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예배

1. 예배의 본질과 의미


예배를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의 믿음의 표현이요, 마음의 표현이다. 그것은 곧 신안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예배의 진수는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데 있다. 예배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 편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 지성과 감성과 의지, 태도,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분의 탁월하심에 합당한 존귀와 찬송을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 이다.


예배의 어원적 의미

예배의 현대적 용어

새우리말 큰 사전은 “신을 신앙하고 숭배하면서 그 대상을 경배하는 행위 및 그 양식”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배의 개념을 살펴보면 예배를 섬김과 봉사의 의미로 이해하여 “봉사적 개념”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예배의 구약적 용어

예배로 번역되는 구약 성경의 중요한 단어는 봉사와 섬김을 나타내는 “아바드(abhadh)' 와 굴복하는 것 또는 엎드리는 것을 뜻하는 ‘샤하아(shachah)" 가있다.


아바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주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샤하아

엎드린다, 굴복한다는 의미로서 예배자들이 숭배 대상에게 최대한으로 존경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종교적 숭배와 순종을 겸하여 마음과 몸으로 존경을 표하는 태도를 뜻한다. 구약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무한의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고 그분의 뜻을 좇아 봉사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그 외적 표현은 “육체적인 겸손의 자세”와 “물질적인 희생으로서의 봉사 행위”로 예배자의 진실한 마음과 생활의 표현이어야 한다.


예배의 신약적 용어


프로스쿠네오

70인역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샤하아를 헬라어 “프로스쿠네오 로 번역한다.

예배에 사용할 때의 주도적 의미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끓어 경배하는 것을 뜻한다.


레이투르기아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로서의 예배를 잘 표현 하고 있는 헬라어 “레이투르기아”는 레이토스와 에르곤의 합성어로서 “백성을 위하여 일한다‘라는 뜻


라트레이아

“종으로서 자신의 상전을 섬겨야 할 신분을 확인시키는 일”에 사용된 말로서, 지위가 높은 자에 대한 봉사를 뜻한다. 제사적인 예배와 전문적인 종교적 행위로서의 예배, 기독교인의 전 생활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참 예배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예배의 생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참 예배인 것이다.


예배의 교회적인 의미


제의

종교적 의식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어떤 것을 존중하다는 의미로서 이교적인 배경에서 온 주술적인 요소가 내포


봉사

예배의 주관자이사며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예배

하나님께 영광, 찬미, 감사를 돌린다는 뜻이다.


예식

레이투르기아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주로 의식주의적 예배를 가리킨다.

개신교에서는 이용어가 의식주의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적 예배를 자칭할 때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이 용어에서 의식적 색채가 없어졌다는 것을

이해한 후에는 개신교 일부에서도 예배를 리터지라고 부르게 되었다.


기도

예배는 공중의 기도 생활이다.

근본적으로 예배는 개개인의 기도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공적인 교회의 예배는 바로 공동체의 기도의 장이다. 작게는 예배의 한 요소인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말하는 표현 양식이다. 그리고 그 기도 가운데는 감사와 찬양, 회개와 도고와 간구 등 적어도 다섯 가지의 요소가 포함된다. 음악적으로 표현되는 교회의 노래나 찬송, 악기 등은 신학적으로는 기도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기도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다. 결국 “찬송을 부르면 두 번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어거스틴의 말은 기도라는 예배의 한 요소를 가지고 예배 전체를 표현한다는 방식에서 온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를 기원의 요소만이 아닌 감사와 찬미를 포함한 광의적 의미로 생각한다면, 기도가 예배 전체를 표현하는 것은 타당하다.


예배의 성격

신비적 성격

예배는 계시적 성격과 신비적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우리를 예배로 인도한다. 계시를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할 수 없다. 사람은 계시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신비의 면전에서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에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결코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예배에서 신비(하나님의 초월성)와 의미(하나님의 내재성)를 모두 경험한다.


축제의 성격

예배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베푸신 은혜를 상기하고 신뢰를 회복하며 말씀을 들음으로써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그에게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을 묘사하는 행위로서의 축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신일은 감사하면서 예배를 드린다.


섬김과 봉사의 성격

교회에서 행하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임재하셔서 그의 백성과 교제하고 그의 백성은 예배에 임재하시는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영적 진리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신약의 예배는 인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사랑, 충성, 복종, 헌신으로 응답하는 것이며 전인격이 하나님과 만나서 변화를 받고 갱신되어 그의 계시에 날마다 새롭게 응답하는 행위이다.

