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 그 부르심의 의미

기독교사대회, 이 모임을 여러 가지 말로 그 의의를 설명할 수 있겠지만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부르심의 자리이다. 우리는 물론 이미 크리스챤으로 부르심을 받은 경험이 있고, 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기독교사’로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이다. 내 삶의 정체성을 새롭게 하시는 개인적인 부르심일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독교사들’이라고 하는 공동체로 부르시는 자리이다.


1. 기독교사는 누구인가?


‘기독교사’는 누구인가? ‘크리스챤이며 동시에 학교교사인 자’를 말하는가? ‘학교 선생님들 가운데 교회 나가는 자’를 일컫는가? ‘기독교사’의 독특한 부르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를 ‘기독’교사와 기독‘교사’, 그리고 ‘기독’‘교사’로부터 구별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1) ‘기독’교사

교회에서는 열심히 봉사하는 장로님이다. 많은 교사들이 학교교사라는 이유로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부감, 부장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때로 성가대원이나 구역장으로 주일은 물론 토요일도 바쁘다. 어떤 때는 학교에서마저 교회 일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예수쟁이’로 통한다.


그러나 정작 교사로서의 그의 삶은 빈약하다. 아이들을 사랑하고픈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자만 늘 쫓기는 마음이다. 주중에도 주일학교 아이들이나 구역식구들을 생각하며, 오는 주일날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한다. 교과준비는 최소한으로 할 수밖에 없고, 학교업무나 다른 교사들과의 관계도 기본적인 수준으로 유지할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는 크리스챤 교사라는 이름을 갖고는 있지만 이 교사에게서 일반 교사들과의 근본적인 차이를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교회봉사를 성실히 감당하는 측면을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교사는 좋은 교인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사’로의 부르심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2) 기독 ‘교사’

모범적인 학교 선생님이다. 그는 누구보다 먼저 출근해서 교실을 둘러보고 하루 업무를 점검한다. 수업계획안은 물론이고 학급일지를 꼼꼼히 작성하며, 자신의 교수 방법을 더 효과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그에게 좌우명이 있다면 ‘인정받는 교사’이다. 학생이나 학부모로부터 그리고 동료교사나 교장, 교감으로부터 능력 있는 교사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기회가 되는대로 좀더 높은 직위로 승진하기를 원한다. 그의 책꽂이에는 성경이 꽂혀 있는 것으로 보아 크리스챤임에는 분명한데, 그의 교직생활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교사는 좋은 교사라고 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사’에로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사는 단지 ‘성실한 교사’로의 부르심 이상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3) ‘기독’ ‘교사’

손색없는 크리스챤이면서, 손색없는 교사지만 ‘기독교사’에로의 부르심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교사의 모토는 ‘학교를 제2의 교회로!’이다. 그 학교에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신우회를 만든 것은 물론이다. 매주 한 번 목요일 점심시간에는 크리스챤 교사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린다.


한 달에 한 번은 교회 목사님을 초청해 설교를 듣는다. 이렇게 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쉽지 않다. 동료들의 차가운 눈총을 받아가며 신우회를 이끌며, 학교 안에 예배공간을 마련한다. 그 지역의 직장 신우회 연합모임에도 가입하여 활동한다. 물론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교회에 나가지 않는 교사들에게 뒤지지 않게끔 열심히 노력한다. 이런 교사는 얼마나 훌륭한 교사며, 설교 예화로 사용될 수 있으리만치 모범적인 직장생활인가?


그러나 이런 유형의 교사를 ‘기독교사’로 헌신한 교사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오늘날 많은 미션스쿨도 이 유형에 분류할 수 있다. ‘기독’과 ‘교사’가 분명히 공존하는데 그러나 이 두 가지가 충분히 서로에게 스며들어가지 못한 상태로 분리되어 있는 모습이다, ‘예배’는 있으나 그것이 ‘교과목 가르치기’와 ‘학생지도 및 학급경영’, ‘학생전도와 학원복음화’, 그리고 ‘학교 내 정의의 실현’과 ‘교육개혁’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분명치 않다.


