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우리 사회의 반기독교 정서는 도를 넘어서고 있다. 얼마 전에는 개신교 신자들이 불교 사찰에 들어가 기도와 함께 우상타파 등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면서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웃 사랑을 큰 가르침으로 받들고 있는 교회가 왜 비난을 받는 것일까. 알게 모르게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들 중 기독교인의 비중이 타종교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도를 상실한 시대
성경은 기독교인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소금이라 한다. 초기 교회는 그 역할을 잘 감당했다. 하지만 지금 교회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고 오히려 뒤처져 있다.
물질만능주의 세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시류에 휩쓸려가고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신앙생활의 핵심이 기도에 있다고 볼 때 문제의 근원은 바로 잘못된 기도생활로 귀착된다. 서점에 나가 보면 기도에 관한 책은 늘 진열대의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
그만큼 기도에 대한 관심과 갈구가 크다는 방증이다.
기독교인들은 기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기도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답변은 “하나님과의 대화” 내지 “영혼의 호흡”이다.
“기도는 삶의 에너지다”.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면서도 하루에 일곱 시간 이상 기도를 하지 않고는 생활하기 어렵다는 기도는 삶 자체라 할 만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기도는 대화가 아닌 일방적인 요구로 일관하기 십상이고,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면서도 숨 쉬기를 게을리 하여 영적 죽음의 상태에까지 이르기 일쑤다.
기도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이유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기도에 어려움을 겪는다.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다섯 손가락 기도법’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용서해주세요, 도와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일상적으로 하는 기도 내용을 분석하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왜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궁극적 목적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았던 것 같다.
오늘의 현실을 보면 많은 기독인들이 진정한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
기도는 신앙인의 의무이자 권리
기독교인이 기도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는 성경이다.
성경에는 기도에 관한 말씀이 숱하다.
기도를 왜 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기도는 우리가 지키고 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하지만 빌립보서에서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역으로 해석하면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평강을 맛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요석 목사는 그의 책 <구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받는 기도>에서 “하나님은 기도 시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신다.”고 한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무릎을 꿇고, 하고 싶은 말만 대강 아뢴 후 부리나케 일어나 일상 속으로 뛰어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기도에 임할 것”을 권한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게 되고 나의 삶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살피게 된다. 신앙인이라면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 된 신자들의 특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통해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영성 깊은 사람들이 기도 시간과 장소를 따로 정해 매진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나의 필요만을 요구하지 않고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살피려는 노력이 더해질 때 기도는 참 의미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사랑의 표현
기도는 이웃 사랑의 실천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만나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만남의 횟수가 줄어들면 그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다.
기독교인에게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가장 쉬운 길이 기도다.
하나님은 두세 사람이 함께하는 기도를 즐겨 들으신다.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중보기도 팀을 꾸려 함께 기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에서 대성회로 모여 남보란 듯이 소리 높여 기도하는 것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마 6:5)고 하셨다.
오히려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고 권면하신다.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과 공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기도를 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때를 정해 기도하든지, 무시로 기도하든지 마음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이웃의 고민과 아픔을 위해 기도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신다.
성경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약 5:15),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 11:23)고 말씀하신다.
철야기도나 금식기도 등 기도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위협을 받고 평화로운 공존이 무너지고 있다.
지금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해야 할 때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약 5: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