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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

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

-회복의 신학적 입장에서의 접근-

"A Life-Saving Movement of Restoration of Worship"

(A Theological Approach of Restoration)

최고센목사

(Nyskc World Mission 대표)

I. 들어가는 말


개혁주의생명신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내고자 하는 하나의 실천운동이다. 이를 실제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개혁주의생명신학 선언문에서는 7대 실천운동(‘신앙운동’, ‘신학회복운동’, ‘영적생명운동’, ‘하나님 나라 운동’, ‘기도운동’, ‘성령운동’, ‘나눔운동’)을 제안하고 있다. 교단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고 교회의 담장을 넘어 개혁주의생명신학 실천운동은 범교단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이처럼 이 운동이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으며 확산되어 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생명을 교회가 회복해야 한다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마음이 성경적인 원리에 기초하여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본 학회의 주제인 “생명을 살리는 예배와 설교”는 참으로 시의적절하다고 보여 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회복은 바로 예배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Nyskc Movement도 1993년 미국 뉴욕에서부터 시작된 예배회복운동이다.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When the worship is restored, the church is risen, the nation is renewed, and the family is revived")는 Theme를 중심으로 Nyskc World Mission을 세워 활동하고 있다. 성경적 본질에 합당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전제위에 Nyskc운동은 일어나고 있다.


그 안에는 4개의 기관으로 나뉘어 좀 더 구체적인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전교인들이 예배회복훈련에 참여하는 Conference이다. Conference는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장년에 이르기까지 Family가 참여하는 예배회복을 위한 훈련 및 성회를 말한다. 또 하나의 기관은 Nyskc Learned Society이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는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다. 회복의 신학연구학회는 회복의 신학을 연구하는 곳으로 예배회복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신학적인 조망을 통해 일시적인 이벤트로서의 예배회복운동이 되지 않기 위하여 성경적이며 신학적인 이론의 체계를 세우고 연구하고 있다. 그 안에는 예배분과, 선교분과, 교회분과, 교육분과, 구제분과를 두고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Pennsylvania Werren에 Goshen Theological Seminary 교육기관을 세워 GTS Academy Program을 진행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예배의 문화적 접근을 위한 일환으로 Miclot과 문서선교를 위한 학술지 및 각종책자를 발행하며 예배회복운동을 하고 있다. 이런 예배회복운동과 관련하여 본 글에서는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된 이유와 동기, 이에 대한 성경적 근거, 그리고 역사적 신앙고백을 살펴보면서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에 대하여 조명해보고 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에 대하여 강조하고자 한다.


II. 펼치는 말


1. 예배와 회복


1) 성경에서 발견한 하나님께 받은 세 가지의 복


(1) 생명을 주셨다.

창조의 첫째 날부터 다섯째 날까지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여섯 째날 동물과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사람을 만든 것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의 본질은 “흙”이었으며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모양대로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 코에 생기를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


(2) 땅과 모든 식물과 생물을 주셨다.

생육과 번성은 곧 땅의 충만이 되었고, 땅을 정복하라 하셨으며 하늘과 땅과 바다에 사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다. 뿐만 아니라 “온 지면의 모든 채소나 열매 맺는 나무를 주시면서 너희 식물이 되리라”하셨다. 예컨대 땅에 사는 동물은 물론 생물 그리고 나무와 채소까지 다 복으로 주셨다(창1:26-29).


(3)하나님과의 교제를 주셨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2:1).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시고 일곱째 날 안식하셨다. 그리고는 “일곱째 날을 복을 주사 거룩하게 하셨다”(창2:2-3)고 하셨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니라”(벧전1:16; 레11:44-45; 고전1:2; 히12:14; 계15:3-4). 하나님은 이날을 사람과 더불어 교제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에 복을 주어 거룩하게 하였고 안식하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생명과 땅(모든 식물과 생물)과 하나님과 거룩함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기업을 주셨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하였기에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되었다.


2) 불순종하므로 세 가지 복의 상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그곳에 사람으로 살게 하시면서 다스리면서 지키게 하시면서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임의로 먹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시면서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셨다(창2:15-17).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7). 하와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3:3) 하였다. 이렇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다 상실되고 말았다.


(1) 영혼과 육신의 죽음(생명기업의 상실) (창3:22-24, 롬6:23, 고전15:45-50)

(2) 땅의 저주(토지기업의 상실) (창3:17-18,23)

(3)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 (교제기업의 상실) (창3:8-10 창3:22)이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면서 동물과 다르게 복을 주어 생령 곧 생명을 주셨고 또 땅에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거룩한 날을 주셨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죄가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었기에 이 모든 것들이 상실된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 받은 복과 그 복의 상실한 인간이 다시금 그 복을 회복하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회복운동을 하게 되었다.