4) ‘기독교사’

‘기독교사’, 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단어이고, 부르기만 해도 온 몸이 전율되는 단어이다. ‘기독’이 교사 속에 한껏 스며들어가 있으며, ‘교사’는 기독 속에서 그 놀라운 의미를 확인한다.

그의 교사직 수행, 그것이 교과목을 가르치는 것이든, 학생을 만나고 상담하는 것이든, 학급을 경영하고 교무실에서 동료교사들을 만나는 것이든, 그리고 학교행정이나 교육개혁에 관련된 이슈들을 대할 때, 기독교적 관점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mind)과 마음(heart)으로 행동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의 신앙적 고백과 예배 행위는 교사직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직을 통해 나타나며, ‘교사로서의 삶’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헌신이다. ‘기독교사’는 하나의 직업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며(어원상 진정한 직업(vocation)은 부르심(vocare:calling)과 연결되어야 한다.) 내 삶의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라, 내 삶을 송두리째 요구하는 중심적, 총체적 반응이어야 하며, 내 삶을 근거 짓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유형의 온전한 모델을 찾을수 있단 말인가? ‘기독교사’로의 비젼과 열망을 갖고 신임교사로 부임했을 때 느꼈던 그 교무실의 냉랭한 분위기, 냉소 짓는 듯한 눈길들, 이것 저것 시도해보다가 기존의 가치관에 타협해 버리거나 아니면 ‘차라리 신학이나 해서 목사나 하자’며 도피해 버리기 십상이다. 더군다나 관료적인 교직 세계의 피라밋 구조 속에서, 잘못된 교육제도나 교육정책과 맞싸우는 일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연상케 한다.


“가능할까? 이러다가 나만 손해보는 것은 아닌가? 나도 실속 차려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다.(다윗의 경우를 보라) 하나님의 교육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이미 골고다 산 위의 십자가 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었다.’ 이미 선포된 승리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2. 그 부르심

‘기독교사’로의 부르심과 ‘목사 또는 선교사’로의 부르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사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둘 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둘째는 모두 그들을 ‘변화’시키는 데에 관심을 있다. 그 초점은 공히 ‘하나님 형상으로의 회복’이다. 셋째는 모두 ‘사랑’을 그 사역의 제1원리로 삼고 있는 점이다. 또한 모두 ‘회심’과 ‘양육’을 포함한 전인적인 변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목사는 지역교회, 선교사는 해외의 선교현장, 기독교사는 학교현장이라고 하는 부르심의 장(場)과, 기독교사는 그 사역의 주된 대상이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동이나 청소년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모두 ‘하나님의 나라’라는 궁극적인 사역의 목적을 향해 그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사’는 Full-time 사역자이다. 우리는 흔히 목사와 선교사는 전임 사역자이고 교사는 단지 ‘평신도’라고 생각한다Part-time으로 전임 사역자를 도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은 ‘기독교사’의 부르심을 ‘그저 그런’부르심 또는 아예 소명과 관계없이 생계유지나 하나의 직업적 수단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기독교사’는 전임 사역자이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이 중심적인 사역이 아니라 학교에서의 교직생활 자체가 중심적 사역이다.


또한 ‘기독교사’의 부르심과 ‘목사와 선교사’로의 부르심을 비교해 볼 때, 그 부르심이 질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다. 흔히 목사나 선교사를 다른 직업과 구별하여 ‘the highest calling'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면 ‘기독교사’는 그보다 열등한 부르심인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질(質)이 다르지 않다.

