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교육방법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마 7:28-29).

마태복음 5,6,7장의 산상 수훈을 다 말씀하셨을 때 청중들의 반응을 마태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당시에도 이미 유대인들은 엄격하고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가정에서는 가장을 중심하여 쉐마를 가르쳤다. 또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고 회당에서는 랍비들이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랍비는 몇 몇 사람들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았다. 그래서 선발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전수해 주었다. 또한 랍비는 긴박한 요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큰 길이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군중들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도 하였다.

예수님은 이런 랍비의 교훈 방법을 사용했다. 제자들을 선택하여 함께 생활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전수해 주었고(마 10:1), 때로는 찾아오는 군중들을 향하여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때때로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요 1:38, 49, 3:2, 4;31, 6:25, 9:2, 11:8 20:16 등 요한복음에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흔히 보아온 랍비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가르치심에는 권세가 있었다. 이제까지 랍비들이 가르친 내용과는 달랐다. 산상수훈에서 랍비들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어떻게 다른가 비교해 보자

①살인에 대해서(마 5:21~22)

②간음에 대해서(마 5:27~28)

③이혼에 대해서(마 5:31~32)

④맹세에 대해서(마 5:33~37)

⑤원수갚는 일에 대해서(마 5:38~42)

⑥원수에 대해서(마 5:43~44)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또한 우리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다른 사람을 제자 삼아 가르쳐야하는 교사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1. 예수님의 교육 방법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사용하신 방법은 다음 세 가지가 있다.


(1) 말을 통한 교육

말 즉 언어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선물이다. 따라서 말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사소통 매체이다. 예수님은 이 말을 통해 강의하고 질문하고 토론하셨다. 강론, 질문, 토론의 방법 중 어느 방법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예수님은 많이 모인 군중들에게는 강론을, 열두 제자와 같이 몇몇 사람들이 모인 경우에는 질문을 많이 하셨다. 그러나 단 둘이 대면하여 앉아있을 경우에는 토론을 하신 경우가 많다.


1) 강론(講論)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 5:1~3). 오랜 시간 강론이 끝났을 때 무리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강론에 놀랬다. 다른 랍비들의 가르치는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5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사이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아무리 빨리 잡아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지 30여년이 지난 후에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젠가는 이 말씀들을 책으로 남겨야 하겠다고 그때 그때 메모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후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태나 마가 그리고 누가나 요한의 머리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더구나 마가나 누가는 예수님의 수제자들이 아니었기에 다른 사람들을 통해 다시 전해 듣고 기록했을 것이다(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도 생생히 기억에 남을 수 있단 말인가?

학교에서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거나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어떤 교수의 강의는 들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정리가 안되는 강의가 있다. 둘째, 들을 때는 재미있고 이해가 되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 시험 때가 되면 학생들로 하여금 절절 매게 하는 강의가 있다. 셋째, 들을 때도 재미있게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강의가 있다. 우리는 흔히 이런 교수의 강의를 명강의라 한다.

그렇다면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교사인가? 어떻게 하면 명 강의를 할 수 있을까? 뒷부분에서 이 문제를 연구해 보기로 하자.


2) 질문(質問)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마 15:34).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14). 예수님은 강론을 하시다가 종종 질문을 하셨다. 설교와 강론의 다른 점은 바로 질문이 있다는 점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까닭에 질문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설교하시면서 질문하신 경우가 있는가? 그러나 교육은 질문을 통한 방법이 대단히 효과적이다.

마태복음 22:15 이하를 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냈다. 그리고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답변하기보다 다시 반문을 하셨다.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예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물어보셨는가? 아니다. 진리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 후 다시 바리새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주님은 또 질문을 하신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마 22:42). 그들이 다윗의 자손이라 하지 또 질문하신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또한 누가복음 20:1 이하를 보면 성전을 정화시킨 예수님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이 찾아와서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하고 반문하셨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따지러 온 사람들의 입을 막기에 충분했고 청중의 가슴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이 사용하신 질문들은 진리를 분명히 드러낸다든지, 사고(思考)를 환기시킨다든지, 응답을 구하기 위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훌륭한 교사는 일방적으로 가르치기보다는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여 대답을 유도하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질문을 할 때 주의할 것이 있다.

①애매한 질문은 피하고 대답을 분명히 하도록 유도하라.

②똑똑한 한두 어린이가 모든 것을 다 대답하지 못하게 하라.

③예나 아니오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질문이라고 볼 수 없다.

④틀린 답을 말하거나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난처할 때 상처를 입지 않도록 조심하라.


