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의 신학적 배경
- 우찌무라 간조와 그의 1세대 제자들의 주장을 중심으로 -
유제시 목사 (GTS)
Ⅰ. 서 론
Ⅱ. 무교회주의의 신학적 배경
1.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그의 성장 배경과 경험
2)무교회주의 태동과 교파근절
3)우찌무라의 무교회론
2.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内原忠雄)
1)예레미야
2)예수 그리스도
3)사도 바울
4)마틴 루터
5)우찌무라 간조
3. 쿠로자키 고우기지(黒崎幸吉)
4. 츠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
5. 무교회주의와 나이스크니즘
Ⅲ. 결 론
Ⅰ. 서 론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Nonchurch Movement)란 일본에서 시작된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로 한마디로 가시적인 조직 교회에 대한 반대 또는 저항하는 신앙과 신학사상을 말한다.
무교회주의는 20세기 초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에 의해서 시작되어 그의 문하(門下)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무교회주의는 일본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본에 유학중에 있던 한국인 김교신(金敎臣)을 중심으로 하여 함석헌(咸錫憲) · 송두용(宋斗用) 등이 우찌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청강하면서 영향을 받은 후 귀국하여 월간지「성서조선(聖書朝鮮)」(1927년)을 발간하였는데, 이 잡지가 한국에서 무교회주의운동을 일으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찌무라 간조는 특히 토착적 일본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순수한 기독교의 진리를 회복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러한 시도가 결국 ‘무교회주의’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는 월간지 「성서연구(聖書の硏究)」를 창간하여 문서선교에 전력하였으며, 많은 저술 활동을 통해 기록된 그의 신앙과 사상은 일본 기독교에 긍정과 부정, 양면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무교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기독교이며, 무교회주의자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다. 교회나 세례의 유무(有無)는 신앙생활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 무교회주의가 곧 복음이요, 교회나 교리가 없어도 기독교의 궁극적 소망인 구원이 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사조는 교회의 바리새주의, 조직 교회의 비복음적 현상, 즉 말씀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현대 교회의 모습에 대한 대안(代案)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속하면서도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에 환멸을 느끼면서 우찌무라가 오늘날 우리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 성경적인 바탕위에 참된 교회를 세우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바른 가르침을 주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무교회주의 정신에 공감하며 그들의 논리와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 즉 범(凡)무교회주의자들이 우리들 주변에 상당수 존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무교회주의의 신학적 배경은 무엇일까? 어떤 성경적, 신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무교회주의운동을 시작한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와 그의 1세대 제자들인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内原忠雄), 쿠로자키 고우기지(黒崎幸吉), 츠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 등의 주장과 논리를 중심으로 논하고자 한다.
Ⅱ. 무교회주의의 신학적 배경
1.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 그의 성장 배경과 경험
우찌무라 간조는 1861년에 에도(江戶)의 다카자키(高崎) 파의 하급 무사계급에 속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유학(儒學)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교육을 크게 받으며 자랐다. 또한 신분상승을 기대했던 아버지의 소원대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1873년 12세에 이르러서는 서양식 사립학교인 도쿄(東京)의 아리마사학교(有馬私學敎)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이때 처음으로 구약성경에 접했다. 그리고 영어 독본을 통해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등 성경의 인물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친구의 권유로 외국인 거주지에 있는 한 교회의 예배에 출석하기도 했다.
그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계기는, 16세가 되는 해인 1877년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學校)의 2기 관비생으로 입학하면서부터였다. 이 학교는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 학장으로 선교사적 열망으로 가득한 윌리엄 클라크(W.Clark, 1826-1886)가 교무주임으로 1년간 초빙되어 체류하는 가운데 1기생 15명 전원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켰다. 그 후 클라크는 자기 나라로 귀국하였지만, 1기생들은 상급생으로서의 권위를 앞세워 2기생들을 강제로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서 압력을 가했다. 우찌무라는 이러한 학교의 분위기에 처음에는 다신교적 미신에 사로잡힌 자기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강력히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클라크가 남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서약’에 동참했다. 이것이 그가 크리스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 속 깊은 평화와 기쁨을 동반하는 회심은 아직 아니었다.
우찌무라가 회심을 향해 한층 진일보하게 된 것은, 그가 1878년 6월 미국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 미리암 해리스(M.Harris)에게 세례를 받을 때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그분의 이름을 받아들이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아멘'이라고 대답하면서부터다. 이후 우찌무라를 포함해 함께 세례를 받은 동기 7명은 남다른 우정을 맺으며 그들나름의 작은 예배공동체를 꾸렸는데, 이것이 후일 저 유명한 ‘삿포로 밴드’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무교회주의의 실질상의 싹인 ‘7인 형제의 작은 교회’였다. 이들은 한 주일에 세 번씩 모여 집회를 가졌으며 7인이 순서를 정하여 그날의 당번이 이른바 목사, 사제, 교사가 되어 특별한 형식적인 의식을 갖추지 않고 동양식으로 서로 둥글게 단좌(端坐)하고 성경을 낭독하기도 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고 나서는 함께 다과를 들면서 그날 설교에 대해서 함께 토론하고, 어떤 때는 밤샘을 하기도 하였다.