진정한 예배는 날마다 하나님께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행하는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께 정교한 기도를 드리는 것과 장엄한 의식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매일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교육적 성격

비의도적인 학습으로서의 예배는 먼저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물음에 대답을 준다. 루터의 지적처럼 인간은 모든 만물 위에 계신 무엇을 경배하고 사랑해야 하는지, 의지하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어떤 표준과 가치를 삶의 행동에 적용해야 하는지, 삶의 희망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등 인간 존재의 근거와 삶의 의의에 따른 물음들에 대한 대답을 예배 가운데 해석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해결한다.

아무리 아니라고 고집하더라도 우리는 지금도 예배 가운데서 교회를 위한 신앙적 삶의 원리를 강화시키고 있다. 예배의 가장 중요한 한 요소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 가르치는 것으로서, 항상 윤리적 관점에서 사람의 지표로 선포되는 것이며 개개인의 신앙 강화에 교육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종말론적 성격

진정한 예배는 항상 예배하는 자의 실존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게 마련이다. 진정한 예배는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항상 공급해 준다. 교회는 예배의 경축에서 하나님의 구속의 종말론적 성취를 보고, 종말론적 교회로서의 자신을 알아차리고, 종말론적 완성의 소망을 갖는다.

2. 예배의 성경적 근거

‘기독교는 예배하는 종교이다. ’‘기독교의 예배는 역사적인 것이다’ 예배학의 기본적인 연구는 역사적 이해를 전제해야 하며, 예배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기독교의 역사를 살피는 것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기독교의 예배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적 과정과 함께 하기 때문에 교회사의 맥락을 따라서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기독교 예배의 근원은 성경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한 특별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하여 자기를 섬기도록 그들을 선택했다고 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민족의 공족 예배 생활은 역사적으로 출애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국 시대로 이어지면서 일정한 장소에 국한된 예루살렘 성전의 예배가 되었고, 민족의 수난과 함께 회당 예배로 새로운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구약 시대의 예배

기독교 예배의 원리는 먼저 구약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일정한 제사가 발전했다. 또한 예배의 실천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했다. 예배 처소의 경우 처음에는 다듬지 않은 큰 돌을 그냥 세워놓던 것이 광야에서는 이동식 성전인 성막으로 발전하고, 솔로몬 때는 항구적인 성전으로 발전한다. 예물을 드리는 방식도 더욱 상세하고 엄격하게 규정된다.

족장들은 자신이 직접 제사를 드렸으나, 나중에는 제사가 제사장의 고유 권한으로 확립되어 왕이라도 친히 예물을 드리지 못했다. 고대 세계에서 이교도들이 드린 예배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드린 예배와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한 특별한 백성에게 자신을 계시한신 사실과 하나님께서 자기를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신 사실에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셨다.

-.그는 역사 안에 개입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셨다.

-.이스라엘은 그 예배에서 아무런 형상을 가지지 않았다.

이교도들의 예배는 아래로부터 시작된 것인 반면에 기독교의 예배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족장시대

족장 시대의 예배는 주로 개인과 가족 중심의 예배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족장이나 그의 가족와 계약을 맺으셨고 족장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단을 쌓았다. ‘희생 제물’이 그 제단의 중심이 되었다. 족장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였고, 그들이 머무는 곳이 어디든지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가 되었다. ‘가족이 교회이고 교회가 곧 가정’이었던 족장 시대 예배의 신학적 성격

첫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둘째, 계약 백성의 구별된 표로서 할례의 제도를 세운 것이었다.

셋째, 십일조의 실례를 세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찾는 자에게 오시고 예배드리는 자리에 임재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원리를 분명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족장 시대의 예배는 원리를 표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율법 시대


첫째, 이 만남을 소집한 주체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은 각기 역할을 분담하여 전원이 참여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다.

넷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로 굳게 약속했다.

다섯째,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만남은 언약에 인을 치는 비준의 극적인 상징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리스도의 희생 이후에는 주님의 성만찬이 교회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관계를 보증하는 인이 되었다. 성막은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였다. 이 성막 예배에는 몇 가지 특징적인 요소가 있었는데,

첫째가 절기의 축제 예배였다.

둘째는 법궤를 중심으로 한 희생 제사의 예배였다.

