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메랑 법칙
부메랑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언어에도 부메랑 법칙이 적용된다. 타인에게 뱉은 말이 자신에게 그대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자기가 뱉은 말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들리게 된다. 타인에게 한 말을 자신이 먼저 듣기 때문에 그 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 하나님이 싫어하는 말
성경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사람이 나온다. 민수기 13장에서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낸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열 두 명은 모두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의 거주민과 성을 보고 기름진 땅이지만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열 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의 환경과 조건을 분석하여 타당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칭찬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다고 평가한다.
열 명의 정탐꾼은 눈에 보이는 환경과 사실을 바탕으로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였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는 그들의 말은 오히려 불신앙의 말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말은 부정적인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믿음의 말, 즉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근거로 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말이 된다.
우리의 여건이 어려울수록 선한 말과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한다. 잠언 18장 21절에서 “사람의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한다. 말로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살리는 말을 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살리는 말은 현상을 보고 그대로 진술하는 말이 아니라 믿음을 가지고 하는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바른 말은 무엇인가? 우리 주변에는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엄격히 말해 이러한 사람들은 교회생활이나 종교생활은 잘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믿음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사람의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환경과 조건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믿음의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것에 목적을 둔다. 다시 말해 믿음의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변화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은 환경을 평가하거나 진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긍정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말에는 권세가 있다. 때문에 말은 관리되고 다스림을 받아야 마땅하다. 사람의 마음에서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그렇기에 말을 다스리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성령께서 다스릴 때, 다시 말해 성령님께 민감할 때 우리의 언어생활은 변화될 수 있다.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사람의 말
성령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어떤 말을 하게 될까? 지금까지 살펴본 4차원의 주제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자. 인생의 3차원적 한계를 뛰어넘는 첫 번째 주제는 ‘생각’이었다.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긍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 그 생각이 구체화된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들 가운데 ‘죽겠다’는 말이 있다. “힘들어 죽겠다”, “답답해 죽겠다”, “어려워 죽겠다” 등 수 많은 말이 ‘죽겠다’란 말과 함께 쓰인다. 이러한 말을 쓰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실재로 부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일상의 말 한 마디로 사람의 인생을 규정짓는 것이 부당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의 파동학자인 에모도 마사루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그의 책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말한다. 물을 향해 욕을 하면 물의 결정체도 일그러진 모양의 결정으로 변하고, 물에 ‘악마’라는 글씨를 써서 붙이면 결정체의 가운데에 구멍이 뚫린 것을 관찰한다.
그러나 물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면 물의 결정체는 아름다운 육각형을 띠었고, ‘사랑해’라고 말했을 때 물 분자는 가장 아름다운 결정을 띠었다고 말한다. 사랑의 주파수가 물의 분자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체의 약 70%가 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몸도 사람의 말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면 그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물도 일그러진 결정을 형성하게 되고 인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뱉은 말은 자신에게 먼저 들리기 때문에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믿음의 말로 풀어놓아라.
3차원의 인생을 뛰어넘는 두 번째 주제는 ‘믿음’이다. 태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을 구했다면 그것을 표현, 즉 선포해야한다. 믿음의 생각을 했다면 믿음의 말로 표현해야 한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다만 그 문제를 어떠한 말로 풀어놓느냐가 중요하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성경은 마음으로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입으로 시인하는 단계까지 말하고 있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제도 입술로 시인할 때 완성된다.
성경에서 구하는 것을 받은 것으로 믿으라고 말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니라”(막 11:24). 말과 받은 것을 동시동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실 때 감사하신 후 명령하셨다.
놀라운 꿈을 꾸고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꿈을 말하라.
3차원적인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는 세 번째 주제로 ‘꿈’을 말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었다면 그 꿈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선언해야 한다. 변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길들인 코끼리와 같다.
어린 코끼리의 목에 줄을 매달아 놓으면 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끈을 풀어 놓으면 코끼리는 도망가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사람은 줄에 매달린 코끼리와 같아서 변화를 위해 피와 땀을 흘리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조정하여 단번에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에게 ‘노력’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시고 그 노력을 통하여 한계를 넘어서기를 바라고 계신다.