우찌무라는 삿포로농학교의 학생시절과 그 후, 후일 그가 평생 동안 주장한 무교회주의에로 방향 촉진을 자극하는데 크게 영향을 준 몇몇 사건들을 경험했다.
첫째로, 선교사들 간의 갈등과 대립을 목격했다. 삿포로에 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각각의 교회를 세우고 도가 지나칠 정도로 격렬한 전도 경쟁을 벌렸다. 그 가운데 감리교와 성공회가 구미(歐美)에서 하던 싸움을 삿포로에까지, 아니 그가 재학중에 있는 농학교 안에까지 끌고 들어와서 상대를 서로 비난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7인의 학생들은 깊은 번민에 시달리게 되었다. “우리들은 종교상의 의견이 거의 같은데도, 세례를 받은 교회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따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유가 없다.” “인구 겨우 3천도 못되는 삿포로 같은 작은 도시에 두 파의 집회소를 만들어 경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엡 4:5)라는 말씀에 비추어 선교사들의 교파주의적 경쟁심에 매우 실망하고, 한 교회조차 제대로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두 개의 교회가 별도로 있을 필요가 없음을 통감하면서, 이 경험을 통해 교파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둘째로, 1880년 7월 우찌무라는 동급생들과 함께 교회건축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감리교와 성공회 교파 소속의 문제로 재정후원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교회 분파주의의 폐해를 크게 직접 경험했다. 그래서 우찌무라는 1881년 7월 졸업 후에 동기들과 함께 빌린 돈으로 어떠한 외국의 교파주의에 의존하거나 어느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교회를 세워 예배와 전도활동에 주력했다.
그리고 셋째는 선교사와의 갈등이었다. 우찌무라는 미국에 유학하여 애머스트대학(Amherst)을 졸업한 후, 1887년 코네티컷州 하트포드신학교(Hartford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 체류 3년간은 그에게 복음 신앙의 재발견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반대로 미국 문명의 현실적인 반기독교성(反基督敎性)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명남용(聖名濫用), 도박, 편중정치, 계급차별, 종교계의 교파 대립 같은 것들이 너무나 심각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우찌무라는 4개월 만에 건강상의 이유로 신학을 중단하고, 1888년 5월 일본선교에 대한 비전을 간직한 채 귀국했다. 그 후 우찌무라는 자신이 미국에서 보고 배웠던 신앙의 훈련을 심어주기 위해 니가타(新瀉)에 있는 호쿠에츠학관(北越學館)의 교장직을 맡아 후진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반년도 못되어 교장직을 그만 두고 말았다. 이유는 선교사들과의 대립이었다.
이곳에서 우찌무라가 취한 교육방침에는 두 가지 특색이 있었다. 하나는 성경, 그 가운데서도 특히 예레미야를 강의했다. 그런데 이것을 선교사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사도(武士道)라든가 유교라든가 일본 재래의 도덕이나 역사를 가르쳤다. 그런데 이것도 선교사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즉 성서적 신앙과 애국심을 연결시켜 교육하고자 했던 우찌무라와 이를 반대했던 외국 선교사들이 서로 대립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우찌무라는 크리스천이지만 목사자격이 없다. 목사자격도 없는 사람이 성서를 강의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리고 기독교정신을 가르쳐야 할 학교에서 일본 재래의 사상과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이교도적이다”라며 그의 행동을 비난했다.
이러한 경험들이 우찌무라가 ‘무교회주의’와 ‘일본적 기독교’ 또는 ‘일본인의 기독교’를 주장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2)무교회주의 태동과 교파근절
우찌무라 간조는 그의 처녀작 『그리스도인의 위안』(基督信徒のなぐさめ)에서 처음으로 ‘무교회’(無教会)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리고 1901년에는 어떠한 교회 조직에도 관계를 맺지 않고 완전한 자유의 기독교를 선언할 목적으로 「무교회(無教会)」라는 잡지를 간행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무교회주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는 본래 해리스(M. Harris) 선교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감리교 교회에 속했었다. 후에 삿포로독립교회도 세웠다. 이러한 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창한 것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롬 3:28)에 의해서라고 하는 순복음의 입장에 철저하지 못한 선교사나 교회 쪽의 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회원이 되지 않더라도 신앙만 있으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일본에는 교회에 갈 수 없는 사람, 또 교회에 가기 싫은 사람이 많이 있다. 집 없는 아이는 불쌍하지 않은가? 나는 교회라는 집 없는 불쌍한 어린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러한 선언하에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 전도를 시작한 것이다.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운동을 전개해 나가면서 특히 앞서 언급했던 교회 안의 교파 싸움 근절을 많이 주장했다. 1924년 우찌무라가 「교파근절의 길」이라고 하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교파근절에 대한 그의 열성을 엿볼 수 있다.
