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은 예배가 중심
하나님의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을 말합니다
성도는 예배로 시작하고 예배로 진행하며 예배로 마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신앙생활을 좀 하고 성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합니다.
맞는 대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슨 뜻일까요?
한마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을 즐겁게 해드리고 보람 있게 해 드리는 일은 곧 예배입니다. 사람은 예배를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이 예배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핍박시대엔 목숨을 걸고 드리던 예배가 자유롭게 드릴 수 있는 은혜를 받았지만, 오히려 예배를 향한 열정과 간절한 소망은 식어가고 있습니다.
마귀는 어찌하든지 예배를 소홀히 하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프랑스 혁명 당시 주일 예배를 막기 위해 일주일을 10일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산업의 생산량이 40% 감소했습니다.
또 러시아 혁명 때 레닌이 일주일을 8일로 늘려 생산량이 30% 감소해 일주일을 6일로 줄였습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생산량 30% 감소돼 레닌 역시 일주일을 다시 7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렇게 제도를 바꾸어서 라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사단은 방해합니다. 일주일의 ‘7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다’는 창세기의 안식일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삶의 리듬이 무너진다면 개인의 건강은 물론 땅의 축복도 상실하게 됩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날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성전 마당만 밟지 말고
특별히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건성으로 드리면 10년을 드려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BTK 킬러’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BTK는 Bind(묶다) Torture(고문하다) Kill(죽이다)의 약자입니다.
묶고 때리는 방법으로 1970년부터 사람을 열 명이나 죽인 살인 사건이 미국에서 일어났습니다. 범인은 데니스 레이더라는 60세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가 그 도시의 공무원이었고, 보이스카웃의 대장이었으며, 교회에서는 운영위원회 의장이었다는 사실입니다.
30년 동안 교회에서 레이더와 그의 아내는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사람들을 좌지우지했습니다. 30년을 교회에 다니며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일에 앞장섰지만,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없었기에 이렇게 흉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반드시 회개의 열매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의 열매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7:16) 그래서 사1:11-12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기왕에 예배를 드리러 나왔으니, 마당만 밟지 말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요 4:32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강조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예배가 삶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와 신자들 또한 예배를 그리 주요하게 여기지 않는 경향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염려스러운 부분입니다.
마치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자 가룟 유다는 마리아에게 왜 그것을 낭비하느냐?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지 않느냐고 했던 말이 교회 안에 힘을 얻고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12:1-3에 보니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더럽고 먼지가 묻어 있는 예수의 발을 씻기 위해 그녀의 영광인 머리털(고전11:15)을 사용했습니다.
또 마리아는 물을 사용하지 않고 약 1년간의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의 값비싼 향유를 사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입니다.
자신을 드림이 예배의 본질
예배는 곧 자기를 낮추는 것이며, 드림에 있어서 아낌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를 바르게 드린 성도는 자신의 지위나 명에가 아무것도 아님을 압니다. 높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인간은 모습은 참으로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납니다.
엎드려 경배함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사람의 문제는 해결됩니다. 하나님을 뵙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나면 두려움도 염려도 교만도 이간적인 자랑도 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만 보입니다.
어느 농촌 마을에 무식하고 난폭한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농부는 저녁 예배에 참석하느라 어두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내 때문에 화가 난 그는 술을 한잔 먹고 술기운에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마침 아내는 교회당 맨 뒷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농부는 여인의 뒷 머리채를 감아쥐고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지막지하게 여인을 두들겼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여인은 자신의 아내가 아니라 the chief of township의 부인이었습니다.
농부는 그 부인에게 크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때 그 부인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예수를 믿겠다고 약속하면 용서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예배 자는 누구도 용서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농부에게 치욕을 당한 그 부인인 지라도 자신이 chief 부인이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한 자는 주님의 마음으로 전도합니다.
그런데 염려스러운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을 드리고 바치는 예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사람을 웃기고, 사람을 위한 예배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 보다 사람에게 칭찬받고 인정받으려고 너도 나도 애쓰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항상 예수의 발밑에 앉아 있었습니다.(눅10:38-42).
그러나 유다는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고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7-8절)고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구제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사람에게 주는 것보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형제에게 주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드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최우선하여 해야 할 일 바로 하나님께 드리는 일 즉 예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것 보다 예배를 귀히 여기십니다.
아무리 구제를 많이 하고 선교를 잘 해도 예배가 없는 구제와 선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예배보다 앞서지 못합니다. 예배가 최우선이요,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예가 출애굽기에 나와 있습니다.
