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여섯째로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을 결정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발견한다. 이것은 여기 제시된 원칙들 중에서 가장 대담한 원칙이며. 즉각적인 의혹을 불러 일으킬지도 모른다. 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처음 보기엔 전적으로 연관이 없으며 심지어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원칙은 어떤 원함이든 다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그리고 있는 원함은 이성적이고 성숙하며. 감정과 사고 모두를 통한 산물이며.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마음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갈망을 말한다.
따라서 갑작스런 충동이나 일시적인 변덕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에 대한 언어적 표현은 “ 하고 싶다” “때로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가 아니라 “나는 참으로 원한다”이다.
이 원칙에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즉 “사람의 삶은 기본적으로 선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사람이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고. 그들 삶의 기본적인 방향이 참되고 선한 것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실수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그것을 후회한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발견하며 행하려고 하는 것은 참되고 선한 것이다.
이 원칙은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함에 있어 이러한 기본 방향과 전제를 가정하고. 우리가 가장 깊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사이에 수렴되는 점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자신을 위해 원하는 만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가장 깊은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그 생명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안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융 (Carl Jung)은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는데. 그는 우리의 참된 자아를 깨닫고 발견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면밀히 귀를 기울여야 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참된 자아 안에서 우리 개개인의 운명을 발견할 수 있으며. 만약 의미와 행복을 찾기 원한다면 그 운명대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모든 정보의 근원들. 특히 우리 자신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융은 우리의 원칙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그의 생각은 그에 매우 근접해 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발견하려고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깊은 내면인 것이다.
신앙적인 사람들은 종종 이에 대해 실수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그들 자신 밖에서 발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 주님의 뜻을 내게 보여주소서”라고 기도하고는 주위에서 표적을 구하며.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중심을 향하도록 그들의 시선을 되돌려놓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이며. 그들 자신의 가장 깊은 갈망을 지닌 내면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힘든 결혼생활을 계속해야 할 지 아니면 그만두어야 할 지 결정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가정하자.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 모든 측면들을 면밀히 살펴본 후에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물어본다. 어떤 때는 현재의 그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지속하기를 원할 것이다. 또 어떤 때는 그 모든 문제들 때문에 그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하기도 한다.
이번엔 어떤 사람이 그가 목회자가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아닌가 알려고 애쓰고 있다고 가정하자. 만약 목회자가 될 소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그것을 발견할 것이며 목회자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성경을 향하게 하는 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원칙들과 가치. 그리고 이상만을 제시할 뿐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미 이것들을 알고 있고 신봉하고 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은 우리가 이 직업을 택할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할 것인가. 이 재산을 팔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들의 경우 나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깊이 기도하며 생각해보고 난 후 그들의 마음이 기우는 데 따르라고 권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 결정하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에 따라 살아갈 일반적인 지침을 주셨으며. 특별한 결정들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우리가 성의껏 하는 결정을 받아들이신다고 믿는다. 그러한 결정들을 하는 데 있어 최선의 지침은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자아에서 흘러나오는 우리 자신의 깊은 원함이다.
죽음과 부활
일곱째로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경험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크리스챤들에게 위대한 계시의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의 어떤 면을 설명해주는 패러독스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는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최후의 단어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죽음 가운데서 일하셔서 거기에서 생명을 일으키신다. 죽음은 통로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단지 역사상의 한 개인에게만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고 우리 모두에게 거듭거듭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는 보기가 된다. 언제나 많은 방법으로 우리는 죽으며 항상 새생명에로 일으킴을 받고 있으며 최소한 그렇게 될 수 있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 주시기를 원함을 보았다. 그에 덧붙여 이 원칙이 말하는 것은 종종 생명은 죽음을 통해 온다는 것이다.
우리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도 있다. 그들 역시 깊은 의미로는 죽은 것이다. 죽음―부활은 그들에게 희망의 본보기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 죽음으로부터 새생명을 주실 것이다.
어떤 부부는 결혼생활의 위기상황에서 찾아온다. 그들 각자는 그 곳에서 어떤 새로운 것이 태어날 정도로 죽어야 할 지도 모른다. 이같은 죽음을 맛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터이지만. 그들은 그로부터 생명이 비롯됨을 확신할 수 있다.
임상의사인 우리는 내담자의 필요에 따라 그 신비의 양면을 모두 강조해야 할지 모른다. 때로는 부활을 강조하여 이미 어떤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죽음으로부터 부활이 있을 것임을 확신시켜야 한다. 또 어떤 때는 죽음을 강조하여 어떤 것을 놓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구하는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죽음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죽음―부활은 인간 소망의 위대한 본보기이며 당황스런 경험을 해석하는 열쇠이다. 그것은 겨울과 봄. 밤과 낮. 폭풍과 평온. 유충과 나비 등 여러 자연 현상들에 구체화되어 있기도 하다.
심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은 종종 자기의 생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재생이나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이때에 바로 이 영적 차원이 큰 힘이 될 수 있다. 죽음-부활은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 미래의 하나님이시며 죽음 심지어는 아주 최종적인 죽음같은 상황에서도 새생명을 가져다주심을 이야기해준다.