“기독교 신자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격렬한 경쟁, 배척, 분쟁, 투쟁을 거쳐 온 서양 사람들의 선교를 받아 신앙에 들어간 우리나라 기독신자는 그들의 감화를 받아 그들 모양으로 분쟁, 시기, 원수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일본에서 교파 폐해를 근절시키는 길은 교파를 전하고 지금도 교파를 유지하는 서양교회와 관계를 끊어야 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만, 이 의견은 교회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 일본 기독신자로서 서양 신자를 따르지 말고, 진정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본사람 특유의 신의 공명을 중시하고, 무엇을 하든지 사(私)를 떠나 공(公)에 서서, 모든 음험함을 피하고 사람의 악함을 생각지 말고 좋은 점만을 생각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나라를 위해 모든 정실에서 벗어나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정신을 기르고 싶습니다.”
3)우찌무라의 무교회론
우찌무라는 앞길이 막힌 기독교를 재출발시키는 길은 무교회주의 밖에 없다고 믿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에 반하여 사랑을 주장하는 기독교가 서로 싸우면 기독교 그 자체가 멸망할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우찌무라는 “무엇 때문에 감독교회는 퀘이커교회를 주의 교회로 인정하지 않는가? 무엇 때문에 신교와 구교 사이에 개와 고양이보다도 더한 질투와 투쟁이 있는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그렇다. 바로 그렇다. 이 말씀을 마음에 품고 조합교회와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관찰해 보라”고 말했다. 결국 ‘무교회적인 관대’가 오늘날 세계를 멸망에서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며, 그의 평생의 주장이 되었다.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교회'는 교회가 없는 자의 교회다. 집 없는 자의 합숙소라고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심령상의 양육원이나 고아원 같은 것이다. 무교회(無教会)의 '무'(無)자는 '없다'는 뜻이고, ‘없앤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정한 교회는 실은 무교회다. ‘성(천국) 안에 성전(교회)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계 21:22)라는 말씀과 같이 천국에는 교회라는 것이 없다. 감독이나 집사나 목사나 교사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만의 일이다. 그곳에는 세례도 없고 성찬도 없다. 그곳에는 선생도 없고 제자도 없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다. 자연이다. 이것이 우리들 무교회 신자의 이 세상에서의 교회다. 그 천장은 푸른 하늘이다. 그 판에 별들이 깔려 있다. 그 바닥은 푸른 들판이다. 그 방석은 여러 가지 꽃들이다. 그 악기는 소나무가지다. 그 악사는 새들이다. 그 높은 단은 산언덕이다. 그 설교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것이 우리들 무교회 신자의 교회다.”
우찌무라는 ‘영의 일치’(엡 4:3)에 대해서 말하며, “이 일치는 특별히 반드시 무교회 신자 간에만 한한 것이 아니다. 교회에 속한 자, 속하지 않은 자의 구별 없이 무릇 같은 영으로써 같은 주의 구속받은 자 사이에 있는 일치다. 진심으로써 주를 믿는 자는 모두 우리들의 형제다. 우리들은 ‘귀하는 언제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어 그 사람이 신자냐 아니냐를 나누지 않는다. 그 사람의 품성에 나타난 나사렛 예수의 감화력을 인정하여 그런 후에 그의 기독교 신자임을 알고 그를 향하여 우리의 교제를 시작한다”라며 마치 세례가 영의 일치를 방해하는 것처럼 인식했다.
또한 생명이 무형(無形)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인 교회가 무형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기독교가 제도이고 조직체일 수 없다. 생명은 때로는 형태를 취해 나타나고, 때로는 형태 없이 생명자체로 존재한다. 생명은 히브리어로 '루아크'이다. 바람이다. 숨이다. ‘바람은 임의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모든 성령으로 난 자는 다 이러하니라’(요 3:8)고 한 그것이다.