셋째는 안식일 제도가 지켜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신앙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기 백성에게 구원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가르쳐주신 사건인 율법 시대의 예배는, 모세로부터 아론과 그 아들들이 의하여 공중 예배의 한 제도로 확립되었다.

율법 시대와 주어진 이스라엘 예배의 뜻과 목적은 “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말라”(출20:5)는 하나님의 요구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라는 말씀 속에 가장 잘 요약되어 있다.


사사시대사사 시대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산당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길갈은 가나안 땅에서 여호와께 예배하기 위해 건립된 첫 장소였을 것이다. 길갈(삿2:1),오브라(삿6:24),실로와 단(삿18:29-31),헤브론(삼하5:3), 기브온(왕상3:4)의 제단들을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위하여 그 땅을 계속 정복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국 시대

다윗시대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 되었지만 솔로몬 시대에 비로소 건축된 예루살렘 성전(왕상 6:37-38)은 유동식 장막을 대치하여 나타난 예배로 장소로, 모세의 광야 예배에서 구원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계심을 상징하는 언약궤(법궤)가 이제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성전 예배와 성막 예배는 구조나 내용상 본질적인 차이는 없었다. 이 성전 예배에는 몇 가지 특색이 있다.

첫째, 예배 장소가 성전에 국한되어 성전 이외의 다른 곳에서 희생의 제물을 드리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다.

둘째, 예배에 관한 모든 요소가 성문화되어 세부적인 것까지 규정지어 있었다.

셋쩨, 특정인을 통하여 대리, 위탁 예배를 드렸다.

넷째, 의식적인 예배로소 설교와 기도가 없는 예배였다.

다섯째, 상징적이고 모형적인 예배였다.


포로이후 시대


포로 이후 시대의 예배는 한마디로 회당 예배라 할 수 있다. 회당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있었는데, 성전 예배의 참여자는 구경꾼에 불과하지만 회당 예배는 모두가 예배의 참여자인 것이 특별한 점이었다.

회당 예배는 임시적인 것으로 메시아가 성전을 건축할 때 까지로 한정되어 있었고 성전에처럼 행을 피우거나 악기를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예배가 거행되었는데 예배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씀, "쉐마“의 낭독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하나님을 사랑함에 대한 신앙 고백(신6:4-9)과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받을 축복과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 이 받을 저주(신11:13-21),다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복(민15:37-41)의 순서로 세 구절을 차례로 낭독한다.

둘째, 회당 예배는 기도를 중시한다.

셋째, 율법의 낭독이 있었다.

넷째, 구약의 예언서를 낭독했다.

다섯째, 강해와 권면의 시간이 있었다.

여섯째, 제사가 있을 때에는 축도가 있었고 축도가 있은 후에 는 아멘으로 끝났다.

이 회당 예배는 주후 1세기에 와서 더 이상 변동하지 않고 고정 순서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면모의 회당예배는 기독교 예배의 요람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오늘의 개혁 교회가 가지는 말씀 중심 예배의 근원이 되고 있다.

회당 예배는 신약 시대에 와서 매우 활발히 전대 전개 되었으며 교회의 확장 속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절대적 영향을 남겼다.


신약 시대의 예배

구약 시대의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였다면, 신약 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예배라고 할 수 있다. 또 구약 시대의 예배를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신약 시대의 예배는 새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께 예배하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과 새로운 계약을 맺은 백성은 누구나 새 이스라엘 민족이 된다는 것 이다.

구약 성경의 예배와 신약 성경의 예배 사이에 근본조적인 단절은 없다. 일반적으로 신약 성경에는 다음의 세 가지 융합된 예배 형태가 있다고 말한다.

곧 성전에서의 예배, 회당에서의 예배,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특수한 집단으로 모인 가정 및 다른 장소에서의 예배이다.

예수님 시대

예수님께서는 말과 행동을 통해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모습을 보여 주셨다. 새로운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은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사람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려지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요4:23)였다. 그는 백성들의 내면적 각성과 실천을 추구하는 가운데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함을 강조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에는 더 이상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사도 시대

첫째, 비교적 개방적이고 비형식적인 전도 형식의 예배였다.

둘째, 사도 시대에는 통상적으로 밤에 행하는 예배가 있었다.

