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한때 변두리 운동과 지엽적 현상으로 여겨졌던 복음주의가 기독교의 주 세력권으로 진입하고 있다. 지류에서 성장하던 복음주의가 본류로 이동하여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려는 것이다. 아무도 이제 복음주의가 세계 기독교의 중심 요소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자유주의 교회는 침체 속에 있는 반면, 복음주의 교회는, 특히 지난 20년, 성장과 확장을 거듭해왔다. 미국 주류 교회들의 교인수가 감소하고 있으나,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은 성장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실패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주의 교회로 발을 돌리게 했다. 1970년대 미 연합 감리교회는 886,000명, 연합 장로교회 526,000명, 성공회는 476,000명의 교인이 준 반면, 루터교-미조리 노회는 3%, 나사렛교회는 8%, 침례교회는 18%, 하나님의 성회는 37% 이상 교인이 증가했다. 1990년 조사에 따르며, 미국에서 급 성장한 500개의 개신 교회 중 89%가 복음주의에 속한 교회였다. 미국의 복음주의자는 약 4천만 내지 4천5백만명으로 추산되며, 미국 복음주의의 기관지로 간주되는 [크리스챤니티 투데이] (Christianity Today)는 1979년 북미 인구의 20%를, 그리고 여론조사 기관 갤럽은 개신교 교인 중 48%를 복음주의자로 간주했다.
복음주의는 획일성을 지닌 하나의 실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양성을 지닌 운동이다. 어떤 이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자기 것만을 옹호하기 위해 사용하고, 그와 다르면 비복음주의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복음주의나 복음주의 신학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할 수 없다. 토마스 오든(Thomas Oden)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신실하게 믿고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을" 복음주의자로 정의한다. 고대 교회 공의회, 루터, 칼빈, 침례파, 웨슬레의 교훈 아래 있는 사람들이 모두 복음주의자에 속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복음을 믿는 자는 모두 복음주의자며, 복음에 기초한 신학은 모두 복음주의 신학이다. 복음주의 신학이 아니면서 기독교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이런 일반적 이해는 복음주의 정체성 해명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복음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 곧 복음주의에 대한 증명과 보증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기독교와 기독교인 모두의 특징이기도 하다.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그 의미가 다양하여,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그치지 않는 개념이다.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미국 종교사 편찬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로 취급된다. 논란이 되는 것은 복음주의를 정의해야 되느냐 또는 기술해야 되느냐, 신학적으로 정의하느냐 또는 정서적으로 정의하느냐, 그것이 신학이냐 아니면 운동이냐 하는 문제 등이다.
복음주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으나, 이론의 여지없는 통일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신학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가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 복음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긴급한 문제는 정체성의 위기다. 데이턴(Donald W. Dayton)은 복음주의란 용어는 더 이상 의미가 없으며, 그 유용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
성결교회는 웨슬레안 복음주의, 그 중에서도 19세기 미국 성결파의 신앙적 유업을 계승하고 있다. 성결파는 복음주의 흐름의 한 작은 지류에 속한다. 성결교회와 신학의 정체성확립에는 두가지 접근이 가능하다. 직접적 방법과 간접적 방법이다. 전자는 성결교회 내부로부터 성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해명하는 것이며, 후자는 외부, 즉 성결교회의 토대가 되는 복음주의로부터 성결교회의 위치를 점검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결교회라는 공간을 새로운 세기와 새로운 천년에 걸맞는 활동 거점으로 만들 책임과 성결교회의 울타리를 복음주의 전 영역으로 확장하여, 복음주의와 더불어 세계 기독교의 주류에 진입해야 될 사명이 있다. 우리는 성결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도 복음주의의 계보와 역사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복음주의의 매력을 알게 해주는 동시에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게 해준다.
