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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에 관하여

1. 서론


고 폴커너(Keith Falconeq)는 마치 대과학자들이 경이감과 존경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자연세계를 탐구 하듯이 사상계를 연구 했다고 한다. 신학도인 우리도 이런 정신을 가지고 아니 이것보다 더 진지한 자세로 선교를 연구 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서 31절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의 삶과 나사로의 삶은 매우 대조적이다. 부자는 많은 물질을 가지고 호화롭게 살았던 반면 나사로는 당장 먹을 한끼의 끼니도 없는 사람이었다. 이 비유에서 부자는 돈만 많이 가진 부자라기 보다 권세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그것은 ‘자색옷’과 ‘고운베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는 것이다. 사사기 8장에는 기드온이 미디안을 평정한후 전리품들을 모으는 내용이 있다. 이 전리품 중에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옷’(8:26)이란 말이 나온다. 즉 ‘자색 옷’은 당시 왕들이 입는 옷이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에스겔 16장에 ‘가는 베와 명주, 수 놓은 옷’을 언급함과 동시에 이러한 것들은 ‘왕후’의 지위와 관련있음을 의미한다. 즉 구약시대에 왕, 왕후등 권세자들이 입던 옷이 ‘자색옷’, ‘가는베옷’, ‘고운베옷’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시대 역시 마찬가지 였다고 생각 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로부터 재판을 받는 사건을 통해 분명해 진다. 빌라도가 바라바를 내어주고 예수님을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박도록 선고한다. 그 후 바로 군병들은 브라이도리온이라는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간다. 거기에서 군병들은 예수님께 ‘자색 옷’을 입히고 ‘면류관(가시)’을 씌운다.(막 15:17) 이것은 예수님을 희롱하는 장면이다. ‘자색 옷’을 입히고 ‘면류관’을 씌우는 것은 바로 ‘왕’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마가복음 15장 18절에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 할찌어다’라고 한 말에서 분명해진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에서의 예를 통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부자는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권세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자는 물질, 명예, 권세등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것은 다 가진자라고 할 만한 사람이다. 필자는 예수님께서 헤롯왕과 같은 사람(13:31-32)을 염두 해 두고 하신 말씀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의 삶과 나사로의 삶이 대조적이었는데 저 세상에서도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부자는 음부의 고통가운데 있는 반면 나사로는 천국 아브라함과 함께 있다. 필자가 눈여겨 보는 것은 부자의 호소다.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는 이 호소는 많은 것을 생각 나게 한다.

세상에서 가질 것은 다 가진 그 였지만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던 것이다. 이 한 가지가 가장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한편 나사로는 세상에서 권세, 돈, 명예, 건강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지만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된 한가지는 가졌던 것이다.


이 핵심적인 문제는 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다. ‘죄’문제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롬 3:23절에서 언급하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다. 바로 ‘죄’문제가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이고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다.(요일 3:8). 예수님은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 즉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건져 주시기 위해 오셨다.


본론


선교는 바로 이러한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전하는(전도)것을 의미한다. 전도없는 선교 즉 세상의 복지만을 추구하는 것은 선교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막 8:36, 눅 9:25) 라는 예수님읨 말씀이 있습니다.

또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명 해 진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상 왜곡된 선교관이 나타나 세계교회와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 자유주의 선교관이 있다.


이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나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있지 않다고 한다. 선교란 교회의 울타리를 헐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데 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선교의 본질이 정복운동에 있다기 보다는 대화와 상호 이해에 있으며, 교회 설립보다는 사회적, 정치적 및 경제적 구조악을 제거하여 이 땅 위에 평화를 가져오는데 있다고 정의를 내린다.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 이들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선교다라고 한다.


