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나 거짓말이라는 말을 타고 땅 끝까지 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되돌아 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 번 두 번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번을 속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게하시가 나아만에게서 취한 것을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집에다 감추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깊숙한 곳에다 감추었을 것입니다. 본 사 람이 없고 눈치챈 사람도 없습니다. 나아만은 벌써 멀리 가버렸습니다. 두 사환도 내용을 잘 모릅니다. 아마 자기 아내에게도 이것을 속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게하시는 손을 털털 털면서 '이제는 되었다'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26절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을 때냐"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네가 어디서 오느냐" 무슨 뜻입니까? '네가 집에 감추고 온 것이 무엇이냐'이러한 의미일 것입니다. 어떻게 엘리사가 이렇게 알았습니까? 본문26절에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무슨 말입니까? 그 때 내가 거기 있었느니라 라는 원문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에게는 영감이 있습니다. 그 영감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도 게하시 인생이 더러 있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성도는 사람을 거짓말로 속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벙어리 종교가 아닙니다. 성도들 저마다 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입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우리는 다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입을 어떻게 사용하여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그 입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잘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2절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입을 가지고 말을 많이 합니다. 하룻동안에 얼마나 말을 많이 합니까? 그 사람 앞에서도 말하고 그 사람이 없어도 말을 합니다. 그래서 내 입 가지고 사람을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합니다. 그입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시장통이 아닙니다. 부도수표를 난발해서도 안되고 저울을 속여서도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러니까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을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것들은부흥을 막고, 은혜를 깨고, 마귀가 춤을 추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은혜스러운 말, 사랑하는 말, 건설적이고 긍정적인 말, 이웃을 축복하고 칭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잠언16장 24절에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 니라"고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라는 것.


게하시는 어찌했습니까? 20절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그랬습니다. 얼마나 가증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는커녕 얼마나 배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본문25절입니다. "게하시야"불렀습니다. 물론 게하시를 부르는 하나님의 종 엘리사의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는 엘리사를 통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종종 회개시키려고 죄인을 부르신 적이 많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셨고 , 가인아? 네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문책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부르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물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욕심쟁이 게하시 인생들을 부르십니다. 김집사야? 박집사야? 게하시야? 게하시야? 부르신다는 말입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언제 깨끗하여 졌습니까? 나아만도 처음에는 '내 생각에는'열 번을 되새겼습니다. 내 생각을 앞장 세웠을 때는 문둥병이 낳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을 곧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앞장 세웠을 때 나아만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졌습니다. 나아만이 깨끗하여 진 것은 요단강 물 자체가 약효가. 나던 것이 아닙니다. 몸을 다섯 번 씻고 여섯 번 씻었기하고 하문둥병이 고쳐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여 일곱번 몸을 씻었기하고 하이적이 일어났던 것기하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26절을 기억해보면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엘리사가 게하시를 문책하면서 주신 말입니다. 지금이 어찌 그러고 있을 때냐? 게하시를 통한 교훈을 삶에다가 적용 해야됩니다. 모든 탐심을 물리쳐보십시오. 탐심은 죄입니다. 끝내는 사망 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무근한 말로 속이지 마십시오. 거짓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합 니다. 잠언 21장 6절입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십시오. 시편 119편 105절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 모두는 복된 삶을 염원합니다. 그런데 그 비밀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옳은 길 가기를 원하고 옳은 일 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길이요 그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시는 게하시 의 길을 걷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게하시의 길에서 돌이키는 그래서 나의 더러운 것이 깨 끗하여지는 축복을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로운 방법의 설교


2.지금이 어찌 은을 받을 때야(열왕기하 5:20-27)


나아만 장군은 아람 군대 장관입니다. 아람나라는 시리아를 말합니다. 나아만은 용장중에 용장임을 알수 있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멀리 경리, 또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시대입니다.


