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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흙 그리고 죽음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 대칭 명제인 죽음을 말해야 할 듯하다. 우리에게 죽음은 무엇인가? 어렵고 힘든 신학과 이론의 말놀이로 우리의 정신을 산란케 할 이유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창세기 2:7절에서 잘 타나내주고 계시다


나 개인에게 있어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군대시절 보았던 총기사건으로 숨진 병사다. 그 180센티의 거구가 재래식 화장장에서 태워지고 재로 된, 그러나 아직도 몸의 형체를 가진 그 몸둥이, 그 덩어리를 끌어 모아 절구로 빻아 분말로 만드는, 즉 흙으로 만드는 그 그림, 그것이 내게는 죽음이다. 다시 말해 흙이 죽음이다.


흙에 대한 성경의 말씀을 살펴보자. 창세기 기록에는 창조가 이뤄지고,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타락을 겪는다. '타락'이 뭐냐,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관해서는 관심을 접어두자. 다만 유혹과 타락 이후에 인간은 심판-저주를 받았다. 즉, '하나님의 심판 아래' 서 있게 된다(창 3 : 9-19).


그 심판의 내용은 남자는 이마에 땀을 흘리고, 수고해야 먹고 살게 된 것이요, 여자는 해산의 수고를 갖게 된 것이다.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의 잉태와 탄생이다. 또 여인이 치르는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인가. 그것 역시 생명의 탄생이다. 이것들을 동시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인생의 가장 큰 '기쁨'이 죄로 말미암은 어둠의 그림자 안에서 성취된다. 인간 생명의 시작은 여자의 고통 끝에 이르게 된다는 말, 여기에 형언키 어렵도록 심각한 삶의 비밀이 있다.


그리고, 구약 중 '가장 비정한 말'을 듣게 된다. 즉,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3 : 19)'. 이렇게 해서 인간 본질에 관한, 아니면 인간과 흙의 관계에 대한, 가장 건조하고 사실적인, 그래서 비정한 묘사가 등장하게 된다. 죽음은 따라서 인간의 흙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따져보면 흙과 인간의 친화성은 신기하다.


장례시, 무덤 구덩이 앞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왜 울게 될까. 시신에 흙을 덮을 때, 흙을 밟을 때 예외없이 터지는 그 울음을 생각해 보라. 동양에서는 땅의 기운을 얻기 위해 아침마다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일 보는 품새로, 맨발로 땅에 앉아 그 기운을 받아 올리는 게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은 맨발로 맨 흙을 밟고, 되도록 자주, 오래 밟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실 모든 인간은 흙에 누울 때 편안함을 느낀다. 또 흙에 가까운 인생일수록 흙 위에, 흙 곁에 있음을 좋아한다. 즉, 어린이는 흙에서 벗어난 날이, 노인들은 흙으로 돌아갈 날이 가깝다. 어린애들은 흙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한다. 늙으면 흙이 아늑하고, 흙이 편안하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이해치 못할 일이지만, 우리의 한국의 어른들은 자신이 묻힐 가봉 분을 만들어 놓고 즐거워한다.


뱀과 흙과의 관계도 희한하다. 땅꾼의 경험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이 뱀을 무서워하나, 실은 뱀도 사람을 무서워한다고 한다. 만일 독사에 물렸을 경우, 사람을 물은 뱀의 머리가 땅에 닿기 전에 흙을 먼저 짚으면 죽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듯하지만, 믿거나 말거나의 말이라서 용기 있는 사람의 확인 실험이 필요하다.


결국 모든 살아 있는 것, 소위 생물체가 마침내 도착하는 곳은, 그 옛날 유행하던 어느 인생론의 제목과 같이,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흙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또 생명은 무엇인가? 그것 역시 어려운 말로써 수백 수천 페이지의 종이와 몇 톤의 잉크를 버려가며 어렵고 어렵게, 말하는 사람, 듣고 읽는 모든 사람에게 어려우라고, 수많은 단어로 풀어헤쳐 놓을 수 있다. 그렇지만, 쉽게, 단순하고 좀 무지하게, 아니면 우리 시대의 총아인 카피적 표현으로 말한다면, 역시 생명이란 흙의 변환태, 아니 '생명은 바로 흙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외경 시락서 40:1에 있는 대로 "흙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흙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시간이란 변수를 작용시키면 생명에서 죽음을 거쳐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결국 흙이 생명인 것이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생명의 위기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아니면 생명의 왜곡이나 위축, 생명에 내리는 저주나, 그것의 '죽음이 아닌 사라짐'에 대해 걱정을 나누기 위해서 생각들을 모으려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바로 흙의 위기나 저주에 관하여 말해야 할 것이다.


유대 기독교적 가르침에서, 추상적 선, 또는 이상들은 대개 관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예컨대, 사랑, 자비, 희생, 등등등 --- 이란 몽상이나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 움직임이고, 선교, 전도, 증언이란, 말뭉치로 된 슬로건이나 선동이 아닌 구체적 삶, 바로 그 자체이듯, 생명이란 것도 잘 빚어진 관념, 아니면 승화된 어떤 개념이나 진술이 아니다. 생명은, 가장 구체적, 가장 직접적, 즉물적으로 말해서, 만져지고, 부서지고, 내려앉는 그 "흙"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오래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긴 언어의 우회로를 거친 '말'로 지은 해결의 탑을 쌓지 말아야 할 듯하다. 그보다는, 마치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코에 "그 큰 숨"을 불어 넣으셨듯이 우리의 흙에 우리의 '숨'을 크게 불어넣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흙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는 길을, 전 인류적 규모와 전 문명적 속도로 재촉하여 가고 있다. 실상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도시의 아들, 딸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시란 어떤 곳인가. 반경 수 마일의, 흙을 안 밟도록 삼엄하게 조치해 놓은 콘크리트 덩어리, 즉 흙이 안 보이는 곳, 흙과 멀어진 곳이다. 흙이 없는 듯, 흙이 없어야 되는 듯, 흙과 상관없는 듯 사는 데 우리들 삶은 길들여진다.


대체로 문명화란 흙과의 거리와 반비례하는 듯하다. 흙과의 격리 정도에 따라 문명화의 척도가 결정된다. 그렇게 본다면 문명화란 생명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작위(作爲)로도 파악된다. 이러한 대세를 거스린다는 것은 아마 시대착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역시 흙은 생명이다. 생명은 흙이고, 죽음조차 생명의 길에 이르도록 만드는 만물의 어머니인 것이다. 먼데 갈 것 없이, 바로 흙이 생명이라는 이 인식에 투철할 때, 우리는 문명이 흐려놓은, 생명에 대한 희미해진 생각의 한자락을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흙은 바로 우리 자신이므로.인간이 기껏, 그리고 장엄하게도 흙이며, 흙으로 돌아간다는 성서의 말씀은 우리를 진실로 경건하게 한다. 우리는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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