3) 회복의 도구가 예배인 것을 발견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므로 죄가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었다(롬6:23).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게 되었다(창3:7).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리었다. 그들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낮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3:8).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책망하셨다(창3:9-13). 뱀은 저주를 받아 종신토록 배로 기어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게 되었다(창3:14-15). 그리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3:14-20)고 하셨다. 또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하고 벌거벗은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하여 나무 뒤에 숨어있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없는 저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21).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다.


(1) 가죽옷에는 생명을 바쳐 죄인들을 살리겠다는 예배가 있다. 죄 없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죽 옷이다.

(2) 가죽옷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곧 예배 선언이다. 먼저 죄 없는 짐승이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한다. 피를 흘려 죽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 가죽옷이다.


(3) 가죽 옷에는 생명을 살리는 메시지가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

이렇게 심각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대신 피를 흘려 죽는 것이다.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4) 가죽옷은 생명의 옷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죄 없는 짐승이 아담과 하와의 죄 대신에 피를 흘려 죽었다. 피 값으로 만들어진 가죽옷은 ‘생명의 옷’이며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분의 모형이다. 그 날 하나님께서 옛 뱀 곧 마귀를 향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을 통해 마귀를 진멸할 것을 선포하셨다.


(5) 가죽 옷에는 동물의 피 곧 생축을 드리는 예배가 담겨져 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서(창4:1-4) 아벨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 되었다. 히브리서는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해여 증거하심”이라고 하였다(히11:4). 아벨은 양의 새끼를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러므로 가죽 옷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회복의 의미가 있다.


(6) 영원한 가죽옷을 입히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셨다. 세례 요한의 고백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우리 죄 대신에 죽으러 오셨다. 아무 흠도 없고 죄는 알지도 못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 대신에 피 흘려 죽었다. 그 피로 나의 죄가 사해졌다. 예수님의 피로 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상징인 가죽옷을 입혀주셨다.


(7) 예배는 생명을 살리는 도구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시키신다.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피를 흘려 죽는 죽음을 통해 다시 사랑하실 것을 선포한 것이다. 자신의 생명보다 더 강한 사랑을 쏟으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 죄인들을 구원해 주셨으며 회복시켜 주셨다.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병든 육신이 치유되고 깨어진 교제가 회복된다.


4) 예배를 회복의 도구로 주셨다.

하나님이 죄인 된 사람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시지 않았다면 결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뭇잎으로나 혹은 나무 뒤에 숨어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음성조차도 두려워 떨어야 하는 사망의 삶이었다. 하지만 아무 죄도 없는 동물을 잡아 그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혀주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그 음성을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동물의 희생을 통하여 사람을 만나주시고 열납해 주시게 된다. 그러므로 제사 곧 예배는 회복의 도구로 주신 것이다. 아벨은 양의 새끼를 산 제물로 드리며 하나님께 나아갔을 때 제사는 열납 되었다. 아벨이 하나님께서 열납 하실만한 희생에 제물이 없이 나갔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가인처럼 열납되지 않는 제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회복의 도구임을 발견하였기 때문에 예배회복운동을 하게 된 것이다.


5) 회복은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의 접근이다

교회들이 많이 쓰는 표어 중에 하나는 초대교회시대로 돌아가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은 그 정신이나 영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안디옥교회에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이방인들이 저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하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목숨을 버릴지라도 믿음을 버릴 수 없다”라고 하는 신앙의 신조가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있다. 주님을 죽도록 사랑하였기 때문에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나는 주님의 것이로다”라고 신앙할 수 있었다. 얼마나 성령 충만한 모습이었는가 상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초대시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Reform)이라는 말을 하면서 과거의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로 접근하려고 하였다. 현대 종교개혁자 중 하나인 네덜란드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가 성장할 당시인 19세기 중엽에는 16, 17세기에 걸쳐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이 세웠던 6개의 대학 중 세 개가 없어졌고, 그 나머지 세 학교마저도 개혁신학이 아닌 자유신학을 따랐을 때였다. 그 시대 네덜란드의 교회의 모습은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신앙의 근본은 성경에 있다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칼빈((Martin Luther & Jean Calvin)의 주장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지 과거지향적인 신앙을 강조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회복이라는 것은 신학적으로는 “본질로의 접근”이라는 말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신앙은 시대의 상황과 현상 세대의 문화와 신앙의 현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육신되어”(요1:1),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심”(창1)등 성경을 중심으로 Protestant Reformation을 일으켰던 것처럼 Sola Scriptura(오직 성경)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Sola Gratia(오직 은혜) Sola Fide(오직 믿음) Soli Deo Gloria(오직 주만 영광 받으심)의 다섯 가지에서 볼 수 있듯이 “회복은 본질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이 곧 개혁주의생명신학의 5대 솔라(Sola)이기도 하다.