문둥병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람 왕이 놓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원래 구별 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옮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훌륭한 사람이기에 없으면 안되기에 두는 것입니다. 사람 하나만 잘 들어와도 축복이 됩니다. 왕에게 충성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람 왕의 입장도 참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용장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리니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그러나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에게 은혜가 임했습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전쟁중에 잡아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계집종은 그 나아만의 아내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남편이 문둥병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입니다. 계집종이 우리 나라에 가면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그분을 만나면 고침을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집종이 있었으나 나아만의 아내는 계집종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을 전합니다. 나아만이 듣고 왕에게 고합니다. 왕이 듣고 보물을 내어주면서 다녀오라 명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아쉽다고 남의 말을 다 듣는 것이 아니다. 죽어도 안 듣는 사람은 안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나아만 장군의 아내가 듣고, 나아만 장군이 듣고, 왕이 듣고 실천에 옮겼더니 복을 받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계집종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을 의미 합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 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123:1-2)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집아이에게 말을 듣고 따라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방해를 받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말씀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은 복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한 번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복입니다.


이때는 칠년의 흉년이 끊날 때 쯤 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게 되었을 때 흉년 때 가장 고생한 사람은 주의 종들이었다. 당시 신학생도 한사람이 돈을 빌려 쓰고 값지 못하고 죽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둘과 아내가 있었는데 채주가 자식을 종으로 삶겠다고 하는 그러한 때입니다(왕하 4:1). 이렇게 된 이유는 여호람 왕이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아 흉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이때가 “유다 왕 여호사밧의 십팔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치리하니라”(왕하 3:1)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나아만은 보물을 많이 싫고 와서 병이 나면 엘리사에게 주려고 했었습니다. (왕하 5:5) 나아만이 말과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 집에 서니 엘리사가 종을 보내어 너는 가서 요단강 더러운 물에 들어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시켰습니다. (왕하 5:9-10) 화가난 나아만은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럴 때 종의 음성을 듣고 다시 물에 들어가 고치게 됩니다.(왕하 5:11-14)


몸을 고친 나아만은 너무 감사하여 강권하여 예물을 드리려 합니다. 그런데 예물을 거절 하였습니다. (왕하 5:15-16) 그곳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함께 있었습니다.(왕하 5:20) “사환” 은 엘리사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신학생이 많았지만 게하시를 대리고 다녔습니다. 다시 말해 종이요 후계자, 신복 이였기 때문입니다. 게아시가 보니 왜 안 받으시는지 고민을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이 어려울 때이기 때문입니다. 다 굶고 있는데 이거 받으면 다 좋을 터인데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 한 일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달란드는 무게를 이야기 합니다. 1달란트는 34킬로 나아만은 10달란트를 가지고 왔습니다.

게야시에 생각에 왜 선생님이 받지 않나? 그러나 엘리사는 엘리야의 10배의 능력을 받은 사람입니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게아시가 볼 때는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의 감사의 표현 이였고 먹을 것이 없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선생님의 생각을 같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무엇을 보고 생각 하느냐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나아만은 흙을 퍼가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생각하겠습니다.(왕하 5:17)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삶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람을 가면 왕을 섬기고 또 림몬의 신을 섬겨야 하니 양해해 주십시오 말합니다. 이정도 고침을 받았으면 하나님만을 믿음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을 받아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는 것입니다(왕하 5:18). 룻의 시누이 오르바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은혜를 받았는데 생각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신앙의 발전이 없습니다. 은혜 받는 것으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행동도 바뀌어야 합니다. 행동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죄를 끊지 못합니다. 은혜 한번 받은 것으로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한심하여 그냥 내 버려둡니다(왕하5:19).

은혜는 받는데 생각이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만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옛날로 돌아가고 맙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아 그렇습니다. 나아만은 림몬으로 돌아갔습니다. 게아시는 현장을 목격하고 나아만의 뒤쫓아 갑니다. 엘리사 선생님이 부탁하셨습니다. 은 두 달란트 좀 주십시오, 사환 게하시가 두명의 생도를 대리고 가서 이들이 필요하니 은 두 달란트 달라 하니 나아만은 반가왔습니다. 그 후 게아시는 생도에게 준것을 빼앗아 자신의 집으로 가져다 놓고 엘리사에게 같습니다.(왕하5:20-24).


