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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께 나아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dk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6-7)

들어가는 말

본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경하여야할 하나님을 온전히 공경하고 경배하여야할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는 대신에 불순종과 죄악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본문 앞 절에서 쟁변하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시면서 자기를 변호하시는 모습을 모두 보여 주었습니다. 애굽의 속박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주시고 또 선지자와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그들에게 진리로 가르쳐 주시며, 나아가서는 그들이 끊임없는 불순종과 범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축복해 주셔서 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반응

이렇게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을 들려주자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 어떤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는지 아니면 이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상적인 반응을 이야기했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 반응이 언뜻 보면 우리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제목이 아닙니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하나님께 경배할까"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그런데 본문을 묵상하며 깨달은 사실은 그것이 바로 자조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의 등불이 되어서 살게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어서 심지 않은 포도나무의 실과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로 부귀하게 하고 영화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타락한 땅,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그 천지에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으셔서 거기에 세워 주셨습니다. 그랬으면 어떻게 해야됩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지내야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변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자비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지만 아직도 그들의 사고 방식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이 기껏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할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는데 그럼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갈까? 무엇을 들고 나갈까?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할까?" 이런 사고 방식으로 차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겉 생활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껍질만이 아니라 정말 우리 자신의 중심이(Diapora) 하나님 앞에 바쳐져서 주님이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즉시 제물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주님의 사랑을 다 이야기 하니까 기껏 여러분들 속에 드는 생각은 '주일을 잘 지켜야 되겠구나. 헌금을 떼먹지 말아야 되겠구나.' 라는 (Idiapora)생각밖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기초가 되지 않으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애굽의 종 되었던 땅에서 속박해 내어서 마치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날음과 같이 모든 위험들과 대적들이 있는 그 광야의 길에서 너희를 보호하고 건져내어서 안전한 이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낸, 나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그 사랑을 너희도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모세와 미리암과 아론과 같은 귀한 선지자와 말씀의 종들을 너희에게 보내어서 너희로 하여금, 가르치는 자가 없고 깨닫는 진리가 없어서 짐승과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진리를 보여주고 감화와 은혜, 하나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준 것은, 너희로 하여금 짐승처럼 사는 대신 내 백성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애 타는 마음으로 진리를 가르쳐 주었는데, 내가 그런 마음으로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던 것처럼 너희는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더러운 죄를 짓고 단칼에 쓸어버린 바 되어야할 그 싯딤에서 그 엄청난 더러운 간음의 죄를 내가 용서하고 너희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유리하고 방황하던 거렁뱅이와 같은 무리들을 장엄한 군대로 만드셔서 요단을 기적가운데 건너게 만드시고 가나안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떠돌아다니는 무리요 영원한 종들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이름에 붙은 그 더럽고 수치스러운 딱지를 길갈에서 모두 굴려버린 것을 너희들이 기억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나는 너희를 향한 관계를 이렇게 소중히 여겼고 너희의 이름에 매달린 수치를 내가 이렇게 미워하고 너희를 존귀한 이름으로 바꾸고 싶어했던 내가 너희의 이름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 애정과 충성심을 너희는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느냐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껏 하나님 뭘 좀 드릴 까요 뭘 좀 잡수시겠습니까? 일 년 된 수송아지 드시겠습니까? 천천의 수양 만만의 기름이면 속이 풀리시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해서 치욕입니까? 이제는 그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나아오기를 원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아와야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개혁이 일어나고 진정한 삶의 변혁이 일어나서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살아갔던 수치스러운 삶들을 청산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는 마음으로 주 앞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예배와 예배자

선지서 속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사상은, 예배와 예배자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그 제사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왔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정신으로 사는 사람, 제사를 드리는 정신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제사 앞으로 나아왔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통해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넓은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로 바뀌게 되어서 어떻게 나왔는가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내가 지난 주와는 어떻게 달라진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나왔는가 하는 그 열매가 주님께 드리려고 손에 들고 나오는 몇 푼 어치의 고기나 끌고 나오는 한 두 마리의 황소보다 훨씬 귀하고 존귀하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가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은 정말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당신의 의로움을 쟁변하셨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의로우심을 이 수준 낮은 인생들에게 쟁변하셔야 됩니까? 하나님은 원래 의로우신 분이시고 그것을 말씀하실 때마다 의롭다고 인정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 것밖에는 인생에게 다른 본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얼마나 의로우신 분인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득시키셨습니다. 깨닫게 하셨습니다. 알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주 앞에 나올 때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됩니다. 주님께서 나같은 죄인을 위해서 흘려주신 보혈의 피, 그 구속의 은혜가 크게 보일 때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던 수많은 이유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렵니까? 여러분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꼭 같이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지를 가지고 고민하시렵니까? 마음은 감추어둔 채 보이는 물질이나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을 바치는 것들로 주님을 높이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은 그런 것들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하나님 앞에 바칠 예물들을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물 자체를 꾸짖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예물과 제물에 합당한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는 것을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몸의 열매