6) 아모스 9장11-15절의 말씀에서 회복을 보았다.

아모스서의 특징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의 삶을 짓밟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있으나 예언자적인 말씀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에 대한 심판과 경고가 나타나 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그리고 주변국가들의 행위와 하나님에 대한 거짓된 경외와 경배등 많은 주제들이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택한 선민들에게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라 하시면서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9:11)라고 하였다.


여기서 다윗의 천막은 곧 성막인데 다윗이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 입성한 뒤 제일 먼저 한 일은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 천막을 치고는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하게 하였으며, 또 “레위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궤 앞에서 섬기며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하였다”(대상 16:4).


사울 왕 때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겼고 또한 형식적이고 거짓된 예배를 드려왔던 이스라엘 가운데 이제 예배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천막에서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제사의 향기가 예루살렘에 넘쳤고 레위사람들로 세워진 찬양대의 찬양과 경배가 반차를 따라 계속되었다.


하지만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이와 같이 다윗 때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회복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지금 안타깝게도 다윗의 천막 곧 성막이 무너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성막 성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때로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암9:11-15; 행15:15-18; 사61:4).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암9:11). 그래서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모스에만 국한 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주는 예배에 대한 메시지다.


16세기 종교개혁이후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신앙으로 화려한 나라가 건설되고 세계적인 선교국가로 발돋움 하던 유럽의 국가들 특히 독일이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스웨덴, 네덜란드, 영국이라는 나라들은 아쉽게도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은 말로만 있을 뿐 실제 교회를 출석하고 교회로 모여 하나님에게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사라졌다. 예컨대 독일이 2차 대전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헨, 뒤셀도르프, 헤이델베르그 등 이런 지역들은 교회 십자가 보다 더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고, 마을에 가장 좋은 자리는 교회당에 십자가가 세워졌지만 지금은 그 곳들이 모슬렘과 힌두 그리고 각종 연회가 베풀어지는 리셉션 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나왔던 네덜란드는 교회의 건물은 있지만 그 안에 모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태이고 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을 세우고 개혁주의 신앙을 담고 있는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신조(Creed)요 신앙고백을 만들어냈던 영국은 복음화율이 불과 2%라고 하는 통계를 생각하면 진정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7) 예배회복은 곧 기업의 회복이다

예배는 회복을 위한 도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배회복을 통해서 회복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기업의 회복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기업이라는 말은 우리말로 유산, 유업, 상속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어로는 “inheritance”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에게 복을 주셨고, 그 복이 그 다음 세대에 상속되는 것을 기업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 곧 기업이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고 그 상실된 기업을 회복하게 될 때 예배가 그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복을 알게 되었으면 상실한 복도 알게 된다. 예배가 그 상실한 복을 회복시킬 수 있는 도구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And God blessed them)은 자손대대로 이어지는 기업(Inheritance)이 되었다. 영원히 소유(everlasting possession)할 수 있는 기업이었는데(창17:8), 그 하나가 생명기업이며 다음은 토지기업이며 하나는 교제기업이다. 물론 이것은 창조의 순서에 따라 여섯째 날에 사람이 지음을 받고 생령 곧 생명을 얻었고, 그리고 땅과 땅에 모든 것을 충만하고 다스리는 관리권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칠일 째 안식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복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기업이 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얻게 되었고,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생명기업을 상실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음성을 두려워하면서 교제기업이 상실되었다. 결국에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다. 또한 에덴동산에서 쫒겨나 얼굴에 땀을 흘리며 수고해야 살게 됨으로 토지기업을 상실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상실한 기업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동물을 희생의 제물로 드리며 예배하도록 하셨다.



8) 예배는 여러 가지 회복의 요소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예배는 주일예배 혹은 교회공동체에서 드려지는 예배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교회가 오랫동안 정확한 예배에 대한 정의를 목회학적으로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예배와 기도 그리고 예배와 찬양처럼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배는 신앙의 종합이다(the synthesis of religious worship). 예컨대 예배 안에 들어 있는 요소를 보면 기도가 있다. 그리고 말씀이 있으며 찬양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예배드리는 날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약속이다. 예배를 드리는 날을 구약에서는 ‘안식’이라고 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교제 다시 말하면 내적인 것으로 말하면 성령의 교통을 의미한다.