아프리카로 보냄 받은 선교사의 헌신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감격과 고백으로 우리는 학교현장으로 보냄 받은 ‘기독교사’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선교사는 ‘선교사 파송식(예배)’,


‘목사 안수식, 또는 취임예배’를 통해 보내심의 의미를 진지하게 확인한다. ‘기독교사’들에게도 그 파송과 부르심의 의미를 되새기며, 다시 한 번 헌신을 고백하는 ‘기독교사 파송식’이 있었으면 좋겠다. 누군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하신 것처럼 세상 속으로 보냄 받는(into the world) ‘기독교사’를 위해 기도한다면, 우리는 그 부르심의 의미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


1) 일반적인 부르심

‘기독교사’를 향한 하나님의 일반적인 부르심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4가지 명령에 비추어 이해할 수 있다. 부르심은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4가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할 수 있다. 모든 크리스챤은 공히 이 네 가지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첫째는 성화(Sanctification)의 명령이다.(마5:48,. 평신도는 전임 사역자처럼 헌신할 필요가 없고, 사역에 관심이 있더라도살전4:3, 벧전1:16) 이것은 ‘교사의 영성(Spirituality)에 대한 부르심이다.

기독교사는 계속 성화의 과정을 걸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해가야 한다.‘전달매체가 전달내용이다’라는 유명한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우리는 알고 있다. 교사의 인격을 학생들이 닮고 모방하게 되어 있다.


이것 자체만으로도 ‘기독교사’가 생애를 통해 추구해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QT와 부단한 영성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격과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가야 한다.


둘째는 선교(Misson)의 명령이다.(마28:18-20, 행1:8) 일반적으로 지상명령으로 이해되는데, ‘기독교사’들에게 이것은 ‘학원복음화’에로의 부르심이다. 우리를 학교현장으로 보내신 것은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복음전파를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직장이 있을까? 교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우리가 그들을 교육(Education)하기를 원하지만 그들로부터 꺼낼 수 있는 것(Educare)으로는 그들을 진정 변화시킬 수 없다. 계시의 빛,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중심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공교육 안에서는 직접적인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지만, 그러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복음으로 그들이 변화되어야 한다.

이점에서 기독교사는 ‘학교로 보냄 받은 선교사’이다.


셋째는 문화적 명령(Cultural Mandate)이다.(창1:28, 골1:16-18) ‘기독교사’들에게는 ‘교과목 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Christian approach to education)' 또는 ‘기독교적 교수방법’에로의 부르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부터 출발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만물이 하나님의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All truth is God's truth).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10:5) 말씀처럼 모든 지식이나 교과마저도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하는 일이 필요하다.


최근에 활발해지고 있는 기독교학교 운동이나 기독교 학문연구도 이 부르심에 성실하려고 하는 노력들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서는 교과별, 전공별 모임이 필요하고, 거시적으로는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연구소나 학회도 필요할 것이다.


넷째로 이웃사랑의 명령 또는 사회적 책임(Social Responsibility)이다.(마22:39, 요13:34, 암5:24) 좁게는 이웃에 대한 봉사(Social service)로부터 넓게는 구조적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는 사회적 개혁(Social action or reformation)을 포함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동시에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선 ‘기독교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웃은 학생들인데 이 학생들에 대한 사랑의 명령으로 이해된다.


기독교사에게 학생상담과 학생지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의 실천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 명령은 왜곡되어 있는 교육현실에 대한 교육개혁에로의 부르심이다. 우리의 학교와 교육의 현장에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고 있는가?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에는 때로 개인의 윤리적 삶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때가 있다.


교육의 영역에 하나님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사들의 공동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 네 가지는 한 분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하나만을 추구하거나 다른 하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사실, 성화 없는 전도가 가능하지 않고, 복음전파 없이 교과목을 기독교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가?

또한 이웃사랑과 정의 없는 전도나 성화는 불완전한 것이다.


이 네 가지 부르심은 서로 의존해 있고,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킨다.

‘기독교사’는 누구나 공히 이 네 가지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은 우리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교육(“내 양을 먹이라”)의 사명을 맡기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확인하신 것은 바로 사랑(“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었다.

이 네 가지 부르심은 이 사랑에 기초하며, 헌신된 ‘기독교사’의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는 것이다.