이 바람이 부는 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 그리고 바람이 형태가 없는 것같이 '영으로 난 자' 즉 그리스도의 신자도 형태가 없다. 신자란 교회원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바람에 불려서 성령으로 난 자다. 그가 무형(無形)임은 말할 것도 없다. 생명은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기도 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영이 때로는 교회 상태를 취하고 나타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우리는 그러한 형태를 귀히 여기고 때로는 내 몸을 이에 의탁하여도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神-정신)과 형(形)을 같은 것으로 볼 때엔 폐해가 속출한다. 그리고 형(形)이 신(神)을 압도할 때에 신(神)은 살기 위하여 형(形)을 거스르고 그를 떠난다. 그를 버리지 않을 수 없다. 무교회주의는 그런 경우에 생기는 주의다. 귀한 것이고 없어서는 아니 될 주의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이 무교회주의자라고 했다. “길르앗의 야인, 디셉 사람 예언자 엘리야는 무교회주의이었다. 그에 의해서 이스라엘 내에서 꺼져가던 여호와의 산 신앙이 부흥 지속된 것이다. 또 드고아의 목부 아모스는 예언자이고 무교회주의자이었다. 그는 그의 침묵을 명한 벧엘 제사장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나는 예언자(직업적 예언자 즉 종교가)가 아니다. 또 예언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다. 뽕나무를 가꾸는 자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양을 치는데서 나를 불러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라고 내게 명령하셨다’(암 7:14).”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도, 바울도 무교회주의자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무교회주의는 ‘교회’보다도 ‘예수의 십자가’만을 중시(重視)한다. 실제로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는 십자가교’라고 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조직으로만 보았던 것이다.
그밖에 “루터도 새로운 신앙을 창도할 당시에는 순전한 무교회주의자이었다. 그는 새로 교회를 일으킴에 이르러서 교황이상의 교황이 되었다. 밀턴은 끝까지 고귀하고 장엄한 무교회주의자이었다. 카알라일도, 톨스토이도 그러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조합교회, 침례교회, 기타 모든 자유와 생명을 새롭게 세상에 쏟는 교회는 열렬한 무교회주의로서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우찌무라는, 무교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은 교회주의, 교회중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지향할 뿐 기독교의 복음신앙 그 자체를 부정하는 주의는 아니다. 산 신앙이 굳어져버릴 때에 교회로 변하는 것이다. 교회는 신앙의 화석이다. 신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그의 신앙이 교회화하는 일”이라고 까지 표현하면서 참된 신앙을 위해서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 교회가 없는 곳으로’ 가야 된다고 한 것이다.
2.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内原忠雄)
우찌무라 간조의 1세대 제자들가운데 한 사람인 야나이하라 타다오는 무교회주의는 ‘종교개혁’이며, 예레미야 ⇒ 예수 그리스도 ⇒ 사도 바울 ⇒ 마틴 루터 ⇒ 우찌무라 간조로 개혁사상이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1)예레미야 여호와 예배와 지방의 우상신 예배가 뒤섞이면서 유대인의 종교는 생명의 순수성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실행했고, 예레미야도 이 개혁운동에 찬성하고 개혁의 취지를 국민 사이에 보급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사업은 흐지부지 끝나고 국민의 암적인 인습과 우상숭배적 요소를 뿌리 뽑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실망 중에 그의 마음속에 새로운 영적 계시가 점점 강하게 나타났다.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렘 4:1-3). 율법과 전통의 형식적인 해석과 우상예배의 잡다한 가시덤불 속에 신앙의 씨를 뿌려도 자라지 못하니까 새 땅을 일구라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 4:4). 할례를 행하는 것은 여호와에게 속한 백성이 되는데 필요한 의식인데,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마음에 할례를 받아라. 육체의 할례를 가지고 자랑하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그것보다도 자기 마음의 가죽을 베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즉 마음의 개혁이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34).
새로운 계약이라는 것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지 돌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1-5). 정치나 사회생활이나 실제로 인간이 살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정의와 공도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의와 공도를 행한다는 것은 이방인과 고아 과부 기타 사회적으로 권리를 존중하라는 예언이다. 예레미아의 예언의 특색은, 여호와의 율법을 새기는 일이다. 마음의 가죽을 벤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진실한 태도로 여호와께 맹세하는 것이며, 사람에 대하여 공도를 행하여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으로, 어느 것이나 당시의 지배계급, 권력계급과의 충돌을 면할 수 없으며, 그 충돌이 사상적 방면, 종교적인 예배방식, 그리고 정치와 사회생활면에 나타났다. 율법을 전해 내려오는 문자로, 형식으로 지켜나가려는 사람은 율법의 정신을 죽여 버린다. 형식이 아니고 마음이다. 유전이 아니고 새계약이다.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고 마음의 진실로 드리는 예배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종교개혁 정신이었다. 2)예수 그리스도 예레미야의 정신을 가장 잘 이어받은 분이 예수시다. 예레미야와 예수 사이에 600년쯤 시간적 공간이 있지만, 예레미야의 종교개혁정신이 지하수가 되어 예수에 와서 또 분출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로서의 예수를 보는 것은 4복음서를 배우는데 대단히 필요하다.
