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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으로 돌아가라

목차

1부. 생명의 말씀으로 지은 신앙

1장.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

2장. 신앙의 열쇠(보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3장.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

4장. 뜨거운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

5장. 겨로 지은 신앙인가 쌀로 지은 신앙인가

2부. 말씀안에 있는 참된 신앙의 길

1장.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으로 나타내셨나

2장. 예수님을 참으로 알려면

3장. 하나님의 뜻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4장. 말씀과 기도와의 관계

5장. 성육신 되신 말씀이 주는 메세지

3부. 재창조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씀.

1장.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는 신앙

2장. 말씀이 선언하는 제 일성.회개하라

3장. 속사람안에 역사되어져야만 하는 말씀

4장. 주신 말씀, 깨닫는 것이 신앙의 첩경

5장. 창조의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4부. 지속적인 신앙성장 말씀이 세운다

1장. 말씀에 맛이 있는가

2장. 말씀안에 있는 신앙 영양분

3장. 말씀의 성품

4장. 말씀이 요구하는 성도의 기본성품

5장.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어떤 말씀인가

5부. 능력있는 삶을 위한 생명의 말씀

1장.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2장. 말씀은 성도의 삶을 지키는 방패

3장. 치료의 능력으로서의 말씀

4장. 종말과 생활-어느 것을 위한 말씀인가

5장. 말씀의 뿌리 얼마나 자라고, 깊이 내렸는가

6부. 말씀과 실천 그리고 성도의 생활

1장.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장. 주시는 말씀 어떻게 받아야 하는가

3장. 살아있는 말씀신앙 이것이 생명이다

4장. 참다운 제자

5장. 전해야만 하는 생명의 말씀

머리글


“말씀의 자리” 이 자리는 성도와 교회가 서 있어야만 하는 진정한 신앙의 자리요 하나님을 따른다고 하는 모든 사람과 단체가 서 있어야만 하는 본질적인 신앙의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는 “말씀론”이나 “말씀의 신학”이 독자적으로 취급되어 강의되어지거나 주된 신앙론으로 다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왜 말씀과 말씀론을 배워야 하는지 참으로 마음속 깊은 심부(心部)에 와 닿는 것이 빈약하기 이를데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과 신학에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말씀이 빠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어떠한 신앙요소들일지라도 그 존재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의 특징이다. 사람의 온 몸에 신경이 골고루 퍼져 있어 사람을 살리는 것과 같이 모든 신앙의 요소 요소에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신앙 요소에 들어가 있어 생명력을 공급하여 신앙을 살아있는 신앙으로 인도해주고 세워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란 절대요소는 이러한 신앙상의 제반요소들이 기독신앙으로 남아있기 위해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생명적 기반이 된다.

20세기는 세계 기독교사적으로나, 안으로는 한국 교회사적으로 큰 역사의 획을 그어 놓은 한 세기였다. 전자는 기독교 세계관의 딜레마를 가져오는 결정적인 세기가 되어 기독교로서는 치명적인 위기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곳곳에서 퇴조를 보였고, 다원화 되어진 사회와 역사속에 휩쓸려 후기 기독교의 시대를 재촉하여야만 했다. 그리고 후자의 한국 기독교 역시 근본주의적 신학과 신앙의 영향하에 교회 성장을 1980년대 후반까지 이루어 왔으나 내외적인 여러 문제에 부딪쳐 1990년대에 들어와 교회 성장의 뚜렷한 둔화와 감소라고 하는 위기적 국면을 맞고 있다. 따라서 오늘의 모든 교회는 크나큰 과제를 안고 20세기 말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의 교회와 신앙이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말씀으로 돌아가 신앙과 삶이 말씀안에 온전히 세워지는 것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고 믿고 있다. 현대의 다원주의적 사회와 문화속에서 기독신앙을 위협하고 혼란시키는 모든 사조들을 잠재우고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말씀으로 돌아가” 올바른 신앙의 가치관을 그 위에 세워놓는 길 뿐이다. 그러므로 본서는 성도들이 말씀의 중요성을 깊이 재인식하여 말씀이 신앙의 제반 요소들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다시금 일깨워 신앙을 흔들리지 않는 반석위에 세워 놓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1. 생명의 말씀으로 지은 신앙

1.1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과 생활이어야만 한다. 말씀은 신앙의 실질적인 생명으로서 어떠한 요소도 이에 우선할 수 없다. 성경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롬8:9)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가르치시기를 그리스도의 영이라 함은 성도에게 주신 자신의 말씀(요6:63)이라며 한마디로 일러 주시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성도되고, 참다운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에 충실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말씀은 성도에게 있어 가장 특별하고도 고유한 신앙 내용이며 필수 불가결한 신앙의 기초이다.

욥은 성경에서의 특징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커다란 고통과 시련을 오직 신앙으로 이겨내고 극복한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같은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를 이겨내고 승리케 된 욥의 신앙의 진정한 기초는 어디에 있었을까? 욥은 강한 믿음의 사람이었으니 오직 자신의 하나님께로 향한 강한 신념에 기초한 오직 믿음으로서 이겨낸 것일까? 아니면 무릎이 다 헤어져 나가도록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류를 통한 기도로 말미암은 믿음의 힘이었을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할 수 없이 참아내야만 하는 소망의 인내심에 근거한 믿음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단지 그가 의인이었기에 그의 결백으로 모든 것을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믿음으로 이겨 냈을까? 욥은 자신의 삶의 위기를 신앙으로 극복해 냈는데 과연 그의 신앙이 무엇으로 지어진 신앙이었기에 이같은 고난을 능력있게 이겨낸 것인가? 그것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욥의 신앙을 아는 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욥과 그의 신앙의 기초는 한결같이 자신의 신념에 기초한 하나님께로 향한 “믿음”이나 “인내”였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접근 때문에 욥의 신앙의 근본을 피상적으로 흘려 버리거나 본질을 지나쳐 버린 경향이 없지 않다.

욥의 신앙의 특징을 알기 위해서 친히 자신이 고백한 신앙 고백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욥은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라고(욥23:12) 고백하였다. 이렇듯 그의 신앙을 특징지으며 삶을 떠 바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말씀” 이었다. 욥은 그 모진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겼고 자신의 주어진 환경과 삶의 조건들과는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치 아니하였으며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다고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치 아니하였음이니라”고(욥6:10)하여 거듭해서 그는 자신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욥이 보여준 이 귀한 신앙적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신앙이야말로 가장 견고한 신앙과 믿음을 세우는 초석임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기독 신앙의 믿음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신이 강하게 의지하겠다고 하는 강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기도에서 나오는 것인가?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기독 신앙에서 믿음이란 정체성의 본질이 거기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 참된 믿음이 어디서 나오는가에 대한 보다 분명한 성경적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기독교인의 믿음이란 신비한 체험을 한 이후에 파생되는 자기 확신에서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독 신앙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내용이라는 방향과 형태에 의해 만들어지고 형성된 믿음으로서 성경에서는 이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선언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그 믿음의 원동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로마서 10:17에서 결정적인 근거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을 들음에서 온전한 신앙과 믿음의 싹이 터 올라오고 진정한 기독 신앙의 믿음이 파생되어져 나오는 것이다. 성경에서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마음으로, 귀로, 눈으로, 듣고, 붙들고, 쓰고, 묵상하고 성경을 통해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항상 귀를 귀울여 들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나 생각등과 같은 체계들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기독교 사상이 있으며, 행동철학이 있으며, 나아가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향과 신앙의 비밀과 위로와 약속의 비밀들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왜 하나님을 믿었으며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흔들리고 방황하고 갈팡질팡하는가? 왜 당신의 신앙이 무기력하고 허약해지며 기갈속에서 헐떡거리며 갈등하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택하지 아니해서인가? 아니면 당신이 노력은 하는데도 하나님이 아예 당신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 같아서 그런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위에 온전히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과연 말씀안에 있으며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 신앙인지 이에 대하여 자신을 냉철하게 되돌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중하게 여긴다면 어떠한 질곡에 빠져든 삶이라고 할지라도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기까지의 소망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씀 가운데 있는 자는 하나님이 친히 그의 능력을 이끌어 내시고야 만다는 것이 욥의 신앙이 보여주는 큰 신앙의 교훈이다.



1.2 신앙의 열쇠(보배)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긴 귀한데 왜 귀한지를 몰라 그 귀한 것을 깨닫지를 못하여 어리석은 신앙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경우들이 흔하다. 올바른 신앙을 세워 나가기 위해서는 신앙의 문을 열어주는 보배 곧 말씀의 중요성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떨어져 나갈때 성도들에게는 과연 어떠한 위기가 닥쳐 오는가? 신앙의 큰 인물인 다윗의 삶과 그 교훈을 통해 알아보자.