미국 여성 사업가 중에 여자의 속옷을 팔아 부자가 된 오스틴이라는 사람이 있다. 미국 여성들의 체격이 커지면서 ‘스몰’, ‘미디엄’, ‘라지’ 등과 같은 기존의 사이즈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오스틴은 체격이 큰 여성들을 위해 속옷을 만들고 ‘뚱보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속옷은 팔리지 않았고, 오스틴은 고심 끝에 ‘뚱보형’이란 용어 대신 여왕이 입는 치수를 뜻하는 ‘퀸즈 싸이즈’로 바꾸었다. 그 때부터 많은 여성들이 속옷을 사기 시작했다. 오스틴의 성공은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말을 바꾸기까지 치열한 고민과 노력이 있었음을 말한다.
이철환 작가의 <곰보빵>이란 책에 곰보빵을 먹지 않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아이가 ‘곰보빵’을 먹지 않는 이유는 사람들이 아이의 아빠를 곰보라고 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곰보빵’을 ‘소보로빵’이라고 불렸을 때 아이는 비로소 곰보빵을 먹을 수 있었다. 같은 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마음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변한다.
말은 자신의 인생과 타인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말은 반드시 인생을 변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의 말은 환경과 조건이 변해있는 바로 그것을 보고 말하기 때문이다.
“말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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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라는 책이 있다.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는 산티아고라는 소년의 흥미진진한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양치기 소년 산티아고는 며칠 동안 계속 반복되는 꿈을 꾸고 자신의 비전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꿈을 찾는 길을 알려주는 노인 살렘왕 멜기세덱은 소년에게 빌립보서 2장 13절을 말해준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여행을 하는 동안 소년이 깨닫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인생의 연금술이 무엇인가? 그것은 철이나 납을 금으로 바꾸어 내는 신비로운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발견하고 갈고 닦아 그 목표를 잘 이루어 내는 것이다.
잠언 29장 18절에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는 말씀이 있는데 KJV에서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한다. “Where there is no vision, the people perish”(비전이 없는 백성은 망한다.) 달걀을 품어주지 않으면 병아리가 되지 못하듯, 꿈을 품지 않은 사람에게 내일의 성공은 없다.
꿈꾸는 야곱
쌍둥이 가운데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은 ‘붙잡다’, ‘빼앗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망에 붙들린 사람, 잘못된 꿈에 붙잡혀 살던 사람이 야곱이었다.
야곱은 형의 배고픔을 이용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빼앗았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아버지가 장자 에서에게 주어야 할 축복권까지 가로채 버린다. 모든 것을 빼앗긴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하고 야곱은 분노한 에서로부터 도망하여 정든 고향과 가정을 떠나는 신세가 되어야 했다. 도망하던 중 야곱이 루스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면서 꾸는 꿈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된다.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아야 할 야곱에게 오히려 복의 근원이 될 것이며 이 꿈이 이루어 질 때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하시리라고 약속해 주신다. 모든 것을 떠난 후 혼자인줄로만 알았던 야곱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쁨에 넘치게 된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던 땅 ‘루스’는 ‘분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동행 이후로 루스를 ‘하나님의 집’ “벧엘”로 바꾼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존재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존재로 바뀌게 된다. 야곱은 인생의 가장 큰 위기에서 꿈을 꾸고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에서: 꿈 없는 인생
야곱이 꿈을 꾸고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시간에 형 에서는 장자의 명분과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아 달아난 야곱을 증오하고 있었다. 에서는 꿈을 잃어버렸다. 꿈을 잃어버렸을 때 에서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만다. 세상 모든 것을 잃어 버렸다 해도 꿈꿀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많은 것을 간직한 사람이다.
에서는 모든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긴 후 아버지를 찾아가 남은 축복이라도 좋으니 자신에게도 축복해 달라고 말한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에서는 그 때 비로소 통곡을 하며 아버지의 침상에서 물러난다. 주경가들은 이 장면을 성경에 기록된 최고의 후회, 최고의 통곡이라고 한다.