미국의 호프만(Hoffman)이라는 선교학자는 “기독교는 이제는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십자군 운동이나 정복운동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현대의 선교는 타종교와의 인도적인 대화를 통하여 서로 주고 받으며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1976년 11월 29일부터 30일까지 서울의 유스호텔에서 ⌈한국 N.C.C 자유선교대회⌋의 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흔히 생각해온 대로 선교란 교회의 설립, 세례, 개인영혼의 구원을 위주로 할 것인가? 역대 교회와 신학은 그렇게 생각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 신학자들이 재발견한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의 메시지는 그런 것도 아니다....선교가 개인구원과 교회 확장을 유일한 의무로 삼아서는 안된다. 땅위의 샬롬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 곧 선교다....제도적인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 속에서의 사회정의, 인간화를 위한 선교적 노력은 오늘 하나님께서 요청해 오시는 선교 명령이다”(필자가 선교지에 있었던 관계로 이후 오늘까지의 활동과 있을법한 여러 선언들을 찾아보지 못했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의 화해 그룹 등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선교를 하나님의 모든 행위라고 확대 해석했다. 결과적으로 Missio Dei는 선교의 주체와 목표를 애매하게 만들었으며 기독교 선교의 본질을 왜곡했다.


Missio Dei란 말은 원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학 분야에서 쓰이던 용어이다. 1928년 예루살렘 선교대회(IMC)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이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1952년 빌링겐(Willingen)대회에서부터 개화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개념은 네덜란드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새로운 선교신학적인 개념이며 20세기 후반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1960년대에 특징짓는 것은 신학 사상의 급격한 변천인데, 이때 문제의 핵심은 선교 개념의 혼란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1958년에 독일에서 출판된 죠지 비체돔(George F. Vicedom)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참신한 바람을 일으켰다. 이러한 선교개념은 18-19세기 선교개념과는 대조적이었다. 불신자들에 대한 복음전파라는 18-19세기 선교개념은 1910년 에딘버러 선교대회에서도 명맥을 유지하였다. 프라이탁(Freytag)은 “과거의 선교의 목적은 영혼 구원과 교회 설립이며, 세상에 대한 참여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함으로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낭만주의는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 유럽, 아메리카등에 있었던 문예사조이다.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를 이어가면서(대립) 동시에 인식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계몽주의의 영향하에 있었다. 고전주의는 절대왕정, 로마카톨릭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그리스 로마에서 규범하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것이었다. 계몽주의는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체재를 타파하고 바람직한 사회건설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잔혹함으로 인해 계몽주의의 한계가 더러났다. 이러한 정신적 폐허에 자신의 심성에 맞는 문화를 구축 하고자 한 것이 낭만주의 이다.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인해 낭만주의의 단꿈에서 벗어나게 했다.


세계제2차 대전 전의 미국 문학.- 자연주의 문학사상.


1900년은 D.드라이저의 《시스터 캐리》가 나온 해로서 이 해의 미국 인구는 7600만으로 기록되었다. 드라이저의 걸작 《아메리카의 비극》은 자연주의 문학의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인간에게 자유의사가 없다면 책임을 따질 수도 없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이다. 자연주의 문학사상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자연계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따르듯이 인간도 자연과학의 법칙을 따른다고 본다. 즉, 인간에게 자유의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본능과 환경에 따라 움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E. 졸라는 유전의 문제를 중시하였다. 이와 같은 인생관 ·세계관에 물든 작가들이 드라이저와 전후하여 작품들을 써냈는데, S.크레인의 《거리의 여인 매기》(1892), F.노리스의 《문어》(1901), J.런던의 《황야의 부르짖음》(1903) 등은 그 대표작으로 꼽힌다


한국의 경우 김동인의 ‘감자’란 단편소설이 한국 자연주의의 대표작이다.


30년대 경제 공황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미국 문학.

J.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51)은 전후 세대를 대변했다.

