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다말이 요구한 약조물의 비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 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더라.” (마 1:1~17)


예수의 족보에 이방 여자가 세 사람 들어가 있는데 왜 이 여자들이 예수의 족보에 들어가 있는가? 족보는 남자들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예수의 족보에 이방 여자 셋이 올라 있는데, '다말'과 '라합'과 '룻'이다. 이 여자들이 다 어떠한 사람들인가 알면 하나님이 어떻한 사람을 기뻐하시는지 알 수 있다.


다말과 라합과 룻은 이방 여인이었다. 이들이 당당히 예수의 족보에 들어갔다. 이들이 이면적(裏面的)인 유대인(롬 2:29)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내 속에도 예수의 피가 흐르고 예수의 정신이 있다면 내가 한국 사람이지만 예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피가 내 속에 흐르지 아니하고 예수의 정신이 없다면 영적인 예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다.


마태복음 1장 1~17절에 나와 있는 족보는 혈통이나 육적인 족보가 아니라, 예수의 피의 족보요 그리스도 세계의 정신적인 족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혈통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사람의 아들(人子)인 예수(육체)가 죽어야 성결의 영(靈)인 하나님의 아들(神子)로 인정되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肉身)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여기서 탈락하면 출애굽(세상에서)하여 광야(교회)에서 헤매다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져버리는 신세가 되고 만다. 애굽은 세상의 그림자요, 홍해는 처음 사람이 죽는 물세례의 그림자요, 광야는 영분별력을 시험하는 그림자요, 요단강은 성신세례의 그림자요, 가나안 땅은 하늘나라 즉 영적인 세계의 그림자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교회에 나와서 구원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주일성수 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열심히 봉사하면 죽어서 천국 간다고 믿고 있으면서 요단강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다. 요단강도 건너지 않고 약속의 땅으로도 들어가지 않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순례자는 성경을 통하여 구원의 로정을 잘 챙겨 보아야 한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다말이 유다의 아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다말은 유다의 첫째 아들 엘의 아내였기 때문에 실상은 유다의 며느리다. 야곱이 12 아들이 있었는데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다. 첫째 아들 루우벤은 아버지의 아내와 동침한 사건 때문에 장자의 위치를 잃었고(창 49:3-4),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 사건(창 34장)에 연루되어 야곱의 축복에서 멀어졌으므로 유다가 장자의 자리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선민인 아브라함의 족보에 꺼림칙한 이방 여인들이 들어갈 수 있었을까! 세상을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계보에 이방 여인이 무슨 선한 일이 있었기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며,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볼 때 불결하게 느껴질 법도하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말의 사건을 잘 이해하게 되면 사건 속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씨에서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야곱의 장자의 자리에 올라선 유다에게서 그 대가 이어져야 한다. 그러나 유다의 장자와 차자는 죽었고 마지막 3자인 셀라까지 죽을까봐 유다가 며느리 다말에게 셀라를 주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다말은 적통에게서 씨를 받아 대를 잇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들어 쓰실 때에 인간처럼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하늘나라는 영적인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을 취하시고, 육적인 사람을 버리신다. 다말은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에 아주 적합한 여인이었다. 다말은 오직 하나님의 씨를 받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주는 것이 자기 사명임을 깨달은 여인이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버림받고, 이방인이 부름을 받은 것은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유업을 계속 이어갈 사명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영광스럽고 찬란한 하나님나라의 미래를 바라보는 소망이 없고 눈앞의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면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썩어질 곳으로 보내신다.


천국은 빼앗겼던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젖먹이 새끼 송아지를 뒤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법궤를 수레에 싣고 블레셋(외국인의 땅)에서 벧세메스(태양의 궁) 길로 바로 향하는 암소처럼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과 부활의 소망을 마음의 수레에 싣고 천성을 바라보고 묵묵히 걷는 사람이다. 다말의 행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도덕 윤리적인 선악의 개념으로 보면, 다말의 행위는 패륜 중에도 극한 패륜이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다말은 위대한 예수의 족보에 올라 있다.


다말은 기독교인들이 깊이 곱씹어보고 되새김질해보아야 할 위대한 여인 중의 여인이다. 다말은 속물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의 정욕을 제어할 수 없어서 시아버지를 유혹하여 욕정을 해결한 그런 여인이 아니다. 그 시대는 이웃 남자와 간음한 사실이 알려지면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시대였다.