또한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듯 예배에는 예물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갈 수 없다는 말씀은 율법이라고 말하기 전에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물질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희생의 제물은 예배자의 준비된 마음이며 동시에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에게 향한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며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모여 하나를 이룬 것이기 때문에 예배는 신앙의 모든 것을 모은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기도를 영혼의 호흡(New Life)이라고 말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고 한다. 출애굽 광야 생활하는 백성들이 하늘로서 오는 떡 만나를 먹음으로 광야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예수님이 생명의 양식이자 영혼의 양식(Yielding for Manna)으로서의 생명의 떡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그러므로 생명의 양식을 받아먹는 사람들은 자기를 구원하신 여호와를 찬양하고 전파(Salvation One by One)하는 것으로 구원받은 백성의 삶을 살아야했다.


또한 하나님께 나가 예배하는 날을 지킨다는 주일성수는 어쩌면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개신교의 마지막 보루(fortification)다. 왜냐하면 이 날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이며 성령과의 교통(Keeping for Lord's Day)하는 날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임재 속에서 만나 교제(Communion)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Complete Offering) 구약에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1년 동안 흠 없게 기른 짐승을 드리며 번제가 되었던 화목제나 속죄제나 속건제로 드리는 자세일 것이다.


9) 예수님은 구원자시자 회복자로 오셨다

성경은 예수님을 구원자(Redeemer)로 말씀하신다. 또한 성경은 예수님을 치료자(I am the LORD, who heals you)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성경은 예수님을 회복자(Lord, wilt thou at this time restore again the kingdom to Israel?)로 말씀하신다.


구속사(History of Redemption, Heilsgeschichte)란 하나님께서 주권적 의지와 계획에 따라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구원하실 일을 계시하시고 교회운동을 통하여 성취해 가시는 역사적 진행과정을 말하듯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어 죄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고 부활 승천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여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세상을 구원받게 하려 하심이라고“하셨다(요3:17). 또한”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컨대 예수님은 역사의 주인이며 주관자 그리고 운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라도 통달케 하실 수 있는 분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메시아로 오셨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롬10:13; 요5:24, 10:28-29; 요일5:12-13). 구원은 영원한 구원(히5:9)으로서 한번 구원받음으로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누구도 우리를 주님의 손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또한 예수께서는 회복자로 오신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고 눈먼 자와 앉은뱅이와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마귀 들린 자를 회복시키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눅5:31; 마9:12; 막2:17)라고 하시면서 회복자임을 밝혔다.

10) 개혁주의 신앙고백서의 개혁(Reform)과 회복(Restoration)

개혁교회의 신조는 장로교회의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개혁교회의 신조인 벨직신앙고백, 도르트신경,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 개혁신앙 표준문서들이 회복을 위한 지침을 우리에 주고 있다. 따라서 각 교단에 새신자를 위한 교육이나 혹은 신앙생활의 기초 등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교회에 처음으로 출석한 초신자를 상대로 가르치는 교리에서 기도와 말씀, 전도, 성수주일,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 등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초가 된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 의미는 영혼의 호흡(new life)과 양식(Yielding for manna) 성도의 열매(Salvation One by One)와 헌신(Communion)과 봉사로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주일성수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예배와 안식일에 관하여) 7항과 8항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인 주일과 주일성수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 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출20:8,10-11; 사56:2, 4,6-7 참조).

이 안식일이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 날로 바뀌었다(행20:7; 창2:2-3; 출31:17; 고전16:1-2 참조). 이 날을 주일(主日, The Lord's Day)이라고 하며(계1:10), 이 날은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 지켜져야 한다(마5:17-18; 출20:8,10 참조).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을 위하여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나니, (1) 그들은 마음을 준비하고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데 지장이 없도록 일반적 사업을 미리 정돈해 놓고, (2) 세상 사업과 오락에 관한 말과 생각과 행위를 일체 중단하고 안식할 것이며(사58:13; 출 16:23, 25-26, 29-30, 20:8, 31:15-17; 느13:15-19, 21-22 참조), (3) 그날의 모든 시간은 공예배와 사적 예배를 위하여, 또는 부득이한 책임과 자비 시행을 위하여 사용해야 된다(마12:11 참조).

주일성수의 중요성은 첫째, 예배의 중요성과 더불어 하나님과의 교제(Communion)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주일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교제(Fellowship)하는 거룩한 날로서 예배드리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위하여 구별된 날이기도 할 뿐 아니라 성령과 교통하는 날로 지켜야 한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 이전에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할 신앙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중에 115-121문까지 제4계명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다.