3) 토론(討論)

어떤 부자 청년이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이 청년과 토론을 통하여 스스로 대답을 찾고 결정하게 하신다(마 19:16~22). 또한 밤 중에 니고데모가 찾아왔을 때라든지(요 3:1~21),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만난 여인(요 4:7~42)과도 긴 시간 토론을 통하여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해답을 찾도록 하고 계신다.

이처럼 토론의 형식은 많은 사람이 모였을 때가 아니라 주로 일대일의 가르침에서 사용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였을 경우에는 간단한 토론으로 마치셨다.

요즈음 청년 대학부에서 소그룹 토론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 토론은 서로 의견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문제를 진단할 수 있고, 또 해답도 스스로 찾을 수 있는 대단히 좋은 교육방법이다. 그러나 토론이 논쟁이 되거나 변론이 되어서는 안된다. 토론의 형식으로 가르칠 경우에 주의할 점이 있다.

①토론의 방향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게 잘 진행을 하여야 한다.

②맨 마지막에 교사가 마무리를 잘 지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2) 삶을 통한 교육


예수님은 말만 하고 생활에서 본이 되지못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라고 엄히 꾸짖으시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3)고 하셨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중요한 교육방법 중 하나는 삶을 통한 교육이다. 예수님은 미사여구를 써서 말만 잘하신 분이 아니시다. 당신의 생애가 곧 교육이셨다. 당신이 말씀하신 바를 스스로 실천하여 본을 보이셨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침 받은 대로 실천에 옮기도록 훈련하셨다.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크냐 하는 문제로 서로 옥신각신하며 다투고 있을 때(눅 22:24) 예수님은 친히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셔서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하고 교훈 하셨다.

또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특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은 지금까지의 교훈이 단순한 말에 그친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위대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가르침이 왜 권세가 없는가? 우리가 최신 교육자재를 가지고 첨단 교육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고 있는데 왜 학생들이 변화되지 않는가? 그 중요한 이유는 가르치는 우리가 먼저 모범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는 교사가 기도를 가르치니 무슨 능력이 나타나겠는가?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지 못하는 교사가 주일성수를 가르치니 얼마나 자신 있게 가르칠 수 있겠는가? 기억하기 바란다. 기독교 교육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리키는 것’ 즉 보여주는 것이다.


(3) 상징을 통한 교육


복음서에 나타나는 상징을 통한 교육방법은 예수님의 독특한 교육방법이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상징의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1) 실물을 통한 교육

마태복음 21:18 이하를 보자. 시장하신 예수님(아마도 베다니의 가난한 집에 갑자기 열 명도 넘는 남자 장정들을 데리고 찾아가셨기 때문에 아침 일찍 그 집을 나오신 듯하다)은 길 가에 서 있는 한 무화과 나무에게 다가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하고 저주하셨다.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죽었다. 그런데 마가복음 11:13을 보면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지방의 무화과나무는 보통 3,4월에 잎이 나기 시작하여 6월쯤에야 첫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니 유월절 즉 4월경에는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말라죽게 저주하셨는가? 바로 실물을 통한 교육이다.

이미 소개한 이야기지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은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게 하신 후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하고 말문을 여셨다.

이렇게 예수님은 실물을 사용하심으로써 가르치는 내용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사가 된 우리는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에 알맞는 실물을 택하여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2) 비유를 통한 교육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마 13:34) 라고 하실 만큼 많은 비유를 통해 교육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 13:3-9)〉〈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29~37)〉등 30~40여 가지의 비유가 등장하고 있다.

예수님은 대개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설명하기 위하여 비유를 쓰셨는데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한번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가르쳐주시려고 하는 천국의 특성은 무엇인가? 물론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사후(死後)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삶을 곧 천국이라 한 것이다.

첫째, 얼마나 오랜 시간 주를 섬기며 봉사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부르심 받은 그 시간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성실히 살아왔느냐가 중요함을 보여준다. 즉 1년 동안 교사로 봉사해온 사람보다 5년 동안 교사로 봉사해 온 사람이 더 상이 큰 것이 아니다. 언제 불러주셨건 부름 받은 그 날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충성했는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늦게 부름 받았다고 해서 걱정할 이유가 없다.

둘째, 그렇다면 일찍부터 부름 받아 포도원 즉 주님 나라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손해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포도원에 들어가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은혜요 복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거리를 찾지 못해 불안해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데 이미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복인가? 사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일꾼으로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은혜이다.

셋째,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기 이전에 행한 일들은 주님이 전혀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사람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었다고 하셨다. 포도원에 들어와 일하지 않고 있다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지 그것은 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는 것만이 일한 것이다.