다윗은 큰 신앙인이요 이스라엘의 빛나는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앞길을 막을 자가 없었다. 막강한 왕권과 군대를 가지고 사울은 다윗을 해하려고 가진 모략과 추격을 다하였지만 결코 다윗을 잡거나 해하지는 못하였다. 다윗은 블레셋 군대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리고난 이후에 열화같은 국민의 지지와 하나님 안에 있는 신앙으로 승리를 거듭해나가 장차 이스라엘 왕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결국 사울왕에 이어 왕권을 넘겨받아 이스라엘 역사에 꽃을 피우는 찬란한 다윗 왕국을 건설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성장을 거듭하던 다윗이 졸지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의 늪으로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이 반전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 사건은 지금까지 승승 장구하며 평온하던 그의 삶을 뒤바꾸어 놓아 고통에 고통을 거듭하는 협곡으로 내몰리게 만든 것이다. 그 사건이란 교모하게 계획적으로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처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은 사건이었다.

다윗의 이러한 범죄의 신앙적 관점에서의 근원적인 이유를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대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라고(삼하12:9) 하였다.

이와같이 다윗의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해 버린 신앙의 그릇된 자세에서 기인된다. 말씀에 대한 자세가 스스로의 요인들에 의해 흔들리고 무너져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고히 세워져 있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말씀의 중요성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국의 왕이었던 사울의 죽음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칭하고”라고(역대상10:13) 성경은 사울의 죽음의 원인을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죄악의 침입을 막고 성도를 공격해 오는 세상과 죄악으로부터 삶을 방어하는 유일한 방패막이다. 앞에서 살펴본 다윗이나 사울의 경우에서 여실히 드러났지만 말씀에 대한 자세가 흩어진다면 죄의 방어벽은 흔들리고 허물어지고 마는 것이며 죄가운데 빠져드는 불신앙적 행위와 배교의 문은 넓게 열려지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안에 있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실질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고자 하는 살아있는 노력이다. 온전한 말씀안에 있는 삶은 정상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삶을 말한다. 그만큼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요하다는 깊은 뜻이 들어 있다.

아모스서 8:11-13절 이하에 나타났듯이 사람들이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에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고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 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더라”고 한 것은 그 만큼 말씀이 없는 삶이 얼마나 방황케 되는냐 하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이같은 모든 방황과 기갈의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 ---중략---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요6:33-35)한 말씀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성경은 이렇듯 신앙의 모든 보물이 들어 있는 산실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외치는 궁극적인 목소리를 바로 듣고 보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성경을 읽어대고, 실적주의로 외워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또 성경을 무조건 본다고 해서 그 공적으로 천국가고 구원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씀이 외치는 소리의 목적이 있으며 그 목적에 합당한 생명의 소리를 듣고 깨달아야만 한다. 그 목적의 소리란 그리스도이며 그 분을 만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씀이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가 또한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 있고 성경속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으로 보고 듣고 읽음에 이 목적에 도달하여야만 하는데 그 목적이란 단연코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의 목적을 무시한 채 외적인 요소들에 신앙의 주안점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개 말씀으로 자신들의 삶과 생각이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리어 자신의 신념체계나 가치관의 기준이 마치 신앙의 전부인양 판단하고 오히려 말씀을 자신에 세워놓은 체계들에 갖다 맞추어 도리어 말씀이 수단으로 이용되는 경향마저 있다. 이것은 반드시 극복되어져야만 하는 신앙적 과제이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이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마13:44)고 하였고, 또 천국은 마치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5)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보화가 들어 있는 밭이나 값진 진주는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는 밭이 다름아닌 말씀인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그것을 발견할 길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귀하고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하여 지불해야 하는 자기 소유가 다름아닌 말씀을 사는 투자인 것이다.



1.3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 사랑

당신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참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이를 당신은 느끼고 있는가?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느끼고 확인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단순한 감정적 확신이나 자신이 설정해 놓은 나름대로의 신념체계나 의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의 열쇠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과 성도간의 사랑의 관계, 이 관계는 기독 신앙의 정체성을 밝혀 주고 결정해 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이라는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동일한 인격을 부여하여 주셨으며 그 인격의 일체안에서 그 관계를 결정하고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관계를 결정지어 주는 핵심적 신앙 요소를 자신이 무조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기 신념적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굳은 신뢰를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이를 소위 “믿음이 강해야 한다”는 의식속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정된 믿음에 의한 관계는 자신의 의지 내지 신념에 의해서 나온 것이기에 유사해 보이지만 다른 것이다.

성도의 믿음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에 의한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고 하는 것이 기독신앙의 큰 비밀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하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의 여하에 의해서 가려진다.

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는 말씀이 있는데 요한일서 2:5절이 그것이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고 하였다.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말을 하지만 말씀이 그 마음에 없으면 실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짓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외적으로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받아들여 그 속 사람에 깊이 심기워져 있다면 그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 신앙의 뚜렷한 신앙의 정체를 밝혀 주고 있다는데서 매우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말씀이 신앙에 미치는 영향과 비중이 어떠한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어떠한 믿음을 지녔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그의 믿음이 어떤 신앙적 특징으로 이루어졌느냐 하는 것은 반드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창세기 12:4절에 의하면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 ”라고 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처음부터 말씀을 좇아 갔고 이것에 의해 그의 신앙이 기초되어 성장해 나갔음을 말해준다.

아브라함은 말씀으로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으며 하나님이 그가 백세때 얻은 아들 이삭을 드리하고 하였을때 그 명령을 따라 드렸다. 언제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그 안에서 생각했으며, 판단하고 결단했으며 생활해 나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와같은 신앙에 충실한 아브라함을 때마다 인정하셨으며 그것을 의로 여기신 것이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며 또한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을 올바르게 사랑하였음을 말해준다.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한다. 이에 대한 신앙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신 바가 있는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요14:15)하셨으며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요14:21) 하셨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따라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그 말씀에 따라 다스려 나가지만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며 그 길은 배역의 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은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은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아니면 무시하고 듣지 않고 있는가 거기에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고 있느냐 아니하느냐에 대한 신앙 생명의 관건이 달려 있다.



1.4 뜨거운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은 어디서 나오는가? 대부분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신앙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소위 성령을 받기를 사모하며 성령을 받으면 기뻐 그 뜨거운 가슴을 안고 뛰기도 한다. 그로 말미암아 받았다고 하는 은사대로, 능력대로 일한다고 교회의 일에 바빠지거나 열심을 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좋게 시작한 뜨거운 신앙이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식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좀더 지속적이고 현명한 신앙관속에 계속 뜨거움을 지속시켜 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음식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주실때의 일이다. 그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져 비로서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희들에게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저들이 고백적으로 서로 말하기를 “---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며 그 뜨거워진 마음을 가지고 가던 길에서 돌이켜 즉시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다. 뜨거운 신앙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의미 깊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때 제자들은 고백하기를 “성경을 풀어 주실 때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눅24:30-33)한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뜨거운 신앙이란 과연 무엇인가?

분명 신앙은 마음이 뜨거워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뜨거움이 분위기에 따라 기분이 뜨거워서도 아니고, 감정만 뜨거워서도 안된다. 신앙은 흥분이 아니며 감정의 도취도 아니다. 분위기에 휩싸이는 군중심리적 열광주의여서도 안된다. 정녕 마음이 뜨거워져야 하는데 그 마음을 불태우는 것은 “성경을 풀어 놓을때” 일어나는 것이며 말씀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삶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그 뜨거움은 쉽게 사그러지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타오르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이고 계속적으로 치솟는 열정과 신앙을 지탱시켜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신앙의 원동력이다.

이 뜨거운 신앙은 자신들이 진정 가야할 삶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고 가던 곳에서 돌이켜 생명력 넘치는 신앙의 길로 되돌아 서게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뜨거움은 회개의 불로부터 시작되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는데 그 말씀은 모든 사람의 생각을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게 하신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속사람의 죄의 실체를 내놓기를 거부한다. 어두움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두움이 어두움을 물리쳐 몰아낼 수가 없다.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된다.

말씀이 곧 어두움을 물리치는 빛이다.

그러나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이 어두움을 비추지만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이 빛이 들어가기만 한다면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죄인된 실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주며 모든 원죄와 자범죄의 실상을 비추어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보게 한다.

결과로 모든 죄와 죄악을 토해 내도록 하여 회개의 불을 일으키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여 삶을 소망과 사랑으로 이끈다. 이를 촉발케 하는 회개의 불은 태울 것을 태우고, 소멸할 것은 소멸하고, 새로운 속 사람의 모습을 바꾸어 놓아 소망의 삶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사람으로 재창조하여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안에는 삶을 온통 변화시키는 감동적인 뜨거움이 들어 있다. 당신이 정녕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을 가지려면 하나님의 말씀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있는 사랑의 불에 의탁하라. 거기에는 진정한 뜨거움이 있어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결코 꺼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신앙의 진정한 불이 있는 것이다.