사도 시대의 예배는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행위로서의 예배라기보다는 복음 전파의 과정에서 흔히 병행되는 비예전적 형태였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중심적 위치에 서 있는 부활하여 살아 계신 주님이 곧 과거에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님이며, 동시에 미래에 그리스도임을 지시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신약시대는 성전 예배와 회당 예배, 마가의 다락방에서와 같은 다락방 예배 요소들이 서로 용해되어 새로운 예배의 규범이 만들어지는 시기로서, 예수님께서 이 모든 예배가 하나님과 동등하신 자신을 향한 예배이어야 함을 주장하면서 유대 민족이 주장ㅎ라는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기본 생각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내려 주셨던 시기이다(막2:27-28)


3. 예배의 역사적 배경

초대 교회의 예배

초대 교회의 예배에 대한 최초의 일반적인 개요는 저스틴의 ‘제1변증서’안에 있다. 저스틴의 자료를 중심으로 한 초대 교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1.찬송 부름(시편이나 성경)

2.성경 낭독(사도들의 언행록과 예언서)

3.인도자의 설교(훈계와 권고)

4.회중의 기도(기립하여 힘에 지나도록)


*다락방의 예전

5.성찬식 -평화의 입맞춤(밷전 5:14)

떡과 포도주와 물을 인도자에게 가져옴

성찬식 기도(인도자 즉석에서 드리는 찬양과 감사)

응답(아멘)

분배(떡과 포도주 분배, 결석자의 몫은 집사가 가져다준다)

6.헌금(가난한 자와 과부를 도와 줌) 등의 순서이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중심이었다.

둘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써 예배자들의 마음을 주께 드렸다.

셋째,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읽고 그 말씀의 뜻을 강해하면서 신앙과 행위에 대한 권면과 설교를 했다.

넷째, 주님의 기도를 비롯하여 감사, 간구, 남을 위한 기도 등과 주님의 재림을 소원하는 기도를 드렸고 아멘으로 응답했다.

다섯째, 예물을 드림으로써 감사와 헌신의 표현을 했다.

여섯째,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공동으로 죄와 신알을 고백했으며 용서를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끝으로 예배의 극치를 이루었던 성만찬 및 세례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의 구속 사건의 새로운 경험과 은총의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 예배 속에서 다져진 신앙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복음 전파에 역동적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예배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고, 예배의 핵심적인 순서는 말씀과 성례에 집중되었으며, 그리스도인의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생명을 재확인하는 데 역점을 둔 예배 분위기를 형성해 나갔다.

중세 교회의 예배

초기 로마 교회의 예배

4세기경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기독교 역사와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를 초래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로마의 콘스탄트누스 대제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고 기독교인들의 일요일을 법적으로 성스러운 날로 지정했으며, 이 교들의 재산을 이용해서 교회를 만들도록 했다. 이로 인해 이 시대의 기독교 예배는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첫 번째는, 사적인 예배에서 공적인 예배로의 변화이다.

두 번째는, 교회의 성장과 부흥이다.

세 번째는, 예배의 전문화(상직화)와 평신도 참여의 후퇴이다.

네 번째는, 외적 형식과 예식의 강조이다.

이처럼 외적인 형식과 강조하게 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주의(Sacramentalism)와 성직주의(Sacerdotalism)의 신학 제도에 기인한 것 이었다. 교회의 이러한 급격한 비약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예배 양식에 대한 심각한 대립을 야기시켜 결국 1054년 동방과 서방교회의 영원한 분열이라는 불행을 가져오게 되었다.


동방 교회의 예배

동방 교회의 예전은 예배에서 그리스도가 주님으로서 임재한다는 생각을 전체한다는 면에서 서구의 예배의 주된 축제로 삼고(부활 장면을 그림으로그려서 교회의 중심에 세워둔다) 있으며,강한 명상을 중심하는 예배라는 면에서 서방 교회의 예배와 차이를 보인다.


서방 교회의 예배

서방 교회는 말씀과 성례를 예배의 두 기둥으로 붙들고 있었지만, 신비적인 면을 강조하던 동방 교회와는 달리 자신들이 속해 있던 문화권의 영향 아레에서 로마인들의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즉 예배가 회중이 알 수 없는 단어로 성직자에 읳래서 연출되는 하나의 연극이며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구경거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쇠퇴로 초대 교회와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며 특색인 말씀과 성찬의 균형이 상실 되었다.

교회의 본래 모습을 예배 가운데서 상실한 중세 교회는 결국 면죄부 판매와 같은 모순을 범하며 시대를 암흑기로 몰고 가게 되었다.그리하여 공명의 새 아침을 추구하는 참신한 개혁의 일꾼들이 드디어 나타나게 되었다.