필자는 성결교 신학 정립의 예비적 단계로 복음주의 신학 일반에 관심을 갖는다. 이 논문을 통해 북미 복음주의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논의를 검토하고 복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며, 복음주의자는 누구인가를 서술함으로써, 정체성의 위기에 처한 복음주의의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복음주의는 어떤 신학적 신념들에 기초한 영적 갱신과 부흥 운동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몇가지 문제들을 논의하려 한다. 역사적으로 복음주의란 말은 어떻게 사용되었는가, 복음주의 신념은 무엇인가, 복음주의 운동이란 어떤 것인가, 현대 복음주의 흐름은 어떠한가? 이 물음들은 다시 한가지로 압축된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1. 복음주의의 의미
복음주의는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신학적 현상과 부흥운동이다. '복음적'이란 말은 한 가지 의미가 아닌,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이단적인 것에 반(反)하여 정통적인 것, 로마 가톨릭 교회적인 것에 반(反)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적인 것, 그리고 현대적 또는 자유주의적인 것에 반(反)하여 전통적 또는 보수적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현대 개신교 내에서도 여러 그룹이 복음주의란 용어를 명확한 기준 없이 자신들의 입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복음 자체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의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선택한 말이다. '복음주의적'(evangelical)이란 명칭은 복음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단어 유앙겔리온(euangelion)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옥스포드 사전에 따르면, 'evangelical'이란 '복음서 교훈의' 또는 '복음서 교훈에 따라'로 풀이된다. 복음주의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 알려진 것을 의미하며, 복음주의 신학은 복음서의 하나님, 즉 예수의 생애와 그의 교훈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초점을 둔 신학을 말한다. 복음주의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은총의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복음에 헌신하는 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란 용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복된 소식, 즉 복음을 보존하고 선포하려는 기독교의 역동적 운동의 중심 취지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그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부터였다. 그것은 중세 말기 교회의 형식적 신앙에 반기를 들고 성서적 신앙 회복을 주창했던 가톨릭 저술가들을 가리키기 위해 처음 사용되었다. 개인적 구원의 경험을 강조하는 복음적 태도는 이미 15세기 후반 이태리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그리고 그것을 중시하는 영적 운동은 1520년대 이태리 귀족사회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복음주의 운동의 초기 형태다.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복음주의는 루터교적이며 반(反)가톨릭 교회적인 것을 의미했다. 독일에서 그것은 프로테스탄트들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16세기 중엽, 가톨릭교회는 루터교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칭의의 교리에 근거하여 개인적 신앙과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루터의 복음주의적 신앙태도를 정죄하고 금지했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는 반 가톨릭교회적 루터교인으로 이해되었다. 또한 로마 가톨릭교회는 복음주의자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불렀으며, 17세기 중엽 그것이 일반화되고, 복음주의자와 프로테스탄트는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현대에 들어, 복음주의는 두가지 의미, 즉 넓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다. 넓은 의미의 복음주의는 18세기 대 각성운동으로부터 일어난 신앙전통을 말하고, 좁은 의미는 그 하부 구룹인 신복음주의자들에게 사용되는 명칭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와의 차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42년 미국에서 오켄가(Harold John Ockenga)의 지도로 조직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의 창립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NAE는 엄격한 근본주의자들 보다 오히려 온건한 복음주의자 구룹이었다. 흔히 신복음주의로 알려진 새로운 형태의 복음주의는 헤렐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은 극단적 근본주의자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신복음주의란 용어를 사용했다. 최근에는 신복음주의란 용어 대신, 간단히 복음주의란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면, 복음주의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항상 동일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다르다. 복음주의는 어느 한 교파나 신학노선에 국한되지 않고 초교파적인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루터주의, 칼빈주의 그리고 알미니안주의, 비교화적인 근본주의자와 유식한 루터파 혹은 개혁파 신학자, 그리고 오순절주의자와 신정통주의자 등을 포괄하기에 충분한 큰 개념이다.