1.5 겨로 지었는가 쌀로 지었는가

밥을 무엇으로 지었느냐에 따라 밥의 성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어떤 성분의 밥을 지었느냐에 따라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의 건강과 체질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믿음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같은 믿음이 아니다. 세상의 믿음과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리스도인 안에서도 믿음의 양식에 따라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속담이 있다. 어떠한 신앙의 요소를 심느냐에 따라 신앙의 성격이나 모습은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겨로 지은 밥을 먹고서는 안된다. 쌀로 지은 밥을 먹어야 한다.

예레미야 23:28에 보면"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는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고 하였다. 쌀로 지은 밥을 먹을때 온전하고 튼튼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 건강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필수불가결한 신앙 양식이다.

이 양식이 부족하면 절대로 신앙 건강을 튼튼하게 유지시켜 나갈 수가 없다. 자신의 신앙이 겨로 지었는가 쌀로 지었는가를 심사숙고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먹는 양식의 본체는 겨가 아니라 쌀이다. 신앙에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본체는 어디까지나 말씀이다. 말씀으로 지어야 신앙이 신앙되는 것이다. 알맹이가 없는 쭉정이는 결국 버려지듯이 쭉정이로 된 신앙(겨의 신앙)은 스스로 병들고 마는 것이다. 겨는 본체인 알맹이를 돕고자 있는 것이지 알맹이가 껍데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말씀을 위하여 기적이나 은사가 존재하는 것이지 기적이나 은사적 요소들을 위하여 말씀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씀이 떠나 버린 신앙은 아무리 많은 표피로 둘러 쌓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생명력이 없는 것이기에 외양은 잘 믿는 사람같이 보이고 열심히 하여 훌륭한 신앙인같이 보이지만 속과 내용은 비어져 있고 실상 병든 경우가 적지 않다.

쌀로 지은 밥을 먹고 사는 성도는 좌가 무엇이고 우가 무엇인지 분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좌로나 우로나 결코 치우치지 아니한다. 불신앙적이거나 온전치 못한 비본질적인 신앙의 길로 빠져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한 진정한 성장은 말씀안에서 양육되어져야만 정상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만 의지하고 따라 가다가는 반드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뜨거운 신앙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안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능하게 된다. 정녕 성도의 신앙이 신앙되게 하는 것은 쌀로 된 말씀신앙에서 되는 것이다. 그안에서 진정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참된 진리의 길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2. 말씀안에 있는 참된 신앙의 길

2.1 하나님은 자신을 무엇으로 나타내셨나

하나님은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이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역사 이래로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 모습을 보기를 원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이야 말로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어떠한 형태로든 그 모습을 성도들에게 내보이고 계시며, 성도는 이렇게 드러내 보이시는 하나님을 만나보아야 신앙의 다음 단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성도들은 마치 예수님을 앞에다 두고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는 빌립처럼 또 다시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매달리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보고, 만나는 귀한 방법을 알려 주셨으며 그 길은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올바른 신앙 정립을 위한 필수적인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이 길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정체성을 밝혀 준다고 하는데서 특히 주목해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눈으로 보아야만 하는가? 실제의 모습을 그렇게 보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신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선언은 요한복음의 서두에서 나온다. 1:1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라고 하였다.

이는 단적으로 말씀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다 분명하게 밝혀주고 그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는데서 매우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본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곧 하나님을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계시하는 생명의 비밀이 들어 있으며 이 비빌이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 말씀의 특징이 지니고 있는 신앙의 비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요한복음 6:38-39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것은 나의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셨다. 바로 예수님의 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보내신 이의 핵심이다. 또한 이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조금도 바꾸어지거나 변질되어짐이 없이 세상에 선포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요한복음 12:44-45를 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 대한 영접은 곧 하나님에 대한 영접으로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구약의 완성은 신약에서 성취되는데 이는 구약의 그 말씀이 신약에 와서 성육신화 되어짐과 동시에 이 말씀이 모든 구원의 완성적 사역을 성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요19:30)하는 종결에 대한 선언은 단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위한 일단의 사건들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끝났다고 하는 한 테마적 사건에 대한 “이룸”이 아니라 이미 인간의 타락 이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말씀에 대한 선언적 의미의 종결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루심은 곧 구약의 완성이요 인간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말씀의 사역에 대한 완성인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언이요 말씀이신 것이다. 고난을 당하시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의 선언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님은 말씀의 완결이요 선언의 종결이요 모든 약속의 완성으로 십가가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한 계시적 선언인 것이다.

저기에 가장 완전한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들어 있는 것이다.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말씀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늘도 가장 가까이에서 당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사람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보이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만질수 있는 계시이다. 가장 확실하게 보이는 계시는 바로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것보다 더 완전한 계시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하나님의 확실한 뜻과 계시를 가장 확실하게 아는 것이기에 이 계시를 제쳐두고 새로운 계시를 받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교훈, 그리고 그의 가르침을 배우라. 거기에 성도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에 대한 최상의 하나님의 뜻과 성도들이 찾고자 하는 최상의 계시가 들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웠으면 그 말씀대로 행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이며 계시이며, 뜻이다. 거기서 구하며 얻어진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의 의인 것이다.

오늘도 그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향해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2.2 예수님을 참으로 알려면

예수님을 바로 안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아마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제일 중요한 신앙의 요소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잘못된 신앙들이 양산되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를 일이키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는 있으나 실제로는 예수님의 존재의 본질과 성격을 “참으로 아는데”는 실패해 버리고 만다. 이런 사람들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참된 신앙에 이르기 위한 “참으로 아는데”는 이르지 못하여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고 마는 것이다. 참된 신앙에 이르는데 실패하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갔던일을 기억해보자. 삭개오는 내외적인 여러 장애적 요소들을 뛰어넘어 예수님을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자리로 올라간 것이다. 이것은 관념적 신앙을 깨버린 것으로 그에게 일대 신앙상의 전환을 가져온 귀중한 신앙의 자리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라고 하는 예측으로 신앙을 단정하거나 적당히 아는 것으로 그쳐 버리는 경우가 예사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귀찮아서 그 생명의 말씀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의 자리는 엄밀히 말해 자기 편리한 엉뚱한 자리에 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방황할 수 밖에 없으며 비본질적인 문제로 흔들리고 갈등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은 결코 예측이나 상식으로 끝나지 않으며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신앙이 예측에 머물러 버리는 한 그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이지 예측 이상의 것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실패하고 낙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참으로 알기 위해서는 꼭 한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이 요한복음 17:8의 말씀에 나타나 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깊이 새기어 보자. “나는”이라는 첫 말씀은 “예수님”자신이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라고 하신 것은 곧 “하나님”을 두고 하신 것이며 “내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하셨는데 “저희”란 다름아닌 “성도” 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저희는 “이것을 받고”라고 하셨는데, 성도란 “이것”곧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말한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셨고 이를 예수님이 받아 성도에게 주신 것은 다름아닌 “말씀”인 것이다.

더 나가서 다음 말이 대단히 중요한 뜻을 담고 있는데 “이것” 즉 말씀을 받은 사람들야말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라고 하셨다.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줄을 “참으로 안다”고 하셨다. 이것이 사람이 진정한 신앙에 이르는 “참으로 아는 참다운 신앙”에 이를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의미깊은 신앙상의 말씀이다. 결국 이렇게 참으로 아는 사람들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도 굳게 믿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말씀안에 있는 자만이 참다운 예수님을 알 수 있으며 믿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냈다고 하는 것이 진실하게 믿어지기 위해서도 이 “말씀”이라고 하는 신앙의 필수적인 기본요소는 언제든지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알되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예수가 아니라 “말씀안에 있는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믿어지기 위한 신앙의 대전제 조건이다.

삭개오가 뽕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풀고 예수님을 만났듯이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리스도를 발견하여야만 한다.

성도가 예수님을 아는 신앙이 상식적으로나 피상적인 앎에 머물러서는 진정한 신앙에 이르를 수가 없다. 말씀위에 올라 가야만 한다. 그리고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바라보고 참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바쁘다고 말씀을 배우려고도 노력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머무르는 한 당신의 신앙은 “못자리 신앙”밖에 되지 않는다. 못자리는 어느 정도 자랐다 깊으면 더 이상 열매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고 허리가 아프고 여러사람의 손을 빌리더라도 못자리에서 모를 떼어 내어 모내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열매가 되기 때문이다. 당신의 속사람에 구체적인 말씀을 심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참된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한 기초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속에서의 그리스도를 만나라. 거기에 참된 신앙에 이르는 예수님 곧 세상에 오신 구주를 발견하고 만나게 될 것이다.