실존주의

세계 제 1, 2차 대전의 여파는 20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실존주의 시초는 니체이다. 실존주의가 두차례의 세계 대전 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되고 환영받게 된 이유는 첫째로 대전으로 인하여 생명의 존엄성이 파괴된데 있고, 둘째는 절대자 하나님의 불신이며, 셋째는 인간존재의 허무에서 오는 현실직시를 의미한다. 실존주의의 이론은 한마디로 현실체제에 대한 반항에서부터 스스로를 찾는 자유운동이라는 것이다. 까뮈가 쓴 ‘반항적 인간(L'Homme Revolte)’에서 역사의 세계를 ‘주인과 노예’라는 대립적 관계에서 말하면서 구속되고 혹사당한 인간은 도덕과 윤리라는 함 속에서 자유를 박털 당한 채 유폐되고 있다. 이를 과감히 박차고 나와서 인간 본연의 자유를 영유하기 위해서 반항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서구 거장은 불트만, 칼 바르트(1886-1968), 폴 틸리히(1886-1965)이다.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인 1928년에 예루살렘 선교대회가 열렸다. 예루살렘 선교대회에서는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관점을 달리했다. 더 이상 서구인들은 비기독교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질문할 수 없었고, 폐허의 서구 문명 속에서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붙들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즉 처음으로 서구는 자신들이 전부 기독교적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에딘버러에서 타 종교인들은 “지옥이 창안해 낸 걸작들이며 전적으로 잘못된 것의 완전한 표본들이므로, 기독교는 완전히 반대하고, 뿌리채 뽑아 버리고 파괴할 소명을 가진것”이라고 발언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세계대전으로 무너졌으며, 비기독교 세계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된 것이다.


1938년에 있었던 인도의 탐바란 선교대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근거한 “사회참여”의 시각이 더욱 발전되어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개인적 회심만으로는 안된다면서 ‘구조악’이란 개념을 들고 나왔다.


삼위일체 교리에다 선교의 근거를 결부시키려는 것이 1952년에 있었던 빌링겐 선교대회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양차대전이 끝난 후 세계는 1949년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냉전체제로 들어섰고, 한국전쟁과 동구권에서의 공산혁명으로 인한 세계의 긴장은 암스텔담대회에서 “책임적 사회”로서 자유와 정의를 긴밀히 연결시켰다. 세계교회협의회는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함께 비판하면서,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주장했고, 군비축소와 수소폭탄등의 위협에 대해 평화를 주장했다. 빌링겐 선교대회는 이러한 세계적인 분위기 속에서 ‘십자가를 걸머지는 선교(Missions under the Cross)를 주제로 했다.

빌링겐 대회의 “하나님 선교”를크게 3가지로 정리하자면 첫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파송의 선교’, 둘째는 모든 인간 삶의영역속으로 들어가는 ‘다차원적인 선교’요 셋째는 ‘종말론적 비전’이라고 볼 수 있다.

빌링겐의 ‘하나님의 선교’에서는 그 동안의 선교이해와 다른 전환이 일어나는데 다음의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로 빌링겐의 ‘하나님의 선교’는 주체가 ‘인간’에서 ‘삼위일체하나님’으로 전환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예루살렘에서 강하게 부각되던 ‘기독론 중심’의 선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로 전환한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학속에서 ‘파송’의 개념을 통해 선교를 이해한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속에서 성부가 성자를 파송하며, 다시 성자는 교회를 세상에 파송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도성은 곧 파송에 있으며, 이 사도성은 곧 선교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회의 파송의 영역은 이 세상의 모든 영역이며, 선교는 ‘다차원적인 선교’가 된다.


Missio Dei 신학의 발전에 비체돔(George F. Vicedom)과 호켄다이크(J. C. Hokendijk)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체돔은 선교의 동기를 ‘하나님 나라’로 두며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들의 선교의 의미를 해석한다. 그는 선교에 있어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다.

호켄다이크는 비체돔과 달리 교회중심의 선교관을 비판했는데 이는 멕시코 CWME 1961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호켄다이크에 있어서 선교의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수립 즉 샬롬이라고 한다. 이 샬롬은 ‘개인의 구원’이상의 것으로서 평화 공동체, 정의, 구원, 용서, 기쁨등이다. 호켄다이크의 전도는 이러한 희망의 실현이다.

호켄다이크는 메시아적 선교방법의 두가지 ‘아닌 것’을 지적한다. 첫째, 메시아적 선교는 ‘선전’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선전의 근본 성격은 희망의 결여이며 겸손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 선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을 강요해야 하고, 그 자신과 그 자신의 말에 호소해야 하며, 그러기에 자신을 복사하려고 애쓴다. 둘째, 전도에 대한 오해로서 ‘교회의 이식(교회설립)’이 굗 선교의 완수라는 사고를 지적한다.