2. 복음주의의 신념
복음주의에 대한 해명 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규정하는 것(defintion)과 기술하는 것(description)이다. 규정 방법은 복음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정의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근본주의나 세대주의와 동일시하는 것, 성서 무오성 또는 베이컨의 인식론에 대한 헌신으로 간주하는 것,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을 미국 부흥운동의 후손들이나 현대사상에 반대하는 자들에게 제한하는 것, 복음주의를 개혁파나 어떤 특정 관점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국주의적 또는 축소적(reduction)정의로 불린다.
이 방법은 복음주의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없다는데 그 난점이 있다. 복음주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토대로 세계 기독교의 다양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이런 기원의 복합성 때문에, 그것을 한마디로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자들은 하나 같이 그 정의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스위트(Sweet)는 복음주의란 용어는 정의를 피한다고 말하고, 크라우스(Kraus)는 "복음주의 운동은 정확한 신학적 정의를 거부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복음주의가 역사적으로 결코 지닌바 없었던 신학적 획일성이나 균일성을 강요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기술의 방법이다.
기술 방법은 다양한 복음주의의 특징이나 경향 또는 중심 요소에 근거해 복음주의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체계로 보는 것과 역동적 운동으로 보는 것이다. 전자가 신학적 또는 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역사적, 정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복음주의를 종교적 조직체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미국 역사학자 말스덴(George Marsden)이 지적한 복음주의를 확인할 수 있는 세가지 중복적 영역에서도 확인된다. 첫째, 복음주의는 개념적 통일체를 의미한다. 복음주의자는 전형적으로 다음 사실을 강조하는 자들이다. 성서의 궁극적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 교리,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역사성, 그리스도 신앙을 통한 영원한 구원, 전도와 선교 및 영적 변화의 중요성. 둘째, 복음주의는 역동적 운동을 의미한다. 그것은 복음주의를 공통적 유산과 공통적 경향, 유기체적 성격을 지닌, 역동적 운동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교단들, 전도 단체(para-church), 그리고 복음전도 지향적 운동들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복음주의는 종교 단체를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공통체 속에 공통 유업과 관심사를 결합하는 자들의 초교파 그룹 및 모임이다. 1846년에 영국에서 창립된, [복음주의 연합] (the Evangelical Alliance)과 1942년 미국에서 창립된 [전국 복음주의자 협회](NAE) 등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교리적 접근에 의해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있는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복음주의의 특징을 밝혀보자. 막크 놀(Mark A.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복음주의를 초자연적 중생의 필요를 강조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고백하며 선교와 전도를 통해 복음전파를 촉진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구속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지적했다. 앤더슨(Ray S. Anderson)은 현대 복음주의 신학의 독특성을 세가지 관심, 즉 정통주의 교리, 성서의 권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체험에 대한 관심에 의해 표현했다.
맥그라스는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를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복음주의에 통일성을 가져다주는 공통된 특징이 확신에 기초무엇인가를 기술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복음주의는 크게 여섯 가지의 지배적 해 있다. 성경이 가지는 최고의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성령의 주권,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복음 전도의 우선권,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이 여섯 가지는 복음주의자들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특징인 동시에 그 토대가 된다.