2.3 하나님의 뜻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대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하여 기울이는 대부분의 신앙적 노력은 기도를 해야 한다고 믿고 있으며 그런 신앙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오늘날의 신앙하는 모습이 아닌가? 아마도 기도를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영적교제가 이루어지고 그 때에 하나님의 계시내지 어떤 영감이 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성경에 기초한 보다 냉철한 기독 신앙의 기도에 대한 자세가 재정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사무엘하 7:20 이하에 보면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말씀을 받고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우리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다윗은 자신과 자신의 가정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를 말씀속에서 확신하고 말씀하신대로 행하였다. 그리고 그 이르신 바를 “행하기 위하여” 기도로 구하였다고 하였다. 다윗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신 것을 깊이 인정하고 좋은 것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찾은데는 매우 의미깊은 교훈이 있다. 그것은 먼저 기도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관에 의해서 본말이 전도되어 기도한다고 하면서 실은 자기 도취에 깊이 빠져 자신들의 감정에 대한 결론 내지 영감적 추측이 마치 신의 계시인냥 착각하고 있는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얼마나 있으며, 또 여기에 감정적을 휩쓸려 그러한 것을 마치 신의 계시로 되어진양 쫓아 다니는 어리석은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신앙의 유형의 사람들은 어리석은 계시론을 따르는 신앙유형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전달되었다는 교훈을 저들은 잊고 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말씀속에서 이미 전달되어져 있었고 기도란 그 뜻을 이루어내기 위한 결단내지 능력이라는 것을 간과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의 교훈과 말씀과 가르침은 이미 다 주어져 있는데 이를 제쳐놓고 다시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아들에게 온갖 좋은 음식상을 차려 주었지만 그것은 버려두고 우물가에 좇아가서 찬밥이라도 달라고 떼를 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아는 것이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그리스도를 배우고 묵상하라. 그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하셨으며 또한 당신이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명령하고 있는지 그 소리를 청취하라. 그것이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고 그 뜻이 세워졌으면 무릎을 꿇어 자신의 뜻대로 하지 말고 그 말씀속에서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결단하라. 그것이 진정한 기도요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동하며 움직이기를 요구하신다. 말씀을 따라 행동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며 바라시는 바이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고 실행하는 것이 신앙의 능력인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향하신 뜻을 찾고자 한다면 이미 그 뜻은 과거에 주신 말씀들 가운데 전달되어져 있는 것이다. 다만 당신은 그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길로 나왔다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대로 행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 되돌아 가겠다는 것, 다시말하면 이미 주어져있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기 위해 되돌아 가기 위해 기도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항상 새로운 것을 구하지 아니하셨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이 어떻게 새롭게 아버지의 뜻을 구하여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성취시키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기도는 이미 받은 말씀과 그 뜻안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마6:10) 하신 것이다.

자신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이 땅에 오실때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아버지의 말씀에 있었으며 그 뜻대로 행하고 실현시켜 나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뜻대로 행하는 것만이 그의 양식이라고 한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화 되어지고 실천되어져 나가는 능력의 회복이 기도인 것이다.

특히 이에 대한 중요한 예로서 예수님의 기도를보면 분명해진다. 예수님의 기도는 전혀 새로운 것을 아버지께 찾고 새로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세워 나가기 위해 순간마다 결단하고 이미 아버지로부터 받은 말씀안에 있는 사명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그렇다. 아버지의 뜻을 예수님은 미리 알고 계셨으며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결단하는 기도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이다.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것에 대한 대답을 아버지께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기도는 그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결단의 과정이었다. 이것은 이미 말씀하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한 능력의 충전이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2.4 말씀과 기도의 관계

말씀과 기도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속에서 신앙의 유형들을 보면 말씀의 홍수속에서 진정한 말씀의 본질과 기 비중의 귀중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기도가 더 우선적으로 앞세워져 거의 기도로만 일관하는 신앙의 유형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성공적인 기도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도 말씀과 기도의 관계를 밝히 이해할때 바람직한 기도도 그 안에서 가능하다. 부분적으로는 언급하고 있지만 말씀과 기도의 비중에 대하여 그 본질을 밝히 파악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교회와 성도들이 말씀에 대한 노력들보다는 무의식적인 기도등에 더 많은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양자에 대한 비중이나 상관 관계에 대하여 보다 냉철하게 재정립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초대 교회의 성장을 분석해보며 말씀과 기도의 관계를 알아보자.

초대 교회의 성장의 시발점은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의 역사였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초대 교회가 열광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이 임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은 사도행전 1:4-8까지에 나타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에 갑자기 성령이 임한 것이다. 따라서 저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이 원인이 되었고 그 말씀을 따라 기다리던 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였으니 초대 교회 부흥운동의 근원적인 기초는 당연히 “말씀의 운동”인 것이다. 저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비로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나타나 있다. 마가의 다락방의 역사는 제자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굳게 붙잡고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임한 말씀의 역사이지 결코 기도의 역사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하다.

성령이나 기도는 말씀의 결과이지 단독적으로 역사되는 능력들이 결코 아니다. 더욱이 사도행전 6장 7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초대 교회의 신앙의 보다 기초적인 근거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고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기도와 말씀을 비교하여 기도가 말씀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 의하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능력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 없다. 다만 여기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신앙상의 중요성이 그 비중만큼 철저히 재인식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신앙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여타의 종교에서 보여주는 일종의 가르침이나 일각의 사레들을 밝혀주기 위한 교훈들의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러한 교훈이나 가르침의 요소가 포함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같은 성격은 일부분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실제로 살아있는 동력적 힘을 지니고 있어 훨씬 광범위하고 성도의 삶과 전존재에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실존적 존재이시다. 성도는 반드시 이러한 말씀의 존재에 대한 보다 분명하고도 명확한 재인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같은 정립하에 말씀과 기도의 관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바로 세워야만 한다.

기도가 대단히 중요하지만 기도가 자칫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혼자 떠들어 대는 소리짓으로 끝날수 있다는 경고를 예수님이나 성경이 각별하게 지적하고 있다. 잠언서에 나타난 기도에 대한 교훈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28:9)

앞의 말씀을 유의깊게 살펴보면 성도가 열심히 기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 그 가증한 기도란 무엇인가? 심혈을 기울여 기도한다고 열심으로 매달려 부르짖지만 그 부르짖음 이전에 기도하는 사람이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있기에 그의 기도는 가증한 기도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는 과연 기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어떠한 관계이어야만 하는 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는 귀한 교훈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하는 기도는 한마디로 “가증한 기도”라고 말한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한다고 하여도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혼자만의 소리요 독백에 불과한 죽은 기도인 것이다.

기도의 제일 조건은 먼저 말씀을 들어야 하며 그 말씀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무엇인가가 우선적으로 선행되어져야만 한다. 무조건 기도하라고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기도가 과연 성도의 참된 기도이며 자세인가를 가르쳐야만 한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구하라고 하는데는 반드시 한가지 전제 조건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내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하는 단서가 전제되어져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들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 신앙의 기도의 대전제이다.

말씀없는 기도는 아버지의 원이라고 하면서도 실은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마는데 이같은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참다운 기도라고 할 수 없다. 생활과 삶과 말씀이 하나가 되어야만 참된 기도다. 말씀안에 있는 기도는 삶과 생활속에서 진정 있어야 할 참된 구함의 방향을 일러주고 스스로 결단케 하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성취시키는 능력의 보루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 그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그때서야 발견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이미 세워진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한 결단의 기도였지 그 기도를 통하여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을때 그 뜻을 가지고 왔으며 겟세마네의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란 그 뜻을 세우는 능력과 결단에 속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성취시켜 나가는 것이 곧 예수님의 기도였으며 능력이셨다.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그러했던 것이다. 항상 기도를 통해서 새로운 것을 공급받고 그것에 따라 행하셨던 것이 아니라 이미 받으신 말씀을 따라 행하셨던 것이다. 항상 기도는 그 받은 말씀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능력있게 성취하시기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자기의 의를 따라 구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라 구하여야 한다. 교회가 많은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도 심각한 분열의 양상을 보이는 것은 자신들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따라 구하는데 인색하다는 것이다.

기도란 그 때마다 새로운 것을 달라고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 성취해야할 능력을 구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언제나 어느 것이라도 구하는대로 이루어 지는 것은 하나님이 그러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을 성취시킬 능력을 넘치도록 공급하시고 지켜 주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신앙인들의 결과를 보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이 다소 부족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이미 있어야 할 거은 채워주시고 계시며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 가운데서는 진정 있어야 할 은혜가 풍성히 이루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도는 환경과 상황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성도가 하는 기도의 대전제 조건은 언제나 동일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안에서 말씀안에서 하는 기도이어야 한다.