2) 은사를 통한 특별한 부르심

일반적인 부르심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사’는 누구든지 네 가지 하나님의 명령 ; 교사의 영성, 학원복음화, 교과목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그리고 학생상담 및 교육개혁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각자의 은사와 특별한 부르심에 따라 어느 한 영역을 보다 강조할 수 있다.


‘교사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 이전에 교사 경건 모임을 인도한다든지, 교사들을 위한 영성(수도원)운동을 통한 교사들의 ‘영성 훈련’이나 ‘인격도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사실 우리 개신교에서는 특히 이 영역이 취약함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사’자신들의 영적 각성과 성숙 그리고 인격의 변화를 위한 사역은 보다 더 강조되어야 하며 이 영역에로의 헌신자가 또한 요청된다.

모든 일반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학원복음화’ 특히 ‘학생전도’에 초점을 맞추는 특별한 부르심이 있다.


많은 기독교사 단체들이 여기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데, 기독학생반을 조직하고 학생기도모임을 시작하며, 불신학생들에게 복음을 소개할 수 있는 다양한전략을 개발할 수 있다. 때로 이 특별한 부르심에 치중할 경우, 교사직이 오직 복음전파를 위한 ‘수단적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되어, 가르치는 전문직으로서의 ‘교사됨’의 의미가 축소되는 경우도 있지만, 복음전파 없는 기독교적 문화는 있을 수 없기에 이 특별한 부르심에 헌신하는 더 많은 사역자들이 필요할 것이다.


‘교과목 또는 교수법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에 집중적으로 초점을 맞추는 것은 또 하나의 특별한 부르심이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와 가르치는 방법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지식을 가르치려는 노력이다.


교사직 자체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와 접근을 강조하는 사역에로의 부르심으로, 다른 일반적 부르심과 함께 교육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이러한 사역은 ‘기독교학교’ 설립 운동에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하는데 ‘학원복음화’에 미션스쿨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교육을 시도하는 것이다.


교과목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은 기독교적 교육학(Christian Approach to Education)과 깊은 관련을 지니며, 교수들이나 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학문 연구회’와 협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독교사’들이 실천의 장에서 시도하는 현장연구 또는 실험학교는 이 영역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적 자료들이 될 것이다.


문제를 지닌 학생들을 위한 ‘학생상담 사역’과 ‘교직사회 속에서의 정의의 실현’ 또는 ‘왜곡된 교육제도의 개혁’ 등은 그 분야로 헌신하는 ‘기독교사’들을 또한 요청하고 있다.

예컨대 비인간화된 입시제도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가? 잘못된 교육행정의 관행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의욕을 상실하고 있는가? 개인의 부정직 뿐 아니라 구조적인 악의 문제에 대해 선지자적인 정의의 목소리가 교육계에 필요하며, 기독교사들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교육개혁 운동이 필요하다.


기독교사들이 이 네 가지 일반적 부르심에 응답하면서도, 이렇듯 어느 한 가지 사역을 위해 더 헌신하도록 하는 마음의 열망과 동기를 하나님이 허락하심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기”(롬 12:6) 때문이다. 이 각각의 사역은 지체와 같은 것으로 결국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한 사역에 집중하면서도 다른 사역의 고귀함을 인정하고, 서로가 협력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이 네 가지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하나가 상실될 때 다른 사역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마치 네 가지 색깔의 실과 같아서 함께 짜여져 아름다운 천을 만들 듯, 기독교사단체들이 다양하지만 그 다양함(diversity) 안에서 하나됨(unity)을 추구할 때 우리는 교육에서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갈 수 있을 것이다.


3. 부르심을 위한 공동의 노력


1) 교회교육에서 기독교교육으로

많은 기독교 교육 학자들이 ‘기독교 교육의 domestication'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교육이 지나치게 ‘교회의 포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교회성장’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사운동’은 기독교교육을 ‘교회교육’이라고 하는 좁은 울타리에서 벗어나 이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로 회복시키는 신학적,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공교육’을 포기한 채, 주일날에 한 번 모이는 ‘주일학교’만을 붙들고 학생들이 변화되고 사회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소극적인 일인가?