종교 개혁시대의 예배


첫째는 가장 보수적인 개혁성을 띤 루터주의 예배 형태로서 로마 가톨릭 시대의 것을 상당히 축소하긴 했지만 많은 부부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었던 예배 의식이다.

둘째는 루터주보다 더 용감했지만 츠빙글리보다는 급직적이지 못했던 온건한 칼빈주의의 예배 형태로서,오늘날 장로 교회 또는 개혁 교회 예배 의식의 원형이다.

셋째는 가장 급직적인 츠빙글 리가 주장한 예배 형태 로서,재침례교 및 퀘이커교와 같은 청교도적 전통의 독립 교회예배 의식의 근간이 된 것이다.


루터의 예배

루터는 첫째,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사귐을 강조했다.

둘째, 주님의 만찬은 중심이 되는 의식으로서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매일 거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성찬의 음식에 실제로 임한다는 성체 공재론을 믿었다.

넷째, 미사는 가톨릭교회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의 반복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바쳐서 그분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섯째, 자국어로 미사를 드리도록 권장했다.

여섯째, 라틴어로 대부분위 의식적 등불과 분향 및 제복을 사용하면서 로마 교회의 옛 관례로 돌아갔다. 루터가 의도한 것은 복음적 태도에 입각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의 균형을 다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역사적인 교회 음악을 선호했던 루터는 츠빙글리나 칼빈과는 달리 오르간을 계속 사용할 뿐 아니라 성가대로 하여금 라틴어로 합창하게 했으며,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를 때는 성가대가 회중의 찬송을 이끌어가도록 했다.성가대가 교회에서는 ‘칸토(cantor,노래하는 자)’가 찬송을 인도했다.

그는 성경에 금지 되어 있지 않은 것을 교회가 도움이 된다고 결정하면 허용하는 원칙을 제시했다.

칼빈과 제네바 교회의 예배

개혁 신학에 가장 큰 공헌을 했고 그 결과 다음 세대를 위한 예배 의식의 예식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칼빈은 중세의 미사를 흉내 내는 것을 싫어했다.

예배는 성경적이어야 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는 칼빈이 루터보다 훨씬 더 철저했다. 루터는 성경에 의해 금지되지 않는 한 교회에서의 전통을 허용했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교회와 국가에서 지배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에 관한 그의 원칙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명하지 않은 것을 금하신다”는 것이다.

둘째로 칼빈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과 마찬가지로 예배는 올바르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예배 이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해될 수 있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중의 언어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칼빈은 예배는 신앙 인격의 성장, 곧 사람들이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넷째로 예배는 단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츠빙글리의 예배

츠빙글리는 예배 계획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종교 개혁의 파문을 확산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는 예배 가운데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성경 봉독과 기도, 죄의 고백 그리고 설교만을 강조한 의식을 내세웠다.

그리고 루터와는 달리 미사를 예배의 규범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주님의 만찬은 1년에 4회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며, 주님의 만찬은 원래 상징적이라고 믿었다.

츠빙글리는 중세 교회의 교리와 의식에 대해 매우 자유로운 관계에 서 있었고, 그의 신학은 루터보다 폭 넓고 충실했다.

면죄부에 대한 그의 위치와 그것에 대항한 그의 태도는 루터보다 급진적이었다.

그러므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루터만큼 동정하지 않았다.


4. 예배의 신학적 기초

예배 신학의 두 차원

예배에 대한 근대 신학적 해석은 크게 신비주의 차원의 예배방법과 성육신적 계시 차원의 예배 방법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신비주의 차원의 방법론 자들은 예배의 핵심적인 내용은 “절대자를 인식하는 일”이라고 정의했고, 성육신적 계시 차원의 방법론 자들은 “예배란 역사와 인간을 위하여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현재에서 축하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 두 주장의 근본적인 차이는 이들이 본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신비주의적 방법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공간적 시각에서 바라보려 한다. 성육신적 방법론 자들은 하나님을 시간 속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계시와 신비 차원의 어느 한쪽에 치우치기보다는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은 이 두 차원 모두를 포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배 신학적 규정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에서 예배 대한 부분을 보면“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 고 나와 있다. 참 예배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나 어떤 사물이 아니라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기독교의 예배는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해 사람이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결코 인간의 감정적, 정신적 만족과 흥분을 유발시키는 인간 중심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의 대상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의 원천이실 뿐만 아니라 보존자이시다. 또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솔선하여 주도적으로 사랑의 해동을 취해준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인격적이고 영적인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요, 영원하고 무한하신 분이며, 인간의 현실 생활에 끊임없이 임재하시는 분이다. 그리고 그분은 예배의 응답자로서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이시다.