2.5 성육신 되신 말씀이 주는 메세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成肉身)되어 이땅에 오신 이가 예수님 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 메세지는 말씀이란 메세지가 담고 있는 변함없는 내용이며 이 땅에 성도들이 구약의 시대에는 다만 듣기만 하던 메세지였으나 성육신화 되어짐으로 이제는 손으로 만질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가까이 오신 말씀이 된것이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성육신되어 세상에 오신 그 자체로 하나님의 메세지가 되고 있었으며 이 메세지는 성도의 가장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는 초석이 되며 위로의 근거가 된다.

말씀의 가장 근본이 되는 이 메세지는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면 어느때든 어떤 장소든 항상 선포되어졌는데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강한 메세지가 들어 있다.

성육신 되신 말씀이 주시는 메세지는 “임마뉴엘”곧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그것이 성육신 되어진 말씀이 주는 직결된 메세지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 따라서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그 입의 말씀으로 친히 증거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분의 존재 자체는 바로 이 메세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접하고 만남에 있어 이 메세지는 그 분의 존재와 함께 언제나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 증거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막연한 추상적 개념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사실성에 근거한 것이며 말씀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믿고 그 속사람에 말씀이 존재함같이 말씀이 있는 사람에게 언제 어느 장소에서나 항상 사실적으로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이에 대한 생명이며 열쇠인 것이다. 말씀이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증거하는 핵심적 수단이 말씀이기에 말씀이 떠났다는 것은 함께 계신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말한다.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었다. 이는 함께 계신 하나님이 예수님과 일체라고 하는 결론하에서 나오는 것이다. 빌립은 예수님께 이런 부탁을 하셨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빌립에게“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고(14:11)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자주 강조하셨으며 그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요10:30)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교훈하시기를 자신을 본 자는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고(요12:44,45) 하셨으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요13:20) 하셨다.

이렇듯 말씀이신 예수님은 그 자신을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을 곧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계시고, 함께 계신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고 계신가를 가장 밝고 분명한 길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큰 위로로 함께 계시는지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 그 자체이시다. 예수님의 모습속에서 하나님의 모습과 성품과 인격을 그대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3. 재창조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씀

3.1 말씀으로 거듭나야 하는 신앙

기독교 신앙에 절대적이고 필수적으로 거쳐야 될 과정이 거듭남 이라고 하는 과정이다. 거듭나지 못하면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가 없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거듭나지 못했으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중요한 거듭남이 자칫하면 감정적으로 흘러 온전한 거듭남을 이루지 못하고 신앙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기형아로 태어나면 온전한 육체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듯이 신앙도 마찬가지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실질적인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물과 성령으로 죄를 씻어 내야 하지만 죄를 찌르는 것은 말씀이며 또 갈라 놓은 상처를 아물게 하고 성장케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늘의 기복적 신앙관에 근거하거나 감정에 호소하는 감정주의나 광신주의, 열광주의로 몰아가는 것에는 어느 정도의 초보적인 성장은 가능하지만 지속적인 올바른 신앙성장은 기대할 수가 없다.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에 기초하여 이루어 지고 있는데 모든 만물을 이루신 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능력으로 특히 사람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는 가장 절대적인 수단이며 능력이다.

말씀과 거듭남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신 말씀이 야고보서 1:18에나타나는데 “그가 그 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하였다. 말씀으로 “낳았다”고 하는 것은 말씀으로 다시 태어 났다고 하는 것이다. 곧 거듭났다는 것이다. 성경의 여러 기자들은 동일하게 성도가 성도되도록 거듭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하고 있다.

진리로 말미암아 거듭난 삶이야말로 새롭게 지어진 삶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는 목적을 이루게 되는 입문이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며 이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듭남의 조건인 자유와 거룩함을 부여 하여주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세우는 것이다.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면 말씀은 생명의 길을 소개해주고 안내해주는 생명의 이정표이다. 그는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고, 사람 그 자신에게도 절대적으로 의로운 정의의 거룩함을 주며, 풍족하고 흔들리지 않는 삶을 가지도록 평탄한 길을 주시며 인도해 주신다.

성도로 거듭나기 위한 모든 필요성과 과정 그리고 그 목적은 말씀안에서 설명되어지며 도착되어지는 그 결과까지도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성도가 성도되도록 탄생시키는 진정한 모체이다.

3.2 말씀이 선언하는 제 일성(一聲) - 회개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에 대하여 또한 성도들에게 수 많은 메세지를 전달하고 또한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일관적이고 직설적으로 선언하고 있는 제 일성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회개하라”는 요구이다. 신앙이란 결국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인데 이를 이루기 위한 모든 신앙의 대전제는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선언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예수님의 천국에 대한 소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는(마4:17) 선언으로 부터 시작되어진다.

그러면 왜 인간은 반드시 회개하야만 하는가? 이에 대한 대전제는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원죄적 사건을 전제로 하고 있다. 성경이 선언하는 모든 인류는 타락이라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게 되어 원죄적 상태 즉 육체라는 특징적 존재 가운데 놓여져 버리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존재가 되어 죄와 사망 가운데 존재케 되어 그 마음이 부패되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이는 윤리나 도덕이나 사람 자신의 선행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보다 깊은 사람의 존재에 관한 본질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이 없으며 동일한 적용을 받는다.

하나님의 회개에 대한 요구는 모든 세상에 대한 보편적이고도 동일한 선언이다. 이 요구는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영역을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적인 신앙에서 이에 대한 요구는 가장 보편적으로 일어나야만 하는 신앙적 행위로서 기독교 신앙에서 전하는 모든 메세지의 출발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시대 어느 조건 가운데 있을지라도 성경의 선언은 언제나 이 메세지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반드시 회개해야만 다음 단계로 옮겨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를 거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대원칙이다.

회개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부패된 자리를 떠난다는 자기 결단이다. 그리고 그 떠난 것을 확인하고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회개는 개인의 결단에 달려 있지만 그 과정은 우주적 선언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며 또한 개인이 비록 회개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자신에 의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의해 이루어 진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서이 되는 것은 자신의 판단이나 사고 및 행동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의인이 되는 결과를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베드로는 비로서 성령안에서 참된 진리가운데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난 이후에 일어나서 성경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긴 설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는데 제자들을 향해서 외친 첫마디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행2:38)외친 것이다. 이것은 교회 시대를 여는 최초의 교회의 메세지 였다.

하나님 나라는 회개한 자의 것이며 그렇게 하는 자만이 누리는 영광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온전한 회개야 말로 신앙의 참모습을 드러내 주며 참된 성도에 이르는 것으로 단연 모든 신앙 내용에 우선되는 말씀의 요구이며 하나님의 지고한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타락한 인류와 사람들을 향하여 불의와 악에서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는 메세지는 어느 시대 어떠한 사람에게든지 동일하게 선포되어진다. 그 형태가 비록 다르게 또한 상황과 문제의 성격에 따라 그 언어적 형태가 다르게 표현될지라도 어느 시대나 장소를 불문하고 어떤 대상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고 있는 제일성은 가감없이 선언되어져야 할 것이 회개에 대한 촉구이다. 세상은 없어 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 영원히 있는 말씀의 가장 처음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 그것은 회개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3.3 속사람 안에서 역사되어져야만 하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씨를 뿌리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드러났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신앙과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말씀이 중요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형식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있거나 아예 참으로 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이 피상적이거나 아니면 다른 신앙 요소가 말씀의 위치를 점유하고 있어 자기 좋은대로, 편리한대로 끌려져 가고 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된다.

초대교회 중에 교회의 연혁은 얼마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참된 신앙의 정신으로 승리하여 칭찬을 듣는 교회 즉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는데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얼마되지 않은 기간에 곤혹스러운 핍박과 고난이 닥쳐 왔으나 능히 흔들리지 않고 승리하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려움과 핍박중에서도 승리케 되는 신앙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 대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바울과 같은 동역자들이 전하여준 복음의 말씀을 받을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받았으며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그러하다 그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살전2:13)하였다. 커다란 위기와 핍박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신앙을 지켜 나아갈수 있었던 것은 저들에게 전하여준 말씀을 받을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보이지 않는 신앙의 기초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신앙 현상은 어느 시대 어떤 사람일지라도 항상 동일하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접하게 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아니하고 사람의 말로 받기 때문에 온전한 신앙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것으로 인하여 신앙상에 본질적인 문제들에 빠져들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과 사람의 말로 받는 것과는 같은 말씀이라도 그 마음에서 역사하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을 경우 그렇게 받는 사람은 그저 교양이나 상식정도로 끝나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어떠한 올바른 신앙성장 내지 변화도 기대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나 알아 두어야 할 상식 정도로 끝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씨앗이 좋은 밭에 묻혀 썩어야 하는데 아예 밭이라는 흙 자체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역사되어지는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와 더불어 더 나가서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가치를 귀중히 깨닳아 자신의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지만 역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어지지 못하는 심령은 하나님의 은헤가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고전2:14)