예배 - 하나님만 맡으시는 향기
출30장에 보니 하나님은 성막에서 어떻게 예배가 드려져야 할지에 대해서 많은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 중에 향품에 관한 하나님의 지시는 예배의 귀중함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 향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안 증거궤 앞에 두라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출30:34-36).
이 말은 실제로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 향은 성막 안에서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룩해야 했고 또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30:37-38에서는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만을 위하여 만들어진 향이 있고, 이 향기가 오직 하나님의 코로만 올라가는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만 드리는 향유, 사람이 맡으면 죽은 향품, 이는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개인의 마음에서부터 바로 하나님의 코로 올라가는 독특하고도 성별(聖別)된 거룩한 행위인 것입니다.
성막에서 향의 향기가 하나님의 코로 올라갔던 마리아가 드린 나드 향 또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위한 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졌고, 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자신을 거룩한 산 제물로
불행하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받으려고 교회에 나갑니다. 자신들의 기호에 합당한 교회, 또는 ‘축복’을 해주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만일 성도가 얻을 수 있는 무엇을 찾아 교회에 나간다면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설교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또는 축복을 받으려고, 자녀 교육을 위해, 위로받기 위해 교회에 나간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교회에 나와야 하고, 예배는 드림으로써 이뤄지는 것입니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엇인가 드리러 가는 것이지 그분께로부터 무엇을 받으러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 그분의 은혜의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고 말씀하셨으므로 드리는 것에 축복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 중 제 1계명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2-6)고 했습니다.
제 1계명의 강조점은 하나님을,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책무이므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출34:14. 마22:37).
특별히 바울은 롬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앞의 열 한 장의 모든 진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그분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뻐하시는”이란 말은 ‘받으시는(acceptable) 예배라는 뜻입니다. 제사와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가 곧 받으심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몸이란 단지 물질적인 육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과 참 자아 즉 몸과 물질 시간 뿐 아니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드리라
히12:28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즉, 영원한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길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섬길지니」는 “섬기다”(serve)라는 말은 헬라어 동사인「라트류오」(latreuo)l로서 ”예배하다”(worship)는 뜻입니다.
그래서 히10:2에서 “예배드리는 자”(wor-shiper)로 번역했습니다. (개역 한글성경에는 ”섬기는 자”로 번역됨). 그러므로 28절의 의미는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고 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었은즉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께 열납되도록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를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응답하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경건과 두려움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경건은 적극적인 것으로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존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고, 두려움은 소극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히10:29의 “소멸하시는 불” 즉 심판하시고 징계하시고 벌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자는 하나님이 두려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존경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린다.
“하나님 나의 예배를 받아 주세요.”라는 두렵고 떨림으로 바른 자세를 가지고, 힘과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맥스 루케이도가 쓴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이란 책에서 그 하나를 소개하면, “1942년 10월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사명을 띠고 출발한 에데 리켄벡커가 바다에 추락했습니다.
그는 ‘나는 요새’라고 알려진 B-17기를 몰고 남태평양을 횡단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료가 떨어져 비행기가 바다에 곤두박질쳤던 것입니다.
그는 구명조끼를 입고 탈출했지만 악천후와 물, 상어, 햇빛 등과 싸워야 했습니다.
8일이 지났을 때 휴대용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가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기적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오후에 혼자서 예배를 드린 다음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졸고 있을 때 뭔가가 그의 모자에 내려앉았습니다. 갈매기였습니다. 그것은 곧 양식을 의미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잡아 고기는 먹고 내장은 낚시 미끼로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갈매기는 어떻게 육지에서 수백 킬로나 떨어진 곳에 와 있었을까요?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린 리켄베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리켄벡커가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때 온갖 좋은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도 예배를 위함이요, 고통 중에도 해야 할이 있다면 그것은 예배입니다. 또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입니다.
죽음으로부터 갈매기를 통해 생명을 연장 받은 이 늙은 신사는 그 후 매주 금요일 저녁만 되면 양동이에는 새우를, 자신의 가슴에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득 채우고 갈매기들이 떼 지어 있는 방파제로 간다고 합니다.
리켄베커가 하나님이 보내신 갈매기를 통해 생명을 연장 받은 것처럼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신령과 진정의 예배자가 되어야합니다. 그 첫째는 지음 받은 목적이 예배요, 또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억만 죄악 가운데 구원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사는 동안 손에는 예물을 가슴에는 풍성한 감사를 가지고 산제사를 드림으로 주께 영광 돌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