예수의 적이 되고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학자, 바리새인, 제사장들, 즉 당시의 대표적 종교가였다. 이들은 모세이래의 전통을 지키고, 예배의식을 유지하고, 유대인의 종교생활을 지배해 온 사람들이다. 그에 대하여 정면에서 종교개혁자로서 맞서 나간 분이 예수였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바람이 임의로 불매 …”(요 3:3-8).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은, 새계약이 여호와로부터 주어진다고 예언한 예레미야의 말과 같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이다. '영으로 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마음에 율법을 새긴다' 또는 '새밭을 간다'든지 '마음의 가죽을 자른다'든지 하는 말에 해당되는 것이다. '바람은 임의로 분다'고 말한 것은 성령의 활동은 자유롭다는 말씀이고, 제도나 규칙이나 그런 것은 고정적인데 성령은 형체를 가지고 고정되는 일이 없이 자유롭게 활동한다. 즉 율법의 형식적인 속박에 대하여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않고 율법을 완성시키려고 왔다”(마 5:17). 즉 율법을 파괴함으로써 율법을 성취시킴이 예수의 개혁이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껍데기를 파괴하고, 율법의 정신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껍데기가 속생명을 질식시켜 버리려는 때에 껍데기를 파괴함으로써 속생명이 구출된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을 이룩한 것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먼저 예언한 개혁을 예수께서 성취하신 것이다. 예수는 모든 시대의 종교개혁의 중심점이고 근원이다. 3)사도 바울 예수다음에 사도시대에 와서는 말할 것도 없이 바울이 최대의 종교개혁자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것이 바울의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이다. 바울이 주창하고 있는 것도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요, 또 예수가 가르치신 선에서 지나지 않는다.
구원은 영적인 것이고 그에 대해 필요한 마음의 태도는 진실이다. 영과 진실이 구원의 근본이고, 형식적인 제도나 습관에 집착하는 것은 모든 영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속박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롬 3:28을 대단히 중요시하고 이것이 종교개혁의 근본적 원칙이라고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역설하였다. 바울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였다. 4)마틴 루터 루터의 종교개혁은 바울의 종교개혁과 같은 정신이 시대를 달리해서 분출한 것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롬 3:28을 근거로 한 것으로,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만'으로 주어지는 의(義)임을 주장한 것이다.
즉 구원은 영과 진실에 의한 것이며, 제도적 예배나 율법적 행위를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중심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 사람이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신앙에 의한 것이지 율법의 행 위에 의한 것이 아니다. 둘째, 그것을 바탕으로 성직(聖職)에 있든지 평신도이든지 불문하고 모든 신자에 게 전도의 자격과 책임이 있다는 만인사제론. 셋째, 독일민족은 독일민족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며, 자유롭고 또한 자주적인 민족생활과 정치적 지위를 확립해야 한다는 민족주의. 그러나 루터의 종교개혁은 불철저한 점이 남았다.
그는 가톨릭교회와 분리하고 또 만인사제의 원칙을 주창했지만, 교회라는 제도를 부정하는데 까지는 이르지 않고 독일민족의 교회로서 '탄데스키루에' 즉 국립교회제도를 만들고, 성직 제도를 남기고, 성직자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예전(禮典) 즉 성례전(Sacrament)-7가지 중 두 가지 즉 세례와 성찬-도 유지시켰다. 성직과 성례전 제도가 있는 교회라는 단체조직을 남긴 점에 있어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예수와 바울로 돌아간 것이 아니고, 가톨릭교회의 제도와 전통을 어느 정도 보존한 것이었다.
즉 영적인 종교개혁으로서는 불철저하게 끝난 것이었다. 5)우찌무라 간조 루터로부터 약 400년 후 우찌무라 간조가 나타났다.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는 종교개혁이다. 종교개혁의 역사의 흐름으로 본다면, 예레미야→예수→바울→루터→우찌무라, 이렇게 계속된다.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가 깨끗한 지하수의 수맥(水脈)과 같이 흘러서, 시대를 따라서 다른 나라에 용출하는 것이다. 하나의 종교개혁이 이룩된 것은 그 시대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그 종교개혁이 형식화되어서 생명을 잃게 되면 하나님은 또 시기(時期)와 국민을 택해서 영원한 진리의 새로운 분출을 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20세기 초에 일본을 선택하여 그중에서 우찌무라 간조라는 인물을 붙잡아 새로운 종교개혁사업을 하게 하시고, 구원의 진리를 세계를 향해 새로운 힘과 생명을 가지고 전파하게 하셨다. 그것이 무교회주의이다. 우찌무라의 종교개혁의 특색을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이 의로 인정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함이 아니요 믿음에 의한 다.’라는 롬 3:28의 원리를 강하고 분명하게 밝힌 점에 있다. 이것은 우찌 무라의 종교개혁의 근본이 된 신앙이다. 바로 이 순복음의 근본에서 출발 해서 무교회주의가 제창된 것이다.