그리고 부패된 마음속에서의 이러한 사람들은 종국에는 허탄한 것을 쫓아감으로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과 바꾸어 버리고 어리석음 가운데 처하여(롬1:23)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들을 따라 사는 것이다. 따라서 속사람 가운데 말씀이 있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삶의 저변은 방황하고 갈등하다가 결국 불신앙 가운데서 무너지며 넘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이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시켜나갈 것인가에 대해 주저하거나 방황하거나 갈등하지 않는다. 그리고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참다운 은혜 가운데서 주체적이고 자신있는 삶을 만족스럽고 또한 희망 넘치게 영위해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고 다시 태어난 사람은 어떠한 시련이 온다해도, 하나님 신뢰에 대한 도전이 다가와도 결코 요동치 않는다. 설사 자신의 생명에 위기가 온다고 할지라도 도리어 담대하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심령속에서 역사되어질때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신앙을 위하여, 성도의 마음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되어지고 또한 그렇게 역사되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다윗은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시119:11) 하였다. 주의 말씀이 떠나간 심령은 탐심이 자리잡게 되고 언제 어느 때라도 불신앙적 행위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욕심이 잉태되면 죄를 낳는 것과 같이 불신앙의 수순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그 예리하기가 쌍칼날과 같아 사람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드러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을 상관하시는 하나님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이 드러나고야 마는 것이다.(히4:12,13)

이같은 말씀이 속사람에게조차 역사되어 질 수가 없고 배척당하고 멸시되어진다면 그 심령은 병든 심령이요, 감각이 없는 죽어버린 존재로 선언하고 있으며, 바울은 이같은 사람들을 화인 맞은 사람들이라고 말한다(딤전4:1,2)

이런 사람에게 아무리 말씀이 그 마음을 찔러 본다고 한들 감각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오직 죄와 사망의 법이 그 속을 지배하고 있을 뿐이며 생명현상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말씀을 받아들여 속사람에서 용해(성육신)되어 받아들인 사람은 그로 말미암아 그 속에서 믿음이 싹이 터 올라 생성케 되며 하나님의 성품과 신앙상의 특징적 연대성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의 동질성은 예수님과 동일한 기쁨을 가지게 되며,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케 되며, 같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는 백성이 되며, 같은 핍박과 고난 그리고 같은 영광을 받게 되는 것이다.(요17:13-26)

신앙하는 성도들의 자세에서는 말씀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말씀에 충실하며 마땅히 관심을 모아야할 신앙력이 이로 모아져야 한다. 막연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치우친 교회 중심주의적 신앙자세에서 일어나 말씀중심의 신앙으로 탈바꿈되고 그 안에서 재정립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들일 수 있는 당신의 마음의 넓이가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마음안에서 더 넓게 자리 잡으면 잡을수록 당신의 신앙은 그만큼 활기 넘치고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아뢰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오면 내가 주의 계명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고(시119:32) 하였던 것이다.


3.4 주신 말씀, 깨닫는 것이 신앙의 첩경이다.

성경은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와서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고(사55:3) 하셨다. 전자에서 말하는 중요한 언급은 “귀를 기울이고 나와서 들으라”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것이다.

그래야 영혼이 산다고 하였다. 말씀을 듣고 깨달을때 신앙이 신앙되는 것이며 참된 신앙에 이르르게 된다는 것이다. 바른 신앙은 여기서 만들어지는것이며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우치며 배우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소리든 그냥 듣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들음”이라고 하는 것은 곧 “깨닫는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옳게 깨닫는것은 온전한 믿음에 이르는 첩경이다. 올바른 깨달음 없이 올바른 믿음에 이를수 없다. 특히 신앙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생명선이다. “---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고(호4:14) 하신 말씀은 막연한 다른 민족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가르쳐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야할 마땅한 길을 가르쳐야만 한다. 이것은 구약의 시대에서부터 오늘날 까지 교회신앙안에서 끊임없이 강조되어져 나온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임무 가운데 하나이다. “---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길과 할일을 그들에게 보이라”라고(출18:20) 한 바와 같다.

교회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명은 어떤 것보다도 우선 되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도가 생명의 말씀을 옳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참다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워지고 살아가야하는 길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르침과 참된 배움을 통한 깨달음을 통하여 성장하고 양육되는 신앙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따라서 성도

자신의 신앙 전체를 말씀위에 올려 놓아야만 한다. 그 위에 모든 신앙의 내용들이 세워진다면 아무리 무거운 것을 올려놓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 살아있는 생명의 신앙으로 인도해주는 것이다.

3.5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만물이 어떻게 지어졌느냐하는 실질적인 내용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과 함께계신 말씀에 의해 지어졌음을 성경은 밝히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속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의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 온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계의 모든 거민은 그를 경외할 지어다.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고(시33:6-9)하여 시편 기자는 하늘과 땅의 모든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근원이 거기에 그에게 가장 완전한 지식, 가장 완전한 사상, 예술, 가장 완전한 학문, 철학, 의학, 문학, --- 모든 완전한 대답이 그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가장 위대한 지식과 사상과 영감을 얻으며 가장 심오하고 깊이있는 법칙들을 발견해낼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으며(잠1:7)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골2:3)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원리이고 지금도 살아계시어 일을 하고 계신다. 사람이 성경을 밝히어 해답을 찾지 못한다고 대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한 것에도 매이지 아니하며(딤후2:9) 영원히 활동하시는 것이다. 성도가 얻고자하는 모든 대답이 창조의 근원되시는 말씀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4. 지속적인 신앙성장 말씀이 세운다

4.1 하나님의 말씀에 맛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 맛이 들어있다. 사실 이 맛의 결정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결정해주는 결정체라고 해도 틀린말이 아니다.

다윗은 그 맛에 대하여 이르기를 “금 곧 많은 정금보다 사모할 것이며 꿀과 꿀송이 보다도 더 달도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말씀을 지킴으로서 자신에게 상이 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시19:10,11) 말씀의 맛은 그 아는 사람들에 의하면 꿀과 꿀송이 보다도 더 달다 하였는데 이는 말씀이 지닌 맛을 한가지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말씀의 깊이가 무척 깊고 오묘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양식도 믿음의 정도에 따른 양식의 형태를 달리한다. 요한계시록 10:10에 보면 먹는 양식으로서의 말씀이 입에는 달되 배에는 쓰다고 하였는데 이는 말씀을 받아먹을때는 꿀같이 달다라는 것이며 배에서 쓰다고 하는것은 그 말을 실천하고자하니 그 쓴맛과 같이 어렵다고 하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 곧 만나를 받았는데 이 양식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양식 역시 맛을 지니고 있다. 만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모형과 상징적 양식으로서의 만나이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세상에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서의 예수님을 나타내 주었는데 이같은 뜻을 알려주기 위하여 만나를 이스라엘에게 내려주신 것이다. 이 만나의 상징성이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어졌기에 만나의 맛도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되어진 참 떡으로서의 맛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만나의 맛에 대하여 이르기를 “꿀섞은 과자 같았더라”(출16:31)라고 하여 그 맛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의 여러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맛을 “꿀보다 더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맛들은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분명한 신앙 가운데로 인도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가야할 바른 길을 제시해주며 마음에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어 힘있게 하고 소망있는 삶으로 인도해주는 신앙의 참된 양식이다. 정상적인 올바른 신도라면 그의 속에 항상 꿀보다 더 단것으로 채워져 있으니 언제나 부유한 사람일수 밖에 없다.