웨보르그(John Weborg) 역시 복음주의란 용어를 정의가 아닌 기술로 간주하고,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네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 인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구원된다. 둘째, 세계의 소망은 역사의 종말에 있게 될 하나님의 구속행위에 있다. 셋째, 성경은 삶과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넷째, 인간은 복음의 능력에 의해 중생하는 것이 필요하다. 죤스톤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공통점을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개인적 신앙을 통한 복음에의 헌신, 복음에 대한 성서적 이해 그리고 전도와 사회개혁을 통한 복음전파이다. 복음주의자는 "복음이 개인적으로 체험되고, 성서적으로 정의되고 열정적으로 전파되어야 한다고 믿는 자"이다. 올만(Ohlmann)은 복음주자들의 공통점으로 거룩한 삶에 대한 열망, 개인적 종교와 종교적 체험에 대한 강조 종교적
자유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성서의 권위에 대한 강조를, 그리고 스태플스(Staples)는 선교와 전도, 성서적으로 기초된 복음, 기독교적 도덕 가치에 대한 깊은 헌신을 지적하고 있다. 특히 스태플스는 복음주의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공동체라고 믿는다.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이 복음주의자라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에스큐(Thomas Askew)는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인정하는 복음주의의 특징으로 네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성서는 신앙과 실천을 위한 유일한 권위다. 둘째, 회심은 크리스챤 생활의 시작에 필요한 개인적 체험이다. 셋째, 영성과 성결은 의식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넷째, 전도와 교회 개혁의 사명은 크리스챤의 의무다. 블로쉬(Donald Bloesch)는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미래]에서 복음주의자들을 흐트려뜨리려는 원심력이 있는 동시에, 함께 끌어들이려는 구심력 있다고 주장한다. 그 구심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과 복음 전파의 공동목적에 놓여 있다. 파크레(Gabriel Fackre)는 [웨스트민스터 신학사전](Wes tminster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에서 복음주의자는 개인적 회심과 엄격한 도덕 생활을 강조하는 자, 신앙과 실천에 대한 지침으로서 성경에 관심을 집중하는 자 그리고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상에서 복음주의 특징에 근거하여 복음주의 의미를 밝히려는 학자들의 노력을 살펴 보았다. 그것을 정리하면, 복음주의 주 요소와 특징은 몇가지로 요약된다. 영국 역사가 배빙톤(David Bebbington)이 지적한바와 같이, 회심주의(conversionism), 성서주의(biblicism), 활동주의(activism), 십자가 중심주의(crucicentrism)이다. 회심주의는 삶을 변화시키는 종교적 체험으로서의 중생을 강조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개인적 회심과 체험적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성서주의는 성서를 궁극적 권위로 신뢰하는 것이다.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복음주의 전통의 본질적 요소다. 활동주의는 복음전파에 관심을 두는 것을 말한다. 복음주의는 복음전도의 우선권을 두고 전도와 선교를 강조한다. 십자가 중심주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한 구속사역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3. 복음주의 운동
복음주의는 성서의 메세지로부터 유래한 신학체계인 동시에, 기독교에서 일어난 독특한 운동, 즉 경건하고 헌신적인 신앙 풍토다. 그것은 항상 신앙운동과 일시적으로 체휴하며 형성되었다. 종교개혁 운동, 경건주의 운동, 청교도운동, 대각성 운동, 부흥운동, 근본주의 운동, 성결운동, 은사운동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신학의 역사를 통해 복음주의를 기술하고 있다.
복음주의 규범적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한편, 복음주의를 신학으로 본다면, 서방 기독교, 종교개혁신학,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의 맥을 계승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운동으로 본다면, 그것은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주요 운동에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다.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등이다. 특히 그랜즈는 [복음주의 신학의 갱신]에서 복음주의가 같은 중심을 축으로 한 세 원을 통해 일어났다고 본다. 큰 원이 종교개혁이라면, 중간 원이 청교도와 경건주의 운동이고, 작은 원이 탈 근본주의, 즉 신복음주의 운동이다.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및 경건주의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복음주의 의미를 논의해보자.
현대 복음주의의 첫번째 역사적 원천은 16세기 독일의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은 복음의 본질을 재천명한 복음주의 운동이다. 종교개혁 시대 독일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복음에 대한 루터의 신앙을 강조하며 자신들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복음주의적(evangelisch)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그렇지만 루터가 복음주의란 말을 사용했다는 것이 종교개혁과 현대 복음주의와의 특별한 관계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프로테스탄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며, 모든 프로테스탄트들은 복음주의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과 현대 복음주의 관계는 그런 외형적인 것이 아닌, 내면적인 것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의 중심 주제들이 복음주의 운동의 근원과 근간이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의 표어,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총(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의 원리가 복음주의 정체성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종교개혁은 복음주의의 초점과 표준이 되었다.