제115문: 제4계명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제116문: 제4계명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제4계명이 모든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정하신 날 곧 이레 가운데 온전히 하루를 하나님께 거룩하게 지키는 일입니다. 그 날은 창세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까지는 제 칠일이었으나, 그 이후로는 매주 첫째 날이 되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며, 신약성경에서 ‘주의 날’(주일)이라 불리우고 있습니다.

제117문: 안식일 또는 주일을 어떻게 거룩히 지켜야 합니까?

답: 안식일 또는 주일을 성수하려면 통상적으로 죄악된 일들뿐만 아니라, 평일에는 타당한 세속적인 직장 일이나 오락을 이 날에는 행치 아니하고 온 종일 거룩하게 쉴 것이며(부득이한 일과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일이 아니면), 공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모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준비해야 하고, 미리미리 부지런히 절제하고 조절하며, 우리의 세속적인 일들을 적절히 정리하고 처리함으로써 그 날의 의무들을 위해 우리가 더욱 자유롭고 여유가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개혁신학적 입장에서 볼 때 주일성수 뿐 아니라 기도와 말씀, 전도와 십일조 등은 개혁된 신앙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교회에게 있어서 언제나 회복되어야 할 마땅한 이슈가 된다. 예배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면 나라와 가정이 무너진다고 할 때 성경적 의미를 보더라도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일상에서 따르고 행하여야 할 신앙고백과 더불어 생활에서 이와 같은 고백적 행위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열 가지의 이유와 동기로 예배회복운동을 하는데, 이 운동은 개혁주의생명신학에서 본 생명을 살리는 예배와 매우 일맥상통한 것이다.

2.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

하나님은 사람을 예배하는 존재로 만드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세움을 입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배란 사랑하는 것이다. 성경 구약과 신약을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 없다. 그래서 성경의 시작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31)하시며 피조하신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자 하신 것처럼,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영광과 존귀를 돌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참된 예배의 시작은 예배의 대상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조금도 변치 아니하시며 영원 진리가 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예컨대 참된 예배와 거짓된 예배를 정의 할 때 예배의 대상과 예배자의 자세로 참된 예배와 거짓예배로 나눌 수 있다. 성경은 이와 같은 두 가지의 예배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고, 그 예배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과 멸망의 백성도 함께 나뉘게 된다. 신구약에서 참된 예배의 모형을 찾아 비교한다면 그 결과는 다른지 않다. 물론 나타난 행위로서는 다르겠지만 그 영적인 의미는 같다. 예수 자신이 “내가 그노라”(요4:24)한 것처럼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요4:25)라고 했다.


1) 참된 예배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예배에 관한 예수의 말씀은 참된 예배의 근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된 예배의 모형은 크게 신약에서는 수가성의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정의한 예배를 중심으로, 구약의 아벨의 제사와 신약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신 무덤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1) 하나님은 영이시다.

참된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영이시다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갖고 있는 "신적인 특성"을 말하는데 하나님의 고유하신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무한, 영원, 불변하시므로 한계나 제약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며 영원 자존하시고 시작도 없도 끝도 없으시다(왕상8:27; 시139:7-10; 출3:14; 롬11:33; 창17:1).

성경은 그 영이신 하나님과 대비하여 유한한 사람들을 가리켜 ‘육적인 존재’라고 한다(딤전1:17, 6:15-16).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죄인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무형적인 존재며(요1:8; 골1:15), 하나님은 영이시니 비물질적 존재이므로 물질로 사람이 만든 우상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질로 형상을 만들거나 섬기는 것을 금하셨다(출20:4-5).

또한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의미는 만물과 인생에게 ‘생명과 힘’의 근원자가 되심을 보여주는 말이다(창2:7; 겔37:10). 그러므로 사람이 영이신 하나님과 하나로 연합하려면 육으로 난 육으로는 연합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살 수 있게 거듭 나야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비로소 영이신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수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이런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2) 거듭남의 예배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 여인이 가지고 있는 예배의 개념은 구약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 곧 예루살렘 성전과 조상들이 산에서 드렸던 단 제사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1,23)라고 했다.

이제까지는 정해진 장소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제물을 가지고, 세워진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렸지만 지금부터는 ‘영과 진리’, 곧 하나님이 보내신 흠 없는 어린양(요1:29)이며 대제사장(히5:10)이며 하나님의 성전(요 2:21)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게 됨을 선언한 것이다. 신약시대의 모든 예배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불가능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와 같은 예배가 선언된 이상 공동의 예배에 있어서 약속된 장소와 시간과 절차와 질서가 반드시 존재할지라도 율법으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하였다. 따라서 교회에서 약속된 예배의 절차와 질서를 형식과 법에 얽매이는 것으로 오해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더욱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도바울은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는 행위를 거칠게 다스렸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라고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나 혹은 사회에서는 항상 예배하는 자세를 중심으로 살아가야 한다.

