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서 론
기독교 교육의 기초는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에 근거한 인간형성의 기능, 즉 복음에 의한 그리스챤 형성의 기능이며 그리스도의 모습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는 그리스챤을 형성하는 주체,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형성하는 주체는 인간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으며 기독교 교육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히2:6 "사람이 무엇이기에 당신이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교육은 사람을 취급하며 또한 사람에 의하여 행해진다. 그래서 일반 교육에서는 교육학의 기초 개념으로 서의 교육의 의의를 단적으로 정의하는 가운데 "교육이란 인간을 보다 더 가치 있는 인간으로 형성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이다" 라는 개념은 인성 그 자체의 발전과 성장이다. 그래서 사람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존재이며 동시에 교육이념을 실천하는 자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인간을 통하여 인간을 교육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이념과 실천은 주로 인간 개념의 기본요소인 인간의 기원과 본성, 세계관, 생의 목적 및 운명 문제 등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효과적인 교육에는 역시 인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이는 교육이 적절히 계획되고 행해 질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루터가 사람의 정체를 재발견하게 된 종교개혁의 귀중한 공헌 가운데 하나이다. 루터는 죄인을 구원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간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면서 "사람은 외롭고 자족할 수가 있는 존재가 아니며 동시에 어떤 인간 공동체의 한 예속자에 불과한 소망이 없는 존재도 아니다." 했다. 이와 같은 교육이념이 기독교 교육이념으로 출발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인간을 통하여 인간을 교육하신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면서 사람이 속해야 할 올바른 관심사는 인간 그 자체가 적절한 영역에서 살게 함이니 지금까지 기독교 교육원리를 많이 대하는 중에 깊은 지식이 있을줄을 알고 인간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및 신-인 관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그 자신은 물론 타인을 이해할 수 없기에 좀 다른 각도에서 기독교 교육론적 입장을 취하면서 기술하려 한다.
II. 기독교 교육의 의의
혹자는 "기독교 교육은 사람으로 하나님과 만날 준비를 갖추게 하고 그 만남이 성령을 통해서 실생활과 상관되고 실제 삶에 편안하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일단 정의한 일도 있다하지만 대체로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와 같은'' (Christ like) 인격형성을 할 수 있도록 교도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경험과 성경의 인도를 받는 개인들이 모인 집단체 안에서의 교제를 통하여 성장 발달하는 교육과정이라도 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형성을 할 수 있도록 교도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육이 ''한과정'' 이라는 말이지 전체 삶에서 분리된 날개의 사건들을 집합시켜 놓은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교도한다는 말은 그들의 삶이 그리스도처럼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리를 주입시키거나 또는 어깆로 배우도록 강요한다는 말은 결코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만약 인간이 더욱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된 의무를 깨닫게 하는 일 이외에 어떤 목적의식을 가지고 교육시키려 한다면 우리의 교육관은 ''최고의 것'' 일수 없는 것이다. ''하나남과의 관계경험'' 이란 어귀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처럼 형제의 필요에 관심하고 그들의 요청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교육을 시키며 남을 돕는 사람이 되도록 육성 발전시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이 필요한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또 그렇게 육성 발전시키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육적 구속적 성장패턴'' 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결국 기독교 교육의 주요 목적은 교육적 구속적 성장패턴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을 배출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만약 교육이 구속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제거되고 말것이며 또한 그 교육 과정은 하나님이 주신 생애를 성취시켜가는 인격자를 형성시키기에는 너무도 큰 빈혈증적인 세속적 수준으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는 개인들이 모인 공동체 안에서의 교제를 통한 성장 발달'' 이라는 어귀는 모든 그리스챤의 성장은 교회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곧 하나님의 성령이 그 집단체의 한복판에서 작용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순
종하며 응답적인 삶을 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생활경험이 밝혀주는 성장발달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육이 놓여있는 근거인 것이다. 동시에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능력이요 바탕이며 그 승리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는 곧 하나님이 높은데 계시지만 동시에 현실생활 속에 현존하심과 그의 순간순간 역사하시는 계시에 응답하는 백성들을 관심하시며 돌보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촌지라고 잊을 수 없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되게 한다.