전호진은 호켄다이크가 쓴 ‘The Call to Evangelism’글을 통해 호켄다이크에 대하여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발전 시키는데 공헌한 호켄다이크는 ‘선교신학의 세속화’를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교회론 중심의 선교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 왜곡이며, ‘선교’란 선포(kerygma), 교제(koinonia) 및 봉사(diakonia)이다. 그는 이 지상에서 메시아 왕국을 세우는 소위 평화(Shalom)의 선교를 부르짖는다. 호켄다이크가 말하는 선포, 교제, 봉사는 비록 성경적 용어이지만 그 의미는 성경적 개념과는 다르다. ‘선포’란 그 평화가 이미 도래하여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교제’란 이미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 있는 평화를 표현하는 것이요, 봉사란 평화를 의미하는 겸손한 봉사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호켄다이크는 선교 목적인 샬롬에 대하여 세가지 통전적 선교로 이해한다.


첫째, 선교의 수행으로서 이 샬롬은 ‘선포’된다. 이것은 설교(kerigma)로 나타난다. 여기서 말하는 선포에 대하여 이동주는 “‘평안이 도래했다’는 선포를 의미한다. 즉 우리가 속박에서 구원을 받고 자유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말한다. 그러나 복음전달이 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둘째, 샬롬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서 친교(koinonia)속에서 생동한다. 이동주는 호켄다이크의 이에 대한 개념을 “코이노니아는 평안이 참으로 현재화 되는 장소다. 평안이 현재적인 것임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코이노니아란 ‘교회 사이의 통합이나 친교가 아니라, 교회들이 연합하고 협력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방세계에서 증거하는 일’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셋째, 봉사(diakonia)속에서 실증된다고 본다.


이동주는 Missio Dei에 대한 개념에는 두가지 즉 세속주의 개념과 복음주의적 개념이 있다고 하면서 호켄다이크의 Missio Dei에 대한 개념이 세속주의 개념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세속주의란 교회가 그 전통적인 신앙을 떠나서 비복음적으로 되고 비종교적으로 되기를 추구하는 개념이다라고 했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진리를 찾고 그것을 성경에 끌어 붙이는 것이 그 방법론이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향해 가는 세상이 아니라, 세계평화가 이루어지는 낙관적인 종말관과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동일시 함으로써 세계선교와 복음화의 무의미성을 주장하는 우를 범했다. 호켄다이크는전통적인 교회가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개종운동을 거부한다. 호켄다이크의 세속주의적인 역사관과 교회관은 만인구원론과 현재적이고 내재적인 종말관을 바탕으로 발전되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고백과 감사와 찬양이 없는 세속적인 신학이 되어버린 것을 알 수 있다.



1961년 IMC가 WCC로 통합되었다. IMC는 WCC내의 CWME(세계선교 및 전도 분과)가 되었다. 1960대 대는 냉전체제 속에서도 2/3세계 국가들이 독립하여 신생국가들이 되고 민족주의와 탈식민지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급변의 시기였다.


뉴델리 WCC대회에서는 앞으로 선교에도 영향을 주는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중요한 두가지의 이슈가 부각되었다. 첫째, 신생국들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정체성에 관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델리에서는 “대화(dialogue)” 개념이 등장했는데, 이는 타종교와의 대화나 미래의 중대한 차원에 대한 대화는 아니었으마, 이 대화의 개념으로 1967년에 타종교와의 대화가 실현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고 함으로써 에큐메니칼 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의 개념이 등장했다. 지틀러의 논문을 통해 ‘대화’가 선교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용어가 되었다.


둘째,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결부된 자연과 생명파괴에 대한 인식이 본격적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이후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계속 발전하여, 산 안토니오 CWME(1989) 이후, 생태신학적인 관점에서 ‘창조세계의 보전’으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1980년 이후에 이르러 하나님이 선교(Missio Dei)의 지평은 다차원적인 선교의 영역으로, 타문화, 타종교권과 생태계의 창조질서의 보존으로까지 확장된다. 이 외에 뉴델리는 탐바람의 ‘구조악’ 개념의 사회참여적 맥락을 이으면서, 해방신학까지 수용하고 있었다.