우리는 여전히 사회 속에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교회 울타리 안으로 제한시켜서는 안 된다. 주일학교 교육만이 아니라 학교교육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場)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사실 처음 Robert Raikes가 1780년 영국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할 때에는 좁은 의미의 신앙교육의 관점이 아닌 사회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기독교교육운동’이었으며, 성경만이 아닌 일반 과목을 가르치는 일종의 보상교육이었으며 사회교육이었다.

미국의 기독교교육 역사를 보더라도 초창기 주일학교에서는 일반 교과목을 가르치며 공교육을 대신하는 기능을 해 왔는데 공립학교가 제도적으로 정착되면서 주일학교가 ‘교회 안 교육’으로 국한되기 시작하였고, 결국은 ‘교회성장의 시녀’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교회교육에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독교교육에로 관심을 확장시켜야 한다(표-1참조). 물론 ‘기독교사’들만이 교육의 주체는 아니다. 여전히 주일학교도 필요하고, 교회교육도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면서 학교에서의 기독교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기독교사들이 교육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면에 나서야 하며, 교회와 다른 기독교 단체들은 이를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교육에 있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초점이 ‘지역교회의 성장’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 확장’에 맞추어진다면 이러한 변화는 가능하며, 이것이 교회의 본래적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기도 하다.


성화의 명령(교사의 영성)


선교의 명령(학원 복음화)


하나님나라

문화적명령 (기독교적 교과목 교수)

헌신 이웃사랑의명령 (학생상담 및 교육개혁)

구원 헌신


<2) 부르심을 위한 공동의 노력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교육 운동에로의 부르심은 공동의 부르심이며, 공동적인 노력을 요청한다. ‘기독교사’들의 연대가 필요하며, 체계적인 연합 전략을 필요로 한다.

기독교교육 운동은 전면전(全面戰)이다.

공동체적으로 대응할 때에 가장 효과적이다.

비록 한 영역에서 노력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전체적인 조망을 통한 계획과 전략이 없다면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

부르심을 위한 공동의 노력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인 노력이며, 다른 하나는 전체 기독교교육 공동체의 협력사역이다.


(1) 기독교사 공동체: 기독교사들의 공동체적인 노력

기독교사 공동체는 다양한 지체를 지닌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전체 기독교사 공동체가 생명을 지닌 유기체로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속에 하위 공동체들이 각각의 특성을 따라 공헌하며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사 공동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생각할 때, 하위 공동체에는 몇 가지 차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세포(cell) 공동체, 2)조직(tissue) 공동체, 3)기관(organ) 공동체로 분류할 수 있다. 예컨대 각 학교 내에서의 QT 모임이나 기독학생반, 교과별 교사모임 또는 교육개혁을 위한 교사모임 등은 세포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세포 공동체가 지역별, 단체별로 다시 조직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고, 그것들이 더 큰 기관 공동체로 발전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분류한 네 가지 영역(부르심)과 공동체의 각 차원을 연결 지을 때,


기독교사 공동체의 다양한 차원을 한 예로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 각각은 서로 연합하여그 몸을 이루어가게 되는데(엡3:16, 고전12:12), 한 영역 안에서의 연합만이 아니라, 각 차원 안에서의 연합도 중요하다.


기독교교육의 범주

교회교육

기독교(학교)교육

초점

교회

하나님 나라

중심기관

주일학교

학교

관심

영적인 면

전인적인 면

사회와의 관계

분리

연결

교육자

목사와

주일학교 교사

기독교사, 학부모



(2) 기독교교육공동체:기독교교육 관련 단체들의 공동체적 노력

교육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기독교사 공동체의 형성만이 아니라 기독교교육과 관련된 다른 단체와의 협력이 또한 필요하다