종교개혁이 복음주의 운동의 뿌리요, 정체성의 주요 요소이기는 하나, 그 전 지평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운동은 교회 개혁에 주 관심이 있었고, 불신자를 회심시키는 복음전도와 선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반면, 복음주의는 교회 개혁보다는 회심과 복음전도에 더 관심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을 죄와 용서라는 법적인 면에서 이해한 반면, 영미 복음주의자들은 성령을 통한 내적 변화를 강조하고 있다.
현대 복음주의의 두번째 역사적 원천은 17세기 청교도 운동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적 부흥운동은 청교도운동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며, 현대 복음주의자들 역시 청교도들의 후예들이다. 웨슬레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서적목록에 많은 청교도 작가들의 저작들을 포함시켰다. 청교도운동은 영국교회 갱신운동이었다. 청교도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이 불완전하다고 평가하고 온전한 개혁을 추구했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고 신약성서적 교회의 회복을 모토로 삼았다.
청교도 운동은 건전한 신학과 윤리적 삶에 관심을 두는 이론적이고 도덕적인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청교도들이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다. 청교도들은 개혁파 교회의 지적 성향과 그리스챤 삶의 경험적 측면을 함께 강조했다. 청교도 운동은 칼빈주의의 선택의 교리에 의해 일어난 불안에 대응해 새로운 종류의 경건을 발전시켰다.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선택이란 용어로 개인의 구원문제를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옹호했으나, 선택된 자로 확신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했다. 반면, 청교도들은 선택의 명확한 표준을 제시했다.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대한 내적 경험이다. 따라서 그들은 구원의 주관적 증표인 중생의 체험을 강조했다. 즉 형식적 신앙을 반대하고, 체험적 신앙을 주장했다.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이 은혜 체험을 고백하는 사람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던 것이 그 단적인 증거다.
복음주의가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것이 그 중요한 특징이 된 것은 청교도운동의 영향이었다. 또한 청교도운동은 복음주의에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과 기독교 국가 건설의 환상을 제시했다. 그렌즈에 따르면, 복음주의적 영성은 청교도운동에서 기원된다. 복음주의가 주로 영어문화권에서 성장, 발전한 것은 청교도운동의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미국이 청교도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18세기에 요나단 에드워드의 목회와 저작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그를 중심한 대각성 운동과 종교체험에 대한 그의 해석은 복음주의 운동에 큰 족적을 남겼다.
복음주의의 세번째 원천은 경건주의 운동이다. 독일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 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화, 교리화되었다. 특히 루터교 정통주의는 "따뜻한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하나의 이론 체계에 불과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의 근본 목적은 엄격한 형식과 교리에서 벗어나 생동감 있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의인, 중생, 성화는 교리로만 취급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 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한다. 경건주의자들의 주 관심은 개인적 신앙, 즉 자신들의 영혼 구원에 있었다. 웨슬레의 올더스게이트 체험은 경건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을 강조한 전형적 실례이다.
경건주의는 기독교란 신념의 체계일뿐만 아니라 일종의 삶이라는 진리를 재발견하며,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활기를 불어넣는데 공헌했다. 그것은 생명력 있는 개인적 종교에 대한 욕구를 육성했다. 독일에서 시작된 경건주의 운동은 18세기 영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복음주의가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현대 복음주의의 또 다른 원천은 부흥운동이다. 부흥운동은 독일의 경건주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운동 및 각성 운동 등에 의해 18-19세기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신앙운동이다. 그것은 종교개혁적 신앙을 강화하는 영적 각성 물결이었다. 부흥 및 각성운동의 특징은 회심 체험, 경건하고 성결한 삶, 교회갱신, 노예제도 폐지와 인권향상 등 사회개혁, 봉사와 선교 등을 강조한 것이다.
172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제1차 각성운동은 1740년대 요나단 에드워드와 죠오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설교를 통해 그 절정에 달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요한 웨슬레와 그의 동생 챨스 웨슬레(Charles Wesley)를 통해 영국교회 갱신운동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미국에서 에즈베리(Francis Asbury)에 의해 계승되었다. 제2차 각성 운동은 19세기 초 찰스 피니(Charles Finney)등의 주도로 미국에서 일어났다.