II. 기독교 교육의 목적
기독교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신 구속의 뜻의 실현이다. 곧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처럼의 삶 그 자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인격 형성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안에 거하리라" 는 말씀 중의 목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생활 전면에 나타났으며,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는 신체적 사회적 그리고 영적상태를 동시에 찾아 볼 수 있다. 이 표준은 곧 사람으로 하여금 인성을 개발하면서 그 사람 속에 신성을 불어 넣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그 은총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채워 삶의 전부각 신앙으로 고상한 차원의 승화하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더우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응답하는 일에 점점 성장해 가도록 교도해야 하며 또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죄 가운데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야 하고 또한 인간이 자신의 무가치함과 용서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하여 사회생활 전반에 기독교적 요소를 정착되게 하는데 있다.는 곧 비기독교적 문화권을 기독교적인 인간형과 생활권으로 정착시키려는 근본 뜻도 동시에 목적이 되어야 한다.
IV. 기독교 교육과 생활의 실재성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교육이 곧 구원받은 자의 실제 생활패턴이 되게 하자는 뜻이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교육이 다방면으로 많은 기관과 단체를 통해서 또한 개교회 주일학교로서 교육이 시행되고 있으나 여전히 근본적인 문제의 숙제는 남아있다.
‘하나님을 보여 달라’ 이 말은, "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못하느냐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14:8-9)바로 이것이다. 예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고 아버지를 알아야 할 의
무와 책임이 있건만 아직 그런 단계에 들어가지 못한 형편이다. 오늘 우리 기독교 교육이 이런 입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말씀과 실제 믿는 자의 생활의 거리를 두고 추상적인 것만 가르치었기에 다 생활 속에 예수가 있고 그 예수와 함께 성장케 하는 체험의심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린이에게 하나님을 사랑과 의와 정의라는 용어로 설명해 주면서 어린이들 스스로가 그런 관계를 경험하도록 자기 성찰과 예민한 느낌을 갖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사람 앞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의 연속성을 아이들 마음속에 깊이 형상화해야 한다. 즉 그리스챤으로서 생활방법에 무리가 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져가며 자신의 윤리적 선택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어린이가 되게 하며 책임을 감수하는 실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교회생활 등 넓은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임을 실감케 한다. 동시에 이런 아름다운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임을 자각케 한다. 그래서 교회에 서 가르치는 말씀과 가정과 사회, 국가생활의 이중 구조적인 모순을 제거해 주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V . 기독교 교사상 적립
기독교 교육은 성격상 구체적이어야만 하고 또 구체적일 수 있다. 그것은 성령에 대한 종의 역할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교훈을 통해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하나님 사이에 관계가 수립되고 대화를 할 수 있게 한다. 만약 가르침이 그 주제와 내용을 전달하는 것 뿐 이라면 인간과 하나님사이에 대화적 관계수립은 있을 수 없고 또 하나님이 주신 교육적 임무는 완성 못하고 실패할 것이다. 크리스챤의 가르침은 상호작용의 전달방편이고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그의 진리 그리고 그의 구속사업에 대한 그들의 관계를 깨닫도록 돕는 기독교 교육자료와 교육목적을 통하여 연합된 하나의 교제의 반응인 것이다. 교육상황은 대개 학생을 사랑하고 또 그들의 필요한 것을 이해해 주는 교사와 또 그룹생활에 열린 마음을 가지고 또 공통의 요구와 약함과 교육방법과 자료 및 구속의 교제 가운데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일 등을 다 포함한 상황인 것이다. 가르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한다는 것 이상의 일이다. 가르친다는 일은 인격적이고 응답적인 교육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주제의 내용 전달 이상가는 응답적인 교육적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고 또한 주제의 내용전달 이상가는 친교의 특성에 의해 가르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가르친다는 것은 함께 나누는 일이고 교육하는 일이고 또 기독교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기능을 발휘하도록 개인을 돕는다. 또한 교육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응답적인 인간존재로서 성장하게 하며 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또 자신을 주어 타인을 믿고 신뢰하면서 자라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 교육은 그 바라던 바의 목적 달성을 할 수 있게 되며 또 성령이 그 교육 그룹안에 함께 계셔서 교육을 실현시켜 나아가도록 돕고 힘주시는 것이다. 더우기 우리 교육의 촛점은 어떤 주제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야만 한다. 기독교 교육은 인간 생활 속에 있는 자만과 자기의존 또는 죄악의 어두움과 무지를 없에 버릴 만큼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은 그룹의 상호작용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임무는 사랑과 친절과 신앙과 하나님께의 응답을 증진시키는 것, 그리고 삶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해서 살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교육목적이고 또 그것은 오직 그리스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 신앙에서만 또한 사랑의 관계에서만 태어나야 한다. 그런 관계의 문맥에서 인생의 추잡함은 그 힘을 잃고 개인의 죄악은 그 호소력과 지배력을 박탈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이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같이 살때 아니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의해서 점령당 했을 때 삶의 승리는 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그리스도 교사는 그리스도 신앙에 의해 가르침의 제제를 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된 가면을 쓴 한낱 가면무도회에 나온 선생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인생을 발견한 교사는 다음과 같은 초대교회의 명령을 느끼게 될 것이다. 즉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것을 가르쳐 기키게 하라" (마28:19-20)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경험한 자이면 누구나 그는 하나님이 행하셨고 또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는 구속사업에 대하여 증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교사는 자기 스스로 기독교 교육의 교사가 될 수 없다. 교사는 정말로 교사되게 하시고 또 정말로 가르치며 또 하나님의 구속사업을 역사하게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사의 헌신적인 지혜와 재능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말과 행동으로 복음 선포하는 일에 헌신하게 하시며 또 구속적 친교를 갖게 하시는 이는 활동하시는 성령이신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은총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는 심정을 갖게될 때에 우리는 과연 무옷을 말하고 가르쳤다에 앞서 학생들에게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많은 학생에게 감화력을 끼치었다 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산 삶의 현장으로 인도하는 기독교의 교육이라 할 수 있겠다.