엘리사는 게아시에게 어디 갔다 왔는냐? 짐작하고 물었습니다. 게아시는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그때부터 거짓말을 하기 시작합니다(왕하5:25). 선생님에게 스스로에게 동생 생도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무엇 때문에 거짓말을 했을까요? 돈에 관심무데도아 거짓말 하는 것입니다. 게아시는 항상 돈에 대한 욕심무데있었습니다. 왜 들키지 않았을까요?. 기회가 없었습니다. 찬스가 없었습다. 엘리사 뒤 엘리어 우두머리가 될 쯤에 죄를 짓습니다. 그 결과 게아시는 나아만의 문둥병무데들어 자손에게 까지 미치게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왕하 5:26).

우리는 모두 이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게아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게아시는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게아시입니다.


우리 또한 죄질 생각이 늘 있습니다. 마귀는 틈새 공격 경찰만 없으면 죄지으려고 합니다.

집사가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죄지을 틈새를 조이기 때문입니다. 사환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가 가장 좋습니다. 사환이라는 이름이 있을 때 죄를 덜 짓습니다. 예레미야 29장에 “칠십년 포로 생활해야 이스라엘로 돌아오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포로 되고 나서야 돌아오리라” 또한 “칠십년 동안 부르짖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죄을지으면 포로로 잡혀 가는구나 또한 포로로 잡혀가면 70년 동안 부르짖어야 하는구나 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버린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게 하시려고 이방인에게 포로가 되게 하신 것 입니다 (렘 29:10, 19).


2. 엄청난 죄를 지었어도 부르짖어 돌아오게 하신다.


죄를 지어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인에게는 이것이 재앙이 아니라 장래의 소망인 것입니다(렘29:11). 그러기에 더욱 부르짖어 기도를 합니다 (렘29:12-13). 죄지은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3. 문둥병의 의미가 있습니다.


게하시가 이러한 짓을 하고 나아만의 문둥병이 옮겨오고 가족까지 문둥병에 걸리게 됩니다.


왕하 5: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


a. 모세의 문둥병은 하나님의 권능을 의미합니다. (출4:6,8; 42:2; 욥42:2; 마19:26)

b. 미리암의 문둥병은 하나님의 징계을 의미합니다.

(민12:2,10,14; 민16:7,11; 고전10:10,11)

c 게하시의 문둥병은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왕하 5:27; 행 5:4; 눅12:47)

d, 웃시아의 문둥병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대하 26: 16,21; 민 18:1-7; 삼상13:13,14)


선생님 물질을 받지 않았을 때에는 선생님에게 하나님의 생각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속단하지 말아야합니다. 아내가 말할 때도 있고 자녀가 말할 때도 있고, 당나귀도 하나님이 써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을 알고도 나중에는 챙피하여 돌아설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은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이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잘못 된 것은 고치면 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늘의 일을 다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나아만이 림몬을 섬길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물질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에게 빛 진 자의 모습을 남게 하기 위해 그 물질을 받지 않아야 했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의 길을 가기가 쉽습니다. 늘 은혜로 사는 사람은 감사해서 삽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은 빛 진 자의 모습으로 다니기를 원하십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 었느니라”(롬 13:8) 댓가를 치루면 마음에 불만이 생기지만 은혜로 봉사하는 사람은 은혜로 인하여 행복이 넘칩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롬 4:4).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6-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대가를 치르려는 사람에게는 받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드리는 것만 받아야 합니다. 또 고마워 드렸으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게아시는 나아만을 쫒아가서 선생님이 보냈다고 돈 때문에 거짓말을 했습니다(왕하 5:20).신앙생활을 돈 받기위해서 따라다니면 마귀가 틈탑니다. 돈을 벌기위해 하나님을 믿으면 시험이 곧옵니다. 십일조 드리면 돈이 잘 벌린다는 생각하다가 잘 안되니 교회 떠난 사람을 보았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모든 것이 경영학입니다. 십자가 만들어 팔 생각까지 한다. 은혜 받아서 십일조 드린 것처럼 자신을 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라 심는 데로 거둡니다. 게아시는 돈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하고 선생님을 속이고 나아만에게 하나님을 팔아먹고 따르는 생도에게 거짓말을 하고 집안에 거짓말을 하여 집안을 망하게 합니다.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거짓말이 됩니다. 자신도 의지를 꺽지 못할 정도로 합니다. 자신의 거짓말쟁이라는 것 들키지 않으려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고 다니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사람은 그런 친구를 사귑니다. 게아시는 하나님을 쫓지 않고 돈을 쫓아가는 자입니다. 사탄을 불러 드립니다. 욕심 때문에 가롯 유다에게 마귀가 들어갔고(요13:2), 시기 때문에 사울에 마음에 악신이 힘있게 내렸고(삼상18:10), 사울의 딸 미갈이 예배 자를 업신여김으로 저주를 받았고(삼하6:16), 욥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가정과 몸에 미친것입니다(욥3:25). 성경말씀에 분노, 거짓말, 도적질, 더러운 말은 마귀가 틈을 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4:27).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 없어도, 안벌어도 충성합니다. 두랩돈 가지고도 예수님께 칭찬을 받습니다.