19세기 초 미국 복음주의의 특징은 부흥운동을 발전시킨 것과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통해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한 것이다. 부흥운동과 국교분리의 결합은 미국 교회에 활력을 가져다 준 반면, 실용성에 대한 관심이 원리에 대한 관심을 압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문제를 실용의 문제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대 각성운동은 복음주의를 19세기 미국 교회의 지배 세력으로 부각시켰으나, 동시에 개인적 종교 경험과 지성적 엄격성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긴장을 일으켰다.
현대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의 산물이다. 이 운동들은 복음주의에 근본 토대와 기반을 형성했다. 한편 복음주의 운동은 현대 초기에 태어나 20세기 중엽 성숙에 이르렀다. 복음주의는 과학적 사고, 경험적 접근 및 상식주의에 같은 현대의 도구를 항상 사용하고 있다.
4. 복음주의의 흐름
복음주의는 획일성을 지닌 실체가 아니라 다양성을 지닌 신학적 신념이요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만화경, 모자익, 또는 우산으로 표현될 만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머어피(Cullen Murphy)는 복음주의 신앙을 12개 기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천막으로 비유했으며, 웨버(Robert Webber)는 복음주의 내에 14개 소그룹을, 그리고 데이턴과 존스턴이 편집한 [미국 복음주의의 다양성]은 복음주의 내에 12개 신학전통을 포함하고 있다. 맥그라스에 따르면, 이러한 다양성은 복음주의 신념들에 대한 강조의 차이, 그들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 그리고 기타 강조점 첨가문제로 일어난다.
현대 복음주의의 유형은 학자들에 따라 3, 4, 혹은 6개로 분류된다. 가브리엘 패커는 현대 복음주의를 분열된 제국으로 비유하고, 그것을 6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근본주의, 구 복음주의, 신복음주의, 정의와 평화 복음주의, 은사적 복음주의 및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완전 무오성을 신앙적 신실성의 표준으로 간주하며, 논쟁적이고 분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구 복음주의는 신앙의 체험적 측면에 우위권을 두며 개인적 중생 체험과 대중적 복음전도 운동을 강조한다. 신복음주의는 신앙의 사회적 의의와 변증적 설득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정의와 평화 복음주의는 활동적 복음주의로 급진적 정치적 견해를 주장한다. 은사적 복음주의는 성령과 그 사역, 방언, 치유, 축제 형식의 예배를 강조한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는 광범위한 기독교 공동체와 관련을 맺는데 관심이 있으며, 공통 사회적 관심사를 위해 주류 교단들과 협력한다.
웨버(Timothy P. Weber)는 4개의 가지를 지닌 복음주의 가계도(family tree)를 제시했다. 고전적, 경건주의적, 근본주의적, 그리고 진보적 복음주의다. 고전적 복음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교리, 즉 성서의 궁극적 권위, 믿음에 의한 칭의, 대속 등에 충실하다. 따라서 고전적 복음주의자는 신학에서 종교적 경험 보다 교리의 역할을 중시하는 신조주의자다. 대륙의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그리고 19세기 구파 장로교(Old School Presbyterianism)가 여기에 속한다.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전통에 경건주의, 청교도운동 그리고 18세기의 대 각성운동의 경험적 강조점을 결합시킴으로써 그것을 완성하려고 한다. 경건주의적 복음주의자는 성령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회심 및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부흥, 사회개혁, 고상한 삶을 촉진하는 종교적 실용주의자이다. 19세기 대부분의 복음주의 체제들, 즉 감리교인들, 침례교인들, 오벌린 완전주의자들(Oberlin Perfectionists), 신파 장로교인들(New School Presbyterians), 성결 그룹과 오순절운동이 여기에 속한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고전적 그리고 경건주의적 복음주의 특징 중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으나, 그 중 소수의 근본적인 것들에 촛점을 둔다. 근본주의자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출현한 신복음주의자가 여기에 속한다. 진보적 복음주의는 현대 의식을 가지고 정통주의 기독교 요소들을 유지하려고 한다. 성서의 무오성과 성서비평주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시대적 필요에 따라 근본주의를 개혁하려고 하는 일부 신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적 분리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주류 교회 안에 남아 있는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속한다.