(3) 의로운 자의 예배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11:4).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롬10:17).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전해온 믿음이다. 아담으로부터 전수 받은 믿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계셨고, 사람이 있었고, 말씀이 있었고, 죄지은 후에 희생 제사가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인류 최초의 불순종에서 죄로 사망으로 만들어진 사건을 통해서 어떻게 구원받게 되었나를 분명히 전해 주었을 것이다. 죄를 범하고 하나님이 두려워 낯을 피하여 나무 사이에 숨어있을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들의 죄를 물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벌거벗은 몸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창3:9, 21).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역사의 첫 기록이다. 가죽옷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이다. 아벨은 아담으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아벨의 믿음은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다.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를 희생제물로 드렸는데 그것은 예배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 희생제물보다 희생제물을 드리는 예배자를 먼저 보신다. 하나님의 눈은 사람이 제물을 드릴 때에, 제물에 먼저 눈길이 것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사람의 마음에 먼저 눈길이 가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shaah)하셨다. 아벨의 제사는 'A More Excellent Sacrifice'이다. 더욱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 해도 늘 부족할 뿐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고 했다. 우리가 더욱 힘쓰고 최선을 다 해도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우리의 최선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곧, 우리의 몸을 드리라는 것이다.

(4) 예배자의 자세

예배는 형식보다는 “영과 진리”로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가 그들의 삶이자 생활이다. 이 말은 예배는 곧 사랑의 표현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예배하는 것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예루살렘에서 예배 자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몸을 정결케 하고 악한 행실을 버리고 악에서 손을 떼라고 했다(사1:15-1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 고아, 과부들을 비롯한 내 이웃들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단순히 휴머니즘적인 입장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많은 여인들 그리고 무리들 가운데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한 여인이자 예수의 사역을 도운 여인이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들린 채 고향을 떠나 살았기에 그녀의 생활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눅8:12). 많은 괴로움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마리아를 방황의 길로 몰아넣던 일곱 귀신이 예수의 능력으로 떠나가고 깨끗이 고침을 받아 순수하고 온전한 신앙생활이 시작된다(눅8;3).

예수님을 만난 이후 마리아는 늘 주님의 곁을 따르며 자신의 소유를 모두 바쳐 그 사역을 돕는다. 주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충성은 누구보다 컸다. 예수님께 대한 마리아의 일관된 사랑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마저 모두 뿔뿔이 흩어져 도망한 위기의 상황에서 마리아는 아무 두려움 없이 죽음의 자리에 동참한다(마27:55-56).

예수님이 있는 곳이라면 무덤이라도 따라갈 만큼의 사랑이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에 예수의 무덤을 찾아가게 하였다(마28:1). 그 후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고하고(요20:2), 무덤 밖에서 울고 떠나지 않고 있던 중 무덤에 있던 천사와 대화를 한다(요20:11). 그리고는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게 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류 가운데서 처음 만난 여인이 되었다(요20:14-17). 그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첫 증인이 되어 증거하였다(요20:18).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으며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구원의 능력을 입게 되었다. 그의 인생은 회복이 되었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독생자로 오신 예수님이 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이다. 그래서 그녀는 “안식 후” “첫 날” “새벽미명”에 무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 예배를 회복한 여인이 되었다. The first day of the week cometh Mary Magdalene early, when it was yet dark, unto the sepulchre, and seeth the stone taken away from the sepulchre(John20:1).

예배가 회복된 사람들이 특징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다는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니 이 때라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고 한 것처럼, 부활의 예수가 그녀를 찾아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배자의 자세에 대한 롤모델이다. 예배하는 자가 이와 같은 자세를 갖고 예배에 임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반드시 체험하고 성령의 충만함이 임할 것이다.

2) 거짓된 예배

거짓된 예배의 모형은 구약의 가인의 제사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의 제사, 그리고 신약에서는 가롯유다의 제자생활을 통해서 볼 수 있다. 예배를 향한 자신의 태도가 문제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회복의 통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은 이 예배, 즉 제사에서 꽃을 피웠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때 “광야 사흘 길을 가서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한다”는 목적으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광야의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집 곧 성막을 세워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시작하고 그 뒤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단을 세워 제사드리고 정복 시대를 거쳐 예루살렘에 솔로몬 성전을 건축한 이후에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제사장이 입을 옷, 성전에서 사용할 기구, 제사 드리는 절기와 방법 등등, 제사에 관한 수많은 규정이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들의 나라나 왕권이나 혹은 가정들을 보면 예배가 왕성할 때는 나라가 부강한 것은 물론 백성들에게 평화와 기쁨이 넘쳤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할 때는 나라가 어려움에 빠졌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으나 그 제사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예배인가 아니면 거짓된 예배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바뀌었음을 아모스나 말라기 선지자들은 지적하고 있다(암5:21; 말1-4장).