1963년 멕시코 CWME는 ‘하나님의 선교와 우리의 과제’라는 주제로 빌링겐의 사회참여전통을 이으면서, 사회참여 구조에 적응하는 개교회의 구조변경과 평신도의 사회참여를 혁명적으로 내세우며 1968년의 웁살라의 성격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웁살라 세계교회협의회 대회는 유례없이 교회의 사회참여가 절정에 다다르게 되었다. 멕시코 CWME의 특징은 첫째, 빌링겐에서 개화되었던 ‘하나님의 선교’가 더욱 강조되면서, 구속사와 일반역사, 교회와 세상, 구속과 섭리를 이분화하는 전통적 신학적 사고에서 하나님의 선교차원에서 경계를 넘어 세상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둘째, 멕시코 대회는 ‘개교회의 선교적 구조’를 전적으로 인정함으로서 이 세계속에서의 교회가 세계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어떻게 자신의 구조와 삶을 변형시켜야 할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선교는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다운 삶의 충만함을 중시했다. 북미는 이것을 ‘인간화(Humanization)'라고 했고 서구는 샬롬이라고 표현했다.


1966년 제네바에서 모인 W.C.C총회는 ‘교회와 사회’라는 주제를 통해 ‘타자를 위한 교회’, ‘세상을 위한 교회’를 역설 하였는데, 이것은 본훼퍼 신학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1968년 웁살라에서 개최된 제 4차 WCC 총회 특징은 교회의 사회 참여가 가장 첨예화된 것이다. 인간화가 곧 선교였다. 이 총회는 선교의 목표를 ‘인간화’로 규정하였다.


“우리는 인간화를 선교의 목표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역사의 시대에서는 메시야적 목표의 의미를 다른 입장으로 전달하기 때문이다. 다른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목표가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으로 생각 하였다. ...선교의 목적은 기독교화로서,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통하여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으로 생각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중요한 문제는 참 인간의 문제이다. 따라서 선교 교회의 주요 관심은 선교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을 지배하는 것이다.”


웁살라 총회 그 이듬해인 1969년부터 Missions에서 s를 빼고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로 하였다. 여기서 W.C.C에서 Mission의 의미는 인간화이다.


1973년 방콕 CWME대회는 맑시즘, 해방신학등을 수용하여 적절한 폭력까지 정당화 하였고 선교의 개념을 ‘인간화’와 동일시 했다. 방콕 CWME는 ‘하나님의 선교’의 세상속으로의 참여를 발전시키면서, 특별히 역사에 대한 관심의 절정을 보여준다. 선교는 곧 인간화이며, 교회와 세상은 구별이 없어지는 듯 하다.

WCC는 구원의 의미를 사회정의, 경제적 정의, 정치적, 문화적 변혁을 통한 사회참여로 극대화시켰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대한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반응.

1960년대부터 복음주의자들은 Missio Dei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1966년 휘튼대회(Wheaton)에서 복음주의 계열은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우선”임을 확인한다.

1973년 시카고 선언은 복음전도는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 인간에 행하는 ‘전체적 구원(holistic Salvation)임을 강조한다.

1974년 로잔복음주의자들의 대회에서 개인구원에만 치중한 점을 반성하며, 사회참여에로 개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1989년 마닐라 제 2로잔 선교대회가 열렸다. 복음전도를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더 이상 이분화 하지 않으며, 복음주의 계열도 missio Dei를 대폭 수용하여, 삼위일체론적 복음이해와 종말론적 시야를 가지는 하나님 나라 사상이 지배적이 된다.


1975년 WCC 나이로비대회는 구원에 대한 포괄적 이해와 세계속에서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이룬다.



먼저 선교란 말의 어원적인면을 생각 해 볼 수 있다.


“선교”라는 말의 어원은 중세기의 프란시스카 수도원(Franciscan order)에서 부터였다. 그 수도원에 속한 수도사들을 선교사(missionary)라고 불렀는데 이 말은 라틴어 미토(mitto, 보내다)에서 왔다. 이것은 또 헬라어 ‘아포스톨로스’에서 기원하였다.


김연진은 “선교(mission)라는 말은 요한복음 20:21의 예수께서 말씀하신 두 헬라어 동사인 ‘아포스텔로’와 ‘펨포’에 기원을 두고 있다. 이 두 단어는 ‘보낸다’, ‘파송한다’란 의미가 있다.”고 했으며 계속해서 그는 “선교가 그리스도 교회의 보냄을 받아서 비 기독교적인 사회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라는 기본적 의도는 최근까지 견지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라고 했다.