다말은 자기가 시아버지와 불륜 관계를 맺은 사실이 알려지면 자기 신상에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모르고 한 행동이 아니다. 간음한 여인은 그들의 관습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무서운 형벌을 감수하고 불륜을 저질러 아들을 낳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러한 숙제는 바로 우리 기독교인들의 문제다. 기독교인들에게도 이러한 숙제가 주어져 있다.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와 불륜을 저질러서 시아버지의 씨인 아들을 낳아 오실 그리스도의 대를 이어준 사람이다. 모든 수치와 멸시와 고난을 참고 유다 지파의 대를 이은 여자, 아니 오실 메시야의 대를 이은 여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씨를 주셔서 자녀를 생산하게 하신 목적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사람은 땅에서 만물을 다스릴 왕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이어받은 존재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6-28)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법(말씀)'이 심비(心碑)을 새겨져야 하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하고 '말씀의 권세인 지팡이'를 손에 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 세 가지가 없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유업을 이을 수 없고 오히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데로 떨어지고 만다(롬 1:25).


이 세 가지는 어는 특정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모 된 사람은 이 세 가지를 그 자녀에게 철저히 교육시켜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을 생산하고 길러내려면 어떤 값을 지불해야 한다. 먼저 아이를 잉태해서 세상에 나오게 하려면 반드시 남녀가 합궁을 해야 하고 또 해산의 고통이 따른다. 그 고통을 극복하고 아들을 낳으면 아들 얻은 기쁨에 모든 고통을 잊어버린다(요 16:21).


이제 유다와 다말의 사건에서 우리가 무슨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그 의미를 알아보자.


“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위하여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매 유다가 그 이름을 엘이라 하니라.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오난이라 하고 그가 또 다시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셀라라 하니라.…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취하니 그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의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형에게 아들을 얻게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泄精)하매 그 일이 여호와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가 그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守節)하고 네 아비 집에 있어서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아비 집에 있으니라.”(창 38:1-11)


다말이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되었다. 이스라엘의 관습은 장자가 죽으면 장자의 동생이 그 대를 이어주는 계대법(繼代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유다가 둘째 아들 오난에게 네 형수에게 들어가 동침해서 아들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주라고 했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와 형수 사이에 씨가 생겨도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잠자리에서 땅에다 설정(泄精)하고 만다. 하나님이 그 행위를 악하게 보시고 오난을 죽이셨다. 오난은 씨를 전해주면 다 되는데 그 마음속에 형수를 여자로 보고 음욕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를 죽이신 것이다, 그 다음 차례는 셋째인 막내아들인 셀라의 차례가 되었다.


이쯤 되자,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며느리가 자식 잡아먹는 요부(妖婦)로 보였을 것이다. 이제 하나 남은 자식까지 죽이겠다 싶었는지! 며느리 다말에게 막내아들 셀라가 장성하면 기별할 테니 친정에 가서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다말은 시아버지의 말을 믿고 친정으로 가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으나 셀라가 장성하여 청년이 되었는데도 유다는 며느리를 부르지 않았다. 영리한 다말은 유다의 속셈을 꿰뚫고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의 씨를 받는 기발한 프로젝트를 개발한 것이다.


사내 놈 치고 여자 싫어한 놈 어디 있나! 더구나 유다는 아내를 상처하고 겨우 위로를 받고 몸을 추스린 다음이었다. 여인의 냄새가 그리웠을 것이다. 다말은 자기가 수립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프로젝트를 가지고 작전을 개시했다. 유다의 목장이 딤나라는 곳에 있었다. 다말은 어느 날 시아버지가 양떼가 있는 딤나로 털 깎으러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과부의 의복을 벗고 대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아서 그 시아버지 오기를 기다렸다.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유다가 그 앞을 지나가다가 요염한 여자를 보고 말초신경이 뿌듯함을 느꼈다. 그 요염한 여자가 자기 며느리인 줄 누가 꿈엔들 상상이나 했으랴! 이때에 이방신에게 제사지내는 제사장 창녀인 줄 알고 동침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이제 본격적인 계약 체결에 들어갔다. 그냥 몸을 줄 수는 없는 일. 다말이 유다에게 ‘무엇을 주고 내게 들어오려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유다는 화대(花代)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에 ‘염소 새끼'를 주겠으니 우선 몸을 풀자고 했다.