4.2 말씀안에 있는 신앙의 영양분

말씀안에서 가장 먼저 생각해 볼수 있는 영양분으로 은혜라고 하는 신앙의 영양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은혜라고 하는 영양소는 성도의 마음을 위로함과 더불어 담대하게 해주며 또한 평온케 해주는 것이다. 은혜의 중요한 요소는 전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과 후자는 “함께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는다.”는 것이다. 이 커다란 두 영역의 내용은 성도들에게 담대함과 위로함을 동시에 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성도들이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과 소망 넘치고 건강한 삶을 유지시켜 나갈수 있는 것은 이러한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두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말씀의 영양분으로는 “진리”이다. 예수님께서 주신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다. 이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사람을 “자유케하는 능력”이 있다. 내적인 모든 죄와 사망의 법을 제거하고 연약한 마음을 하나님의 의로 세워주는 강철보다 강한 힘이 진리라는 속성인 것이다. 진리라고 하는 영양소는 언제나 변함없는 불변성을 제공하며 어떠한 조건과 사정이나 환경 가운데서도 변질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세번째로 생각해 볼수 있는 말씀안에 있는 영양소는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이라고 하는 영양소 이다. 하나님의 말씀속에는 하나님의 굳은 약속이 들어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그 말씀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떠한 약속을 주셨는지 알게되며 이같은 약속은 그 말씀을 받은 성도와 하나님만 가지게 되는 특수한 관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네번째로 생각해보는 영양분은 “믿음”이라고 하는 영양소이다. 그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안 성도들이 지니게 되는 확신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의 속사람에 “믿음”이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싹을 키워내는 특별한 영양소가 들어있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동반한 살아있는 믿음으로서의 삶의 모든 면모를 살아있도록 가능케 하는 생명력을 공급하며 하나님의 의에 도달케 하는 생명의 길이다.(롬10:10)



4.3 말씀의 성품

성경을 여러가지 뜻으로 말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계약”, “언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또다른 뜻으로 성경을 캐논(Cannon)이라고 말한다. 이는 “법”, “기준”, “잣대”, “규정”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성경이 캐논으로 불리는 이유는 모든것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격을 한마디로 대변해주고 있는 말인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모든 사상과 삶의 전반적인 사상과 지식과 생각을 통틀어 이에대한 기준, 잣대 등과 같이 가치의 척도를 견주어 보아야할 가장 완전한 가치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의 인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하나님의 성품은 어떠한 특징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우선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정미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조금도 부족하거나 흠이 없다는 것이며 정미하다고 하는 것은 세밀하여 작은 것일지라도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든 조화와 평화에 대한 일치는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두번째는 “순결하다”고 하였다. “순결”이라고 하는 말은 “잡된것이 섞이지 않고 맑고 깨끗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아무것도 섞이지 아니한 본질 그대로의 원상태를 두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결하다고 하는 것은 가장 완전한 깨끗함을 지지하는 것이다. 시편 12:6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하였다. 이 순결한 말씀이야말로 죄를 찌르며 회개케하고 죄를 드러내게하여 죄를 죄로 깨닫케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이 바라시고 원하시는 뜻을 전달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진 평화를 이땅에 이루어 나간다.

세번째 하나님의 말씀의 성품은 “의롭다”는 것이다. 이 “의”라는 하나님의 성품은 가장 광범위하게 알려진 성품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의 인격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대표적 성품가운데 하나이다. 생명의 말씀에 대한 성품을 말함에 있어 나타나는 성품중에 의와 더불어 말할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참되다”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의 정직성을 지지한다.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렘10:10) 거짓이란 전혀 없으신 의로우신 하나님 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성품에 대한 이해는 말씀의 성품을 이해하는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곧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시기에 말씀의 성품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과 일치된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하심에 있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자체가 이미 죄의 세력에 대한 포기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인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은 채찍과 모욕과 십자가상에서 흘린 모든 피는 성도의 의로움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성품은 사람에게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길을 하나님의 의의 길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여 대는 회초리속에 의가 들어있어 의의 길로 인도하여 주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거짓없는 의가 들어있어 당신과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생명과 평화와 자유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4.4 말씀이 요구하는 성도의 기본 성품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이 성도의 삶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성도의 성품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그 요구하는 대표적인 성품은 무엇인가?

에수님의 성품과 가르침 가운데 나오는 가장 소중한 교훈중에 하나는 자기를 낮추심이다. 즉겸손이라고 하는 성품이다. 겸손은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성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 가운데 하나로서 성도들에 대한 말씀이나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겸손하고 자기를 낮추라고 하는 요구는 가장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번째로 생각할수 있는 말씀이 요구하는 성품가운데 하나가 “성실”과 “정직”하라는 요구이다. 성실하라, 정직하라고 하는 요구가 성경에 그렇게 많이 언급되지는 아니했을지라도 예수님의 삶과 생활 전체가 의와 성실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모든것을 “다 이루었도다”하시며 마지막 숨을 거두실때까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성실하게 이루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정직하고 진실하게 최선을 다하신 삶이셨다.

정직과 성실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의 성품과 특징으로 성도들이 지녀야할 신앙자세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의 성품과 기본 자세에 미치는 영향은 아주 중요하다. 성도가 어떠한 경우라도 참아내며 인내하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라고 예수그리스도는 명령하고 계신다.

그리고 삶과 신앙에 성실할 것과 정직하고 진실한 삶을 가질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과 삶을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인도하시며 지켜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에 정직한 영을 불러넣어 주시며 성도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겸손하고 정직한 가운데 성실히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기를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4.5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 어떤 말씀인가?

성도들이 듣는 말씀은 어떤 말씀인가? 그 말씀의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마치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길을 잘 알고있어 쉽게 가듯이 말씀도 그러하다. 대표적인 것을 네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이 전하는 모든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아버지의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근원이 아버지 즉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전달되어지는 경로가 다를수 있으나 언제나 그 출발점은 단 한곳 즉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다.

두번째로 생각해볼수 있는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이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는 새 생명의 말씀이며 사람의 삶을 한정된 멸망의 삶에서 영원한 영생으로 인도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다.

세번째 성도들에게 주는 말씀은 “항상 있는 말씀”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는 말씀이라고 선언한다. 항상 있다고 하는 말씀은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계신 말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심같이 하나님께서 항상 일하심 같이 말씀도 계속 일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오늘의 사역을 이끌어 가고 일하고 계신 이는 다름아닌 항상있고 살아있는 말씀이 일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신 것은 육신으로서가 아니라 생명의 말씀으로 계신 것이다.(마28:20)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있고 살아있는 말씀으로 매일 속사람과 삶이 새로와지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있는 자들의 하나님인 것이다.(마22:32) 성도가 깨어 살아있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이 말씀이 성도의 속사람과 삶속에서 항상 살아있는 모습으로 일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넷째는 화목케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평안을 매는 줄로 하나가 되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엡4: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명령하시는 말씀의 목적은 화목이며 그 화목을 이루어내야만 하는 사명의 직책을 성도들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성경의 말씀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여러 화목을 위한 교훈들과 사명을 부여하고 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또 오늘도 그의 백성들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위하여 화평중에 성도를 부르셨다.(고전 7:15) 따라서 성도는 이 평화를 위하여 일하여야 한다.(골3:15) 그 일을 할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요 참된 제자로 자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5. 능력있는 삶을 위한 생명의 말씀

5.1 풍성한 삶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이 말씀안에서 주시는 풍성한 삶은 세상에서 주는 행복의 조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나님안에 있는 풍성한 삶의 특징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속되어 영원하다는 것과 쇠하거나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고후4:16)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 행복의 조건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세상이 주는 것도 또한 그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 안에서 얻어지는 삶과 행복은 흔들리거나 요동되어질 성격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멀다.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이다.

풍성한 삶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믿음은 말씀안에서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 가운데서 주어지는 평강과 구원이 그 마음을 주장하여 자유한 존재로서 가장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5.2 말씀은 성도의 삶을 지키는 방패

다윗은 자신을 지키는 하나님을 “반석”, “요새”, “건지는 자”, “나의 하나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구원의 뿔”, “산성”이라는 여러 표현을 하였는데 결국 이같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 사무엘하 22:31에 가서 결국 의지하는 자에 대한 구체적 결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진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들을 의롭다 인정해 주시며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 시편 기자는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시 1:3)하여 말씀으로 나아가는 자의 삶이 어떠하다는 것을 잘 말해준다.

그리고 그 말씀안에 있는 자의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으며(시56:4) 하나님께서 돕는자로 계시므로(시54:4) 결코 요동치 아니하고 어떠한 어려운 난관과 문제에 부딪친다고 하더라도 이겨나갈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도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도를 지키고 일으키며 인도하고 깨닫게 하는 하나님의 방패이며 무기이다. 성도는 어떠한 조건과 상황하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놓을 지라도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입의 말씀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그의 걸음을 바로 따라야 한다.

이를 잘 설명한 것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하는 바울의 권고이다.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사람에게는 지혜의 길이요 고난 당하는 자에게는 피할길로서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의 가장 커다란 힘의 공급처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생명의 말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하나님을 향해서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진 사람만이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매일 매순간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이로 말미암은 만족과 확신과 평안 가운데서 당당하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5.3 치료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가운데 하나가 “치료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으신 주체이시다.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되어지지 않은것이 없다. 그 창조의 근원이 되시는 말씀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특히 사람의 전 존재와도 뗄수 없는 관계하에서 그 치료의 능력이 발휘하는 것이다. 말씀은 성도의 병든 욕심과 마음의 모든 곳을 치료하는 치료의 광선이며 중요한 것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이다. 말씀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씀을 받아들여 그 능력을 믿고 힘입고자 하는 순종의 자세 속에서 하나님의 큰 영광이 드러났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도가 처한 고난과 상처속에서도 개입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도움의 손길이다. 그는 수리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그 자체이다. 주의 도움을 기다리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주의 말씀을 기다려야만 한다.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일이라면 언제 어느곳에서나 어떠한 문제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은 속히 달려오시고 치료의 광선을 발하고 역사하신다. 그 속에 더할 나위없는 위로와 소망이 내포되어져 있는 것이다.