죄는 전염됩니다. 문둥병은 죄의 상징입니다. 아람왕은 나아만의 문둥병이 안옮았습니다. 나아만의 신하들도 옮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도 안 옮았습니다. 누가 옮았습니까? 똑같은 영, 거짓영을 가진 사람에게 옮는 것입니다(왕하 5:27). 죄는 전염이 됩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나쁜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옮겨오는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생각할 때 마귀가 온 것 입니다. 자신이 문둥병에 걸리고 가족 까지 문둥병에 걸립니다.


나아만은 가지고 온 물질은 사양해도 내려놓고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려고 가져온 헌금은 헌금 시간에 드리지 않으면 남은 것이 아닙니다. 드리려고 왔으면 꼭 드려야 합니다. 헌금은 이미 준비할 때 드린 것입니다. 고전 9:7절 “준비해서 드리는 것” 준비 해 왔는데 드리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작정했으면 드려야 합니다(시15:4, 잠20:25; 전 5:4-6).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가 땅을 드리는 것을 보고 나도 드리겠다 서원하였습니다. 자신의 땅이 팔려 돈이 너무 많다 생각이 드니 드릴 마음이 바뀌어 반만 드렸습니다. 그로 인하여 영혼이 떠나 버렸습니다(행5:1). 아브라함은 마음 바뀌기 전에 아들을 드렸습니다(창22:2-3). 드리려는 마음이 있을때 이미 우리 마음에서 떠난 것입니다. 이미 드려진 것입니다. 나아만이 왕을 섬기고 림몬을 섬겨야 한다는 말은 물질에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했으면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합니다. 드리려고 가져온 물질을 드리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드릴 마음이 없었기에 다시 가져가는 것입니다.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은 죄가 전념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쫓겨난 자는 이빨을 가는 것입니다. 말씀에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눅 13:2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 달려가야 합니다(히12:1).


길선주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끈을 가져 오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끈을 몸에 묽고 가려니 갈수 없지만 끊어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보혈을 지나야 하나님 품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죄를 씻지 않고 하나님에게 갈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성소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기쁨이 없습니다.


게아시는 순간에 온 것이 아닙니다. “너는 이때가 은을 받을 때냐” 지금은 나아만에게 받을 만한 때가 아니다. 나아만이 완전히 변화 대어 받아야 한다. 은혜로 드릴 때만 받아야 한다. 나아만은 댓가를 치렀기 때문에 은혜를 기억하겠다고 떠간 흙은 다 버렸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면 엘리사에게 찿아 오게 되어있습니다. 그 후 찾았다는 말이 없습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생각이 바뀌지 않아 버림은 받은 사람의 대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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