나는 때로 죽음과 새생명 사이의 암울한 시간을 사람들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성 토요일 (Holy Saturday) 의 비유를 사용한다. 성토요일은 예수님께서 죽으신 금요일과 새생명으로 부활하신 주일 사이의 혼란스런 날이다. 이러한 연례적인 종교적 축일 가운데 성토요일은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으며 무엇을 느끼고 해야 할지 당황스런 잿빛의 애매 모호하고 공허한 날이다.
비극적 죽음의 그 격렬한 고통은 누그러졌지만 그 상실의 자리에 전혀 새생명이 주어지지 않은 때문이다. 우리 삶에서도 때로 성 토요일이 잠시 동안 일어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생명을 낳는 변화의 기간이다.
인간 성장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죽음에 우리를 빠지게 한다. 그 죽음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막다른 골목이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야만 하는 관계에 우리를 처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의 참 모습을 누군가에게 알게 하는 심각한 위험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애착을 갖던 대상이 사라지고 그것 없이 위태로운 첫발을 내디뎌야 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하도록 만들려는 교묘한 노력들을 포기하고 그들에게 자발적인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실로 집을 떠나 어른으로서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이기주의로부터 전적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 기본적인 관심을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모든 결정들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우리에게 맛보게 한다. 죽음―부활 본보기는 그 경험의 영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지 (support)의 근원이 될 수 있다.
사랑
여덟째로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사랑. 즉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자기 사랑이다. 사랑은 우리 삶의 수단이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 행복을 이루고 성취감을 맛본다.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것을 믿으며 받아들이고 그 사랑에 젖는 것 만큼 어렵다고 하겠다. 더구나 우리들 중 다수는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어렵게 느낀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는 무엇보다도 평생 지속될 끝없는 성장 계획이다. 그 계획은 우리의 인간화에 있어 핵심적 문제이다. 그것은 또한 핵심적인 영적 문제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모든 치료상의 문제는 결국 사랑 쪽으로 기울어진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은 아주 낮은 자존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무의미하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종종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고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주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의 삶은 공허하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만족은 상당 부분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매우 관대한 사람들도 있다. 흔히 여자들이 그러한데. 그들은 항상 자신을 맨 마지막에 두며.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데 전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아무도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필요로 하고 삶에서 얻기 원하는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를 받을 필요가 있다. 임상 치료의 궁극적 과업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완전하고도 균형있는 기준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이다. 거기에 그들의 성취와 행복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과업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이 통상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잘 사랑하는 법을 알아내려고 머리를 짜내야만 한다. 결혼생활의 갈등의 대부분은 단지 이 한명의 신비스런 사람을 잘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데 달려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그들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줌으로써 언제나 가장 잘 표현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들에게 참으로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를 고려할 때. 안된다고 말함으로 사랑을 표현할 수 있음을 알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작별을 고해야 할 때도 있다.
이는 특별히 그 결정에 우리 자신에 대한 적절한 사랑까지도 포함시키려 노력할 때 더욱 그러하다. 사랑은 임상치료에 있어 핵심적인 문제이며.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문제이다.
치료자
아홉째로 치료자는 내담자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의 현현이다.
앞의 원칙들은 내담자의 삶에 있어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번 원칙은 그 안에 치료자를 포함시켜 그 치료자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현현 또는 구체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치료자는 그대로 놔두면 추상적이고 모호한 어떤 것을 구체화하여 현실적이고 명료하게 만든다.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만 종종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그것을 구체화시킴으로 현실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측면들이 있다.
첫째. 우리가 상담하는 어떤 사람에게든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긍정적인 자세로 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을 살펴보고. 자기가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편한 장소를 제공해야 한다.
아마도 그곳은 그들의 모든 것이 받아들여졌다고 그들이 처음으로 느끼는 장소가 될 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에 대해 수용적이고 사려깊은 사람이 됨으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사랑의 현현과 표현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분의 상징이며 나타나보이는 표현인 것이다.
둘째. 치료의 환경은 단순히 사람들을 위한 장소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곳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길을 찾는 장소이다. 그들이 여러가지 가능성들을 고려하고 선택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와 도전 모두를 구체화시켜 나타내보여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선함과 은사를 확증시켜줄 때와 그들이 바른 선택을 하고 있음을 확신시켜줄 때 위로를 베풀어야 한다. 우리의 격려는 권능이 있다. 그것은 해방. 치료. 그리고 성장의 방향으로 자아를 빚어 가는데 도움을 준다.
우리는 또한 어떤 도전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사랑에 또한 하나님께 뿌리박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정말 내담자에게 유익한 것을 원해야 하며. 행동의 예상 경로와 예상 결과를 지적하여 때로는 그들이 하기 꺼리는 것들도 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가 대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전하는 균형이룬 활동들에서 우리는 그들을 위한 하나님 그분의 사랑을 최대한 구체화하고 표현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모든 실체의 가장 깊은 차원이신―은 또한 상담과 임상치료. 영적 지도에 있어 우리의 임재와 활동의 가장 깊은 차원이며 근원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상징 또는 화신(化身)을 의미한다.
위의 내용들은 영적 차원이 우리의 삶. 특히 기독교인으로서 돕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현실적이 될 수 있는가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이 고찰이 목회자들인 우리가 치료와 신학 사이의 영역을 더욱 능란하게 오갈 수 있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우리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영역 모두의 특성을 우리에게서 원하며 필요로 한다. 다행히도 훌륭한 치료와 훌륭한 신학은 인간의 치유. 해방. 성장이라는 공통된 목표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