뒤이어 성경에는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라는 의문문이 나옵니다. 이것은 올바른 것들로 하나님 앞에 반응하지 아니하고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하는 자신의 시도가 확신이 없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어떻게 섬길 때에 주님도 만족하고 우리도 만족합니까?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는 만족함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족하실 때 우리도 만족합니다. 무엇으로 하나님을 섬길 때에 우리는 만족합니까? 마음에 없는 많은 헌물과 마음에 없는 많은 섬김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족하게 하고 우리를 만족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중심에 가장 귀한 것이 그분 앞에 놓여질 때, 우리 속에 감추어진 그 옥합이 주님의 발 앞에 깨뜨려져서 그 분께 부어질 때, 바로 그 때 우리도 만족하고 우리의 중심을 바친 그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도 만족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계속해서 이제 바치고 싶은 것이 점점 정도를 더해가고 있는 점층법적인 표현을 여기에서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 년 된 황소였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는 하나님 앞에 바치는 예물 중에서 가장 좋은 최상의 예물이었습니다. 개인이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예물 중에서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실감이 나겠습니까?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할까? 아! 내 아파트 팔아서 바칠까?' 이 정도입니다. 최상의 것으로 시작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을 이야기합니다. 천천이면 일백만입니다. 지금 그런 대규모의 제사를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것을 꿈꾸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국가적인 난국을 타개할까? 백만 명을 여의도 광장에 모아볼까? 이백만 명을 모아볼까? 만원씩 헌금을 하면 기뻐하실까? 별 생각을 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영적인 종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심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않으면 그는 아무 것도 안 드린 것입니다. 마음의 진실한 사랑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 드려졌으면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린 사람입니다.

회복의 신학이 무엇입니까?

잃은 것을 찾는 것입니다, 상실한 것을 찾는 것입니다,무너진 것을 복원하는 것입니다,황무한 성읍을 건축하는 것입니다. 퇴락한 것을 옛적같이 세우는 것입니다,타락한 것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죽음에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주신 것을 되 찾는 것입니다.퇴락한 것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환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로 접근 하자는 것입니다 Transformation하자는 것입니다,

4R Reform,Recovery, Restoration,Redemption,하자는 것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가 중심이 된 신학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가 곧 회복이라고 하는 신학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 가운데 신령과 진리, 곧 성령과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주신 복을 상실한 것을 회복한다는 사상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의 상실을 회복하자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를 신앙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배가 회복되면 교회가 살고 나라와 가정이 산다.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예수님은 구원자이시자 곧 회복자도 되심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성령의 운행하심으로 회복될 수 있음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성령님의 조망으로 신앙의 완성, 신학의 완성을 밝히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신앙의 5대 행동강령과 신조 곧 기도, 말씀, 전도, 주일, 예물드림을 찬양하는 학문입니다.

회복의 신학은 개혁주의 철학을 바탕에서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만만의 강수와 같은 기름이 흐르게 되는 제사가 되려니 얼마나 많은 양을 잡아서 그 기름을 태워 그 번제단에서 떨어져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데 그것은 내 몸의 허물, 내 영혼의 죄를 위해서 내 몸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바로 자식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다 내어주면서 끝까지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만 안 내주려고 붙들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일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그 당시에 이방 종교들, 몰렉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데는 어느 민족에든지 몸의 열매를 드림으로써 신들에게 호감을 산다든지 재앙을 면한다고 하는 사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농경사회이므로 이 농사를 짓는 신들에게 호감을 사는 방법 중에 하나가 어린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동네에 임하는 재앙을 면하고 몰렉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일 년 된 송아지나 천천의 재물을 가지고도 주님이 만족하지 않으신다면 내 허물을 위해서 내 자식이라도 하나님 앞에 제사로 바칠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자식을 향한 진실한 사랑은 인간 사회의 보편적인 경험인데 그것까지도 뛰어넘으면서 그 자식을 제물로 바쳐서 태워버리겠다는 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참된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다양한 일에 종사하며 삽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좋은 지위와 환경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다스리며 직장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초라하게 구멍가게 이끌어가면서 그렇게 살아갈 수도 있고 때로는 정말 비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의 양식이 어떠한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이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냐, 누구를 높이고 공경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며 그 사람의 인생의 중심에 무슨 목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이러한 놀라운 말씀의 은혜,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받았으니 이제는 너희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지를 묻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으면 이제는 우리가 무엇으로 그 사랑을 갚아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뼈를 갈아도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어차피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의 사랑에 빚지면서 살다가 주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쉬운 것, 그러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 한가지를 요구하십니다. 내가 마음으로 너희를 사랑하고 온갖 사랑으로 너희들을 이제까지 인도해온 것처럼, 너희도 나를 경외하고 나를 섬기되 너희의 온 마음으로 섬기고 경외하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사랑을 입고 이 부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맺음말

갈릴리 땅이 알려질 이유도 없었지만 예수님 때문에 알려졌습니다. 스불론 땅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와 은총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루살렘이 도대체 무엇이고 유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심으로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셨습니다. 부인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입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고달픈 인생길을 주님을 위로로 삼으면서 이제껏 걸어오고 또 이기고 올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홀로 버려 두신 적이 있었습니까?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주신 적이 있었습니까? 결핍 속에 몸부림 쳐서 결국은 우리가 그 결핍 때문에 죽은 적이 있습니까? 죽은 자 같았으나 다시 살아났고 무명한 자 같았으나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다시 유명한 자 같이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받았으면서도 우리가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중심이 이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구원함을 받아서 이제껏 하나님의 사랑과 그 거역할 수 없는 은혜로 붙들린 바 되어서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의 양심이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충대충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저 형식으로 주님을 공경한다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으며 사는 것으로 만족해도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로 우리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살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놀랍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특별한 은혜가 특별한 은혜 되고 놀라운 사랑이 놀라운 사랑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님을 사랑하라고 그 사랑을 알게 하시고 주님만 경외하고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께만 마음을 바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들보다도 나를 독점적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를 보여주셨다면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몇 푼이나 몇 시간의 시간이나 몇 번의 섬김으로 주님의 이런 놀라운 사랑을 대신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못 박히신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할 바에야 용기 있게 세상으로 달려나가십시오. 그것이 영혼으로 훨씬 더 빨리 하나님 앞에 고침을 받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은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진실해 지십시오. 그리고 정직해 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 마음과 중심을 바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바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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