5.4 종말과 생활 - 어느것을 위한 말씀인가

예수님은 성도들에게 말씀을 주셨고 그 주신 말씀의 목적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우리는 가질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종말에 대한 분명한 신앙관계를 말씀해 주셨다고 하는 데서 다시금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적어도 오늘의 혼잡한 양상속에서 신앙하고 있는 우리의 신앙이 나아가야할 분명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하는데서 간과할 수 없는 의미깊은 말씀이다.

요한복음 17:14,15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인데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 이니라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 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이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라고 한것은 휴거를 말하는데 예수님은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라”이라고 일언지하로 말씀하심으로 성도의 신앙생활의 중요한 방향설정이 어디로 지향되어져야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한 말씀에서 강하게 지향하고 있는 두가지 신앙의 방향이 있다. 첫째는 “현재”라고 하는 것과 둘째는 “악에 빠지지 않는 생활”인 것이다. 성경의 대부분의 말씀이 먼 미래를 두고 하는 말씀이거나 아니면 과거의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살고있는 당신과 우리를 위하여 하고계신 말씀이다. 그래서 말씀은 지금과 현재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것이다.

현재의 완성이 미래의 완성까지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주 예수님을 영접하여 영생이 성취되어진 사람은 현재가 완성되어져 있는 사람이며 이러한 사람은 또한 영생으로 미래가 완성되어져 있는 사람으로 미래를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미래의 완성은 현재가 완성 되었느냐하는 관건에 달려있음으로 오늘을 말씀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의 미래도 그 안에서 완성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5.5 말씀의 뿌리 얼마나 자라고 뿌리를 내렸는가?

말씀과 신앙 이라는 밭이 지니는 신앙의 역학적 관계에 대하여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자세히 설명해주고 계신다. 이 비유가 지니는 큰 의미는 단지 말씀이라고 하는 단일한 조건으로 신앙 전체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비유의 첫번째 가르치심이 말씀과 마음과의 관계를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씨를 뿌리러 나갔는데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라고(마13:4)하셨다. 예수님은 이에 대하여 설명하시기를 “아무나 천국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때는 악한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라고(마13:19) 하셨는데 이는 말씀이 사람의 삶속에 주어졌으나 신앙성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불신앙적 상태의 사람들을 두고 말한다.

두번째로 예수님께서 돌작밭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를 통해 말씀 하셨는데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란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라고 하셨다.(마13:20,21) 여기에는 두가지 특징이 있다.

그 하나는 뿌리가 짧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요, 또다른 특징은 씨앗의 생명이 지속적이지 못하고 일시적 이었다는 것이다. 돌밭은 길가에 뿌려진 씨앗보다는 조건이 약간은 좋을지 모르나 신앙 성장이 불가능 하다고 하는데서는 마찬가지다. 진정한 거듭남이 이루어지지 아니했기에 말씀이 뿌리를 깊이 내리는 데는 한계가 있을수 밖에 없다. 이같은 돌밭에서 정상적인 수확을 거두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신 씨앗의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라고 하였다. 예수님의 이에대한 설명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라고 하였다. 뿌리 즉 신앙은 어떻게 해서 내렸으나 내외적인 여러 조건으로 인하여 열매까지 이르지 못하는 실패되어진 신앙양식을 말한다.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목적이 전혀 다른곳에 있어 참 신앙에서 이완된 자리에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앗의 뿌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혹 육십배, 혹 삼십배가 되느니라”라고 하셨다. 다시말하면 좋은 신앙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가를 비유하신 것이다. 좋은 신앙이란 한마디로 좋은 밭에 뿌려진 씨앗인데 예수님은 이를 “말씀을 듣고 깨닫는자”라고 하셨다. 그래서 복있는 사람은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그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깊이를 더해가는 뿌리깊은 사람이다.


맺음글

- 말씀과 실천 그리고 성도의 생활

하나님의 말씀속에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전달하시는 온갖 중요한 메세지가 들어있어 그 선물로 성도는 풍요로운 삶의 길로 나아간다. 그 안에 생명이 있으며, 구원의 길이 있으며, 온갖 보화가 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뜻과 온갖 비밀이 들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안에서 사람은 참된 행복의 길을 발견하고 또한 그 행복을 누릴수 있는 메세지와 생명의 길을 얻으며 이웃을 사랑하는 진정한 길을 발견하게 된다.

초대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당하는 가운데도 담대하게 복음의 말씀을 전한것은 자신들의 목숨 이상의 귀중한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복음은 넘치는 감격에 의해서 받은 은혜를 드러내는 것으로 진정한 성도라면 당연히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필요성이 피할수 없는 사명으로까지 와닿는 것은 그 만큼 감격이 크다는 것과 오늘날 모든 세상의 사람들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해방과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평화와 구원의 메세지이기 때문이다.

사명으로 받는 사람은 참으로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한 보배이기에 잘 감당하지 않으면 안될 하나님의 선의적 명령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전함에 이르는 말씀이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일 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다”(고전 9:16)라고 까지 하였다.

광의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제자이다. 제자란 가르침을 받았다는 뜻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제자가 되기위해서는 몇가지 특징적인 제자의 조건이 있다.

첫째가 반드시 말씀을 듣고 배워야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 정녕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자의 조건을 지닐수가 없다. 뿌리가 없는 나무가 아무런 열매를 맺을수 없음같이 말씀이 없는 성도는 제자의 어떠한 조건도 성취시켜 나갈수가 없는 것이다. 차가 출발하기전에 연료가 있는가를 확인해야 되듯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가를 확인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살아있고 자신의 삶을 움직이는 생명의 말씀이 있는가를 확인해야만 한다. 그러기위해서 제자의 조건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듣고 배우고 깨달아 알아야만 한다.

두번째 제자의 조건은 반드시 그 말씀에 따른 행위가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에 따른 행동력이 실제로 뒤따라 그 열매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그친다면 결코 온전한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제자란 말씀을 듣고 거기서 끝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결실을 향해 나가거나 이루어내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역적 제자는 말할것도 없고, 모든 보편적 생활속에서의 제자는 말씀을 자신의 삶과 생활속에 적용하여 실천해 나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 속에서 많은 열매를 맺어 나갈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복음의 말씀은 언제 전해져야만 하는가? 이“때”에 대하여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여 말하고 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5)고하였다. 이것은 말씀을 아는 모든 자에게 주어지는 고유한 명령이다.

또한 방도는 어느 특정한 방법으로 한정되어져 있는것이 아니다. 말로 전하는 방법도 있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도 있으며, 가르침을 통해서도, 봉사를 통해서도, 돕는것을 통해서도 모든 가능한 것을 통해서 말씀이 드러나고 전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때도, 장소도, 방법도 특정하게 주어져 있는것이 아니다. 접하고, 통하고, 주어지는대로 심고 전하는 것이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때와 장소에 관계없이 어떠한 환경이나 조건에도 불구하고 전해져야만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하는 것에는 여러가지 은혜와 특권이 따르지만 그리스도인들만이 지니고 또한 하나님 구원과 사랑과 자유의 비밀이 담겨져있는 말씀을 맡았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말하면 전해야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 말씀을 받고 맡은자에 의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말씀은 맡겨진자에 의해서만 전달되는데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요7:16)고 하신 바와 같이 그 말씀속에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담겨져 있으며 우리를 향하신 가장 완전한 계시가 들어있는 것이다.

말씀의 전파는 하나님 신앙의 모든 내용의 전달의 시작이며 이는 곧 하늘에서 이루어진 평화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초석이며 첫걸음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평화와 구원의 소식을 위하여 어떠한 방도로든 복음과 생명의 말씀은 전해져야만 한다. 여기에는 어떤 특정한 대상이 따로 구분되고 나누어져 있는것이 아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대상에 포함되어져 있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씀을 들은자이며, 그다음은 그 말씀을 들은자에 의해 전파되는 말씀으로 인하여 믿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참으로 귀하고 좋은 선물이다. 그 전하는 말씀안에 진정한 삶을 위한 평강과 견고함이 있는 것이다.(사39:8) 그리고 잠언 기자는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와 같으니라.”(잠25:25)고 하였다. 하나님의 복음은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평화와 진정으로 유쾌한 삶으로 인도해주는 하나님의 기쁜 소식인 것이다.(엡 2:7,8)

이 기쁜 소식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기회가 주어지든지 안 주어지든지 어느때, 어느장소라든지 이 말씀의 전파에 대한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씀이 담고 있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평화와 구원에 대한 증인이며 증언자이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 이시다. 정녕 말씀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그 앞에서 언제까지나 산자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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