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1718년에 커넥티커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열네 살에 어머니를 스트레이트로 잃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천성적으로 우울과 낙담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아빠 어딨어 엄마 보고싶어 엉엉엉' 1740-1743년의 뉴잉글랜드 대각성운동 기 간에 그는 성년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흥운동가들의 강조로 개인적 구원 체험을 얻고자 하였고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구원받기 위해서 는 단지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이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원문제 를 앞에 두고 1년 이상을 기도와 금식으로 시간을 보낼정도로 열렬한 성 령파였습니다. 주님! 저의 눈을 열어 저의 죄악을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 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해 주십시요! 때때로 불신 가운데 시달 리기도 했지만 그는 힘써 기도했고 마침내 21살에 개종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에 매혹되었습니 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인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가 21세에 개종한 후 그의 기도 생활은 더욱 빛이 났습니다. 그는 한 시간의 기도 가운데 얻는 기쁨이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을 능가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근심걱정이 밀려올 때 그는 기도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 와 사랑을 구했습니다.


그는 예일 대학에 진학하여 목회를 준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교수들 은 그때 불고 있는 대각성운동에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브레이 너드가 2학년 때 학생부장이 기도모임때마다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자 브 레이너드는 그를 은혜가 아주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오해 의 소지가 되어 퇴학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적된 후 브레이너드는 여러 목사들로부터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이 경험은 그로서는 예일 대학에 다 니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경건생활 가운데 그는 불 쌍한 영혼들과 그리스도의 왕국의 확장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는 '그래 구원받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함으로 나 의 인생을 불태우며 살자' 결심하였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인디안의 구원 을 위하여 뭔가 해야만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날마다 기도생활에 헌신 하였습니다. 아침에 기도하고 점심에 기도하고 저녁에 또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24번째의 생일을 금식과 기도로 바치기로 작정할 만큼 기도열이 대 단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생일에 복음 사역을 준비하려고 예수님처럼 밤 이 다하도록 힘써 기도하였습니다.


1743년 그는 인디언 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첫 선교지인 카우나우믹에서 옥수수죽을 먹고 짚더미 속에서 잤습니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온 밤을 숲속에 누워 있음으로 굶주린 늑대들 이 침을 흘려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인디안어를 배우기 위해 무인의 정 글을 수도 없이 오갔습니다. 그는 때마다 온밤을 깨어 기도했고 믿음의 친구들과 이웃 전도자를 위한 중보기도를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을 위해 기도하느라고 며칠이고 기도에만 열중하기도 했습니 다. 점차 그의 믿음과 수고가 인정되어 가장 살기 좋은 아늑한 도시의 목사로 초빙되었지만 그는 인디언 복음화를 위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고 자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는 인디언 양들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하느라 광야의 위험을 감수하며 강행군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의 수고가 결실 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크로스윅숭에서의 성공적인 사역은 사마리아 여인 처럼 은혜로운 말씀을 함께 들으려고 친구들을 데리고 온 여인들로 시작 되었습니다. 그들은 친구들을 말씀잔치에 초대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 녔습니다. 한달 후 그들은 브레이너드 목자님이 감사기도를 드려주기 전 에는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대단히 영적인 자들이 되었습니다. 1745년 그는 영혼의 깊은 밤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너무나 쇠약 해졌습니다. 고통으로 인하여 설교도 기도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절 망적 상황은 하나님과 끊어진 듯한 영혼의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시작된 신 앙 부흥은 일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가슴은 중보기도로 녹아져 있었 습니다. 그의 설교를 통해 은혜의 소나기가 홍수처럼 쏟아 부어져서 살인 과 싸움과 도적질을 밥먹듯이 하는 인디언들의 가슴이 녹아졌습니다. 말 씀을 듣는 자들은 모두 고꾸라져서 구툼마우할룸메 구툼마우할룸메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 뜻은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복음을 듣는 양마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긍휼을 간구했습니다. 그는 은혜의 사역에 대하여 스스로 평가하기를 그의 힘이 한계에 도달해서 모든 인간적 소망 이 깨어져 버렸을 때 전능하신 주님께서 역사하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헌신적으로 양들을 섬겼습니다. 날마다 교리문답 식으로 그들의 심 령에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신앙을 심었습니다.


1746년 가을에 그는 학생시절부터 그를 괴롭혔던 결핵 때문에 그곳을 떠 나야 했습니다. 그는 남은 12개월 동안 사랑하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지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건강관리에 있어서 허점이 있었 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동생에게 선교 사역을 이어 주면서 이런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신신당부하였습니다. 그는 1747 년 29세의 꽃다운 나이로 장인어른인 요나단 에드워드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생명을 내걸고 하나님 앞에 헌신한 삶을 살았기에 29세란 젊은 나 이로 하나님 앞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건강을 완전히 희생하여 선교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생애는 후세에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슴과 생애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는 1740년대 미국을 휩쓴 대각성 운동의 주도자 요나단 에드워드의 심장에 깊은 감동을 끼쳤고 존 웨슬리 의 마음에 큰 전환점을 마련해 주엇습니다. 윌리암 케리와 헨리 마틴 짐 엘리오트 선교사의 마음을 움직여서 복음 사역에 종사하도록 하였습니다.

Nyskc Teachers Colloquium

Nyskc Teachers Colloquium NT는 Nyskc Teachers의 약자입니다 Nyskc는 신앙생활의 5대원칙으로 만들어진 신조를 통해서 예배회복을 이루려는 한편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 있는 곳으로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가 있는 곳으로 가며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인도자 곧 교회 Teachers를 뜻합니다 교

월명(月名)의 유래

1월 : January ( Jan.) : the month of Janus (로마신화에서 머리의 앞뒤에 하나씩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대문의 수호신인 Janus 의 달을 의미한다.) 2월 : February ( Feb, ) : the month of the feast of cleansing ( 청정의식의 달이라는 뜻으로 cleansing을 뜻하는 라틴말의 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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