데이턴은 복음주의자라는 명칭이 사용되게 된 개신교 역사을 주목하고, 복음주의를 세 유형, 즉 프로테스탄트/루터란 복음주의, 부흥운동적 복음주의,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로 구분했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개혁 시대, 기독교 신앙에 성서적, 그리스도 중심적 표현을 부여했다. 18-19세기 미국의 대 각성과 부흥운동 기간 회심을, 그리고 20세기 근본주의자/현대주의자 논쟁 기간 정통주의와 보수주의적 가치들을 강조했다.
바레트(David Barrett)는 [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에서 복음주의를 세가지 형태로 나누었다. 근본주의자, 보수적 복음주의자, 신복음주의자이다. 근본주의자는 그 창립정신을 고수하고 기독교의 일곱가지 근본 교리를 주장한다. 성서의 무오와 문자적 영감설, 동정녀탄생, 그리스도의 기적들, 육체의 부활, 인간 존재의 전적 타락, 대리적 속죄, 천년왕국 이전의 재림 교리이다. 보수적 복음주의자는 근본주의의 내용을 고수하기 원하나 보다 개방적이고 비판적 형태를 원한다. 에큐메니칼 복음주의자 또는 신복음주의자는 교회 일치와 협력에 개방적이며, 세계교회 협의회와 미국 복음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성서의 제한적 무오성을 확신한다.
웨버의 견해는 복음주의 흐름 이해에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패커의 분류는 더 압축될 수 있는 반면, 바레트나 데이턴의 분류는 복음주의의 현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0세기 이전의 복음주의는 종교개혁적 복음주의와 청교도운동, 경건주의운동, 부흥운동에 토대를 둔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반 복음주의를 대표했던 근본주의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근본주의를 개혁하려한 신복음주의 또는 진보적 복음주의를 첨부할 수 있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또는 신복음주의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근본주의는 19세기 미국의 두 신학 조류인 프린스톤 신학과 세대주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일어난 신학운동이다. 근본주의는 특히 1920-40년대 사이 미국 개신교권 내의 한 운동을 말한다. 그것은 현대주의 도전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통주의 기독교 신앙의 근본 요소들을 재확인하고 재천명한 것이다. 그 기본 정신은 저항주의와 분리주의로 요약된다. 그것은 반문화적 운동과 기존 교단으로부터의 분리로 표현되었다. 근본주의의 주 관심사는 바른 교리였다. 근본주의는 교리 중심의 복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흐름을 차단하고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를 보존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반면, 사회적 비젼을 가진 기독교적 세계관을 제시하지 못하고, 기독교 복음의 한 측면만을 강조했다. 근본주의는 지나치게 내세 지향적이며, 반지성적, 비교화적이어서 교육받은 대중들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1940년대에 근본주의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출현한 것이 신복음주의다. 미국의 근본주의 안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지성적 표현을 추구하는 젊은 지도자들이 나타났다. 헤롤드 오켄가, 칼 헨리, 빌리 그래함 등이다. 그들은 개신교 정통 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가졌던 온건한 근본주의자들이었다. 신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주류의 입장을 회복하면서 특히 세상을 긍정하고 문화를 포용하는 복음주의적 비젼을 지니고 있었다. 신복음주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젼을 회복한 것"이다. 신복음주의의 출현과 더불어 서구에 복음주의의 새로운 부흥이 일어났다. 최근 신복음주의란 명칭은 간단히 용어인 복음주의로 대체, 사용되고 있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의 차이는 신학보다는 그 양태(style)에 있다. 양자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신학관점을 공유하고 있다. 성서의 영감과 절대 권위에 대한 확신, 그리스도의 유일성 , 체험적 신앙, 세계 선교, 현대신학에 대한 불신 등에 대한 강조가 그것이다. 그러나 교리적 관심을 추구하는 방법에서 복음주의자는 보다 지적이고 개방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자유주의 보다는 보수적이나, 근본주의 처럼 보수적이지는 않다.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의 중간 길을 택하는 제3의 세력을 말한다.