첫째, 교단과의 긴밀한 유대관계가 필요하다. 현재는 장로교의 경우, 교단 내의 교육부에서 교단 관련 기독교계 학교를 담당하고, 전도부에서 학원선교를 지원하도록 되어 있지만 일반 학교교육 안에서의 기독교사 활동이나 교육개혁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교단적으로 교회교육만이 아니라 학교교육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원하고, 지역사회 안에서도 각 교회가 그 지역 학교둘째, 학원선교단체와의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선교단체는 물론 대학생 선교단체들도 기독교사 공동체와 연대를 맺어야 한다. 특히 교대생, 사범대생, 교직 희망자들에 대한 사역을 협력적으로 추진하여, 대학시절에 기독교사 운동에 대한 비젼을 갖고 기본적인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각 선교단체의 학사 사역이 ‘동창회 성격’을 넘어선 전문직 사역이 될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하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영역/차원

세포 공동체(1)

조직 공동체(2)

기관공동체(3)

교사영성(A)

교사 QT 모임

지역별 교사경건모임

교사 영성 수도원 운동

학원복음화(B)

기독학생반

학생 기도모임

학생 선교단체

기독학생반 연합

청소년 선교단체 연합

기독교적 교육(C)

교과별 교사모임

세계관 공부모임

교과별 학회

실험학교

기독교적 교육학회

기독교학교 운동

교육개혁(D)

교육정의를 위한 학교별 모임

지역별 교사 개혁 모임

교육개혁을 위한 기독교사 연대



셋째, 기독교 학문 공동체와의 연대가 필요하다.


크리스챤 교육학자들은 물론 각 분야의 학자들이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 분야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의 의미와 구체적인 방법들을 개발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협력하여야 한다.

특히 신학교의 기독교 교육학자들과의 교류도 필요한데, 현재 교회 교육에 치중한 나머지 학교 교육에서의 기독교 교육을 거의 다루지 못하는 현실을 개선할 수 있도록 새로운 관심을 촉구하고, 기독교 교육 학자들은 학교에서의 기독교 교육의 이론적 근거를 더 견고히 세워주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시민단체들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교육개혁을 위해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며, 교육에 대한 의식을 새롭게 하도록 계몽하는 역할을 함께 담당해야 한다.

특히 학부모 단체와의 협력이 필요한데 교육의 주도권이 정치가나 행정관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에게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실제적인 교육개선에 참여, 실천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4. 부르심에 대한 순종


부르심은 응답을 전제한다. 만약 부르심만 있고 순종이 없다면, 비전만 있고 헌신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을 때 비로소 그 삶의 정체성상에서 우리는 소명의 자리에서 바울이 던진 두 개의 질문을 기억한다. “

주여 뉘시오니이까?” “주여 내가 무엇을 하리이까?”


기독’ ‘교사’로 오랜 세월을 보냈어도 이제 다시 ‘기독교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게 될 때, 삶의 비전은 새로워지고 명료해진다. ‘Vision의 명료화’ ‘Identity 드러내기’ 그래서 ‘다시 교육 현장으로’. 마치 디베랴 바다에서 물고기 잡던 베드로를 만나 다시 재소명을 허락하시는 주님, 그 부르심에 순종함으로 새로운 모습으로 교육 현장에 서는 우리 모든 기독교사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편57:7)

Nyskc Teachers Colloquium

Nyskc Teachers Colloquium NT는 Nyskc Teachers의 약자입니다 Nyskc는 신앙생활의 5대원칙으로 만들어진 신조를 통해서 예배회복을 이루려는 한편 하나님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 있는 곳으로 예배가 없는 곳에서 예배가 있는 곳으로 가며 교회가 없는 곳에서 교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인도자 곧 교회 Teachers를 뜻합니다 교

월명(月名)의 유래

1월 : January ( Jan.) : the month of Janus (로마신화에서 머리의 앞뒤에 하나씩 얼굴을 가지고 있어서 대문의 수호신인 Janus 의 달을 의미한다.) 2월 : February ( Feb, ) : the month of the feast of cleansing ( 청정의식의 달이라는 뜻으로 cleansing을 뜻하는 라틴말의 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