예배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예배의 기초는 기독론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아래로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직접 예배 드릴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말 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우리와 동일한 신분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대속의 죽음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길을 다시 열어 놓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하여 제사장을 통하지 않고서도 하나님께 직접 예배 드릴 수 있는 은총을 입게 되었다.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예배자는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시인하는 신앙을 요구받는다.

영적인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다. 신약시대 이후로 예배는 의식과 형식을 넘어선 영적인 예배가 되었다. 성령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내적으로 예배자에게 증거 하여 깨닫게 할뿐만 아니라 감동시키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행위이다

예배는 고립된 개개인의 행위가 아니라 교회 전체의 행위이다. 예배는 경건한 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교회의 주와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공동 행위이다.

서로의 개성과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신앙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 형제요 가족이라는 연대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全(전) 삶이다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임과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예배를 받는 존재로만 끝나지 않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있는 무리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신다. 다라서 예배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며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5.예배와 성례

개혁 교회의 전통은 기독교 예배에서 중요한 네 가지 요소를 강조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친교의 삶에 대 의식적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나 성례는 그렇지 않으며, 말씀은 신앙을 일으키고 강화하나 성례는 신앙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며, 말씀은 곧 세계로 전달되나 성례는 오직 믿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진다.

하이델베르크 신앙문답은 성례는 복음의 약속을 더 잘 이해하도록 하는 보이는 표시(Signs)요, 보증(Seals)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성례는 교회를 위한 것으로서 칼빈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시요 보증이 된다.

실로 세례는 우리가 씻음 받음과 깨끗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고, 성찬은 구속되었음을 증거 해 주므로 성례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례를 어거스틴은 ‘보이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성례의 중요성

세례와 성찬의 성례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 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복음을 구체화하고 설명한다. 따라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해위이지 결코 예배자들의 경험이 아니다 세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봉헌이나 믿음이 아니라 거듭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이다.

그리고 성찬서 가장 중요한 것은 떡을 떼는 것과 포도주를 붓는 수단을 통하여 예배자들에게 자신을 떼어주시는 그리스도 이다.

인간의 구원사역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하심이 제일이요 인간의 행위는 부차적인 것과 같이 성례에도 그러하다는 의미이다.

성례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되어 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사랑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성찬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을 양육하고 신앙을 강화하며 교회 안에서 사랑의 관계를 지속 할 수 있게 된다.

성례의 어원과 신학적 의미

성례란 무엇인가?

‘성례’는 ‘신비’ 또는 ‘비밀’이란 뜻의 헬라어 뮈스테리온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교회의 역사에서 이 단어를 맨 처음 사용한 사람은 3세기경 로마 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Tertulliian)으로 알려져 있다.성례는 세례와 성찬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

세례는 신자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할 때 단 한 번 받는 반면에, 성찬은 평생토록 계속한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로도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 일 즉 칭의와 부응하는 의식이며, 성찬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성결한 생활을 하며 새롭게 되는 성화에 부응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의식을 성화에 부응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이라는 두 의식을 통해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다.

상례전은 순수한 세례와 성찬은 예전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경험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엄숙한 예전으로 이해되었다.

성례의 신학적 의미

종교 개혁자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행하도록 멍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제정된 성례로서 세례와 성찬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즉 성례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현재적인 역사를 묘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례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활동에 있다고 하겠다. 성례전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첫째, 성례전은 모든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보이는 말씀’이다.

둘째, 성례전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와 예배자들의 진지한 응답이 나타나는 현장이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사랑의 실체로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넷째, 성례전은 성도들의 공동체 의식을 재확인하는 예전이다.

끝으로, 화육적(Incarnational Respect) 관계 형성이 성례를 통해 계속적으로 다짐되어야 한다.

성례는 한 인간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고 그 새로운 차원의 세계에 머물게 하는 신비한 위력을 갖고 있는 예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장을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예전이라고 부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룩되는 현장이라고 부른다.

세례의 신학

기독교 공동체는 세례를 통하여 한 인간의 삶 속에 하나님의 통치의 시작을 실증하고, 그 통치의 미래를 향한 공통적 회개를 실증한다.