다말이 그냥 그 말을 믿고 몸을 내 줄리 없다. 이미 시아버지는 자기를 속인 전과자인데 또 속겠는가? 그래서 다말은 유다에게 말했다. 당신이 '염소 새끼'를 줄 때까지 약조물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유다는 마음이 급한데 이것저것 가릴 것이 무엔가? 유다가 물었다. 무슨 약조물을 주랴? 다말이 말했다.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시오.”(창 38:18) 유다가 즉각 오케이! 하므로 이제 계약은 체결되었다.


다말이 임신할 수 있는 주기를 정확하게 재서 벌인 일이렷다! 유다가 다말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유다와 다말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서 시치미 뚝 떼고 시아버지 유다는 양털 깎으러 목장으로 갔고, 며느리 다말은 면박을 벗고 과부의 의복을 도로 입고 발거음도 가볍게 친정으로 돌아갔다.


이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비밀은 바로 다말이 약조물로 소유한 ‘도장’과 ‘끈’과 ‘지팡이’에 있다.


이 일 후에 유다는 화대로 주기로 약조한 염소 새끼를 자기 친구 편에 보내어 약조물을 찾아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여인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돌아왔다. 그 친구가 다말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곳 사람들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였다. 그 말을 들은 유다 왈 ‘그로 그것을 가지게 두라. 소문나면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렵다’(창 38:22-23)였다. 그래서 ‘너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약조물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일 후 석 달쯤 후에 유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이 들려왔다. 며느리 다말이 어느 놈하고 붙어먹었는지! 배가 볼록 튀어나왔다는 소문이었다. 그래서 유다는 며느리 소식을 듣고 뿔이 석자나 솟아가지고 씩씩거렸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요년이 집안 망신을 시킬 수가 있어! 우리 속담에 ‘똥 뭍은 개가 겨 뭍은 개 나무란다’는 말이 있다. 바로 유다에게 적합한 말이 아닌가! 우리가 다 이와 같은 위선자가 아닌가! 추잡한 짓은 자기가 앞장서서 해 놓고 며느리 타박하고 있다.


"유다는 그(며느리)를 끌어내어 불사르라"(창 38:24) 한다. 그러나 그냥 죽을 다말이 아니죠! 다말은 인편에 자기가 보관하고 있던 담보물을 시아버지에게 보냈다. '당신 한 번 맛 좀 보실 랍니까? 유다는 약조물을 보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아니, 이게 뭐야!!! 유다의 표정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아마 황소 눈처럼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꿀 먹은 벙어리가 따로 있나! 자기 살을 꼬집어보지 않았을까! 이런 경우를 두고 ‘청천벽력(靑天霹靂)’이라고 하는 것 아닐까! 이 정도 되면 유다가 손들고 자수해 한다.


유다가 자기가 주었던 약조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하는 말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라”(창 38:26)고 자수할 수밖에 없었다.


사탄이 유다 마음속에 ‘네 며느리 다말은 사내 잡아먹는 년이야!’라는 생각을 살짝 집어넣어 가지고 구원자로 오실 그리스도의 맥을 끊어 놓으려는 계략을 세웠던 것이다. 무엇이 사탄인가? 바로 우리 마음이 뱀이며 사탄이다. 우리는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왜 하나님은 부정한 여자 다말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오게 하셨을까? 그 이유는 간단한 데 있다. 다말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의 '씨'를 이어가고 싶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신다. 우리도 다말과 같이 신앙인의 보물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다말의 사건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교훈은 약조물인 ‘도장’과 ‘끈’과 ‘지팡이’에 있다고 전제했다. 그 약조물들의 의미를 짚어보자.


첫 번째, 다말이 수중에 집어넣은 ‘도장’에 대하여 영적인 비밀을 알아보자. ‘도장’은 자기 자신을 대표한 인감이다. 모든 계약을 체결할 때에 도장이 찍혀야 한다. 왕이 규례를 세울 때에도 어인(御印)을 찍어야 비로소 그 효력이 있어 시행된다. 금령을 세울 때에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도장'이 찍혀 있느냐에 따라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고 권리를 상실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법(말씀)'을 '인침'을 받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마귀의 표(거짓 선지자의 말)를 인침 받은 자가 얼마나 많은가. 마귀의 표를 인침 받으면 마귀의 자식이 될 뿐이다.