VI. 결론적으로
기독교 교육의 중심목적은 기독교 교육의 최고 목적이 성경상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을 가지게 된 그리스챤이 과거 및 현재를 통해서 얻은 통찰력을 가지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 결정은 다음으로 요약이 되어지나니,
1)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하나님은 진리와 사랑과 선함과 공의 등 우리의 모든 실재 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그의 능력을 통하여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이는 인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인간의 죄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인간을 늘 찾아다니시며 그의 구원을 인간에게 가져오셨다. 이런 성경적 사상 문맥에서 진정한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결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사람이 그의 생명과 구원을 진정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을때 거기서만 결정될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챤이 되는 방법에 대한 통찰력-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사람들은 그리스챤이 된다. 사람이 모방에서가 아니고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될 수 있는 열린 반응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특색을 취하게 될 때 그는 자기가 그리스챤이 된 것을 안다. 곧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삶과 또 삶의 동기와 진리의 봉사정신을 발견하지 않고서는 결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이 된 연후에 기독교 교육은 하나의 목적을 가질 수 있다. 곧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깨달아 알게 하고 또 그에게 가납될 수 있는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유일한 목적이다.
3) 인격의 점진적 발전에 대한 통찰력-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인간 발전의 층계적 레벨에 관련을 갖고 또 의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이 각기 이해할 수준에 따라 받아드릴 만한 사상 형식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학적 교육목적만은 모든 수준에 동일하게 실현되어야 하지만 그 목적달성을 위한 표현은 계층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이들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방법은 단순히 자연적인 생활과의 관련을 통해서 되고 청년과 어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인격적 관계를 가짐으로서 또 구원과 신뢰를 통한 반응으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목적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는 우리는 인격의 성장과정을 간과해서는 안 되고 또 인격 성장발달의 수준에 알맞는 또 의미가 통하고 이해될 수 있는 표현 형식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4) 신앙의 강박성에 대한 통찰력-초대 그리스챤들은 복음의 내적박력(inner dynamic of the gospl) 에 의하여 활약하였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한다는 사실이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들은 죽기까지 예수를 증거하였다. 타인을 돕는다는데서 그들은 곧 삶과 죽음의 차이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현대인에게 긴요한 생의 전부이다. 어떤 그리스도인 교육자들은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성한 강박감(comiulsion) 에 감동되어 예수의 세계를 전하고 있다. 이 교육자들은 기독교 교육을 위하여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교육적 소명감인 것이다.
5) 그리스도 교회와 그 나라의 뜻 실현 통찰-교회는 그 전체 역사로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 이름에 있으니 먼저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있고 연합된 사람들의 친교의 집단이 있고, 또 성령에 의하여 능력을 얻으시는 하나님의 가족이 있다.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 교회에서 나타난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의 친교관계를 들어가도록 사람을 육성시키는데 있었다. 이 구원의 공동체는 보다 큰 사회적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증진시키고 또 인간의 생명을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 가운데로 해방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회의 목적과 사명은기독교 교육을 위한 신학적 목적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사명완성은 하나님과 구원의 교제를 통해서 오는 교육의 힘으로 실재화 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적 교육목적은 한 하나님과의 만남 곧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이 기독교 교육의 유일한 그리고 참된 목적이라고 믿는 깊은 신앙에서 와야 하는 것이기에 깊은 참고와 상고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