(1)형식적인 제사

가인의 제사에서의 문제점을 볼 때 가장 우선되는 것이 예배의 자세였다. 그가 제물을 들고 나갈 때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는가를 보면 악한 마음을 가지고 준비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창3;6-7)하였다. 그가 제물을 준비하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그 시작되는 순간부터 악했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므로 가인이 농산물을 제물로 삼고 제사를 드리던 혹은 동물을 희생의 제물로 제사를 드렸던 상관없이 그는 제사가 열납될 수 없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다 같은 제사요 제물에 차이가 있을 뿐, 그는 농사짓는 사람이니 당연히 그에게 있는 것 수확한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의 제사는 거짓되었기에 받지 않으신 것이다.

“소돔 관원들아, 야훼의 말씀을 들어보아라. 고모라 백성들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여 보아라.”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 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사1:10-17). 심지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행위조차 귀찮다고 했다. 제사행위자체를 거부했다. 제사의 방법이 틀려서 그렇게도 하였지만 그보다 먼저 제사를 드리는 백성들의 태도와 자세가 문제였다.

문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태도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하나님 앞에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사야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과 불의와 사악함,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고 배반한 것이 문제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저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모범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안식일, 매월 초하루, 유월절, 초막절, 칠칠절 등등, 많은 종교절기를 그들은 성실하게 지켰으며 제사를 드릴 때마다 희생의 제물까지 드리고 있었지만 다 형식적으로 행한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구원받을 수 없다. 또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세상의 정의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리석다. 하나님을 믿을 때 의에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비로소 구원을 얻는다. 이렇게 믿음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자 원칙이다. 신앙의 편의주의가 되면 사람의 업적이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으며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자동적으로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참된 믿음이 될 수 없고 사람의 편의를 위해 믿음을 이용하는 것이다.

제사의 행위로만 종교행위는 완성될 수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들은 삶에서 말씀을 제거한 것이다.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릴 때 하나님이 찾으시게 되는데 진리를 제거하고 제사적 행위만을 할 때 그들의 예배는 형식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형식적인 예배의 특징은 사람의 열심이 지나치게 비중을 차지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거짓예배라 하고 싫어한다고 하셨다. 너희가 기도해도 내가 듣기를 거부하겠다고 까지 했다.

(2)거짓된 예배자

Judas Iscariot는 어떠하였는가? 그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였던가? 처음 그가 부름받을 때부터 주님을 사랑해서 따라나선 것같이 보이지만, 결과를 보면 그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시몬의 아들이며(요6:7), 주께서 택한 열두 사도 중에 한 사람이며(막3:14; 요6:70) 돈궤를 맡은 자로서 부정을 행하였고, 베다니에서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지극히 비싸고 순수한 나드 향유를 마리아가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가롯유다는 이 향유가 삼백 데나리온 나가는 것임을 알고 이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서 주지 아니 하였으냐 하고 비난했다(요12:4). 그러나 그도 제자들 사이에서 귀신을 쫒고 병도 고친 일이 있다(마10:1; 눅9:1). 그리고 지금까지 예수를 따랐던 것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었으나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예수가 로마에서 유대를 구원하지 않음을 보고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은 30개에 팔기로 하고 기회를 엿보다가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빠져 나가 팔아버렸다.

이것을 알았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을 때가 다가오는 것을 알고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했다. 이미 마귀는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이다. 과연 가롯유다는 예수를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자기의 이상과 목표를 위해서였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아니었다. “누구든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그 수단으로 찿는 자는 하나님을 발견 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토저 박사는 말한다. 유다는 제자들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였을 때나 예수께서 기적과 이적과 표적을 나타내고 각색 병든자와 죽은 자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자를 보게 할 때 다 현장에서 목격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거짓된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다다르게 되었다(마27:3-5; 시109:8; 행 1:18-20).