선교란 자기의 문화권과 영역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하며(행 22:21), 선교사란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임하는자이다(행 6:4). 맥가브란(Donald A. McGavran)은 선교를 문화적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했다. 맥가브란은 “최고의 바꿀 수 없는 기독교 선교의 목적은 예수를 선포하는 것과 사람을 설득해서 그의 제자가 되게 하며 그이 교회의 책임있는 성원이 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오늘날에 있어서 선교의 의미는 타문화권에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함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온 선교의 개념은 그리스도가 선교의 주체이며, 교회를 통한 선교였다.

김명혁은 선교를 ‘찾아가는것’, ‘잃어버린자를 개종 시키고 구원하는 일’,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가르치는 일’이라고 하면서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영광’이라고 했다. 찾아 가는 것이란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르고, 기후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이것을 넘어 가는 것을 말한다. ‘구원’은 단순히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즉 예수님이 최초의 선교사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에 일치하는 명령을 제자들에게 하셨다.


존. R.W. 스톨(John R.W. Stolt)는 “선교”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세상에 보내셔서 시키시는 온갖 일을 표현한 포괄적 단어라고 했다. 그것은 전도와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 두가지는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간절히 섬기고 싶어하는 사랑의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은 “교회의 희생적인 봉사의 사명에 있어 전도는 최고의 사명이다. 세계복음화를 위해서는 전체교회가 전체적 복음을 가지고 전체세계를 향하여 나갈 것이 요청된다.”


존 스토트는 두가지 극단적 견해를 이야기 한다. 첫째 선교는 전도, 선교사, 전도자, 선교프로그램과 전도 프로그램을 동일 시 해 온 견해이다. 세계 선교 및 전도 위원회(The Commission on World Mission and Evangelism)까지도 선교와 전도를 구분 하지 않고 있다.


선교는 교회의 본질적 임무중 하나다. 복음서는 전부 선교명령으로 끝을 맺는다. 마 28:18-20, 막 16:15, 눅 24:



선교에 임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a. 긴급히 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선교의 긴급성을 촉구한다’. “오늘날 복음에 대한 엄청난 긴급상이 존재한다” 앤드류 머래이는 “교회의 선교사업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세계의 절박한 호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우리 주님의 명령의 참뜻과 절박성을 알아야 하고, 이 사업을 위해서 교회가 너무 준비가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껴야 한다.”


요9:4 때가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엡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b. 선교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선교사업은 교회의 한 부분이 아니라 교회의 생명선이다.”

“오늘날 인도의 신문에서 힌두교로부터 불교로의 대량개종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결론:


선교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생의 핵심적인 문제, 죄문제를 해결해 주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선교는 사랑의 행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 선교를 하게 하신다. 사랑의 행위로서 복음전파, 사랑의 행위로서 이웃을 돌아보는 일이 바로선교다.



Missio Dei 에 관한 참고문서.


김명혁외, ‘Missio Dei 이후의 선교신학동향’(신학사상 14집, 1976년)

김은수, ‘Missio Dei의 기원과 이해에 대한 비판적 고찰’(서울: 신학사상 94집, 1997)

데이비드 J. 보쉬(David J. Bosch), 「변화하고 있는 선교」 김병길.장훈태역(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0)

유상현, ‘바울의 제1차 선교여행’(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2)

이동주, ‘복은주의적 선교관과 Missio Dei' “성경과 신학, 9”

이미옥, ‘에큐메니칼 선교역사에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변화에 대한 연구’(서울: 장신, 2001, 석사학위논문)

이종일,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통해서 바라본 성육신 선교와 교회 공동체’,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1년 석사논문.

조은호,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의 비판과 복음주의 선교관 제시’(서울: 총신대학,1993년 M.Div논문.)

황순환, ‘ Missio Dei 와 미전도 종족 선교’ “신학과 문화 제 9집”(대전신학대학, 정행업박사 은퇴 기념 논문집, 2000)

휘체돔, 박근원역, “하나님의 선교”(서울: 기독교출판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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