세례 의식의 역사


초대 및 중세 교회의 세례 의식

기독교에서 행하는 세례 의식은 기본적으로 예수님의 명령(마28:19)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세례의 사상이나 사역은 일찍이 구약의 유대 민족의 종교 생활 가운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1.원시 세례

세례의 원시적 형태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나 거룩한 예전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물로 깨끗이 씻는 의식을 가졌다.

둘째로는 쿰란 공동체에서 가졌던 세례 의식이다. 이들의 세례는 세례 요한의 세례의 줄기가 되었고 이후 기독교 세례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셋째로 유대교로 개종하는 이방인들에게 주었던 세례가 있었다. 영과 육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바치는 성례전적 성격을 포함한다.

복음의 전파와 확장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개해 갈 것을 명령하셨던 예수님께서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베푸신 것은 기독교의 입교 의식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기독교라는 새 공동체 형성을 위한 훌륭한 방편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신학자 머레이는 “기독교 세례의 신학과 형태는 유대교의 개종자 세례의 형태와 신학에 기인 한다” 고 말했다 .

세례 요한에게서 기독교 세례의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세례는 유대교의 세례 형태에 새로운 내용과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서 곧 예수님의 사역 출발점이 되었고 그 후 기독교 공동체의 소중한 성례 의식이 되었다.

2.예수니미과 사도들의 세례

먼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셔야 했던 의미를 생각해 보자.첫째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는 선지자 요한을 통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1:29)이라고 한 것

둘째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는 순간에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막1:11)는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통하여 만인에게 예수님의 신분을 확인시켰다.

그는 새롭게 다가올 미래 사건을 가리키는 것으로 세례를 언급했는데, 그 내용은 십자가 수난 곧 오스카 쿨만의 말대로 메시아와 수난의 종으로서 그 자신이 행동적으로 받을 세례를 예언하셨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가 베풀어져야 되다는 사실과, 복음을 받아들이는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인치는 예전으로 지켜나가야 할 의무임을 가르쳐준다.

3.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세례

이것이 최초로 나타난 곳은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에서이다. 사도들에 의해 행해진 세례 사역의 의미는 우선 그들이 ‘주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다는 데 있다.

그리고 사도들은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죄의 용서를 선언했다. 사도들을 통해 받은 세례에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의미가 주어졌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무리들은 새로운 공동체 세계에 서 참 기쁨을 향유했으며 그리스도의 강력한 증인으로 살았다.

종교 개혁 이후

개혁자들 에게 세례는 하나이며, 물 세례는 사람을 내적으로 정결케 하는 성령 세례를 표상으로 하는 외적인 징표였다.그리하여 루터로부터 독립된 세례 의식과 성찬이 개혁 교회에나타났고, 츠빙글리와 칼빈의 종료 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의식 중심의 상정적인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예전을 만들려고 했다.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와 신학

개신교의 예배에서 세례를 성만찬과 함께 소중한 성례전으로 지키게 된 것은 특유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례는 죄의 용서, 인치심, 성령의 부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함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함 등 다양한 의미를 간지다. “세례는 우리 교회의 친교를 허락하는 입회의 표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랴”는 정의가 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취하신 절대 주권의 표시이며 인치심(seal)이라는 신 주도적 입장을 취한다. 존 맥콰리(John Macpuarrie)같은 학자는 세례를 구원론의 단계에 속한 하나의 과정으로 보면서 죄의 인정과 회개, 칭의, 성화 그리고 선택의 순간으로 해석했다.

세례를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실제 삶과 연관시켜 보면 몇 가지 의미를 새롭게 찾아볼 수 있다.

첫째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둘째로, 세례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예전이다.

셋째로, 세례는 새로운 피조물의 탄생을 의미한다.

넷째로, 세례는 기독교 공동체의 일원이 되게 한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며,교회를 통한 권리와 의무 수행에 책임 부여되지 않는다. 세례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사람들의 일원이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 삶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유아 세례와 입교 의식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은 어린아이들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입어야 할 자로 여겨 일찍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베풀게 했다.

유아들의 세례는 부모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알고 믿음 안에서 자라도록,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과 양육이 전제된 가운데 세례를 받도록 하는 것이다.

유아 세례는 기독교의 오랜 전통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유아 세례는 계약의 원리에서 추론하고 있다고 하겠다.