(3)사람이 만든 예배

북이스라엘의 초대왕 Jeroboam은 에브라임 족속 스레다 사람 즈밧의 아들로 모친은 스루아이다(왕상1:26).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할 때에 역사 감독이 되었다가 그는 젊었을 때 솔로몬 왕에게 용맹과 부지런함을 인정받아 요셉족속의 노동 감독으로 임명받았다. 하지만 솔로몬의 가혹한 정치를 보고는 괴로워할 때 실로의 사람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다. 아히야의 예언이 "네가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되리라" 하였다. 솔로몬이 이것을 알고 죽이려하므로 애굽으로 도망하여 시삭 왕에게 위탁하고 있었다(왕상11:27-40). 솔로몬이 죽은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기회를 차서 북방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왕상12:20).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은 장차 자기를 배반할 염려가 있다하여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하나는 북방 단에 두고 하나는 남방 벧엘에 두고 그것을 섬기게 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때 여로보암 왕은 예배의 대상을 금송아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7월 14일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배하는 날이었는데 그는 날짜를 바꾸어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하여 예배하게 하였으며 북이스라엘은 제사장이 없었으므로 일반 사람을 제사장으로 세워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것은 사람이 만든 예배였고 인간의 종교이자 거짓예배의 전형적인 모형이다. 가인의 제사가 결국 이스라엘의 악한 마음을 쫓아 여로보암의 종교로 이어진 것이며 이것은 인간의 화려한 종교로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거짓된 제사는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가 될뿐 아니라 백성들을 죄에 빠뜨리는 행동이 되었고(왕상12:25-33)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죽고난 후 제위 22년에 그도 죽었으며 아히야 선지자 말대로 왕조의 멸망했다(왕상14:17-20, 15:25-28).

III. 나가는 말: 생명을 살리는 예배회복운동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자 구원자이며 회복자요 위로자이다(Redeemer and Savior, and the Recovery is Comforter). 이처럼 예수님에게 붙여진 이름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온 예수님은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끊임없이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하였다. “I am come that they might have life, and that they might have it more abundantly”(John10:10). 생명을 살리는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이다.

1. 생명되시는 예수님

하나님이 사람에게 생기를 주어 생령이 되었으니 사람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명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창1:27, 2:7). 이 사람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흙과 함께 살고 있고 분리될 수도 있다(민 16:22, 27:16; 마6:25, 10:28-33, 39; 요19:30). 모든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은 사람 생명을 사랑한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 상처입은 생명, 죽어가는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릴 수 있다(사42:3; 요11:25-44). 하나님의 그 사랑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셨다(요3:16-17; 딤전2:4). 하나님사랑이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그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을,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후,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성령부음을 통해 계속 볼 수 있게 하셨다(마16:17-18; 요14:21).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구원자요 질병과 죽음의 고통에 있는 생명을 치유하시고 살리는 회복자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요8:12; 마5:14-16). 생명의 빛으로(마25:31-46)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고 있다(요8:12, 15:16, 사42:3; 막1:16-18, 29-31).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을 너무 사랑하셔서 사람의 아픔과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고 함께 아파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있고, 따라서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며 그 생명으로 질병을 치유하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는 능력이 된다(요1:3-4, 3:16-17, 11:36, 14:12-14).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된 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세상에서 소외된 세리와 창녀, 고아와 과부를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섬겼으며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들을 보호하시고 돌보셨으며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사랑과 평화와 생명으로 회복시켰다.

2. 생명을 살리는 예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으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생명과 교제와 땅의 것을 다 상실하게 되었으므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입히시므로 그들은 살게 되었다. 그로부터 그들은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교제뿐 아니라 생명을 얻게 됨을 알게 되었고 땅에서의 형통함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동물 희생의 제사는 아벨에게 나타났으며 그리고 셋과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으로 이어졌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에녹에 의해 므드셀라, 라멕이 노아를 낳았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성경은 말한다(창5-6).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물의 심판이 끝난 뒤 그는 방주에서 나오자 바로 하나님 앞에 단을 쌓고는 희생의 제사를 드렸다(창8:20-21).

노아 이후 셈으로 이어졌고 아브라함까지 계속되는 가계 속에서 하나님께 희생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왔고 이삭과 야곱 등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제사는 계속되었다. 성경 창세기 뿐 아니라 출애굽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시고 광야로 나오게 하신 이유는 “사흘 길을 나가 하나님께 희생에 제사를 드리려 함”으로 말씀하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사를 어떻게 드리냐’가 나와 있으며, 민수기는 하나님을 예배하면 살고 하나님 외 다른 신을 섬기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신명기는 광야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곧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다.

여호수아서 사사기를 보더라도 하나님 앞에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부흥하고 살며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멸망함을 보여준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께 희생의 제물로 단을 쌓고 제사하고 성막에서 희생의 제사를 드리고 왕권시대에 성전중심의 희생 제사를 통해서 백성들의 생명을 하나님이 보장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생명 되시는 예수님이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은혜로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살리는 작업이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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