복음주의의 흐름은 역사적으로 16세기 종교개혁, 17-19세기 청교도, 경건주의 및 부흥운동, 20세기 전반의 근본주의 그리고 후반의 신복음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이 흐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모든 복음주의의 조류는 신학적으로 프로테스탄트 정통 교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성서의 궁극적 권위,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성,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신앙에 의한 구원, 회심을 통한 성결과 전도에 헌신적인 삶이다.
한편,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주장하거나 강조한다고 해서 모두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복음주의 신학을 독특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정통주의, 성서적 권위 또는 크리스챤 경험에 대한 독점적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복음의 본질적 요소로, 신앙 고백으로 그리고 전도와 세계 선교에 대한 명령으로 표현하는 열정적 관심이다. 종교개혁적 신학개념과 갱신 및 회심의 정신이 결합되어야 복음주의적이 되는 것이다. 부흥과 갱신의 역동성이 복음주의의 본질적 특성이다.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교리 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경건주의적 복음주의는 감정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복음주의를 신학적 신념이나 교리로 간주하는 것과 신앙운동과 정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복음주의 전통의 양면 중 한 면만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현대 복음주의는 신학인 동시에 운동이다.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신념에 토대를 둔 영적 부흥 및 갱신운동이다.
결론
복음주의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서구 세계, 특히 북미에서 큰 부흥을 이룩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복음주의의 영적 호소력과 낙관주의적 사고에 매료되고 있다. 정통 기독교 교리를 신봉하고, 복음전도에 헌신적인 것이 복음주의 매력이요 장점이다. 현대복음주의는 활동적이고, 대중적이며 실용적인 것이 특색이다.
현대 복음주의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중간 길을 택하는 제3의 세력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큰 문제점은 복음에 가해질 해악을 간과하고, 현대인이나 문화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복음을 변조시킨 것이다. 이런 급진적 자유주의에 저항하는 동시에, 극단적 보수주의, 즉 근본주의의 신학적 폐쇄성으로부터 자유한 것이 복음주의 신학의 중요한 업적이다.
한편, 복음주의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지성적 빈곤이다. 복음주의는 폭 넓고 심오한 지성적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비판적 분석과 진지한 성찰 보다, 문제들을 단순화하거나, 영감과 은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세대주의, 근본주의, 케직운동, 오순절주의 등은 복음주의 생존 전략들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요소들을 보존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지닌 것이 문제였다. 따라서 복음주의는 대중적 차원에서는 큰 성과를 이룩했으나 지성계나 문화계 상류층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2차 대전을 깃점으로 근본주의가 쇠퇴하고, 복음주의가 부흥되는 과정에 교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 약해지고 있다. 그것이 복음주의 정체성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 원인 중 하나다. 복음주의의 정체감을 보존하고 지켜 나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은 복음주의 운동의 뿌리를 재발견하는 것이다. 복음주의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그 명칭이 유래된 것이므로, 그에 맞게 복음 위에 서야 한다. 또한 복음주의는 종교개혁, 청교도운동, 경건주의, 부흥운동 등 그 계보와 역사 속에서 다양한 자원들을 발견하여 세로운 세기를 대비해야 한다.
현대 후기는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를 필요로 한다. 한스 큉에 따르면 "교회는 근본이 없는 현대주의와 현대성 없는 근본주의 사이에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 시대적 요구를 이상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복음주의다. 기독교의 미래는 복음주의 운동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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