둘째, 루터의 민족주의 사상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 민족은 일본민족의 역사와 문학과 도덕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이민족적 기반에 그리 스도의 복음을 접목함으로써 기독교는 정말 일본국민의 신앙이 될 수 있 는 것이다. 미국이나 영국 기타 외국화된 기독교가 아니고,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를 직접 일본 사람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우찌무라 간조의 일본적 기독교 주장이었다.
셋째, 교회에서 인정한 목사자격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성서를 가르칠 수 없다 든지 세례를 줄 수 없다든지, 또 그 유자격자인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자가 아니면 교회원이 될 수 없으며, 교회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자는 기 독신자로서 공인되지 않는다든가하는, 모든 교회의 제도와 전통에 대하여 비판적인 것이 무교회주의의 주장이다.
야나이하라 타다오(矢内原忠雄)는 설명하기를 “그(內村鑑三)의 무교회주의라고 하는 것은, 요컨대 속죄의 복음의 한 응용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이 죄를 용서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음이고 어떠한 율법의 행위나 제도적 예배에 의하지 않고 단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만으로 족하다는 것이 그의 무교회주의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3. 쿠로자키 고우기지(黒崎幸吉)
쿠로자키 고우기지(黒崎幸吉)는 무교회주의의 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교회주의의 특성은 단순히 교회조직을 가지지 않는다든가 성례전을 무시한다든가 하는 소극적인 면만이 아니라, 적극적인 면에서 믿음은 ‘생명’이라고 하는 점을 고려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관점에서 무교회주의를 볼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제일, 무교회주의는 일정(一定)한 교리나 신조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각 사람이 아주 자유로운 입장에 서 있음에도 그 신앙은 성경적이고 정통적이며 대체로 각 사람이 놀랄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또 성경제일주의로 성서연구에 전력을 집중한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에 접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신앙의 중심을 둔다.
따라서 무교회적 신앙은 성경전체를 기계적(機械的)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 즉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자기표현이라고 믿고, 성경을 연구함으로 성경에 자신의 본질과 의사(意思)와 행동을 표현하신 하나님자신을 발견하고, 그것에 의해 하나님의 생명에 접하고 결국에는 죄 된 자신을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하고,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자기 가운데서 발견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즉 무교회적 신앙은 하나님의 생명이 자신 가운데 살아있는 신앙이다.
제이, 무교회적 신앙은 이것을 굳이 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보수적(保守的), 정통적이고 소위 자유주의적(Liberalism), 근대주의적(Modernism)이지 않다.
신앙을 조목별로 나누어서 각각을 믿느냐 믿지 않으냐하면서 물어서는 안 된다. 단지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그 생명, 그 자신을 생활의 모든 면에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표현해야만 한다. 무교회주의는 일견(一見) 자유주의와 같이 보이지만 그 자유는 인간적인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자유이고, 또 무교회주의는 소위 정통주의(Orthodoxy)와 같이 보이지만 신조나 교리에 기계적(機械的)으로 속박되지 않는다.
제삼, 무교회주의자는 신앙의 외적 표현, 즉 그 언어나 행위에 의한 표현에 있어서는 대단히 다종다양(多種多樣)의 변화가 존재하는 것을 용인(容認)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생명이고, 생명은 미리 규정된 형태나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제오, 무교회주의는 정의(正義)를 중요시하는 점에서 현저하게 강하다. 하나님의 생명에 이어지는 새로운 생명에 살아가는 이상은 그 생명의 당연한 표현으로서 정의의 행위가 되는 것으로 이 세상의 불의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활하는 것은 무교회주의자가 아주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제육, 무교회는 형식을 멀리한다.
제칠, 무교회는 비전주의(非戰主義)다.
제팔, 무교회주의자는 제도적 규칙적 교회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교회 그룹 안에 있는 자는 모두 구원받았다는 보증도 없고, 단지 각자가 믿음으로 주님과의 교제에 들어가 주님과 동일한 생명에 살아계신 주님을 사랑하고 생활하는 것 가운데만이 진정한 에클레시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들의 마음가운데 넘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이 이상 자기를 제도나 조직 가운데 둘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구, 무교회주의자는 그룹에 있는 사람들에게 누가 구원받았고 누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는지를 정하고자 하지 않고, 또 결정하고자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다.