둘째로, 사도 시대에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은 사건(행 11:14, 16:33, 18:8고전 1:16;딤후 1:16)을 근거로 많은 학자들은 그 가족에 속한 어린아이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유아 세례는 무엇보다 부모의 신앙과 그들의 책임 있는 서약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한다.

로렌스 스투키 교수는 ‘계약의 새로운 갱신’이라고 부른다. 근본적으로 입교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세례를 유아 때에 받았던 자들이 성장 기간을 거쳐 일정한 연령에 이를 때에 교회가 기독교의 신앙 교리에 근거한 신앙 교육의 과정을 베풀고, 그 과정을 마친 자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환영하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만찬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예배의 현장에서만 베풀어지는 성만찬은 세례와 함께 교회 공동체를 가장 기독교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예식 가운데 하나이다.

성찬식을 통하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이웃의 화해를 경험하며 신앙을 재확인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삶이 가지는 의미와 세상을 향한 선교적 사명을 되새기며,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게 된다.

성만찬의 역사적 배경

성만찬 예배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출발한다.

그리스도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11:24)는 말씀에서 성만찬 예배는 출발한다.

초대 교회 때부터 성만찬은 예배의 필수적이며 중심이 되는 순서였다. 말씀으로부터 시작된 예전은 다락방 예전(성만찬)에서 절절을 이루었고 세례 교인은 성만찬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를 갖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는 성만찬 중심의 예배로, 개신 교회는 성만찬이 빠진 설교 중심의 예배로 변질 되었다.그러나 종교 개혁자들 중에 성만찬의 중요성을 무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종교 개혁자들의 성만찬에 관한 통일되지 못한 견해들이 말씀을 중시하고 성만찬을 소홀히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성만찬의 유래

초기 형태의 성만찬 예식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성만찬에 관해 신약 성경이 제공하는 자료로는 마태복음 26:26-29절, 마가복음 14:22-25절, 누가복음 22:15-20절과 고린도전서 11:23-26절이 있다.

예루살렘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 예수님의 최후 만찬으로부터 유래 되었다.신약학계의 권위자인 예레미야서는 복음서의 기록 속에는 그만찬의 유월절 배경을 가리키는 열한 가지 사실들이 있다고 밝혔다.

첫째, 최후의 만찬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었다.

둘째,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게 식사를 위한 방이 소란 없이 제공 되었다.

셋째, 밤에 거행되었다.

넷째, 소수의 남자들의 무리가 함께 모였으므로 유대 가족적 만찬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유지 되었다.

다섯째, 제자들이 상에 기댔다.

여섯째, 빵을 떼기 전에 어떤 음식이 먼저 나왔다.

일곱째, 유월절의 독특한 특징인 붉은 포도주를 마셨다.

여덟째, 이 만찬은 자선 행위와 관련되었다.

아홉째, 만찬은 시 113-118편에서 발췌된 찬양으로 끝을 맺었다.

열째, 유월절에 일반적으로 있었던 성경 강해 순서에 빵과 포도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열한째, ‘적신 빵 조각’의 사용(요 13:26이하)은 그 만찬의 특징에 대한 증거의 하나이다.

최후의 만찬이란 지금까지 키디쉬를 행해 온 것 중 ‘최후의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최후의 만찬이 키디쉬에서 근거한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요한복음 기사이다.

요한복음 18장 28절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은 유월절 잔치를 먹기 전이라는 견해를 밝힘으로써 최후의 만찬은 다락방에서 마지막 날 밤에 빵과 잔을 나눈 것뿐이지 유월절을 기념한 것은 아니므로, 결국 최후의 만찬은 키디쉬였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어떤 형태의 식탁을 이용하셨든 새로운 성례전으로서 성만찬을 제정하셨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전적으로 독특한 기독교적 전통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것으로미래 구원에의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을 성례전으로 제정하신 과정

첫째, 먼저 주님께서 빵을 취하셨다.

둘째, 축하하셨다.

셋째, 그것을 쪼개셨다.

넷째, 제자들에게 나누어지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 아니라”고 하셨다.

다섯째, 그 후에 잔을 드셨다.

여섯째,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다.

일곱째, 제자들에게 드리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시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

예전의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은 신실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의 참된 임무라 하겠다.

6 Powerful "I WILL" Promises of Jesus

praying in the spirit Christians are quite familiar with the “I AM” statements in Scripture. They are powerful and share much about the character of Christ. They share God’s will for His son and for 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