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훔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
들어가는 말
“나훔서”를 아십니까?
나훔서를 통한 설교를 들으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훔서는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震怒)와 보응에 관한 두렵고 떨리는 심판(審判)의 말씀입니다
이는 듣기에 좋은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나훔서를 선포하는 설교자를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은 1차적으로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1:1)입니다
1:2절에는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는”(1:2)하나님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훔서가 어떠한 책인가를 단적으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훔 선지자의 니느웨에 대한 이 경고는 역사적으로 성취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훔서가 현대교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오늘의 “니느웨”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뜻에서 켐벨 몰간은“참으로 엄숙한 마음가짐이 없이는 나훔서를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는 진노의 교리에 대해서 부인하거나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 것을 설교하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진노”가 없다면“복음”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노를 부인하는 것은 복음을 부인하는 것과 다름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십자가를 헛된(갈2:21)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까?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성경 전체의 요절이라고 말하는 요한복음3:16절에는 “영생과 멸망”이 함께 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가 함께 나타나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를 함께보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도 복음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원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까?
그렇게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주시지 못하고 자기 아들에게 대신 정죄하시고야 우리를 받아주실 수가 있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실 뿐만이 아니라 죄를 묵과할 수 없는 공의(公儀)의 하나님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사랑의 높이를 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 하는 진노의 깊이를 봅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에 진실성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진노”는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거룩하심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진노”는 동전의 앞뒤 면과도 같습니다.
이 둘을 함께 전해주어야만 합니다
바울을 로마서1: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나니”하고 “복음과 진노”를 함께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복음이 왜 필요한가?
복음을 전해주지 않으면 저들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이를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하고 “사랑”만을 강조하고 있는 현대교회에 나훔서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복음과 진노
나훔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앞부분(1장)은 주로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입니다.
“여호와”하는 말이 9번 하나님을 가리키는“그”라는 대명사가 10번 이상 나옵니다
뒷부분(2-3장)에서는 주로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행하실 일 즉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첫 말씀이 “여호와는 투기”(2상)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도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시면서“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라”(출20:5)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어찌하여 투기하고 질투하시는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약4:5)_하고 묻고 있습니다
“투기 진노”란 사랑을 배신당했을 때에 일어나는 분노(憤怒)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을 배반한 죄에 대한 보응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3절에서“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합니다.
이는 2절의 진노가 얼마나 오래 참으시던 끝에 발하시는 진노인가를 말씀해줍니다.
그런데 사악한 인간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 얼마나 멸시하고 있습니까?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롬2:4)
다음은 니느웨가 무엇 때문에 심판을 당하게 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首都)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롬1:18)위에 임합니다.
“경건치 아니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여호아께서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11)합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가?
열왕기하18-19장에 나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을 가리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군대장관 랍사게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적하며 훼방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는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왕하19:22)하고 꾸짖으셨습니다.
또한 그들은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1:14)을 숭배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정복하고는 자기의 신이 이겼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함”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 위에 임합니다.
“불의”(不意)란 이웃과의 관계에서의 죄입니다.
니느웨를 가리켜“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3:1)합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으면“피 성”이라 하시겠습니까?
나훔서는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3:19)하고 마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의”입니다.
죄는 억만 가지가 있어도 크게는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두 가지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어디에 임하는가?
나훔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는 앗수르의 전성시대(1:12,3:16-17)라 할 수가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이미 멸망을 당했고 남쪽 유다도 극심한 위협을 받고 있던 때입니다.
이런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나훔 선지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들어서 바벨론의 심판을 경고하신 시점도 예루살렘을 정복한 전성시대(렘50:1)였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대적자가 영구히 영화를 누릴 줄로 알고 기세가 등등할 때 심판을 선언하시며 그 예언은 문자적으로 응하였음을 역사가 증언하고 있습니다.
나훔서1:5-6절에 나오는 “그의 앞에”라는 말씀을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는 하나님의 존전을 가리킵니다.
“누가 능히 그 분노하신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 진노를 감당하랴”(6)합니다.
성경 마지막 책에서도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6:17)합니다.
누가 능히 설 수가 있는가?
우리에게 설 자격이나 공로가 있단 말인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합니다.
그 때에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15)하고 기쁜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이 당시로는 앗수르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롬10:15) 한 복음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리하여 담대히 설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소식입니다.
나훔서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불변의 진리는 행악하는 자가 한 때 흥왕 하는 듯하나 종국에는 심판으로 갚으시고 경건한 자가 한 때 고난을 당하나 결국에는 영광과 위로로 갚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점을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1:6-7)합니다.
이는 나훔서에 대한 좋은 해설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앗수르라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치 아니함과 불의”는 이제도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도 “니느웨”는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도 “나훔서”힘있게 선포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어도 하나님의“사랑”만 알고 ,공의는 모르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냐 오냐”하고 키운 자식은 자기밖에 모릅니다.“아비 없는 후레자식”같이 됩니다
이는 우려가 아니라 증상이 아주 깊은 상태라 하겠습니다.
그들을 균형 있게 양육하기 위해서 나훔서를 선포하지 않으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