제십, 무교회주의는 단지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를 믿고, 그 말씀에 따라 모든 것을 처리하고, 그것을 위해서 세상과 싸우다 미움을 받고 배척당하며 기피당하면서 생활을 하는 것이 본질이다.
또한 쿠로자키는 무교회주의를 하나님의 ‘전체주의’(全体主義)라고 설명하면서 그 의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일, 무교회주의는 유일하신 하나님의 지배하에 복종하는 전체주의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인간의 평등과 자유를 주장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 대해서 자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고, 이 복종이 신앙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이러한 무교회주의는 다른 사람이 자기 영혼의 지배자가 되는 것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 …자기를 지배하는 사람은 하나님뿐이고 자신은 그 종이기 때문이다.
제이, 무교회주의의 이데오르기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의 실현이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실현될까? 그것은 어떤 인위적인 제도조직(organization)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유기적 생명(organism)이 되는 것이다.
제삼, 이러한 하나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는 무교회주의는 하나님의 전체주의인 것이 당연한 결과로, 신앙에 반한다든지 또한 이것을 방해하는 모든 사실에 대해서 싸움에 임한다. …특히 하나님의 전체주의인 무교회주의로서는 하나님이외의 것을 신(神)의 지위에 두고자 하는 모든 경향에 반대한다.
즉 교리라든가 제도라든가 의식이라든가 또는 성경의 문자 등을 하나님을 대신한 우상으로 숭배하고, 그런 것이 없이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경우, 무교회주의는 강력하게 이것을 배제한다. …이와 같이 무교회주의자는 하나님 앞에 서로가 평등하고,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은사의 차이가 많고, 사명의 차이가 있어도 일치의 영이 반드시 나타난다.
4. 츠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
츠카모토 토라지(塚本虎二)는 기존의 무교회주의자들이 많이 주장하는 극단적인 무교회주의, 교회개조주의, 교회에 가지 않는 주의에 대해서 찬동하지 않으면서 다소 다른 무교회주의를 주장했다.
우선 그는 무교회주의를 '순복음주의'라고 표현했다. 즉 철저한 신교주의, '믿음만'의 신앙을 뜻하는 것이지, 교회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회원이 되느냐 마느냐, 세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 성찬식에 참여하느냐 않느냐 그런 것들이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무교회주의’같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할만한 말을 쓸 필요는 없지 않는가? 오히려 단순하게 '순복음주의'라고 말하면 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서 그는, 현대의 개신교회의 신앙을 ‘퇴화한 가톨릭주의’라고 간주했다. 그래서 자신이 믿는 '신앙만' '그리스도만' '하나님만'의 신앙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 신교적 순신앙주의인 무교회주의는 이러한 교회중심의 신교적 교회주의에 반항한다고 말한다. 그는 무교회주의를 적극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순복음주의 '신앙만'의 신앙주의이고, 소극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회주의 및 현대 개신교회의 교회주의에의 반항이라고 규정했다.
그가 말하는 무교회주의란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하지 않고 신앙에 의한다”라는 바울의 고백, 루터의 소위 ‘믿음에 의하여’라는 신앙에 철저히 살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필요한 유일하고 충분한 조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무교회주의는 기독교와 더불어 오래되었다면서 “그리스도가 최대의 무교회주의자이셨다. 살리는 것은 영이다.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신 그는 무교회주의의 주동자이시다”(요 6:63)라고 한다. 그리고 이 예수의 생명을 산 바울이 무교회주의이고, 바울의 정신을 이어받은 루터가 무교회주의자라고 했다.
5. 무교회주의와 나이스크니즘(NYSKCISM)
“기독교는 제도가 아니다. 교회가 아니다. 신학도 아니다. 더구나 책은 아니다. 성서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말씀도 아니다. …기독교는 사람이다. 살아있는 사람이다.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치 아니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기독교가 만일 이것이 아니라면 항상 살아 있는 그가 아니면, 이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 무교회주의가 밝힌 신학적인 체계는 뚜렷하지 않다.
교회사학자인 민경배 교수는 우찌무라의 “무교회주의라는 것은 절박한 어떤 신학상의 사정에서보다도 오히려 구미(歐美) 기독교에서 독립하고자 한 욕구와, 세속적 제도로 화해해버린 일본의 교회와의 타협을 배격하는 거절의 정신에 의해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하나 표현되었을 따름이다. 따라서 무교회주의의 성립 배경은 일본적인 주체적 기독교의 모색, 반서양 기독교적 저항, 교회의 형식화 경화에 대한 도전이요, 따라서 주체성 확립과 개혁 의지가 그 기축을 이루고 있는 셈이었다”라고 했다.