2. 예수님 교육의 특징


(1) 쉽게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신 교육의 특성은 무엇보다도 쉽게 가르치셨다는 점이다. 마치 어머니가 자녀에게 이야기해 주시듯이 쉬운 말로 단순하게 가르치셨다. 어떤 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너 학습능력을 증진시켜야 하겠구나” 하시겠는가? 그냥 “얘, 공부해라”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부인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하셨고, 들에 나가셔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마 5:25~34)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이로부터 어른까지, 배운 자나 무식한 자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가르치셨다.

알고 보면 성경이 그렇게 어려운 책이 아니다. 그 시대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쓰던 대중언어를 가지고 말씀하셨고 도 기록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교사나 목사들이 ‘쉬운 성경을 어떻게 하면 어렵고 고상하게 가르칠까’ 고민하며 연구하고 있다.

눈 높이 교육으로 유명한 피바디 선생님의 이야기를 기억하자. 따라서 쉽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첫째, 수식어가 많이 붙지 않은 짧은 문장을 사용하라.

둘째, 이해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라.

속죄, 죄의 전가, 변형되었다, 하나님의 형상… 이런 말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셋째,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2) 재미있게 가르치셨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록은 찾을 수 있지만 웃으셨다는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퍽 재미있는 표현들을 쓰고 계신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하신 말씀이라든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중에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도다”(마 23:24) 라고 하셔서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신다. 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마 7:9~10) 하신 말씀도 대단한 코미디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위트가 넘치고 있다. 사람들은 대개 딱딱한 이야기는 듣지 않거나 듣고 쉽게 잊어버리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는 귀가 솔깃하고 잘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교사는 수업시간에 적어도 한 번 쯤은 학생들을 실컷 웃길 수 있어야 한다. 그 웃음 속에 복음적 진리가 담겨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라고 할 것이다.


(3) 정곡을 찌르는 가르침이셨다.


어느 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남자는 도망쳤는지 놓아주었는지) 기세가 등등하여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리고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고 질문하였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하셨다. 이것은 실로 정곡을 찌르신 말씀이었다. 그렇게도 기세 등등하던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나가버리고 말았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두려워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는 사람에게는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 하셔서 그 사람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쫓아내자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하면서 대드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뻔뻔스런 모습, 예수님의 대꾸(마 21:24~25)에 말문이 막히자 바리새인, 헤롯당, 사두개인들을 동원하여 말의 올무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을 아신 주님은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 23:33) 하고 직격탄을 쏘기도 하셨다.

교사는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또 재미있게 가르치기도 하여야 하지만 가슴을 찌르는 말씀이 필요하다. 학생들의 마음 속에는 재미있는 예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사랑으로 가르치셨다.


흔히 사람들은 요한을 가리켜 예수님의 제일 사랑 받던 제자라고 한다. 이렇게 불리게 된 데는 먼저 이름 자체가 “여호와의 사랑하는 자”란 뜻을 가지고 있기 때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가지는 요한이 쓴 복음서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이다(13:23, 19:26, 20:2, 21:7, 21:20 등). 그리고 그는 항상 예수님 곁에 앉으려 했고 마지막 만찬 때는 예수님 품에 아예 기대고 있었다(13:23).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누구를 더 사랑하시고 누구를 덜 사랑하시지는 않으셨다. 원수도 사랑하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 더구나 당신이 불러 세우신 제자들을 편애하실 리가 없다. 다만 제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주님의 가장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누가 크냐하고 언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목회자 뿐 아니라 구역장이나 교사는 이런 사랑을 가져야 한다. 열심 있는 사람은 그 열심 때문에 사랑하고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렇기에 더욱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할 때 모두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듯이 말이다. 다만 사랑하는 방법도 서로 다를 수가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들 수도 있다.

하나님의 양무리를 맡아 기르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하고 “우리 선생님은 나만 제일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어야 한다. 칭찬할 때뿐 아니라 꾸지람을 해도 “우리 선생님은 나를 제일 사랑하신다”고 생각해야 효과가 있고 기쁨으로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결 론》


예수님께서 훌륭하게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교육방법이 단순한 지식 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나고 교제하고 함께 생활하셨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마 19:14) 하신 예수님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들어도 찾아오는 사람을 만나주셨다.

열두 제자를 불러 항상 함께 생활하며 가르치신 예수님은 삭개오를 가르치기 위하여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머무셨으며(눅 19:5), 마르다의 집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에게 가르치셨다(눅 10:38).

진정한 교육은 만남이요 또한 삶이다. 우리가 일 주일에 한 번씩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것으로 교육을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학생들을 자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할 때 그들의 필요를 발견하게 되고 그들에게 값진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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