인생의 위기: 꿈을 꾸어야 할 때
독일의 저명한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박사는 자신의 신학을 “희망의 신학”이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몰트만은 병사로 징집되어 전쟁터에 나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수용소에서 갖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또한 자신이 태어난 함부르크가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그 곳에 살고 있던 가족들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몰트만은 낙심하여 절망에 빠지게 되고 자살까지 생각하게 된다. 절망의 상항에서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성경에서 외롭고 처절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보게 된다. 몰트만 박사는 예수님을 통해 절망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가장 어둡고 캄캄한 절망에서 부활의 승리로 일어나는 예수님을 보면서 희망의 신학을 발견하게 된다.
가장 위기의 순간이 몰트만에게는 평생을 좌우할 방향을 결정한 시기였다. 인생의 위기는 포기하고 절망해야 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이다. 꿈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멋진 꿈은 나의 인생을 멋지게 만들어 준다. 이것이 진정한 꿈의 신학, 희망의 신학이다.
꿈만큼 인생은 위대하다
우리는 한 인간의 위대함을 꿈의 크기로 재어 볼 수 있다. 꿈이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꿈이 큰 사람은 큰 사람이다. 하늘세계를 꿈꿀 수 있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지혜가 탁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했던 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개인이나 가정, 공동체, 교회, 민족을 축복하실 때 먼저 꿈을 주신다.
교회는 꿈을 파는 곳이다. 교회 강단은 꿈을 나눠주는 곳이다. 목사는 설교로 성도들의 사명, 비전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다.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실패하여 주님 앞에 찾아왔다가 성공하는 꿈을 꿀 수 있어야 한다. 병든 사람은 건강한 꿈을 꾸어야 한다. 쓰러진 사람은 다시 일어서는 꿈을 꾸어야한다.
한나는 슬픔을 안고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태의 문이 열려 사무엘을 낳았다. 히스기야는 죽음을 선고 받고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다가 생명을 연장 받았다. 이사야는 절망 중 성전을 찾았을 때 역사를 이끌어 가는 사명을 받는 꿈을 꾸게 되었다. 언제나 역사는 꿈꾸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미래도 꿈꾸는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1940년대에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라는 뉴질랜드 청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에베레스트 산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하였다. 그는 내려오는 길에 유명한 말을 남겼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라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기어이 네 정상에 설 것이다.” 약 10년 후인 1953년 5월 29일, 그는 다른 산악인 두 명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다. 실패는 인생의 가장 보편적인 경험이다. 누구나 실패한다. 실패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보장된 승리의 미래를 위한 주춧돌이다.
사람은 꿈의 높이만큼 높아진다. 꿈은 사람을 비상하게 한다. 그래서 귀머거리, 벙어리, 소경이었던 헬렌 켈러는 “날 때부터 장님으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불행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눈이 있어 보기는 보아도 비전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초라한 제자들을 앉혀놓고 언제나 꿈을 이야기하셨다. 예수님은 눈앞의 것에 관심을 두는 제자들에게 위대한 비전을 품게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빈약하고 초라한 꿈을 큰 꿈으로 키워 주신다. 처음 전도하실 때 이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가자고 말씀하시지만, 후에는 온 천하 만민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막 16:15)는 세계선교의 비전을 품게 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믿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바라보게 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겨자씨 한 알로도 큰 숲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의 무한한 가능성을 심어주신다. 또 적은 양의 누룩 한 숟가락으로도 밀가루 한 통을 다 부풀게 하는 믿음의 위력을 확신시켜 주신다. 한 알의 밀 알이 땅속에 묻힘으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게 하신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무한한 가능성의 꿈과 비전을 주신다.
약한 비전에서 강한 비전으로 전환시켜 주신다. 예수님은 연약하고 무능한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행할 것이라는 새 꿈을 품게 하신다. “너희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행하리라.” 예수님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하다. 제자들의 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나의 제자들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역사가 바뀐다.
“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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