정확히 말해 무교회주의는 교회의 정당성에 대해 처음부터 회의(懷疑)에서부터 출발해서 발전했다. 이에 대해서 구약학자이며 무교회주의 전도자인 세키네 마사오(關根正雄)는 기독교가 본래 다른 종교들과는 달리 제도의 창설에 흥미가 없었고, 실제 ‘교회’(ecclesia)도 마태복음에 두 번 나오지만 그것 역시 편집상 훨씬 후기에 부가된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 자신도 교파심의 특징인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반대하신 사실, 바울 자신도 초대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교파심에 크게 반발했던 점을 보아 교회가 본래 기독교의 본질이 아님을 지적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에클레시아라는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의 친교, 생활의 예배와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야나이하라(矢内原)도,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ekklesia)라는 말은 크리스천의 모임이라는 뜻일 뿐 어떤 특별한 제도나 조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말하는 ‘교회’, 제도로서의 교회는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전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또 교회로 비유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는 표현도 그리스도와의 사이의 깊고 영원히 신성한 사랑의 관계를 말한 것일 뿐 제도적인 의미는 전혀 없다는 것이 무교회주의자의 무교회주의에 대한 논리이며 주장”이라고 했다. 그래서 무교회주의는 교회, 설교단, 성가대, 헌금, 목사, 장로, 집사 따위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믿음만’, 그리고 신앙과 관련된 순수한 일만 자신들이 지켜야할 유일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이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제도를 지키는 것도 아니라, 믿음에 의한 것, 구원은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 순복음이고, 무교회주의의 원리이며 사명이라고 한다.
자신들은 결코 교회를 타파하거나 교회와 대립 항쟁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지 않지만 교회에 속해야 된다든지 성례전(Sacrament)을 지켜야 된다든지 하는 것은 순복음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정신도 아니라고 한다. 참 예배는 장소나 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도화된 교회에 출석하거나 교회에서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며 복음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찌무라 간조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하게 된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시적인 조직교회가 여러 가지 약점과 문제와 질병을 안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현존하는 교회들이 성경에 입각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선의의 저항감이 무교회주의자들의 사상저변에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교회가 우리의 신앙성숙과 구원여정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공동체임을 거듭 강조해 주고 있다.
교회 안에는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직분이 있고, 또한 직분자들이 함께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각자의 직분을 충심으로 섬기며 말씀선포, 성례전 시행, 권징사역 등이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성도들은 매주일 함께 모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자기백성을 위해 다시 오실 그 주님만을 소망하며 말씀으로 교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가 거룩한 모습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통적인 교회관이 아닌가.
루터를 비롯해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를 모든 신도의 ‘어머니’로 이해했는데, 특히 칼빈은 ‘어머니 교회론’, 즉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지는 모든 성도는 교회를 그의 어머니로 모신다고 주장했다. “참 교회에 관하여, 그것은 모든 경건한 자의 어머니이므로 우리는 교회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어머니인 교회는 우리를 당신의 태에서 잉태하고, 낳고, 젖을 주며, 기르고, 돌보며, 교육하고, 훈련하며, 안내하고, 지도하며, 훈육해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성숙한 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도, 신앙도, 신앙의 성숙도, 참된 영성과 경건의 훈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나이스크니즘은 이러한 칼빈의 어머니 교회론 위에 서있다.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어머니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생명의 잉태, 생명의 재생산, 생명을 영적으로 먹이고 기르는 일, 영적인 훈련과 훈육을 통해 성숙하게 하는 일, 성숙한 성도들을 세상에 보내어 삶의 현장에서 강한 그리스도인의 군사로 살게 하는 일, 바로 이 일들에 전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받은 기도와 말씀이기에 교회는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이 일에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이스크(Nyskc Movement)의 핵심이다.
Ⅲ. 결론
무교회주의(無敎會主義, Nonchurch Movement)가 성서중심의 신앙생활 추구, 즉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의해서 주어지고 구원은 행위가 아닌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하는 입장에 서있다는 점에서는 순복음주의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외 교회의 존재나 성경적 관습(전통)을 부정하는 것은 위험한 사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먼저 땅의 ‘흙’이라고 하는 물질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물질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자 그 물질이 사람이 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되었다(창 2:7). 즉 물질과 영이 하나가 되었을 때 살아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교회(ecclesia)는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 도피성, 방주 등과 같이 가시적인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유무형의 부분, 가시적인 것과 불가시적인 부분, 물질(교회 건물)과 영(예수)을 항상 분리하고 나누어 생각하려고 하기보다 언제나 하나로 인식하고, 또한 같은 선상에 놓고 볼 때에 건강한 교회관을 형성해 갈 수 있다.
오늘날 교회의 본질을 상실해가는 이 시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구현해 가는 그런 교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예배회복을 통해 교회의 회복을 꿈꾸는 나이스크의 회복 사상이 더욱 크고 강력하게 확산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