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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시는 하나님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깊은 거룩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미숙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덜됨과 철없음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0년, 20년...을 끈질긴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한 달을 길다 합니다. 1년 앞에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부, 자녀, 친구, 팀원, 동료, 교우, 이웃...에 대하여 기다림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이 눌려 있고 상해 있습니다. '왜? 저 모양인가...' '왜? 저렇게도 안 변할까...' '왜? 아직도 그 수준밖에 안되나....' 이런 넉두리와 한숨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교만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조급함과 경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다려줍시다. 주님이 나를 기다려주고 계시듯.... 평생이라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노력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일을 하지 말고 마냥 멍청하게 기다리자는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 형제의 모습이 내 모습이며, 내가 그토록 속상해 하는 다른 지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의 마음도 이러하실 터인데... '왜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 왜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냐?

'왜 그렇게 성화 되지 못하느냐?' '왜 그렇게 아직도 그대로냐?'고 한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멘으로 받고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극심한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했듯이 말이죠. 당장 마실 물을 달라 합니다. 당장 고기와 먹을 것을 달라합니다. 안주면 돌아간다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의 일그러진 실존형상 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장 응답하시라 보챕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 당기라 떼를 씁니다. 왜, 이렇게도 더디냐고 따집니다.


조급함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마귀는 우리의 조급함을 배후에서 충동하고 조종합니다. 우리를 견딜 수 없이 조급하게 하는 사단을 대적하십시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렸듯 야곱이 21년을 기다렸듯 모세가 80년을 기다렸듯 요셉이 13년을 기다렸듯이....(나중에는 기다림 마저 포기하게 하심)


가족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기다리되 투덜거리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10년이고 20년이 지나면 달라지리라 기대하십시오.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당장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몽둥이와 잔소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기다려 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속도 만큼 남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다리게 하실까?'를 고민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또한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여 하나님 우편으로 승천하셨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다림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기다림처럼 우리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깨뜨릴 방법은 없습니다. 끝을 모르는 기다림은 죽음을 방불케 합니다. 그 기다림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은 부셔지고 자아는 죽고 속 사람의 찌꺼기는 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 자신을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치명타를 아십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빨리 깨어지고 쉽게 항복하는지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그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길 장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얼른 포기하십시오. 얼른 항복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은 곧 행복의 시작이자 회복의 시작입니다.


기다림이 힘든 것도, 포기하기 어려움도, 불평과 원망이 들끓음도 사실은 나의 못난 자아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까? 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기다림보다 사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더 속히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야곱의 험악한 인생이 속히 청산되기를 기다림보다 하나님이 야곱의 인생을 빨리 '평안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의 응답은 야곱이 지렁이 같이 되고서야 이루어지게 되었고 야곱의 기다림은,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으로 끝이 나게 됩니다.


나를 찌르고 격동케 하고 나의 인생에 막대한 손해를 입혀 억울하게 한 그분(?)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 기다려 주십시요. 그 때문에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나 때문에 그의 고생도 큰 것입다. 마치 요나가 탄 배 때문에 뱃사람들이 함께 고생했듯이 말이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분의 수고와 노고가 얼마나 많은지요. 나도 그로 인하여 힘들지만, 그 또한 나를 인하여 힘들지요. 결국, 나를 나되게 하고 철들게 하고 온전케 하고 성숙케 할 사람은 나를 칭찬하여 주고 극진하게 섬겨 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쉬지 않고 격동시키는 그분(?) 뿐입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준비케 하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행복인생'은 항복으로 다가오며 '평안인생'은 기다림의 승리로 찾아오며 기다림의 끝은 나의 깨어짐으로 앞당겨 질 수 있다는 사실을....


얼마만큼 깨어져야 합니까? '이 정도면 되었지 않느냐?' 라는 생각조차 안들 때까지.... 얼만큼을 더 기다려야 합니까? 기다림 마져 포기될 때까지.....


'기다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이며, 나를 나되게 하시는 기막힌 은혜입니다. 그냥...막연히....기다리시면 안됩니다. 기도하며, 은혜 받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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