“썩는 양식(거짓 선지자의 말)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의 '인 치신' 자니라.” (요 6:27)


이 인(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인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의미한다. 너는 ‘내 소유다’라고 도장을 꽉 찍어놓는 것을 말한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 침을 받지 아니하면 가짜 그리스도인이다. 예수를 믿어도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은 성전밖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인침을 받았는지, 자신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 쳤느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2~34)


복음을 전할 때에 하나님께 받은 말씀만 해야 하고, 복음을 받는 자가 거짓 복음을 마음에 새기면 마귀의 인을 받는 것이 된다.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하라 하시고 나의 듣는데 또 그 남은 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 성읍 중에 순행하며 아껴보지도 말고 긍휼을 베풀지도 말고 쳐서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인)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겔 9:4-6)


'표'나 '인'이나 '도장'이나 같은 말이다. 말씀을 빼앗아 가지려 하는 자가 바로 과부, 고아, 친구, 형제, 이웃이라 했다. 그러므로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배당에 들어와 앉아 있다고 인 쳐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 속에 들어가 말씀대로 행하는 자, 목숨을 내어놓고 어린양을 따라가는 자가 인을 받게 된다. 다말은 이 인의 소중함을 깨닫는 이의 어머니다.


두 번째, 다말이 담보물로 받았던 ‘끈’에 대해서 알아보자. '끈'은 무엇인가? '끈'은 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끈'에 매였는지 '마귀의 말의 끈'에 매였는지 자기를 성경 말씀인 다림줄로 늘 재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마귀의 달콤한 말의 끈에 매여 있으면 그는 마귀의 종으로 어두움에 있는 자요, 갇힌 자요, 사로잡힌 자이다. 하나님 말씀의 끈에 매어있는 자는 자유인이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엡 6:14)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사 11:5)


'띠'가 곧 '끈'이다. 진리(말씀)로 허리띠를 띠고 사탄의 세력과 싸우라는 것이다. 역도 선수들이 경기할 때 허리띠를 띠는 것은 배에 힘을 싣기 위함이다. 우리 성도들은 말씀의 허리띠를 띠고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한다. 그래야 옷이 흘러내리지 않아 잘 싸울 수 있다. 다말은 진리의 띠의 소중함을 깨달은 이의 어머니다.


세 번째, ‘지팡이’가 무엇인가 알아보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사 11:4)


이 '지팡이'는 소경을 인도하기도 하고, 나의 길을 갈 때에 나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나의 나그네 길에 지팡이는 아주 좋은 동반자다. 천국 가는 길에 필요한 말씀의 지팡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바로 앞에 섰고(출 4 :17), 아론이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졌고(출7:10), 주님께서도 지팡이 같은 갈대를 요한에게 주셨다(계 11:1).


우리가 거짓 목자와 변론하게 될 때가 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인 '지팡이'로 쳐야 입술의 기운에 악한 자가 죽는다. 다말은 '말씀의 지팡이'의 소중함을 깨달은 자의 어머니다. 우리 성도에게 이 세 가지 곧 ‘도장’과 ‘끈’과 ‘지팡이’가 없으면 승리하는 길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 맞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말씀의 지팡이로 무장'해야 승리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요한계시록 9장 4절에 보면, “저희에게 이르시되 땅의 풀이나 푸른 것이나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하시더라”고 했고, 요한계시록 7장 2~4젤에 보면,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하였고,


또 요한계시록 6장 9~11절과 14장 1~5절에 보면, "인 맞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 당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 맞은 자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가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인 맞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37장에서 요셉이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간 사건을 말씀하시다가 중단하고, 다말의 사건을 삽입하여 다말의 사건을 마무리한 후에 다시 요셉의 사건을 이어나가는 것을 깊이 생각해보면 후 세대 성도들에게 귀감을 삼으시려는 뜻이 있었다고 보여 진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시라(계 2:7).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 맞고 하나님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3-17)


다말이 소유한 ‘도장’과 ‘끈’과 ‘지팡이’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이것이 없는 자는 용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용인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Comentarios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